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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6/29 14:47:27수정됨
Name   Wilson
Subject   운동권의 정반합(正反合)
8, 9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녔다면 윤리와 사상 시간에 얼핏 들어봤을 법 한 정반합(正反合)은 기본적으로 논리 전개 방식이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의 변증법을 도식화 한 것으로 정(正), 여기서는 올바름을 뜻한다고 보면 그것에 대응하는 반(反)이 존재하고 이 정과 반의 비교를 통해 합(合)을 이루어 논리를 발전시키거나 그 실체적인 본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역사적 관점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정이라는 하나의 역사적 흐름에 대항하여 반이 등장하고, 정과 반을 통해 합에 도달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시회적 진보를 이룬다는 내용이다.

글을 쓰는 필자나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인 학생운동이 정(正)인 세상에서 대학생활을 보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 와중에도 학생운동을 좋지 않게 보는, 비판적인 반(正)의 시각은 존재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학생운동이나 시민운동을 한다고 하면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거의 대부분 평범한 사람이며, 더구나 20대 초반인 대학생들은 여러모로 서투른 풋내기들이다. 하지만 정(正)이 사회적 담론이고 흐름이었던 시간 속에서는 반(反)의 시각이나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았고 정을 비판하며 합을 찾아가는 주장을 펼치기도 쉽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시민, 학생운동으로 탄생한 정권의 시대가 되자 오히려 지금의 시대와 정권을 탄생시킨 초석이 된 학생운동은, 그 당시 반(反)에 해당했던 시각들이 오히려 주류가 되어 가끔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놀림이나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렸고 인터넷 상의 학생운동에 대한 밈(meme)은 오히려 풋내기 대학생들의 학생운동을 까고 조롱하는 것이 정(正)이 되어버린, 정조역전세계 같은 상황이 되었다.
결국 이러한 인터넷 상에서 학생운동에 대한 조롱과 비판이 누적되면서 ,지금은 그것으로 밥 벌어먹고 살지 않음에 감사하더라도 한때 그곳에 몸 담았으며 아직 자신을 '운동권'으로 규정하고 있는 나 같은 소시민의 반발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고, 그 반발심의 압력값은 스스로의 정체성 보호를 위한 글의 끓는점을 넘게 되었다. 결국, 이제는 학생운동을 까는 밈이 정(正)이 되어버린 것에 맞서, 반(反)의 입장에서 몇 차례 글을 써보고자 한다. 서두에 언급한 정반합과 같이, 변증법적 순환을 거친다면, 단순히 내가 생각하는, 또는 당시 사회가 그리는 정(正)이 진보요, 정의라고 생각하는 편협함을 넘어서, 그때, 그리고 지금의 학생운동의 진정한 모습인 합(合)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운동권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나 생각,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지만 기억에 남는 몇번의 파업이나 시위 참가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한다.
학생, 노동자의 연대를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학생운동 입장에서, 내일 모레 개강으로 학생회가 가장 바쁜 시기였지만 민주노총 공공부문 산하 최대 노조인 공공운수노조 철도노동자의 파업을 모른체 할 수는 없었다. 파업 노동자 집결지는 청량리차량사업소. 단대학생회에서 파업 현장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뒤, 오후 4시쯤 도착한 청량리역은 집회 참가하는 학생, 조합원들과 전, 의경으로 북새통이었다. 전, 의경은 이미 차량사업소로 통하는 지하철 출구 몇 곳을 병력으로 완전히 폐쇄하고 집회 참가를 막고 있었는데, 현장에 모인 사람들이 몇 군데로 전화를 돌리더니 결국 봉쇄된 출구 중, 가장 넓은 곳을 힘으로 뚫고 집회에 합류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대략 10미터 정도 되는 폭의 출구. 하지만 플라스틱 방패와 헬멧, 군화로 무장한 전경들이 3열로 완전히 틀어 막고 있는 곳을 뚫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많은 실전 시위 경험으로 다져진 집회 참가자들은 틈을 찾을 줄 알았다. 축구나 바둑에서도 상대 진영을 무너뜨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양 측면 돌파다. 중앙은 상대방을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 부치는 것이 아닌 이상, 점으로 밀어야 하는데 결국 뚫으려는 한명이 서너명의 힘을 맞닥뜨려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하지만 측면은 둘파하는 쪽에서 중앙에 적절한 압박만 가해주면 벽에 바짝 붙어서 돌파 할 수 있다. 한명이 통과하면 손을 잡고 뒤를 이어 줄줄이 지나가게 되고 결국 전경들의 저지선을 뚫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합류한 차량사업소의 철도노조 파업현장은 일반적인 파업 전야제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노조 간부 소개, 조합원의 발언, 노래패와 율동패의 공연. 철도노조 파업은 파업 무력화를 위한 대체인력이 투입 될 수 있 수 있기 때문에 차량사업소를 점거하고 파업참가 모든 조합원이 그곳에서 파업이 끝날 때까지 전 조합원 옥쇄를 다짐한다. 하지만 연대참가한 학생들의 경우는 계속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결국 12시가 넘은 늦은 밤, 철수를 결정했다. 철도노조 측에 입장을 전달해서 양해를 구하고 집회 현장을 둘러싼 철조망 한쪽을 걷어올리며 집회현장을 빠져나가는데. 이제 파업 시작인데 어딜 빠져나가냐는 한 참가자의 호통을 뒤로 하고 집회현장을 빠져나오는 길은, 3월인데 갑자기 눈이 펑펑 쏟아지며 우리의 발자국을 기억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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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속편도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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