-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8/02/12 16:31:10
Name   Erzenico
Subject   [번외] Bill Evans (2) - Portrait In Jazz
* Portrait In Jazz는 빌 에반스의 1959년 작 앨범 제목인 동시에
국내에도 [재즈의 초상]이라는 이름으로 번역이 되어 발매된 빌 에반스 평전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원제는 How My Heart Sings 이지만 이걸 한국어로 번역하는 게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사실 이 글의 내용도 이 책에 실린 내용이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구요.
글이 비정기적으로 올라오니 혹시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1부에 이어서 빌의 첫번째 전성기부터 차근차근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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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일스로부터의 연락

빌은 New Jazz Conception 앨범 이후에도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 베이시스트 찰스 밍거스와의 녹음, 자신의 밴드를 이끌고 하는 클럽 연주 등..
이런 활동이 이어지면서 1957년에는 점점 재즈계에서 존재감이 두각되었고
여성 보컬 헬렌 메릴과의 아름다운 작업, The Nearness of You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 무렵 마일는 프레스티지 4부작을 포함한 명작들을 낸 첫 번째 퀸텟의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밴드 멤버들의 약물 문제나 음악적인 한계를 느끼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타개하고자, 다음 앨범에는 두 명의 피아니스트를 트랙에 따라 나누어 사용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던 중
그의 친구이자 모달 재즈의 이론적 기반을 세운 조지 러셀의 조언에 따라 빌 에반스의 연주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빌 또한 자신의 친구이자 마일스 밴드의 일원이었던 색소포니스트 캐논볼 애덜리 Julian 'Cannonball' Adderley를 통해
마일스가 그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듣기도 하였고, 마일스의 첫 앨범부터 쭉 들어와 속으로 존경하고 있던 차였으나
예전 클럽에서의 짧은 인사 이후 특별한 접점이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마일스로부터 전화가 와서 "안녕 빌, 난 마일스야 - 마일스 데이비스. 자네 이번 주말을 필라델피아에서 보낼 수 있겠나?"
라고 전해왔을 때에는 재즈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회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58년 마일스 밴드의 일원이 된 빌은 카페 보헤미아, 그리고 빌리지 뱅가드 등지에서 클럽 공연을 가졌으며,
클럽 공연을 녹음해서 내보내는 라디오 프로그램인 '밴드스탠드 USA'에 자주 등장하며 신중하고 예민하면서도 감각적인 음악을 선보였고
이 밴드의 초기 연주는 컬럼비아 레코드의 녹음실에서 진행한 녹음을 나중에 편집해 내놓은 음반
['58 Sessions Featuring Stella by Starlight]에 수록되어 오늘날에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음반은 에반스의 서정적인 발전의 이정표이자 10개월 뒤 만든 [Kind of Blue] 음반의 밑그림으로서의 가치가 있지요.



한편 이 시기에, 빌은 오랫동안 자신이 연주하게 된 레퍼토리 중 하나를 갖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Nardis'라는 곡이었습니다.
이 곡은 캐논볼 애덜리를 위해 쓴 곡으로 마일스는 좀처럼 이 곡을 연주한 일이 없었으나
유독 빌은 이 곡을 잘 소화한 것을 마일스가 칭찬했음에 기뻐했고
이후 트리오가 바뀌어가면서 Nardis 또한 진화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활동에도 불구하고, 마일스 밴드의 다른 흑인 연주자들은 백인 연주자와 함께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 했고
특히 존 콜트레인의 경우에는 피부색과 관련된 조롱섞인 농담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빌은 스트레스로 이전에 접했던 헤로인에 다시 의존하게 되었으며
마일스 밴드와의 활동을 중단하기에 이릅니다.

6. 개인활동, 그리고 마일스 밴드로의 복귀

이후 잠시간의 휴식기를 가진 빌은 기운을 되찾았고, 휴식하는 동안 새로운 음악적 아이디어와
피아노로 표현할 수 있는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하였고, 이를 구체화하는 작업에 들어갑니다.
앞서 New Jazz Conception을 함께한 프로듀서 오린 킵뉴스 역시 빌의 새 작업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이에 필리 조 존스, 샘 존스와 함께하는 피아노 트리오로 녹음한 것이 바로 [Everybody Digs Bill Evans] 앨범입니다.



전통적인 스윙, 비밥 피아니즘과는 다른 의도적인 레이드-백과 일부러 힘을 빼고 굴려서 치는 듯한 터치 등
추후 그가 트리오 활동에서 보여줄 다양한 모습을 실험하는 듯한 이 트랙에서는
아직 그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이해하지 못한 필리와 샘의 당혹스러움이 느껴지는 듯하기도 합니다.

