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 18/03/06 00:27:36 |
Name | 코리몬테아스 |
Subject | 셰이프 오브 워터와 짧은 생각들(스포일러) |
아카데미 수상기념으로 밤에 재관람을 했어요. 한 번 보고나면 빠르게 글로 남겨두지 않으면 생각이 휘발되는 편인데 요즘 많이 게을러서 글을 남기지 못하네요. 그런데 또 두 번 본 영화들은 글을 꼭 남기게 되요. 글을 남길만한 좋은 홍차넷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ㅋㅋㅋㅋ 1. 스트릭랜드 영화는 명백하게 약자들의 연대와 가부장적 남성사이의 대립을 다루고 있어요. 그런데 화장실에서 그 야만적 성미를 자랑하는 장면에서 명확해졌던 이 대립은, 이 가부장의 폭력성을 쉽게 부각시킬 수 있는 장소인 가족을 비출 때는 부각되지 않았죠. 처음 볼 때는 그 공간에서 스트릭랜드가 대화보다는 침묵과 고요함을 원한다는 부분만 보았는데, 다시보면서 가족과 함께하는 그 모습이 스트릭랜드가 가지고 있는 전통성을 더 부각시키는 부분에서도 의미가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또 스트릭랜드는 재미있게도 대적자이면서 주제를 매개하는데, 카딜러로 부터 캐딜락이란 미래를 산 그는 흡족해하고 젊은 이들과 도로를 내달리면서 앞을 향해가죠. 그 체험은 단순히 유희로 끝날 것이 아니라, 괴물을 희생시킨 뒤 그가 경험할 밝은 미래의 체험판이겠죠.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미래를 체험시켜줬던 캐딜락은 찌그러지고, 그의 앞날도 불투명해지죠. 영화속 대적자는 단순히 대적해야할 전통성의 집합이 아니라, 대적자 또한 미래를 향해 몸부림치는 존재가 아닌가 싶었어요. 2. 외톨이들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약자들의 이야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소통이었는데.. 그 소통의 이면을 지배하는 '외톨이'라는 정서가 다시 관람하면서 눈에 들어왔어요. 저마자 다른 방식으로 단절된 일라이자, 데릴라, 자일스, 호프스테더가 괴물을 중심으로 연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외톨이이기 때문이에요. 장애를 가져서 외톨이가 되었고,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가정에 놓여있고, 사회로 부터 이해받을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조국과 적국의 경계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진실을 터놓을 수 없는 그들에게는 서로만이 유일한 이해자이고 이 연대는 대단한 일들을 해내죠. 그리고 이 연대는 누구라도 이들이 외톨이라는 성질을 읽어버리려는 순간 무너지고요. 할아버지가 농아를 포기하고 자기와 닮은 존재에게 나아가려 할 때 농아와 할아버지의 연대는 무너지죠. 그리고 그가 거부당하면서 외톨이성을 회복하는 순간 농아와의 연대와 인간성을 회복하고요. 스파이가 조국의 명령을 배신하고 진정으로 외톨이이고자 할 때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 조국의 품으로 돌아가 외톨이성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는 죽음으로 응징당하죠. 그런 의미에서 가정에서 외톨이었던 흑인 청소부가 스트릭랜드한테 겁박당할 때, 그의 남편이 용기있게 나서지 않은 것은 '게으른 가부장성'에 대한 조소이기도 하겠지만, 결국 데릴라의 가정에서 가진 외톨이로서의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일이기도 했을 거에요. 만약 그 순간 남편이 스트릭랜드에 대항했다면 그녀는 관계를 회복했을 것이지만 러시아 스파이마냥 죽음으로 응징당했을 수도, 혹은 더 이상 외톨이가 아닌 입장에서 농아를 배신했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에 이르렀어요. 결국 인간성의 진정한 면은 가정,국가와 같은 사회에 소속됨으로서가 아닌 외로운 개인으로서 얻어서 외로운 개인으로서 소통하며 나눌 수 밖에 없는 게 아닐까 3. 스트릭랜드의 최후 스트릭랜드에게 괴물이란 자신을 미래를 위해 희생시켜야만 하는 존재죠. 스트릭랜드의 신체 일부인 손가락은 괴물에 의해 절단되었지만 부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고요. 