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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6/28 02:07:20
Name   Raute
Subject   간단하게 복기해보는 한국 2:0 독일
1. 요기의 구상은 무엇이었는가?
독일은 이번에도 4-2-3-1에 크로스-외질-케디라 3미들을 가져왔습니다만 실제 역할 배분은 4-1-2-3이었고 선수들의 행동반경을 고려했을 때는 3-4-2-1에 가까웠습니다. 케디라는 슈팅을 몇 차례 시도하기는 했습니다만 전방보다는 후방에서 수비라인을 보호하는데 주력했으며 스리백에서 외질-크로스 2미들을 세웠던 것처럼 두 사람이 볼의 배급을 전담했습니다. 양 윙인 로이스와 고레츠카는 측면에서 공을 받아 1on1을 시도하는 대신 공미처럼 하프스페이스에 주로 머무르며 중앙을 메웠으며 양 풀백들이 전진했을 때 위치를 바꿔 다시 측면으로 빠져주곤 했습니다. 여기에 베르너는 톱과 측면을 오고 가면서 윙/풀백들과 위치를 바꿔가는 모습을 보였고요. 그러니까 오늘 독일이 보여준 4-2-3-1과 정석적인 4-2-3-1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습니다. 요기는 예전부터 양 풀백을 윙백처럼 끌어올리고 윙을 중앙으로 몰아넣어 중앙에서 숫적 우위를 가져가는 모습을 보였는데 오늘 경기 역시 그런 모습을 그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2. 신태용의 구상은 무엇이었는가?
우리나라의 전력이 객관적으로 F조 최하위라는 것은 명백한 만큼 신태용은 거칠고 저돌적인 플레이로 밸런스를 맞추려고 했습니다(우리나라는 현 시점에서 조별리그 최다 반칙팀입니다). 요새 유행하는 4-4-2처럼 수비 공간은 좁혀놓고 중원에서는 개싸움을 몰고 가면서 독일을 괴롭혔고, 운동능력이 좋은 공격진을 활용해 역습을 시도했습니다. 구자철을 처진 공격수로 둔 것은 아마 중원이 너무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던 거 같은데(이전 경기들에서 구자철의 수비적 기여도를 언급하는 외신들도 있었고) 이건 크게 효과적이진 않았던 거 같습니다. 대신 거친 플레이로 독일을 괴롭혔던 건 꽤 효과적이라서 적어도 전반전까지는 독일은 이렇다할 공격도 하지 못했습니다.

3. 독일은 왜 무기력했는가?
안 그래도 촘촘한 우리나라의 수비대형에 독일의 공격자원들을 잔뜩 우겨넣으니 공간만 좁아지면서 이렇다할 활로를 찾지 못했습니다. 로이스야 부상으로 기량이 많이 떨어지면서 빈 공간을 휘젓고 다니는 유형이 됐지 수비수들의 경합을 뚫고 마법을 부리던 선수는 더이상 아니고, 고레츠카는 애초에 이런 걸 기대하고 쓰는 선수가 아닙니다. 베르너도 어느 정도 공중볼 경합을 해줄 수 있다 정도지 수비축구를 부술 수 있는 선수는 아니고요. 결국 대각선상에서 낮은 크로스나 중거리슛 등으로 수비를 끌어내야 했습니다만 이것도 별로 효과적이진 못했습니다. 요기가 지나치게 둔감했던 게 아닌가 싶은데 독일의 양 풀백은 현재 공격력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헥토어야 원래 다재다능하고 견실한 풀백이라서 높은 평가를 받는 거지 공격력이 아주 탁월한 유형은 아니고, 키미히는 대단히 뛰어난 킥을 지녔지만 혹사의 여파인지 클럽 시즌 막판부터 폼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죠. 두 풀백들은 공격가담에는 적극적이었지만 유효한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키미히는 슈팅으로 연결되는 장면이 꽤 있긴 했는데 그에 대한 반동인지 본인이 말아먹는 장면도 많이 나왔죠. 그리고 이런 플레이의 문제점이 뭐냐면 필연적으로 공격의 템포를 느리게 만든다는 거죠. 풀백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는데 어느 세월에 속공을 하겠어요.

