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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08/13 07:22:46 |
Name | 기아트윈스 |
Subject | 영국 생활 이야기 (1): 소속감 |
나이 서른에 가족 다 데리고 영국유학 간다고 PGR에 글 올렸던 게 어느덧 거의 2년 전입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석사생활이 끝나고 이제 박사과정에 돌입하려는 찰나에 지난 경험을 돌아보며 느낀 바를 풀어보려고 해요. 사실은 뭔가 홍차넷에 글을 투척하고 싶은 데 글감이랄 게 이런 것 밖에 없어서...; 몇 편 까지 쓰게될 지 모르겠지만 일단 생각나는 대로 써볼 계획입니다. 어여삐 봐주시길. ---------------- 1. 외지인 유학생이건 뭐건 그건 본인 사정이고 일단 연고 없는 지역에 가게 되면 그냥 [외지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됩니다. 그건 마치 무슨 이유가 됐든 제주도에 연고가 없는 사람이 거기 가서 살게 되면 그사람은 일단 [뭍]에서 온 사람으로 통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MMORPG로 비교해볼 수도 있지요. 일단 게임을 받고 계정을 만들고 자기 캐릭터를 만들고 접속하고 나면,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자기 자신이 여태 구축해둔 그 모든 아이덴터티와 인적 물적 자원을 떠나서 그저 0 에서 시작하게 됩니다. 주변에 보이는 1레벨에 속옷만 입고 바삐 뛰어다니는 인간군상들을 [늅]이라는 말 이외에 그 어떤 말로 더 정확히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현지에 도착하고 한동안은 이 외지인으로서의 생활이 계속됩니다. 혹시라도 친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학교에서 제공하는 OT성 프로그램은 다 참석해 보지만 대개 허사로 끝납니다. 초면에 할 말도 대충 정해져있습니다. 안녕, 넌 어디서 왔니 (이 때 대답에 따라 다양한 화제로 전환 가능. 북한/싸이/박지성/김치 등등...), 전공은 뭐니, 연구 주제는 뭐니 등등. 다들 대화를 길게 이어가야 한다는 모종의 사명감 같은 걸 가지고 자리에 임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대답은 거의 안나옵니다. 상대가 어디서 왔다고 대답하기 전에 이미 내 마음 속에선 "Cool!"을 한 발 장전하고 대기하고 있지요. 그리고 대답이 나오자마자 바로 발사해줍니다. 왜 그 나라에서 왔다는 사실이 쿨한지에 대해선 우선 쿨을 뱉어낸 다음에 침착하게 찾아야 합니다. 유명한 나라는 쉽습니다. 미국에서 왔다 그러면 굳이 왜 쿨한지 덧붙이지 않아도 됩니다. 좀 덜 유명한 나라는 약간 어렵지만 불가능한 수준은 아닙니다. 스웨덴에서 왔다 그러면 "즐라탄 쩔지!" 하는 거고 덴마크에서 왔다 그러면 "벤트너의 나라잖아!" 하는 식이지요. 어려운 건 생소한 나라이거나 정말 안 쿨한 나라 출신일 경우입니다. 예컨대 "난 부르키나파소에서 왔어" 라고 한다거나 "난 팔레스타인에서 왔어" 라는 말에 미리 장전한 "Cool!"을 그대로 쏴버리면... 뒷이야기가 상당히 궁해집니다 -_-; 그렇게 정해진 대화가 끝나고 나면 대개의 경우 긴 침묵이 이어집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요. 그리곤 서로 친구가 되긴 어렵겠다는 판단 하에 다시 연락하지 않게 되구요. 하지만 인간은 소속감 없이 살 순 없습니다. 지독하게 외롭거든요. 그래서 더 많은 화제를 공유할 수 있는 이들을 갈망하게 됩니다. 2. 대동아주의 만세! 학기 시작 후 한 두 달 가량 지나고 나면 어느새 휴대전화에 아는 사람 번호가 차기 시작하고, 페이스북에 새로운 친구들이 늘기 시작하며, 무엇보다도 Wechat과 Line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냥 이건 운명이에요. 당신이 딱히 영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거나 미국에서 학부를 나왔다거나 하지 않았다면, 그냥 한국에서 현지 직송으로 영국 대학원에 내동댕이쳐진 경우라면, 당신 친구는 그냥 8할이 중국인, 나머지 2할은 일본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들과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는 건 이들과 우리를 묶어주는 연결고리가 영키들과의 그것에 비해 훨씬 깊고 단단하기 때문입니다. 영키들 눈에 우리는 그냥 [외지인]이지만 이들 눈에 우리는 [아시아 출신 외지인]입니다. 이건 생각보다 훨씬 큰 차이입니다. 당장 비슷한 나이 또래의 동북아권 남학생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화제가 물 흐르듯 이어진다는 걸 금방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현 시점에서 저와 가장 친한 친구 하나는 또래 대만 남성인데, 이 친구와 만난 그날 파판6에서 맷슈 필살기 커맨드 입력을 할 줄 몰라 눈물을 흘렸던 이야기부터 조조전에서 전위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야기, 각종 일본 만화 이야기 (드래곤볼, 슬램덩크 등등), 중국 영화 이야기, 푸른하늘 양의 다양한 비디오 이야기 등등 24시간이 모자라도록 이야기를 나눴더랬지요. 