위기에 몰려 모든 것이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에서도 그는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썩어 문드러진 그의 손가락을 찌그러진 캐딜락에서 부여잡으면서 버티면서요. 그리고 자기 미래였던 캐딜락이 아닌 남의 차를 탄 최후의 추격에서 그가 좋아하던 사탕의 정체가 밝혀지는 데, 결국 그는 화려하고 복잡한 미래에 적응 할 수 없는 전통적 존재임을 드러내고, 그 고백을 통해 영화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해요. 그리고 부여잡던 손가락도 이 추격의 과정에서 뜯어내죠. 순수한 존재로 탈피한 그는 괴물에 맞서기 위해 용감하게 나서지만 결국 연대한 이들에게 패배해 죽었죠. 결국 고루한 가부장적 폭력성을 가진 자에게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미래는 주어지지 않고, 연대하면서 인간성을 회복한 이들에게 패배해야한다는 주제를 명확화하기 위해 그는 그런 삶을 살아야했어요.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 동정하게 되더라고요. 4. 일라이자의 독백, 영화라는 공간.. 여기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이 드는데 두 번째 감상에서 스트릭랜드에 너무 집중해보다보니 오히려 첫 감상에서 일라이자에 대한 생각이 휘발되어 버렸어요. 그들이 고전을 재현하는 부분이나 영화를 통해 매개되는 부분이 가져다준 감정들도 스트릭랜드가 다 먹어버린 느낌. 그만큼 그가 강력한 대적자이고 고유한 이야기를 가졌기 때문이 아닌가 변명해봅니다 ㅋㅋㅋ 원래 탐라에 올리려고 했는데 막상 복사 붙여넣기 해보니까 1800자는 탐라에 올리기 좀 그런거 같아서.. 지난번에도 긴 글은 티타임에 올려주면 좋겠다는 댓글을 남겨주신 분도 있고해서 티타임에 올립니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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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빌런이 살아야 영화도 사는 것 같아요. 저는 "쉐이프 오브 워터"를 물에 무형상성을 말하는 것도 이해를 하지만 반대로 그런 그릇이 없다면 물은 어떤 뜻이나 의미를 담을수도 없다고 생각해요. 표현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것처럼 말이죠. 이 영화에서도 각자 그들만의 사랑을 형태로 만들어 보여주었고 상대방이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샐리 호킨스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분노의 수화신이 매우 마음에 들었으나, 3 빌보드가 강간미수피해자를 다룬다는 사실을 알고는 포기 했지요. 아무튼 두고두고 곱씹어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스트릭랜드가 물을 다루는 방식도 주목할 만하다 싶습니다. 이 사람은 이성적으로 분해 불가능한 물(자연, 신화, 야생, 원초, 사랑 등등..)을 지극히 질박한 방식으로 다루죠. 소변을 흩뿌리고, 피를 흘리고, 정액을 싸지르고.. 그리고 그것들을 일라이자와 젤다 같은 아웃사이더 여성들이 '양동이'를 들고 걸레로 지워내기도 하고, 마치 인형처럼 5-60년대 식의 전형적인 현모양처 헤어와 의상을 전시하고 있는 트로피 와이프와 오피스 와이프들이 감내하기도 하고 그렇지요. 스트릭랜드의 붉디붉은 피와 빨간색 전화기가 일라이자의 붉은 머리띠나 영... 더 보기
스트릭랜드가 물을 다루는 방식도 주목할 만하다 싶습니다. 이 사람은 이성적으로 분해 불가능한 물(자연, 신화, 야생, 원초, 사랑 등등..)을 지극히 질박한 방식으로 다루죠. 소변을 흩뿌리고, 피를 흘리고, 정액을 싸지르고.. 그리고 그것들을 일라이자와 젤다 같은 아웃사이더 여성들이 '양동이'를 들고 걸레로 지워내기도 하고, 마치 인형처럼 5-60년대 식의 전형적인 현모양처 헤어와 의상을 전시하고 있는 트로피 와이프와 오피스 와이프들이 감내하기도 하고 그렇지요. 스트릭랜드의 붉디붉은 피와 빨간색 전화기가 일라이자의 붉은 머리띠나 영화관의 빨간문 등과 색채만 같지 의미는 상이하다는 것도 의미심장하고요(마찬가지로 일라이자의 녹색 오리 구두솔을 비롯한 일상의 녹색들과 스트릭랜드의 청록색 캐디락 같은 것 역시 색채만 같지 의미가 다르죠.).
