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01/04 12:56:45
Name   homo_skeptic
Subject   우산보다 중헌 것

장마철은 아니지만..
사실 우산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니까 상관없겠죠?

세상엔.. 우산을 사주지 않는 부모, 우산을 사주는 부모, 기깔나게 비싼 우산을 사주거나 비를 맞을 상황 자체로부터 자녀를 완벽히 차단하는 부모라는, 단 세 부류만 있다 생각하며 아이를 키워왔습니다. 사실 세 번째 부모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론 대부분 두 번째 역할을 하며 잃어버릴 때마다 잔소릴 하는 부모가 되었죠. 자신의 물건을 잘 챙기며, 폰 메인화면만 봐도 확인할 수 있는 그 날의 기상예보 정도는 미리 확인하는 습관을 길러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 믿었으니까요.

우산 따위보다 신경쓸 것이 늘 많으신 아들놈들을 둘이나 키우다 보니, 여름철엔 거의 마트에 갈 때마다 우산을 사야했습니다. 3단 우산, 좀 크면 덜 잃어버릴까 싶어 장우산, 비싸고 신기한 걸 사주면 챙길까 싶어 인터넷으로 사준 왠갖 고오급, 캐릭터 우산까지. 하지만 제 아이들은 그 어떤 우산도 일주일 이상은 간수하질 못했고 그때마다 버려진 우산을 들고 온 덕에 지금도 저희 집 신발장 안에는 고객들이 선호하지 않는 디자인과 색깔을 피해가려는 우산업체에게 완벽한 해답을 제공할만한 표본으로서의 양과 가치를 뽐내는 우산들이 쌓여있습니다. (새삼 생각해보니 놀라운 경향성을 보이네요. 생생 생활정보 : 1단 자동우산으로 명도가 낮은 보라색과 분홍색, 파란 색 계열의 우산은 쉽게 버려진다!)

잃어버린 우산을 찾는 과정의 소음과 분노에 서로 지친 나머지, 책가방에 우산을 꼬매줘야겠다는 멍청한 아이디어를 실천하기 직전, 다행스럽게도 세상엔 네 번째 유형의 부모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산을 잔뜩 사주고 혼내지 않는 부모요. 만수르 이야긴 아니고요. 생각해보니 거긴 비도 안오네요.. 밸런스 무엇? 암튼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커뮤니티에서 장마철이 되기 전에 늘 개당 1000원도 안하는 비닐우산을 수십 개 단위로 미리 사놓는다는 아버질 봤거든요. 자음남발 가득한 가벼운 게시물이었지만, 전 과장없이 그 뮈시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비할만큼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선 아이와 부모 모두 우산에 대한 스트레스나 불쾌한 갈등에서 벗어났을 겁니다. 다음으로 아이는 비를 맞고 등하교를 할 일이 전혀 없어졌겠죠. 학급에도 본인이 언젠가 가져왔을 것이 분명한 우산들이 널려있었을 테니까요. 기분 내키는 날엔 여러 개의 우산을 들고 가 우산을 잃어버리고 쩔쩔매는 친구들에게 호쾌하게 나눠주는 즐거움도 느꼈을 겁니다. 어쩌면 친구들이 순수한 호의로 지어준 우산맨같은 별명에 즐거워했을 수도 있겠죠.

우산을 잃어버리지 않거나 일기예보를 확인하는 습관이요? 제 돈으로 사거나, 여자친구에게 선물받은 우산이 생긴다면, 혹은 우산 때문에 큰 낭패를 본 경험 한 번이면.. 어차피 유년엔 곧 죽어도 깨우치지 못했을 우산 챙기는 일의 중요성 따윈 단번에 깨우치기 마련이죠. 무엇보다 언젠가 반드시, 그 아이는 아빠가 해준 행동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겁니다. 우산을 쓰는 날엔 늘 아빠를 생각하게 될 지도 모르고요. 그렇지 않아도 힘든 출근길의 어깨를 내리찍듯 쏟아지는 비 아래에서 추억하기엔, 근엄한 얼굴로 우산의 행방을 묻는 얼굴보단 그 편이 더 나을 거에요. 그런 날, 그 아이는 조금 더 가볍게 우산을 들 수 있을테고 어쩌면 퇴근 후엔 아빠에게 전화 한 통을 먼저 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나아가 자신도 그런 아빠가 될 가능성도 높아지겠죠.

우산보다 더 중요한 건 이런 거죠. 그날 이후로도 수백 번 잊어버리고 어제도 실패했지만, 전 정말 이런 부모가 되고 싶어요.



12
  • 육아는 참말로 수양이로군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931 일상/생각일주일간 컴퓨터 사려고 했던 이야기 6 2032.03.26 18/07/24 6046 2
7960 여행(스압, 데이터 주의) 오키나와 여행기 ~첫째 날~ 8 소라게 18/07/27 6046 18
8724 육아/가정우산보다 중헌 것 5 homo_skeptic 19/01/04 6046 12
10615 오프모임[오프모임]5/29일 금요일 가로수길 리북집 7시반 55 소주왕승키 20/05/23 6046 5
11378 게임반지원정대 젠지를 학살하는 쵸비 히스토리 1 Leeka 21/01/25 6046 3
8230 사회생계형 범죄자를 위한 출퇴근 교도소를 맹근다고 합니다. 3 NoviPo 18/09/14 6047 0
11397 철학/종교(번역)자크 엘륄: 우리가 자유롭다는 환상 6 ar15Lover 21/02/06 6047 6
3221 게임[하스스톤] 재미로 살펴본 고대신 카드팩 개봉 결과 4 모선 16/07/07 6048 3
9461 음악[클래식] 비발디 두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1악장 ElectricSheep 19/07/20 6048 0
3967 기타10.29일 (토) 여러분을 만나봽고 싶습니다. 14 레이드 16/10/20 6049 3
8990 도서/문학서평 『너무 시끄러운 고독』 – 보후밀 흐라발 2 메아리 19/03/22 6049 6
10939 일상/생각회사일기 - 1 2 Picard 20/09/08 6049 1
2904 정치이 나라의 공직기강 해이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13 Azurespace 16/05/27 6050 0
6017 여행현재 진행중인 몰디브 여행 항공, 숙박 준비 8 졸려졸려 17/07/28 6050 2
8336 일상/생각욕망하지 않는 것을 욕망함에 대하여 12 일자무식 18/10/07 6050 20
687 일상/생각한 폭의 그림같은 직장 이야기 #3 15 No.42 15/07/30 6052 0
7207 일상/생각고백 9 알료사 18/03/08 6052 3
6053 영화오랜만에 더 씽(1982)를 봤습니다(아주짧게) 1 제천대성 17/08/03 6052 0
9498 오프모임여름맞이 진주회관 콩국수 41 은목서 19/08/01 6052 4
838 기타스페인 시골마을 부동산 전체가 2억 4천만원 5 눈부심 15/08/25 6053 0
4111 영화동심파괴 일본애니 <Ringing Bell> 2 눈부심 16/11/08 6053 0
4164 IT/컴퓨터구글, 신경망 기반 번역 기능 공개 20 Leeka 16/11/16 6053 5
9180 도서/문학고속도로로서의 템즈강: 18세기 템즈강 상류지역의 운항과 수송에 관한 연구 34 기아트윈스 19/05/11 6053 15
9302 음악[클래식] 라벨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6 ElectricSheep 19/06/11 6053 2
9454 일상/생각청혼에 대한 기억... 22 o happy dagger 19/07/20 6053 2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