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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7/02 23:02:21
Name   Wilson
Subject   삼청동의 술래잡기(2/5)
난 집회의 공기, 분위기가 좋았다. 다양한 의견,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 마음맞고 생각을 공유하는 선후배를 만날 수 있는 곳. 스스로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자부심과 당위성은 있지만 다수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사상적 교감을 가진 사람들끼리 만나면, 처음보는 타대학 사람이라도 동질감만으로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 한창 학생운동을 한창 활발히 하던 시절에는 한미 FTA 반대집회부터 작은 동네 의료원 보건노조 파업까지, 많은 집회에 다양하게 참가했다. 집회 인근 지하철 역에서 내리면 딱히 집회 쪽으로 가는 방향을 모르더라도 가야하는 방향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어렴풋이 휘날리는 깃발, 언제나 가슴뛰게 하는 민중가요. 집회현장을 빼곡히 둘러싼 검은 전투복을 입은 경찰들의 장막을 헤집고 시끌벅적한 집회 현장에 들어가는 순간은 흑백티비에서 삶의 역동성, 다양성을 보여주며 컬러티비로의 전환과 같은 신선함이었다.


각종 스포츠, 또는 스마트폰이나 PC화면으로 봐도 똑같은 이스포츠 경기라도 사람들이 현장중계를 찾는 이유는 현장에 가면 역동성과 긴장감, 현장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그것에 집중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루하다고 채널 돌리듯 쉽게 자리를 뜨기 힘들고 두세시간은 그것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집회도 같은 이치다. 집회에 참가하면 공연이나 발언을 듣더라도 이 시위가 정말 정당성이 있는지, 꼭 필요한지 끊임없이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글쎄, 물론 그렇지 않고 집회나 시위에 전적으로 찬성하며 힘을 보태자는 사람도 있겠지만 난 끊임없이 스스로의 집회참석에 대한 당위를 찾아야만 하고 납득시켜야 했다. 그러다보니 이어지는 집회 뒷풀이나 새벽까지 이어지는 정리 모임에서 난 항상 비판적인 모습이었고, 선배들은 넌 맨날 집회 안 올 궁리만 하는 거 같다고 놀리면서 내 주장의 약점을 조목조목 파고들며 기어이 나를 설득시켰다.


이렇게 평화롭게 마무리되는 집회도 있지만 광화문에서 정부를 향한 대규모 시위는 가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다. 가두행진에 이어 살수차도 가끔 등장하는 시위는 집회 도중 고학번 선배가 은밀히 몇몇 학생들에게 모일 곳을 정해주는 것으로 전위대가 꾸려지고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한다. 감시하는 눈에 띄지 않게 뭉치지 말고 한두명씩 자리를 뜨는 것처럼 지하철 역으로 이동하라는 내용이 전달되면 조용히 일어서서 삼청동쪽으로 이동한다. 광화문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있고, 누가봐도 대학생으로 보이지만 스스로는 평범해 보일 거라고 생각하며 삼청동쪽 골목길을 지나가듯 둘려보면 역시나 골목마다 경찰들로 꽉 차 있고 경찰 간부들이 하나둘씩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긴장상태를 유지하다 한쪽이 뛰거나 다른쪽에서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시작으로 추격전이 시작된다. 사실 삼청동 안쪽으로 들어가는 골목은 거의 막혀있기 때문에 바깥으로 돌 수 밖에 없고 학생 한명이 쫓긴다 싶으면 반드시 최소 한명을 붙어줘야 한다. 혹시라도 체포될 때 버둥거리는 사람 한명을 제압하는 것과 두명은 제압하는 건 크게 다르니까. 도망치다 힘이 빠지거나 넘어져 잡힐 거 같은 상황이면 격투기의 파운딩과 같은 자세를 취해서 최대한 체포되지 않도록 한다. 만약 두명이라면 반드시 서로 팔짱을 끼고. 나도 한번 도망치다 넘어져 경찰이 눈앞까지 온 적이 있지만 당시 참여정부의 시위대응 기조였는지, 삼청동에서 멀어졌기 때문인지 그냥 멀어져가는 경찰의 모습을 보며 안도하기도 했다. 물론 이제 갓 형법 배운 법대생 나름대로의 계산도 있었다. 나의 지금까지 행위가 형법 구성요건해당성을 충족한건 아니잖아?


그렇게 졸업 후, 취업준비에 부대끼며 운동과는 멀어져가던 때, 알바연대에서 청와대 인근 건물 옥상에서 기습시위를 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알바연대는 청와대가 훤히 보이는 건물옥상에서 최저임금문제를 이명박이 직접 해결하라는 플랜카드를 내걸었다 체포되었는데 그 기사를 보고 문득 전위대로 뛰던 시절이 떠올랐다. 만약 내가 그때 청와대로 침입했다면 난 뭘 할 생각이었지? 그에 대해서 선배로부터 이야기를 듣거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어본적이 있었나? 놀랍게도 없엇다. 애초에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이미 생각해서일까. 삼청동에서 술래잡기만 했지 막상 청와대로 들어가면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이 생각조차 졸업 후에 깨닫게 되다니. 그것은 나에게 적잖은 충격을 줬다. 물론 겨우 대학교 1, 2학년이었지만 시위의 최전방을 자부하던 내가 알고보니 경찰 시선교란용 정찰병? 평택 대추리에서 그렇게 목놓아 불렀던 민중가요 '불나비'처럼 정말 앞만보고 뛰어가는 불나비였나? 아니, 오히려 시위마다 그렇게 비판적이고 합리적 판단을 찾아 토론하던 내 자신이, 정작 가장 큰 위험을 무릅썼던 전위대의 정확한 목표조차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 한심스러웠다.


일련의 생각들은 스스로의 합리성과 학생운동에 대한 생각을 돌아보게 했다. 삼청동 골목을 뛰던 대학생의 나는 무엇이엇나. 스크린 너머의 공포영화를 보며 역설적으로 자신의 평화로운 상황에 안정감을 느끼는 것처럼, 나의 행동 중 가장 사회저항적인 일탈행위를 한다고 하지만 사실 기저에는 스스로 그러한 선은 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후의 구체적 행동을 알려주지 않은 선배는 알고 있었을까. 내가 사실 운동에서도 가장자리만 맴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 대학생활을 바친 학생운동, 지나간 20대를 새롭게 정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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