이렇게 보면 호프스테틀러가 죽어야 했던 것도 설명이 된다 보고요. 물론 장르적인 클리셰에 따라 죽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 인물이 '주사기'라는 기술적인 도구(스트릭랜드의 남성기를 연상시키는)를 '손'에 쥐고 '물'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 또 공교롭지요. 즉 물을 변질시킨 것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볼 수 있다 싶고.
또 스트릭랜드가 손씻기를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활용하자마자 '말 못하는' 괴수에게 손가락이 잘려나간다든가, 그 잘린 썩어빠진 손가락으로 성애를 나누는 아내의 입을 막아버린다든가, 언어장애인이자 '수화'로 교감하는 일라이저에게 욕정을 느낀다든가 하는 것의 의미도 분명하겠죠. 커뮤니케이션을 거부하는 이란 거고..
30년대를 낭만하는 60년대와 60년대를 낭만하는 10년대라는 구도도 그럴 듯하다 싶고, 이걸 강화시켜주는 게 또 영화관이겠죠. 영화를 꿈꾸는 이들을 영화로 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인 이상 '판타지'와 '주술'과 '과거'에 대한 복고적인 열망은 정당화 되는 것이고, 이것은 과학과 진보의 이름으로 '해부'하고 폐기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이미 극장에 간 것 자체로 과거에 공모하고 있는 셈이니 자승자박이고. 이를 살펴볼 때에 볼티모어라는 공간 역시도 빼놓을 수 없다 싶고요. 전후에 항만이라는 '물'을 통해 쌓아왔던 백인 제조업 노동자들의 풍요가 흑인들이 늘어나고 슬럼화가 진행되던 60년대를 거치며 사라지고, 1968년과 2015년에 대규모 흑인 폭동을 겪었던 역사적이고 현재적인 공간. 최근 볼티모어 국립 수족관에서 돌고래들을 바다에 풀어놓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아다리가 맞고요.
다만 이런 대립 구도 자체는 단조로울 정도로 이분법적인 것이 양식적이고 전형적으로 보이긴 했는데.. 언더도그마 테이스트 듬뿍이니.. 그냥 영화적 허용이라 생각해서 큰 거부감은 없긴 했네요. 인물들의 내면을 보다 복합적으로 구성해서 복잡다난하게 뒤얽히게 했다면 좋았을 것 같은데 기획의도는 그게 아니기는 했겠지요. 예컨대 자일스와 일라이자의 교감만 하더라도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고 외식적으로 유지되는 관계라는 것을 보다보면 짐작할 수 있는데 도발적인 선까지 나아가 놓고서는 다소 맥빠지게 정상화시키더라고요. 막말로 일자리 안 잘렸으면 안 도와줬을 거면서 ㅋㅋ
이렇게 보면 호프스테틀러가 죽어야 했던 것도 설명이 된다 보고요. 물론 장르적인 클리셰에 따라 죽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 인물이 '주사기'라는 기술적인 도구(스트릭랜드의 남성기를 연상시키는)를 '손'에 쥐고 '물'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 또 공교롭지요. 즉 물을 변질시킨 것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볼 수 있다 싶고.
또 스트릭랜드가 손씻기를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활용하자마자 '말 못하는' 괴수에게 손가락이 잘려나간다든가, 그 잘린 썩어빠진 손가락으로 성애를 나누는 아내의 입을 막아버린다든가, 언어장애인이자 '수화'로 교감하는 일라이저에게 욕정을 느낀다든가 하는 것의 의미도 분명하겠죠. 커뮤니케이션을 거부하는 이란 거고..
30년대를 낭만하는 60년대와 60년대를 낭만하는 10년대라는 구도도 그럴 듯하다 싶고, 이걸 강화시켜주는 게 또 영화관이겠죠. 영화를 꿈꾸는 이들을 영화로 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인 이상 '판타지'와 '주술'과 '과거'에 대한 복고적인 열망은 정당화 되는 것이고, 이것은 과학과 진보의 이름으로 '해부'하고 폐기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이미 극장에 간 것 자체로 과거에 공모하고 있는 셈이니 자승자박이고. 이를 살펴볼 때에 볼티모어라는 공간 역시도 빼놓을 수 없다 싶고요. 전후에 항만이라는 '물'을 통해 쌓아왔던 백인 제조업 노동자들의 풍요가 흑인들이 늘어나고 슬럼화가 진행되던 60년대를 거치며 사라지고, 1968년과 2015년에 대규모 흑인 폭동을 겪었던 역사적이고 현재적인 공간. 최근 볼티모어 국립 수족관에서 돌고래들을 바다에 풀어놓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아다리가 맞고요.
