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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9/05/29 00:00:46 |
Name | The xian |
Subject | 오후 두 시 |
낮에 일하는 사람들이 점심을 먹고 잠깐의 휴식으로 짧게 재충전한 뒤 기운을 회복하는 시간. 아침부터 태양열을 받은 바깥의 온도가 가장 높아지는 시간. 오후 두 시. 하지만 제게 이 시간은. 그럭저럭 움직이던 제 신경이 하나둘씩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기 시작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선 한쪽 눈꺼풀부터 서서히 감겨지기 시작합니다. 심하면 한쪽 눈을 거의 뜨지 못하기도 합니다. 키보드를 치는 손은 미묘하게 오타가 늘어납니다. 당연히 오타가 미묘한 정도가 아닐 때도 있습니다. 마우스를 잡아도 어린애도 안 할 클릭 미스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전신을 무력감이 가득 채웠을 때에는 자리에서 축 늘어지기도 합니다. 찬 물로 세수를 하거나 커피를 몇 잔이고 마셔도 이 증상은 크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잠을 못 자서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을 하다가 목소리가 어눌하게 나오거나 아예 말을 더듬게 되기도 하고 뭘 먹게 되면 젓가락질을 하다가 초밥이든 반찬이든 제대로 집지 못해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그 전날 잠을 아무리 잘 자서 에너지를 축적해 놓아도 그 에너지가 소비되는 동안 충분히 보충이 안 됩니다. 그러니 그 에너지를 다 쓰게 되면 무력감에 빠지는 것이죠. 그 시간이 보통 오후 두 시입니다. 물론 잠을 제대로 못 자거나 피로가 누적되면 오후 두 시가 좀 더 일찍 찾아오기도 합니다. 어떤 날의 오후 두 시는 저에게 정오가 될 때도 있고, 열한 시가 될 때도 있고, 심하면 여덟 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도 먹고 살아야 하니 좀비처럼 걸어나가 대부분은 일터로 향하는 지하철에 오르지만 정말로 무력한 날은 그냥 내일 아침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때가 있기도 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해가 기울고 저녁이 되면 조금은 기운이 회복됩니다. 왜 그러는지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최소한 서너 시간, 많으면 대여섯 시간 동안 기운 빠진 상태에서 에너지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니. 사용하지 않은 만큼의 에너지가 남아서 기력이 회복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죠. 하지만 낮 동안 골골대다가 저녁에 조금 생기가 돌아오는 제 모습을 보고. 어떤 자들은 저를 번아웃이 맨날 온다고 비꼬았습니다. 식곤증이라는 오해를 받은 적은 부지기수입니다. 일 하기 싫어 꾀병을 부린다거나 직무태만이라는 오해도 받았습니다. 차라리 번아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식곤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제 의도에 의한 직무태만이나 꾀병이었으면 후련하겠다 싶기도 합니다. 내일 저에게, '오후 두시'는 몇 시에 찾아올까요? 그리고 내일은 얼마나 그 무력함이 오래 갈까요? 두렵습니다. 이렇게. 자정 다 될 때까지 한쪽 눈이 감겨 있는 날에는. 더더욱. - The xian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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