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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8/12/08 22:20:33수정됨 |
Name | 기아트윈스 |
Subject | 인생은 아름다워 |
1. 옛날에 한 나그네가 황량한 들판을 정처없이 걷고 있는데 갑자기 사나운 코끼리가 나타나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 나그네는 다행히 우물을 발견했고 덩굴을 타고 우물로 피신해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우물 안벽에는 독사 네마리가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고, 바닥에는 독룡이 나그네가 떨어지길 기다리며 노려보고 있다. 나그네가 의지할 곳이라고는 덩굴 밖에 없었지만 그마저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갈아먹어 언젠가 반드시 끊어질 것이었다. 그는 크게 놀라고 무서웠다. 우물 위에 드리운 나무가지에는 벌집이 달려있었는데, 마침 여기서 벌꿀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그네가 고개를 뻗어 한 방울... 두 방울... 다섯 방울을 받아먹고 보니 매우 달콤했다. 나그네는 이제 위태로운 처지를 잊고 꿀맛에 탐욕을 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이 나그네가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이 우화의 알레고리는 사실 명확했어요. 흰 쥐와 검은 쥐는 밤/낮, 덩굴은 우리의 생명, 독사는 지/수/화/풍의 네 원소, 다섯 방울의 꿀은 인간의 다섯 욕망 (五欲). 그러니까, 우리들은 모두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도망칠 곳도 없는 주제에 정신 못차리고 향락이나 탐하고 자빠졌다는 거예요. 많은 선승들이 이 레퍼런스에 맞춰서 알쏭달쏭한 답을 냈어요. "어젯밤 꿈 속의 일이다!" 라든가 "언제 우물에 들었던가" 라든가 "아야! 아야!" 라든가. 전강스님은 당시 20대에 불과했지만 이미 불교계의 기대주로 떠오르고 있었어요. 그래서, 비록 이 대담에 초대받지는 않았지만, 다른 스님들은 그를 시험해보고 싶었지요. 마침 김천 언저리에서 일군의 스님들이 엿판 근처에 모여있었는데 저 쪽에서 전강이 오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붙잡고 바로 물어봤대요. 요즘 용성스님 덕분에 안수정등 문제가 화두인데 자네도 대답을 해보라는 거지요. 전강은 엿조각을 하나 집더니 입에 넣고 '달다' 한 마디만 남긴채 갈 길을 갔대요. 2. 아는 이에게 들은 이야기에요. 우리가 흔히 Seize the day라는 영역어로 더 잘 알고 있는 호라티우스의 경구 carpe diem의 carpe는 [붙잡다] 보다는 [따다]에 가깝다고 해요. 그러니까 그것은, 떠나가는 오늘을 꽉 움켜잡고 실컷 누리는 것과 같은 행동력 넘치는 동사가 아니라, 잘 익은 과일을 '톡' 따서 먹고 만개한 꽃을 '톡' 따서 즐기면서 이리저리 소요하는 행동에 더 가깝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어차피 덩굴에 매달려 나갈 곳이 없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꿀방울을 받아먹는 정도 아니겠어요. 죽는 건 죽는 거고, 단 건 단 거지요. 3. 또 다른 이에게 들은 이야기에요. 독일인이 쓴 우화소설인데, 주인공은 어떤 벌레예요. 벌레들의 나라에는 아주 높은 흰개미탑 같은 게 있는데, 모든 벌레들이 이 탑의 최상층에 올라가고 싶어해요. 길은 순탄치 않고, 벌레들은 다른 벌레들을 밀쳐내고 자기가 그 위로 올라가기 위해 애를 써요. 주인공 벌레는 어찌어찌 최상층에 도달하게 되는데, 기대했던 것과 달리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냥 텅 빈 방이었지요. 실망해서 탑을 내려가려는 주인공을 최상층 주민들은 이해하지 못해요. 주인공은 최상층 벌레들에 대해, 그리고 그런 최상층에 올라가기 위해 애쓰는 다른 벌레들에 대한 경멸감을 품게 되지요. 그렇게 내려오는 길에 주인공은 자신과 역방향으로 (위쪽으로) 애써 달려가는 다른 벌레들을 보게 되는데, 뜻밖에도 그 벌레들의 빛나는 눈동자들이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 반짝반짝 빛나는 경쟁심이 어찌된 일인지 참 보기 좋더라는 거지요. 그렇게 경멸감이 녹은 자리에 애틋하고 사랑하는 마음, 자비심이 싹터요. 4. 위의 세 이야기들은 모두 죽음의 그늘로도 가릴 수 없는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에요. 하지만 살펴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어요. 주인공 벌레는 꿀물을 향해 치열하게 분투하는 인간군상의 아름다움을 깨달아요. 물론 이 아름다움을 온전히 발견하려면 발견자 본인은 그 분투의 밖으로 나와야 할 필요가 있어요. 박사과정 말년차 대학원생은 학부생활에 미련이 없기 때문에 학부 입학을 위해 분투하는 아이들의 눈빛으로부터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요. 하지만 교수직엔 미련이 많기 때문에 교수직 차지하겠다고 분투하는 동료들의 꼬락서니를 감상할 여유가 없지요. 주인공 벌레가 최상층에서 스스로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거예요. 호라티우스는 보다 느긋하고 관능적이에요. 매일 매일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과일 따먹는 선사시대의 채집인처럼 살다 조용히 운명을 맞이하는 소요인. 하지만 그의 경구는 인생의 쓴 맛에 대해선 별 말이 없어요. 거기에는 분투하는 인간군상도 없고 폭주하는 코끼리도 없고 덩쿨을 갉아먹는 쥐들도 없어요. 최백호의 노래가사 중에 '실연의 달콤함'이란 말이 있어요. 젊은 정신은 연애는 달고 실연은 쓰며, 성공은 달고 실패는 쓰다고 생각해요. 연애와 실연 성공과 실패 사이를 달려가며 살아온 그 치열함 자체가 무척이나 달콤했다는 걸 깨닫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해요. 비유하자면, 커피의 쓴 맛이 실은 달다는 걸 10살짜리는 몰라도 20살짜리는 아는 것과 같이, 실연의 쓴 맛이 실은 달다는 걸 20살짜리는 몰라도 40살짜리는 알겠지요. 전강이 말한 '달다'에는 그런 정신이 있어요. 어차피 우리는 코끼리에 치어 죽든 뱀에 물려 죽든 다 죽어야 하니 우리 실존이란 참으로 좃같은데,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좃같은 운명 덕분에 방울방울 받아먹는 꿀이 무척 달콤해요. 호라티우스도, 독일인 작가도, 전강스님도 이제 모두 덩굴이 끊어져서 떨어져 죽고 없는데, 그들이 꿀 먹던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참 달지요. 전 살다가 힘든 일이 생길 때면 이런 자비심을, 관능을, 꿀맛을 생각해보는데, 이게 마음의 안녕에 도움이 돼요. 여러분도 힘든 일이 있거든 곰곰히 생각해보시길.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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