다만 이런 대립 구도 자체는 단조로울 정도로 이분법적인 것이 양식적이고 전형적으로 보이긴 했는데.. 언더도그마 테이스트 듬뿍이니.. 그냥 영화적 허용이라 생각해서 큰 거부감은 없긴 했네요. 인물들의 내면을 보다 복합적으로 구성해서 복잡다난하게 뒤얽히게 했다면 좋았을 것 같은데 기획의도는 그게 아니기는 했겠지요. 예컨대 자일스와 일라이자의 교감만 하더라도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고 외식적으로 유지되는 관계라는 것을 보다보면 짐작할 수 있는데 도발적인 선까지 나아가 놓고서는 다소 맥빠지게 정상화시키더라고요. 막말로 일자리 안 잘렸으면 안 도와줬을 거면서 ㅋㅋ
물을 다루는 방식이란 기준으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흥미롭네요. 역시 의견은 교환하고 봐야하나봐요. 말씀하신 물의 논리는 언급하신 호스테들러의 죽음에서 좀 확실하게 다가오네요. 그럼 그가 의미심장하게 탁한 색의 물을 주시하는 장면에 더 풍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기도 하고요. 그리고 영화에서 붉은 색을 아껴두었다가 중요한 순간에 꺼냈다는 생각은 했는데 그게 스트릭랜드의 피의 색과 대비된다는 생각은 못해봤네요. 어떤 의미인지 좀 더 풀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스트릭랜드가 침묵을 원하는 사람이고 그게 소통을 거부한다는 점... 더 보기
스트릭랜드가 침묵을 원하는 사람이고 그게 소통을 거부한다는 점... 더 보기
물을 다루는 방식이란 기준으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흥미롭네요. 역시 의견은 교환하고 봐야하나봐요. 말씀하신 물의 논리는 언급하신 호스테들러의 죽음에서 좀 확실하게 다가오네요. 그럼 그가 의미심장하게 탁한 색의 물을 주시하는 장면에 더 풍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기도 하고요. 그리고 영화에서 붉은 색을 아껴두었다가 중요한 순간에 꺼냈다는 생각은 했는데 그게 스트릭랜드의 피의 색과 대비된다는 생각은 못해봤네요. 어떤 의미인지 좀 더 풀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스트릭랜드가 침묵을 원하는 사람이고 그게 소통을 거부한다는 점은 너무 분명한데 곱씹어보면 결국 소통의 부재를 원하는 건 한 편으로는 그가 상징하는 기계적인 세계를 대변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스트릭랜드에 대비되는 인물들은 음악,미술,요리,과학을 통해 저 마다 아름다움을 찾고 모험하며 호기심을 가지고 세상을 탐구하지만(이들의 탐구는 모두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요.), 스트릭랜드는 부품으로서 기계로서 역할을 충실히하고 그가 바라는 고요함이라는 건 결국 기계세계에 노이즈가 끼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겠죠. 해가 드는 따뜻한 배색의 집에서도 묘한 차가움과 위화감이 느껴지도록 연출된 것도 결국 그 때문일테고요.