4. 독일의 결정적 패인은?
웹상에서는 외질, 케디라, 베르너 이런 선수들을 기용한 게 잘못됐다라는 얘기가 많은데 근본적으로는 요기가 판을 잘못 짜온 게 가장 크지 않나 싶습니다. 적어도 오늘 경기만 놓고 보면 외질과 케디라는 자기한테 주어진 역할을 했습니다. 외질은 키패스 7회, 드리블 4회를 기록하는 등 독일의 공격을 주도했으며 중거리슛 유도로 스탯을 예쁘게 세탁한 것도 아닙니다. 특히 후반 이후 우리나라가 무게중심을 더욱 아래로 끌어내리고 중원이 무주공산이 되자 외질을 전혀 제어하지 못했죠. 케디라 역시 위험한 장면은 많았지만 수비적인 기여도가 상당했고요. 베르너는 확실히 많이 부진하긴 했습니다만 베르너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세울 수 있는 공격수가 없었기 때문에 베르너 때문에 골을 못 넣었다고 하기도 뭐하죠. 고메스는 말할 필요도 없고, 바그너를 언급하자면 결국 요기를 까야하는 거니까요. 잘못된 패스로 게임을 터트린 크로스를 욕하자니 크로스 역시 외질에서 중원에서 맘대로 뛰어놀았습니다. 그러면 다른 선수를 탓할까요? 이전 경기들과 달리 오늘의 교체카드는 전혀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클로제니 슈바인슈타이거니 람이니 떠나간 선수들이 아니라 현 시점에서 '전술을 바꾸지 않더라도 이 선수를 넣었다면 이런 구도는 안 나왔을 것이다' 싶은 선수가 있었나요? 전 없었거든요. 굳이 따지면 브란트 선발이 아쉽긴 한데 어차피 독일이 역동성 잃어서 글렀을 거 같네요. 판 자체를 잘못 깔았는데 거기서 억지로 조합을 맞춰봤자 별 수 없다는 거죠.

5. 독일을 위한 변명
은 할 필요가 없을 거 같습니다. 뭐 독일 선수들 기량이 훨씬 좋고 오늘 경기도 독일이 주도하긴 했죠. 조현우 아니었으면 독일이 골 넣었을 것이고, 결정적인 상황에서 슈팅도 빗맞고 뭐 어쩌구 저쩌구. 근데 그걸 떠나서 독일은 오늘 기대치보다 훨씬 못했고, 우리나라 선수들은 기대치보다 훨씬 잘했습니다. 양팀 활동량이 우리나라 118km, 독일 115km였는데 이 경기 99분짜리였죠? 경기가 안 풀리면 허탈하게 웃으면서 고개 저을 게 아니라 한 발짝이라도 더 뛰었어야죠. 꼬우면 더 잘했어야 합니다.

6. 독일의 내일
갈아야죠. 어차피 오늘 경기를 어떻게 평가하건 간에 외질과 케디라의 기량이 계속 하락세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고, 뮐러-보아텡 나태해진 거 분데스리가 보는 사람이라면 다들 알고 있는 거고, 이렇게 콕콕 짚지 않더라도 독일이 전반적으로 둔하고 느려졌습니다. 독일에는 역동성이 필요해요. 그리고 그걸 하려면 젊은 피를 수혈하는 게 필수적이고요. 요기가 계속 대표팀 남을지 어떨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본인 전술도 재정비하고 팀도 재정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7. 한국의 내일
어... 요새 여기저기 얘기 나오는 걸로는 한국 축구의 미래는 암흑기의 끝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이제부터 진짜 암흑기의 시작이라고 해도 될만큼 부정적인 얘기만 가득했거든요. 근데 오늘 신태용호가 보여준 모습은 박수 받을 만 했고, 절망밖에 없어보이던 한국 축구에 굉장한 희망을 줬다는 점에서 향후 우리나라 축구사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전환점이 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딱 한 판 이긴 거든 뭐든 어때요. 오늘 이 경기 자체가 우리나라 축구사 최대 이변 중 하나인데. 오늘 경기가 아마 우리나라 elo 최다 포인트 획득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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