이후 쳇 베이커의 아름답고도 신선한 쿨 재즈 명반 [Chet]에 참여한 빌은
약 4개월만에 앨범의 녹음을 위해 마일스 밴드에 합류하였습니다.
밴드에는 이미 새로이 합류한 피아니스트 윈튼 켈리 Wynton Kelly가 있었음에도,
마일스의 구상에는 빌의 피아노가 필요했기에 마일스는 다시 한 번 빌에게 연락을 했죠.
대신 윈튼은 이 앨범에서 Freddie Freeloader 단 한 곡의 연주에 이름을 올립니다.

이 작업은 앞서 모달 재즈에 대해 언급한 글에서 드러났듯
코드 진행에 의존한 즉흥연주의 한계를 넘어 하나의 모드 스케일 안에서 파생되는 연주를 목표로 진행되었고
이 과정이 Flamenco Sketches 한 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첫 번째 테이크로 앨범에 실렸습니다.
특히 빌은 이 과정에 대해 앨범의 라이너 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일본 회화의 한 종류는 화가의 무의식성을 필요로 한다. 화가는 특별한 붓과 먹물로 얇게 펴진 양피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데 여기서 부자연스럽거나 단절된 붓놀림은 그 선을 파괴해버리며, 그림 전체를 깨뜨릴 것이다. 지우거나 형태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화가들은 특별한 규율을 연습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손놀림과의 교감 그 자체를 표현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방식은 신중함에 의해 결코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략) 이러한 직접적인 행위에 대한 확신은 의미 있는 성찰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 확신이 재즈 연주자 또는 즉흥음악 연주자들의 지극히 엄격하고 독특한 규율들을 발전시켜 왔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 앨범에서도 빌은 부당한 일을 겪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피아노를 아끼던 마일스에게서 말이죠.
이 노래, Blue In Green은 빌이 친구 얼 진다즈의 방에서 작곡했고
Kind of Blue 앨범 녹음을 위한 곡이 하나 필요하다고 해서 악보를 들고가서 제공하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이 노래의 작곡가는 마일스로 등록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마일스는 이전에도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곡을 뺏은 적이 있고 의도적인 것인지 습관인지 실수인지는 알 수 없으나
빌은 이 일로 마음에 상처를 또 받았다고 이후에 회상합니다.

7. 첫번째 트리오

이 아름다운 작업이 끝난 뒤인 여름, 빌은 자신의 피아노를 제대로 된 정서적 표현으로 들려주기 위해서는
적절한 트리오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으나 처음 마일스에게 소개받은
베이시스트 지미 개리슨 Jimmy Garrison (이후 존 콜트레인의 밴드에 합류하여 에너제틱한 연주를 보여준)
그리고 드러머 케니 데니스와 함께 Basin Street East Club 등지에서 연주하였지만  
빌의 생각과는 다르게 작용하는 트리오를 더 이상 유지할 이유가 없었으며,
그는 구체적으로 트리오가 동시에 즉흥연주를 하는 방식을 기대하며 베이시스트가 피아니스트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드러머는 이 둘의 자유로운 리듬 변화에 적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한동안 함께 연주했던 폴 모티언을 떠올렸고,
뒤이어 떠오르는 신성과도 같았던 베이시스트 [스콧 라파로 Scott LaFaro]가 여기에 합류하며
마침내 길었던 준비를 끝내고 빌 에반스의 첫번째 트리오가 출발한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빌 에반스의 활동에 든든한 후원자와 같은 역할을 했던 프로듀서 오린 킵뉴스는
이 새로운 트리오를 위한 음반 작업의 준비에 착수하였으며, 그 활동의 첫 번째로 내놓은 음반이
바로 [Portrait In Jazz]입니다. 이 음반에는 Autumn Leaves, Someday My Prince Will Come 등 유명한 스탠다드 넘버와 함께
그의 여자친구 페리를 위한 곡 'Peri's Scope가 포함되어 있는데, 대단히 활력이 넘치고 탄력적인 연주이며
동시에 스콧 라파로가 빌의 상상력을 어떻게 자극하고 리듬을 주도해 나가는지가 잘 드러나 있는 곡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과정을 빌이 일일히 부탁하지 않아도 스콧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이해하였으며
빌 역시 스콧의 이러한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동시에 이루어지는 즉흥연주는
그의 음악적 이상을 처음으로 실현가능케 한 훌륭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작업을 토대로 1960년 빌 에반스 트리오는 전미 투어를 하며 자신들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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