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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1/30 23:10:20수정됨
Name   자연도태
Subject   소통, 프로불펴니즘, 커뮤니티의 위기
사람들이 인터넷 커뮤니티를 하는 이유는 결국 소통에의 욕구때문일 것입니다. 그건 개인사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고, 전문 지식의 공유일 수도 있고, 사회적 이슈에 대한 논의일 수도 있죠. 그렇지만 일정 규모 이상의, 종합(특정한 목적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 커뮤니티라면 사회 이슈를 중심으로 해 돌아가는 것은 필연 아닐까요.

그러다보면 의견이 갈리는 사안에 대해 커뮤니티 내에서 첨예한 논쟁이 붙기도 합니다. 가끔은 욕설이나 그에 준하는 모욕을 섞으면서까지요. 아무리 유명한 커뮤니티라 해도 그 논쟁의 실질적 무대인 현실에는 조금의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그럼에도 논쟁이 한 번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것 역시 '소통욕'으로 요약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결국 '내 말을 들어달라'는 이야기지요. 물론 상대방도 나를 '내 말은 안들으면서 자기 할 말만 하는 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건전한 토론이란 인터넷에서 정말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이런 본인 위주의 소통욕은 인스타그램 등에서의 '소통해요~'와 정서가 일치하는 면이 있습니다. 주로 저 표현은 미모의(그리고 다수 팔로워를 보유한) 여성 유저에게 남성들이 접근할 때 쓰이죠. 그런데 굳이 소통이란 단어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것은 사실 '나는 남의 말을 먼저 듣는 젠틀한 사람이다'라는 의미가 담긴, 일종의 에티켓이기에 그런 거겠죠. 결국 '그러니 나에게 말을 걸어달라'는 자기 의지가 숨어있음을 너도 나도 알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소통이란 먼저 듣기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논쟁에 지친 커뮤니티의 어떤 유저들은 논쟁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그정도는 아니더라도 (원문이 꽤 험악하더라도) 반론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듣는 것도 마냥 쉬운 일은 아닙니다. '듣기'와 '가만히 있기'는 전혀 다른 행동이니까요. 어떤 커뮤니티는 반론 자체를 차단해서 구성원 간의 통일감을 유지하는데, 내실을 보면 그건 이미 썩어 있는 상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듣기가 곧 '경청'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행위라고 한병철의 <타자의 추방>은 이야기합니다.

[나는 우선 타자를 환영해야 한다. 다시 말해 타자의 다름을 긍정해야 한다. 경청은 타자의 말을 수동적으로 좇아가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경청은 말하기에 선행한다.]

[환대하는 침묵은 타인을 경청하는 대신 모든 것을 듣기만 하는 분석가의 침묵과는 다른 것이다. 손님을 환대하는 경청자는 자신을 비워 타인을 위한 공명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 공간은 타인을 해방시켜 자신에게로 오게 한다.]

하지만 말이야 옳은 말이지, 사실 인터넷 공간이 그러한 '경청의 공간'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애초에 그래서 한병철도 주로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지적했지만, 결국 인터넷 문화 전반을 비판하는 것이니까요. 그래도 우리가 속한 게시판 형태의 커뮤니티는 SNS와 달리 걸어볼 희망이 조금은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SNS가 보고 싶은 글만 본다면 게시판에선 보기 싫은 글 또는 사람을 차단할 수 있을까 말까나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다름'과 '틀림'은 다른 것이다'라는 말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풀어 말하자면 무엇을 '틀렸다'고 단언할 수 있을 때, 그것은 직선적인 충돌입니다. 그때 상대의 의견을 인정하면 정말로 나의 논리가 부서지는 것이죠. 반면에 '다름'으로 인한 충돌은 십자가형입니다. 상대의 어떤 부분이 나의 주장을 건드리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상대방의 주장을 인정한다고 해서 내 논거가 망가지는 게 아닐 때를 의미하지요.

웬만하면 이제 들고 싶지 않은 예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논쟁만큼 이 예시에 적절한 것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러 사건과 그 흐름을 지켜봐왔기에, '정상적인 페미니즘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들은 온건-과격을 막론하고 사회에 대체로 해악만 끼치고, 정부와 언론은 정신 못차리고 비호하고 있지요. 그리고 만약 페미니스트 혹은 페미니즘을 여전히 긍정하는 누군가가 이 내용을 본다면 페미니즘의 가치와 정상적인 페미니즘 단체나 활동에 대해 열변을 (최소한 속으로라도) 토할 것입니다. 그게 옳든 그르든, 이건 자기와 자기가 믿는 사상을 부정하는 것이니까요. 그 입장에선 '음 당신 생각은 그렇군요.'하고 넘길 수가 없는 문제죠.

