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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12/11 12:14:11수정됨
Name   구밀복검
Subject   '인 디 아일' 소개(스포일러 없음)
https://youtu.be/S16RYhdMDsA

'인 디 아일In den Gängen'은 독일 영화로, 구 동독 지역인 라이프치히의 대형마트를 배경으로 삼는 일상극입니다. 주인공은 크리스티안이라고 하는 청년남인데, 딱 봐도 과거가 범상치 않았을 것 같은 인상이죠. 본인 스스로도 갱스터들하고 어울렸다고 하는데, 아마도 공간을 고려하면 네오나치일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도 크게 깨지고 정신 차렸는지 마트 취업해서 지게차 몰며 성실하게 일합니다. 사수는 브루노라는 아재고, 마리온이라는 누나가 작업도 걸고 그래요. 이렇게 보면 힐링 무비 삘인데 딱히 그렇진 않고..

포인트는 라이프치히란 공간입니다. 아주 역사적인 공간이죠. 바흐의 도시기도 하고, 연합군이 나폴레옹을 작살낸 곳이기도 하고. 실제로 작중에서 BGM으로 바흐도 나와요. 독일의 문화와 영광이 꽃피웠던 도시죠. 보다 중요한 건 동독 지역이었단 거죠. 심지어 반정부 시위로 동독을 끝장내고 통독의 시발점이 된 곳이기도 하고요. 노동자 인민 공화국의 희망찬 기억이 있던 곳.. 하지만 지금은 서독에 비해 낙후된 벽지죠. 사실 이 마트의 '근로자'들은 동독 시절엔 제법 규모 있는 화물 연대 소속의 '노동자'였어요. 크리스티안의 사수인 브루노는 그 시절이 한창 때였죠. 지금은? 적당히 농땡이 피우면서 태업 안 될 수준으로만 일하죠. 사회주의 락원 시절은 죽었어! 더는 없어! 뭐 그런 거죠. 그래도 문화와 관습이란 게 한순간에 증발하는 게 아니라서 콩산당스러운 잔재가 있기도 합니다. 공식적인 보고와 비공식적인 실무가 괴리를 보인다든가, 업무를 빡빡하고 분주하게 하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땡땡이도 쳐 가면서 슬렁슬렁 안일하게 하죠. 퇴근할 땐 대표자와 악수를 나누면서 인사를 하며 헤어지고, 수습 녀석이 라이센스를 따면 모두 모여 축하도 해줍니다. 일 나고 사람 났냐 사람 나고 일 났지라며 만사를 태평하게 넘기는 것이 그야말로 대책없는 사회주의 문화 그대로죠. 시장경제에서는 공공부문에서나 간혹 느낄 수 있는 그런 태만함 말이죠. 하지만 이 역시도 과거의 잔재일 뿐 생명력이 있는 건 아니죠.

흥미로운 건 이런 주제의식을 형상화 하기 위해 쓴 이런저런 소품들인데요. 먼저 음악입니다. 앞서 말했듯 라이프치히의 역사성을 상징하는 바흐도 삽입되어 있고, 보다 강조되는 것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An der schönen blauen Donau'입니다. 물론 자체로도 듣기 좋은 곡이긴 하지만, 이 음악이 쓰였던 이런저런 맥락을 생각해보면 재미난 게 있죠.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이 곡이 독일권의 분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1866년 벌어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동족상잔은 프로이센의 승리로 돌아갔고, 이때부터 독일의 정통성은 프로이센이 가져가고 오스트리아는 부외자가 되어버리죠. 그 직후에 오스트리아 사회를 위로하면서 패전을 극복하고 내셔널리즘을 고취시키기 위해 나온 게 이 곡이고요. 굳이 말하자면 임호란 패전 직후에 나온 '임진록'이나 '박씨부인전' 같은 겁니다. 한 마디로 루저의 정신승리용 딸감인 셈인데, 그런 노래를 서독에 흡수 통일 된 동독의 비애를 그리는 데 활용한 것은 꽤 묘하죠. 마치 이 곡이 작곡될 땐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 발렸던 것처럼 지금은 동독이 서독에 먹힌 시대라는 것처럼.. 바흐고 뭐고 서독 식민지다 이거죠.

https://youtu.be/iOD2tvNuzig

또 재미있는 건 등장인물들의 이름입니다. 먼저 살펴볼 건 크리스티안의 상대역으로 나오는 히로인 마리온인데요. 마리온은 본디 마리아의 파생형이고, 마리아는 히브리어로 미리암입니다. 성서에는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있고 사실 성모 마리아도 미리암이죠. 그래서 이슬람에서는 성모 마리아와 모세의 누나 미리암을 동일인으로 간주합니다. 이에 따라 모세와 아론은 예수와 숙질간이 되죠. 여튼 이 미리암-마리아라는 이름은 여러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데, 대부분의 의미가 '바다'와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바다, 슬픔, 고통, 모성 등의 뜻이 있고, 이외에 높은 곳, 반란 등도 연관이 있죠. 이건 영화의 소재와 바로 직결되는데, 이 영화에서 중점적으로 부각시키는 소재가 바다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시장경제에 종속되어 삭막하고 폐쇄적인 섹터에 불과한 마트이지만 여기 사람들은 나름대로 냉동창고 안의 수족관을 바다라고 부릅니다. 마치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꼬마들이 자기들이 사는 판자촌 같은 모텔 곳곳에 이름을 붙여 특별한 공간인 양 향유하듯이요. 그리고 그곳은 마리온과 크리스티안이 밀애를 나누는 공간이기도 하죠. 심지어 크리스티안은 마리온을 처음 대면할 때 파도 소리를 듣기도 해요. 생각해보면 도나우 강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도나우 강은 남독에서부터 발원해서 구 공산권 국가들을 고루 거쳐 바다로 나아가니까요. 동독과 공산권 붕괴의 한과 대응이 잘 되는 소재죠. 한강이 한민족의 한을 싣고 흐르듯 ㅋㅋ