차가운 기계이자 폭력적인 가부장이 삶 속에서 예술을 수행하는 약자들에게 패배하는 이 너드들이 승리하는 이야기에 전형성은 너무 많지만 그래도 이런 이야기가 주는 감동은 식지 않는 거 같아요. 그리고 이 구도를 조금만 바꿔보면, 결국 과거의 영화에서 중년의 위기를 겪는 남성이 괴물로 형상화되는 외부의 적을 물리치고 가정과 사회에서 위치를 인정받는 전통적인 이야기의 트위스트이기도 하잖아요. 괴물에게 육체적 욕망을 해소하는 장애인이나 러시아 스파이는 괴물과 함께 세트로 물리쳐야 할 흔한 적들이고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는 더 이상은 안돼. 그런 고전은 이 영화관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미래로 나갈 수 없다는 서브텍스트도 너무 분명하니 그마저도 좋고 ㅋㅋ
스트릭랜드가 침묵을 원하는 사람이고 그게 소통을 거부한다는 점은 너무 분명한데 곱씹어보면 결국 소통의 부재를 원하는 건 한 편으로는 그가 상징하는 기계적인 세계를 대변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스트릭랜드에 대비되는 인물들은 음악,미술,요리,과학을 통해 저 마다 아름다움을 찾고 모험하며 호기심을 가지고 세상을 탐구하지만(이들의 탐구는 모두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요.), 스트릭랜드는 부품으로서 기계로서 역할을 충실히하고 그가 바라는 고요함이라는 건 결국 기계세계에 노이즈가 끼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겠죠. 해가 드는 따뜻한 배색의 집에서도 묘한 차가움과 위화감이 느껴지도록 연출된 것도 결국 그 때문일테고요.
차가운 기계이자 폭력적인 가부장이 삶 속에서 예술을 수행하는 약자들에게 패배하는 이 너드들이 승리하는 이야기에 전형성은 너무 많지만 그래도 이런 이야기가 주는 감동은 식지 않는 거 같아요. 그리고 이 구도를 조금만 바꿔보면, 결국 과거의 영화에서 중년의 위기를 겪는 남성이 괴물로 형상화되는 외부의 적을 물리치고 가정과 사회에서 위치를 인정받는 전통적인 이야기의 트위스트이기도 하잖아요. 괴물에게 육체적 욕망을 해소하는 장애인이나 러시아 스파이는 괴물과 함께 세트로 물리쳐야 할 흔한 적들이고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는 더 이상은 안돼. 그런 고전은 이 영화관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미래로 나갈 수 없다는 서브텍스트도 너무 분명하니 그마저도 좋고 ㅋㅋ
보통 사람들이 일라이자와 주변의 붉은색만 주목하던데 저는 스트릭랜드의 붉은색도 요긴하게 쓰였다 생각했거든요. 녹색 화장실에서 일라이자와 젤다를 희롱하며 녹색 액체 비누로 손을 씻고 녹색 사탕을 먹으며 나가자마자 일라이자는 스트릭랜드가 남기고 간 혈흔을 복선처럼 발견하고, 씬이 전환되자마자 스트릭랜드는 자신이 통제하는 녹색 연구소에서 괴수에게 손가락을 잃고 피를 철철 흘리지요. 마치 청록 캐디락과 녹색 자계서를 비롯한 어떠한 그린 컬러를 전시하고 분장해봐야 그가 갖고 있는 원초적인 혈기와 정욕과 야만성을 지워낼 수 없다는 것처럼. 피... 더 보기
보통 사람들이 일라이자와 주변의 붉은색만 주목하던데 저는 스트릭랜드의 붉은색도 요긴하게 쓰였다 생각했거든요. 녹색 화장실에서 일라이자와 젤다를 희롱하며 녹색 액체 비누로 손을 씻고 녹색 사탕을 먹으며 나가자마자 일라이자는 스트릭랜드가 남기고 간 혈흔을 복선처럼 발견하고, 씬이 전환되자마자 스트릭랜드는 자신이 통제하는 녹색 연구소에서 괴수에게 손가락을 잃고 피를 철철 흘리지요. 마치 청록 캐디락과 녹색 자계서를 비롯한 어떠한 그린 컬러를 전시하고 분장해봐야 그가 갖고 있는 원초적인 혈기와 정욕과 야만성을 지워낼 수 없다는 것처럼. 피만큼 물 그 자체인 것이 없기도 하고요. 그리고 스트릭랜드의 사무실을 보면 검은색 전화기 옆에 공교롭게도 붉은 전화기가 존재하는데, 이걸 언제 쓰나 봤더니 파이브 스타 제너럴 님과 통화할 때만 쓰더군요. 스트릭랜드의 목적과 욕망을 지향하는 데에 핏빗 붉은색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싶더라고요. 또 하필 스트릭랜드의 아내의 차림도 붉디 붉고.. 그래서 일라이자의 붉은색과 스트릭랜드의 붉은색은 같은 색이고 열정성이라는 근간이 통하긴 하지만 결국 양 인물의 정체성과 사고방식과 욕망의 차이 때문에 이질적인 색깔이 된다 싶었습니다. 녹색도 비슷하다 봤는데 녹색이 일라지아의 피부만이 아니라 일상 도처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일부로 자리잡은 것이며 배타적으로 과거를 배격하는 것이 아닌 것과 달리(낭군부터가 녹색...) 스트릭랜드의 녹색은 똑같이 일상을 이루더라도 외식이고 패션이고 강박적이라 생각했네요.
