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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10/30 20:00:58
Name   구밀복검
File #1   pepguardiola_cropped_mlj1pju02vsw1t1p23op4w78s.jpg (1.03 MB), Download : 11
Subject   펩빡빡 펩빡빡 마빡 깨지는 소리 : 과르디올라는 왜 UCL에서 물을 먹는가


펩빡이는 왜 거듭 UCL에서 고배를 마실까요. 물론 펩빡이는 이미 빅이어를 두 번이나 들었고 바르셀로나를 벗어난 뒤 고작 5번의 시즌을 치렀을 뿐이니 펩빡이가 UCL에서 통하지 않는 감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동전을 다섯 번 던져서 다섯 번 연속 앞면 나오는 것은 별로 신기한 일도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일도 아니며 그저 우연일 뿐입니다. 다만, 펩빡이가 그간 지속적으로 보여준 면모, 그리고 패배를 당했을 때 드러난 시의적인 약점(이 역시도 어디까지나 시의적인 것이지 본질적이라고 단언하기엔 시기상조라 생각합니다. 당장의 진화 경쟁의 승자가 본질적 강자가 아니라 시의적 강자이듯.)들을 미루어 분석을 해볼 순 있겠죠.

아마도 펩빡이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라면 잉여에 대한 혐오일 겁니다. 펩빡이는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리소스를 남김없이 써먹어 최대한의 효율을 달성하기를 원하죠. 그러니까 멘디가 부상으로 나갔을 때 레프트 백을 그 자리에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는 측면과 중앙을 오가며 후방 빌드업을 수행할 수 있는 델프를 넣어 볼회전을 안정시키고 그 대신 기동력과 스태미너와 인듀어런스를 두루 갖고 있는 '레프트 윙' 사네를 위 아래로 넓게 움직이게 하면서 전혀 다른 식으로 밸런스를 맞추는 거죠. 그게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리소스로 조합할 수 있는 맥시멈이니까요.

흔히들 과르디올라가 전술적으로 경직되었다고 하는데, 그 반대입니다. 과르디올라는 자신의 플레이모델이 가질 수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 해서 누구보다 방대한 바리에이션을 가지기를 원하는 사람이고, 그만큼 전술에 변화를 많이 줍니다. 물론 거시 전술에서는 변화가 적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항상 공세적이고, 경기를 주도하려 들고, 포메이션 같은 가시적인 부분들은 예상한대로고.. 왜냐하면 자신의 플레이모델을 무한히 변용해서 부분 전술과 개인 전술의 폭을 무궁무진하게 만들어낼 수 있기에, 최소한 그에 대한 자신감을 본인이 갖고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도리어 바리에이션이 부족한 감독들이 플레이 모델이나 팀 전술 같은 거시적인 부분에 손을 많이 댑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방법론을 유지해서는 다양한 상황에 대해 대응할 수 없는 사람들이거든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선택적 랜덤, 그러니까 상대가 저그면 본인은 테란을 선택하고 상대가 테란이면 본인은 토스를 선택하고 상대가 토스면 본인은 저그를 선택하는 그런 게이머가 있고, 반대로 상대가 무슨 종족이든 간에 한 종족만 잡고서 모든 종족전에 대해 다채롭게 대응할 수 있는 게이머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혹자는 삼종 모두를 소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자의 플레이 폭이 넓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스타크래프트를 잘 아는 사람이면 후자가 훨씬 더 플레이 폭이 넓다고 하겠죠. 한 종족으로 겨우 상성 종족만 상대할 줄 아는 건 반편이니까요.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전자의 예가 뻑하면 포메이션과 선수 포지션과 플레이 모델을 바꿔치기 하며 한 경기 한 경기 당장의 난관을 얕은 수작으로 모면했던 로저스고, 후자의 예가 펩빡이죠.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과르디올라가 지극히 전술적인 사람, 다시 말해 지성주의적인 사람이라는 겁니다. 자신은 이성이 있고, 축구를 알기에, 어떤 퍼즐이 주어져도 최선의 해를 구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죠. 아주 이지적이고 근본적으로 합리주의적이에요. 래셔널/래디컬하단 말이죠. 실제 팀 운영도 그렇죠. 일 단위 팀 매니지먼트부터 시즌 단위 피트니스 트레이닝 등 감독으로서 수행해야 하는 모든 일들을 체계적으로 결합시켜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단일한 구상하에 끝내버리죠. 즐라탄 같은 이는 그것을 징글징글 하게 여기고 하비 마르티네스 같은 이는 펩빡이만이 제공할 수 있는 교육이라 말하며 감탄하죠.
https://redtea.kr/?b=31&n=58332&c=355572