다음으로 구 동독 시절이 리즈 시절이었던 브루노. 브루노는 브라운의 파생형이고, 이 브라운Braun은 영어의 Brown과 같습니다. 네 갈색이죠. 그리고 이건 고대 게르만 권에서 곰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곰은 위협적인만큼 신성하다보니 직접적으로 호명하길 꺼려서 완곡어법으로서 'Brown갈색놈'이라고 부른 거죠. 이게 현대에 와선 Bear가 된 거고요. 즉 곰=Bear=Brown=Bruno인 것입니다. '패딩턴'이 괜히 패딩턴 '브라운'이 아닌 것이죠. 말하자면 브루노란 이름은 '곰탱이'쯤 되는 겁니다. 그리고 작중에서 브루노는 실제로 곰탱이 같아요. 젊음은 간데 없이 배 나온 중년이고 틈만 나면 퍼질러 쿨쿨 자고 맥주 마시고 담배 태우고.. 그러면서도 순박하고 정직하면서 요령없는 우직한 밥통 곰이죠.


* 패딩턴 브라운 = 패딩턴 곰탱이

이외에 비중은 높지 않지만 클라우스라는 인물도 있는데.. 이 사람의 이름도 가벼이 지나칠 수 없죠. 클라우스는 니콜라우스고 니콜라우스는 성 니콜라우스를 대번에 연상케하니까요. 네, 산타'클라우스'입니다. 실제로 이 인물은 작중에서 근로자들이 벌이는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이비자가 따로 있냐 여기가 이비자고 천국이다'라면서 겨울 한밤 중에 알몸으로 선탠을 하죠. 의미심장한 건 니콜라우스란 이름에는 '인민의 승리'라는 뜻이 있다는 것이죠. 아주 반어적입니다. 클라우스의 선탠이 차디찬 현실 속에서 골계를 드러내는 반어적인 넋두리에 불과하듯 인민의 승리는 지금에 와선 넋두리에 불과하죠.

이쯤 되면 크리스티안이란 이름도 당연하게 여겨지죠. 이건 유수된 유태인들처럼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의 이야기고, 쓸쓸한 현실에서 헤어나올 길 없지만 도나우 강처럼 흐르는 '통로Aisle=Gängen'를 통해 동유럽 망국들의 한을 실어 바다로 나아가기를 희구하는 갈망을 그리고 있죠. 비록 직접적으로는 종교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지 않지만 종교적인 구석을 느낄 수 있어요.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희생자들이 지고 가는 생의 무게란 십자가만큼 종교적인 것은 없지요. 지금의 독일은 '로마'와 다름없기도 하고. 독일과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악연으로 얽혀있단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하지만요.

이 가운데 읽어낼 수 있는 건 삶에 대해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는 생기없는 직장인들 사이의 유대 아닌 유대입니다. 어린 시절 우정만큼 순수하다거나 격의 없진 않지만, 생계의 무게를 함께 지면서 서로 사정이 통하는 처지 사이에 흐르는 뜨뜻미지근한 무언가가 있죠. 같이 타오를 건 없고 얽매일 것도 없지만 은근히 미온이 오래 유지되는 그런 현장적인 것들이 드러나는데, 이 역시도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네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진 못하지만 그럼에도 누구든 잠깐이나마 기대게 되는 그런 것이죠. 몸을 떠맡기듯 기댈 순 없지만 잠깐 기울였다 추스리는 그런 것.

예상을 뛰어넘는 작품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개를 다 예측할 수 있고, 보면서도 이면을 발견하기 어려워요. 등장인물들과 그네들이 겨냥하고 있는 관념 혹은 맥락들이 딱히 역동적으로 뒤섞이지도 않고. 충분히 더 전개해서 함의를 끌어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맥거핀처럼 흘려보내는 것들도 상당하죠. 그래서 힐링영화가 아니지만 힐링영화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영화입니다. 장점도 단점도 다 그런 데에서 오며 그 이상으로도 그 이하로도 가지 못하죠. 그럼에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런저런 구체화 된 소재들이 하나하나 낱낱이 맞물리면서 오는 앙상블이 라이프치히의 대형마트란 시장경제 어느 복판의 풍경을 마치 '바흐'의 화성처럼 재치있게 묘사한다 싶었습니다. 아직 대형 극장에서는 프라임 타임에도 상영하고 있으니 볼 거 마땅치 않다 싶으시면 이거 골라도 괜찮을 것 같네요 ㅋㅋ 경고하자면 지루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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