그런데 잊어서는 안될 점은 그렇다고 '정상적인 여성이 없는 것'은 절대 아니란 것입니다. 그냥 학교 다니고, 회사 다니고, 연애하고, 아이를 키우는 보통의 여성들이요. 그리고 어떤 젠더적인 사회상에 대해, 여성들의 관점은 남성들과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여자들이 성추행을 그렇게 많이 당하는지 몰랐다는 남친 이야기나, 결혼이나 출산으로 인한 퇴사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 등등요.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조금 꺼내는 것만으로도 요새는 그래서 페미니즘이 옳다는 거냐는 적대감 가득한 반응을 받습니다. 현재의 제어 안되는 페미니즘에 동의한다고는 한 마디도 안했는데도, 몰려드는 수십 명의 본심이 뭐냐는 의도를 노골적 혹은 은근히에 드러내는 댓글에 이내 입을 닫게 되지요. 혹 '오냐 그래서 니들은 잘한게 뭔데'라고 공격적으로 나가기만 하면 그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꼴페미 낙인이 찍히고요. 이 과정을 여러 번 거치며 결국 커뮤니티는 한 쪽 입장만을 대변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문제 자체를 한 쪽 관점에서만 바라보게 되는데, 저는 이것을 커뮤니티의 남초적 위기라고 진단합니다. 제가 보는 남초 커뮤니티의 모습은, 여성이 받는 피해를 조금이라도 인정했다간 그게 너무 억울해서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유약한 사람들의 군집입니다. 이건 우리가 익히 보았던 여초 커뮤니티의 문제점과는 비슷하면서도 좀 다르죠.
(분쟁 방지를 위해 첨언하자면 남성들이 피해의식을 갖는 것 자체는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따지고 보면 그 대상도 아닌 사람들에게 열을 내는 건 그들이 항상 말하는 '우리가 만든 세상도 아닌데 왜 우리한테 난리냐'와 도무지 다를 게 없어 보인다는 말이죠.)

'프로불편러'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어떤 문제에는 불편해 하면서 어떤 문제에는 불편해 하는 사람들을 비꼴까 생각해 봤습니다. 위근우는 <프로불편러 일기>에서 무슨 프로불편러를 마치 잘못된 세상에 저항하는 위대한 발걸음 뭐 그런 걸로 묘사해놨던데, 그분이 남초적 불편함을 못견딜 것을 생각하면 역시 그건 말이 안되겠죠. 이 글을 쓰면서 십자가형 문제를 직선형 문제로 어거지로 주장하는 것, 그것이 바로 프로불펴니즘이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그리고 커뮤니티에서 무엇이 프로불편인지 이야기 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수의 문제라는 것도요. 그러고보면 최근 커뮤니티에서 프로불편러를 비꼬는 게시물이 없진 않아도 부쩍 줄었는데, 이는 페미니즘의 해악이 개선되지 않자 남초 커뮤니티에서 여유를 잃어서일 수도 있고 그러면서 프로불펴니즘을 어느새 차용해서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해봅니다.

프로불펴니즘이 무엇인지 규정할 수 있게 되자 그것을 극복할 방법도 떠오릅니다. 솔직히 저를 포함해서 우리 중 다수는 다른 의견을 듣고 싶지도 않고 다른 의견에 관심이 있어서 커뮤니티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몇몇 사람들은 불편한 의견이라도 보이는 것을 스스로 가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있는데, 커뮤니티를 연구하는 학자도 아니고 사실 그럴 필요가 없는 데다, 그런 사람들이 다른 의견을 듣고 인정하는 것도 제대로 못 봤습니다. 다만 내가 지금 분노하는 문제가 직선형 문제인지 십자가형 문제인지, 이것만 조금 고민해 보는 건 저기 어떤 인격적인 목표보다 훨씬 쉬운 것이 아닐까요. 즉 더이상 '다른 의견을 받아들여라'라는 위선은 나에게나 남에게나 그만두고, 그저 '다른 관점의 존재 자체를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부정하지는 않기' 정도로 한발 물러나자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일베류 옹호, 워마드류 옹호, 또는 커뮤니티의 룰을 어긴 어떤 과격 발언 등에 대한 제한은 여전히 강력히 두면서 말이죠.



24
  • 좋은 분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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