한 마디로 펩빡이는 가장 엄격한 의미의 '감독', The coach가 되고 싶은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진정한 플레이어는 선수가 아니라 감독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축구는 11명의 선수들의 개성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나의 뇌가 결정하는 종목이라는 것입니다. 피파를 플레이하는 것은 화면 안의 11명의 선수가 아니라 패드를 잡고 있는 단일한 게이머인 것처럼요. 맨체스터 시티의 25인 선수단은 디지털 그래픽일 뿐이며, 유일한 플레이어 과르디올라가 패드로 축구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축구를 11명의 통제 불가능한 '선수'들이 자생적으로 수행하는 우연의 스포츠가 아니라 1명의 '감독'의 '계획'에 의해 통제하는 필연의 스포츠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는 것이죠. 경기장은 무질서한 '진화'의 현장이 아니라 필승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이야기고. 영화 감독인 히치콕은 '나는 월트 디즈니가 부럽다. 그 새낀 배우가 맘에 안 들면 찢어버리면 되잖아(I used to envy him - Walt disney - when he made only cartoons. If he didn't like an actor, he could tear him up.)'라는 말을 남긴 바 있는데, 펩빡이가 바로 축구계의 히치콕이자 디즈니가 되고 싶은 사람일 겁니다. 이런 펩빡이의 면모를 일컬어 흔히들 '완벽주의'라고 하는 걸 테고요. 지칭하는 바가 정교하지 않은 뭉툭한 어휘긴 하지만 이해는 가죠. 시장에 대한 정부 주도적 통제와 그로 인해 행해지는 보편 복지를 두고서 빨갱이 드립이 나오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https://redtea.kr/?b=31&n=58341

그리하여 근본주의에 입각한 펩빡이의 '축조'는 아주 정교한 모양새를 띱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선수단, 선수들이 갖고 있는 기량 요소를 모두 완벽하게 분해하고 재결합시켜 이 팀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전력을 잉여 없이 구성하겠다는 야심이 넘치죠. 하지만 이 말인즉슨 '여백'이 없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극단적으로 정교하게 조립한 톱니바퀴의 연쇄 작용이기에, 어느 한 부분에서 예상 외의 탈이 나면 갑자기 와르르 무너져버린단 말이죠. 가령 13-14 UCL 4강 2차전에서 마드릿의 전술에 대응하면서 로베리-괴체라는 2선 자원들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시즌 내내 써먹었던 4-1-4-1을 포기하고 4-2-3-1로 나왔습니다만, 라모스의 박치기를 연이어 맞자마자 팀이 삽시간에 작살이 났던 것이 좋은 예지요. 날카롭게 벼려진 명검일수록 부러지기 쉽고, 경도가 높은 유리나 주철 같은 것이 깨지기 쉬운 것과 같습니다.

말하자면 펩빡이의 군대에는 유격전에 쓸 예비대가 없는 것이죠. 물론 펩빡이의 관점에서 예비대는 낭비입니다. 이성적으로 매순간 최선의 방책을 찾아 실행하면 되는 것이지, 실수를 두려워해서 비상대책을 위해 여분의 힘을 남겨두는 것은 하수의 보신책이라는 것이죠. 스타크래프트에서 드랍쉽 떨어질까 두려워서 본진에 성큰 네 개 박는 것이 초보자나 할 짓거리인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문제는 축구는 발로 수행되는, 아주 불확실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스포츠라는 겁니다. 중추신경계의 지시를 손으로 수행하는 것은 비교적 굴절이 적습니다만, 발로 수행하게 되면 명령은 굴절되고 상실되어 실제 결단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결과가 실행되곤 합니다. 따라서 손을 봉인한 채 발만 가지고 공을 처리해야 하는 축구의 경우 볼컨트롤의 난이도가 농구나 미식축구와 같은 여타 종목에 비해 훨씬 높으며, 따라서 수의적으로 결정한 전술적 구상을 그대로 경기장에서 실현할 수 있는 종목이 아닙니다. 결정과 실행 사이에 딜레이와 노이즈가 발생할 수밖에 없지요. 이것은 그만큼 불확실성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게임의 인과관계가 여타 스포츠들처럼 합리적 결단의 연쇄로 설명되기가 어렵죠.  자연히 정확한 계획 수행으로 일타일득을 노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고, 시행착오를 거듭해가며 보다 지속적이고 점진적으로 경기를 축조해나가는 식의 종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신속한 기동전이나 섬멸전 양상보다는 지리멸렬한 지구전과 소모전 양상이 잦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 와중에 경기는 감독의 '계획'보다는 선수들의 '임기응변'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때는 잉여로 남겨두었던 그라운드 위의 리소스들이 나름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죠.

이것이 '현실의 축구'입니다. 그리고 펩빡이는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고요. 헤게르디올라다 이긔.. 해서 만약 펩빡이가 이후에도 실패한다면, 그 원인은 대강 둘 중 하나일 거라 봅니다. 일단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본인의 이성적 포부를 포기하지 못하고 현실의 비이성적 축구에 순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겠죠. 그게 아니라면 저런 포부를 극단까지 추구할 정력이 나이를 먹으며 떨어지는 경우가 있을 테고요. 근데 사실 이건 어디까지나 '실패한다면 이런 특성 때문일 것이다'라는 가정에 불과합니다. 애시당초 필연적으로 우승열패할 수밖에 없는 특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도리어 저런 특성 때문에 지금까지 펩빡이가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것이도 하고, 어떤 '절충'이나 '타협' 같은 게 더 좋은 결과를 불러올 거란 보장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사후에 결과가 나오면 원인으로 작용한 것을 우리가 지목하며 후견적으로 해석할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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