저도 방금 보고 나왔어요 :D 정말 좋았어요
특히 엔딩-!
장애가 치유되는 회복(?)같은 뻔한 결말이 아닌
나를 장애로 옭아 매던 오랜 흉이 오히려 숨쉴 수 있는 새로운 길이 된다는 것 같은거요 ㅎㅎ
데릴라를 포함해서 영화 속에 나오는 흑인들은(파이가게에서 쫒겨나다시피 나가는) 백인들 앞에서는 특별히 자기 주장을 하지 못하고 그건 데릴라와 남편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영화 속에서는 그 소수자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소수성을 극복하는 모습은 안 보여주더라고요
오직 여주만이 다른 방식으로(?) 자유로운 소통의 길을 찾고요
... 더 보기
특히 엔딩-!
장애가 치유되는 회복(?)같은 뻔한 결말이 아닌
나를 장애로 옭아 매던 오랜 흉이 오히려 숨쉴 수 있는 새로운 길이 된다는 것 같은거요 ㅎㅎ
데릴라를 포함해서 영화 속에 나오는 흑인들은(파이가게에서 쫒겨나다시피 나가는) 백인들 앞에서는 특별히 자기 주장을 하지 못하고 그건 데릴라와 남편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영화 속에서는 그 소수자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소수성을 극복하는 모습은 안 보여주더라고요
오직 여주만이 다른 방식으로(?) 자유로운 소통의 길을 찾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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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방금 보고 나왔어요 :D 정말 좋았어요
특히 엔딩-!
장애가 치유되는 회복(?)같은 뻔한 결말이 아닌
나를 장애로 옭아 매던 오랜 흉이 오히려 숨쉴 수 있는 새로운 길이 된다는 것 같은거요 ㅎㅎ
데릴라를 포함해서 영화 속에 나오는 흑인들은(파이가게에서 쫒겨나다시피 나가는) 백인들 앞에서는 특별히 자기 주장을 하지 못하고 그건 데릴라와 남편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영화 속에서는 그 소수자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소수성을 극복하는 모습은 안 보여주더라고요
오직 여주만이 다른 방식으로(?) 자유로운 소통의 길을 찾고요
스트릭랜드는 결국 마지막에 남주의 생명력에 감탄하며 신이라는걸 인정하는 말을 하는데 정말 순수한 감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트릭랜드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괴물-크리쳐에 대한 혐오를 줄곧 드러내며 너는 화내는거냐 비는거냐 도통 모르겠다고 짜증을 냈는데, 마지막 순간엔 그도 크리쳐가 어떤 생명인지 일부나마 깨달았다고 느꼈어요
특히 엔딩-!
장애가 치유되는 회복(?)같은 뻔한 결말이 아닌
나를 장애로 옭아 매던 오랜 흉이 오히려 숨쉴 수 있는 새로운 길이 된다는 것 같은거요 ㅎㅎ
데릴라를 포함해서 영화 속에 나오는 흑인들은(파이가게에서 쫒겨나다시피 나가는) 백인들 앞에서는 특별히 자기 주장을 하지 못하고 그건 데릴라와 남편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영화 속에서는 그 소수자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소수성을 극복하는 모습은 안 보여주더라고요
오직 여주만이 다른 방식으로(?) 자유로운 소통의 길을 찾고요
스트릭랜드는 결국 마지막에 남주의 생명력에 감탄하며 신이라는걸 인정하는 말을 하는데 정말 순수한 감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트릭랜드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괴물-크리쳐에 대한 혐오를 줄곧 드러내며 너는 화내는거냐 비는거냐 도통 모르겠다고 짜증을 냈는데, 마지막 순간엔 그도 크리쳐가 어떤 생명인지 일부나마 깨달았다고 느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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