90년대 전후로 태어나신 분들이라면 아마 중국인 친구들과 밤새 포켓몬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저보다 한 세대 아래 친구들을 보니 포켓몬은 거의 일상이더군요. 이렇게 화제가 이어지는 친구들을 확보하고 나면 이제 외지성을 약간 벗어낸 것입니다만, 여전히 외지인인건 그대로입니다. 이 때 두 가지 옵션이 있습니다. 1) 중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들어가기만해도 이렇게 좋다면, 그냥 아예 한국인들과 만나서 놀면 되겠군. 2) 중국인/일본인과 화제를 찾아서 공유했던 것처럼 영키들과 대화할 만한 무언가를 찾아서 개발하자. 1번으로 가는 길로는 다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현지 한인 학생회 활동을 시작하거나 아니면 한인 교회에 가거나. 2번으로 가는 길은 실제로 무한히 다양할 수 있는데 쉽고 편한 길로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정치/종교/스포츠. 3. 외지인에서 [우리]로 많은 사회과학자들과 사학자들이 지적했 듯이 공동체란 공통의 경험을 가진 이들의 모임을 이릅니다. 유학생은 현지인과 공유할 만한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현지인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속성/꼼수 과정이 필요하지요. 다시 말해, 과거에 그들이 겪었던 경험을 과거로 돌아가서 함께 겪을 수 없는 이상, 그들이 매일 매일 새롭게 경험하고 있는 일 중에 가장 뜨겁고 위중한 경험에 참여하는 겁니다. 대충 자주 얼굴을 보게 되는 영키들의 정치/종교/스포츠 취향을 파악합니다. 강한 노동당 지지성향에 미지근한 크리스쳔, 뜨겁게 타오르는 아스널 팬 등등 대강 견적이 나오면 이제부터 할 일은 해당 뉴스를 읽고 난 후 그 친구와 대화하는 겁니다. 아스널. 대화. 성공적. 그렇습니다. 헌데, 정치/종교/스포츠는 어째서 외지인에게 쉽게 아이덴터티를 부여해주는 걸까요. 다시 말해,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사회가 있고 많은 경우 이들은 다소 폐쇄성이 있어서 외지인이 그 사회에 비집고 들어가 구성원으로 대접받기 어려운데 반해 왜 정치/종교/스포츠는 전혀 연고가 없는 외지인에게조차 문이 활짝 열려있는 걸까 하는 거지요. 답은 간단합니다. 적이 있고, 적과의 싸움은 궁극적으로 머릿수 싸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어떤 사회든 소속 구성원들에게 걷어가는 세금이 있습니다. 그건 회비이기도 하고 공개적 지지의사 표명이기도 하고 잦은 참석이기도 합니다. 조직의 유지를 위해 회원들의 다양한 방식의 기여를 요구하지요. 폐쇄성이 높은 사회일 수록 세금이 높습니다. 따라서 들어가기도 어렵구요. 백만장자의 모임 같은 데 참석하기란 얼마나 어렵겠어요. 반면에 정치/종교/스포츠 단체가 걷는 세금은 기본적으로 매우 저렴합니다. 정치의 경우는 투표권 보유 여부가 크게 작용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냥 사람이기만 하면 됩니다. 종교의 문은 더 넓지요. 유권자가 아니어도 대환영이니까요. 스포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스널 팬 입장에선 저 친구가 하필 첼시 팬도 아니고 맨유 팬도 아니고 토트넘 팬도 아니고 하필이면 아스널 팬이 되어준 것 자체가 아주 아주 고마운 일입니다. 4. 그래도... 제 경우 첫 1년이 꽤 힘들었습니다. 늘 부담 없이 점심을 같이 먹을 친구를 충분한 만큼 확보하는 데, 그게 영키든 중국인이든 일본인이든, 대략 1년 가량 걸렸던 것 같아요. 이 과정에서 한국인 커뮤니티 쪽은 아예 배제했는데, 지금 생각에 이게 잘한 건지 못한 건지 아직도 약간 헷갈립니다. 아무리 이런저런 수를 써서 영/중/일인 친구와 친해진다고 해도 무언가 끝내 메우기 어려운 그런 틈이 있거든요. 한국인 친구들과의 관계에서처럼 착착 감기는 그런 게 좀... 쉽지 않지요. 그래서, 도영 당시만 해도 유학 마치면 영국이든 어디든 헬조선 밖에서 취직하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은 학위 마치고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이 훨씬 큽니다. 영/중/일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메우기 어려운 이 간극을 저는 제 안에 돌이킬 수 없이 각인된 한국 문화라고 부릅니다. 달리 말하자면 헬조선은 제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인 셈이지요. 어쩌겠어요, 그 어떤 산해진미를 먹어도 밥에 반찬을 먹어야 속이 편한 걸요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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