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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2/27 09:25:53
Name   라밤바바밤바
Subject   순백의 피해자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순백의 피해자' 판타지가 만연해 있죠.
성폭력 사태에서는 피해자의 평소 행실을 들먹이며, 꽃뱀이겠지, 그럴만하니까 당해도 싸지, 피해자가 빌미를 줬네 등등등...
꼭 성폭력 사태는 아니더라도 왕따문제 등 다른 사회문제에서도 이런 편견이 꼭 끼어들어가있죠.

이 편견이 피해자를 은폐하고 가해자 입장에 힘을 실어준다는 걸 다들 인식하면 좋겠어요.

아래 퍼온글은 허지웅이 쓴 '순백의 피해자'라는 글입니다


(전략) 허지웅이 대학 시절 만났던 편의점 알바 여자 동료와 좋은 사이로 지냈음.
어느 날 그 친구는 계산대의 돈 30만원을 횡령했다는 의심을 받고 알바 짤림.
허지웅은 점장에게 항의해서 그 친구를 도와줌.







사흘 후에 출근했더니 점장이 없고 새로 뽑은 근무자가 일을 하고 있었다. 창고에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가 점장의 메모를 발견했다. 그 친구에게 삼십만 원을 빼지 않고 정산을 다 마쳤고 오해가 풀려 일이 잘 마무리되었으니 그렇게 알라는 내용이었다. 인수인계를 받고 계산대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새 근무자가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 하나를 집어 들어 비닐을 뜯더니 한입 가득 입에 물었다. 그리고 그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점장님한테 원래 일하다가 잘린 여자애 이야기 들었어요. 전에 술집에서 일했었다면서요?”





나는 한참 가만히 서서 새로 온 근무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당황스러웠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전에 술집에서 일했든 청와대에서 일했든 그게 이 문제랑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그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새 근무자는 조금 당황하더니 인사를 하고 나가버렸다. 상황을 보아하니 그 친구가 점장에게 어떤 모욕적인 이야기를 들었을지 짐작이 되었다. 그 친구에게 잘 해결된 게 맞느냐는 문자를 보내보았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나는 한 달을 더 일하고 편의점을 그만두었다. 그 뒤로 그 친구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여러 모습으로 계속해서 내 앞에 나타났다.





배를 타고 가던 아이들이 사고를 당해 구조를 기다렸으나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시스템이 하나도 작동하지 않아서 목숨을 잃었다. 그 아이들의 아버지는 광장 위에 섰고 철저하고 공정한 조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본래 가정에 소홀한 아버지였다’, ‘보상금을 노리고 그러는 것이다’ 등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위로는커녕 모욕을 당했다.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남자가 오랜 혼수상태 끝에 사망했다. 남자의 가족은 아버지의 존엄을 지키려고 분투했다. 그러나 금세 아버지의 ‘임종 순간을 지키지 않고 해외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면서 위로와 지지 대신 비아냥과 손가락질을 당했다.




순백의 피해자. 나는 순백의 피해자라는 말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순백의 피해자라는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 피해자는 어떤 종류의 흠결도 없는 착하고 옳은 사람이어야만 하며 이러한 믿음에 균열이 오는 경우 ‘감싸주고 지지해줘야 할 피해자’가 ‘그런 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피해자’로 돌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순백의 피해자란 실현 불가능한 허구다. 흠결이 없는 삶이란 존재할 수 없다. 설사 흠결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도 얼마든지 인과관계를 만들어내 낙인찍을 수 있다. 나쁜 피해자, 착한 피해자를 나누고 순수성을 측정하려는 시도의 중심에는 의도가 있다. 피해자의 요구나 피해자가 상징하는 것들이 강자의 비위에 거슬리는 것이라면, 그런 피해자는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든 너무나 손쉽게 나쁜 피해자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간과한다. 순백의 피해자라는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 자신 또한 언젠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순백이 아니라는 이유로 구제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그 친구를 더 열심히 돕지 못했다는 이유로 종종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진다. 우리가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던 그 많은 피해자들을 떠올려보자. 어쩌면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허지웅 작가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766464.html#csidx3ebc33429500688857f531ebc56dc8d onebyone.gif?action_id=3ebc334295006888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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