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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9/09/22 00:02:12 |
Name | 호타루 |
Subject | 실록에서 검색한 추석 관련 세 가지 이야기 |
옆동네 글 이벤트 응모하다가, 하나 더 응모해 볼까, 그런데 내용은 뭐가 좋을까 했거든요. 샤워하다가 떠올린 걸로 하나 더 썼습니다. 이런 주제도 재미있겠다 싶어서 한 번 검색해 보았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월척이 얻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만... 실록이 한자로 쓰여 있다 보니 한가위로 검색하면 엉뚱한 검색 결과만 나오는 관계로, 두 가지 키워드, 추석과 중추(仲秋 - 한자어로 검색해야 결과가 추려지더군요)로 검색했습니다. 매년 8월 15일의 기록을 보는 것도 방법이긴 합니다만, 글쎄요 그렇게까지 하긴 좀... 검색해 보니 대다수의 결과는 추석 제사를 행하다, 추석제를 지내다... 뭐 이런 류입니다. 그런 걸 걷어내고 나니 기록이 몇 개 안 나오더군요. 그런 기록 중 세 가지를 소개해 드립니다. 태종 15년 9월 3일 태종 15년이면 1415년이죠. 아들과 칼끝을 겨누었던 이성계도 아들과 화해한 이후 죽은 지 7년이 지난 시점이고, 나라의 기틀이 거의 정립되어 가는 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기사 제목은 "제향 의식에 대한 예조의 계문, 모두 그대로 따르다"인데요, 계문(啓聞)은 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는 걸 계문이라 합니다. 뭐라고 했는지 보시죠. "[목조(穆祖)] 이하 여러 산릉(山陵)은 [원일(元日)·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동지(冬至)·납일(臘日)]에 사신을 보내어 제사를 행하고, [건원릉(健元陵)·제릉(齊陵)]의 삭망(朔望) 및 원일·한식·단오·추석·동지·납일의 제사는 한결같이 전례에 의하고, 봄·가을 중월(仲月)에 예관을 보내어 여러 능을 순시하고, 인하여 심릉안(審陵案)을 만들어서 본조(本曹)에 감추어 두소서." 강조 표시한 부분을 중점으로 봅시다. 목조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당시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의 선조를 왕으로 추존하여 제사를 드린 건데, 그 추존 범위가 고조부까지였던 게 일반적이었죠. 조선 시대에도 이성계의 4대조까지 왕으로 추존하여 능으로 제사를 지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조선 시대의 주요 명절의 리스트라 볼 수 있겠네요. 원일은 설날을 말합니다. 한식은 음력 3월 3일로 진 문공의 신하 개자추를 기리는 날이...긴 한데요, 물론 사대주의가 좀 있던 시기임을 감안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날짜가 3월 3일인 게 더 중요합니다. 1, 3, 5, 7, 9 등 홀수는 양(陽)의 수, 그 반대인 짝수는 음(陰)의 수라 하여, 양의 월에 양의 수가 겹치는 날인 1월 1일, 3월 3일, 5월 5일 등을 양기가 성한 날이라 하여 중요시했거든요(그래서 단오 칠석 등을 기린 겁니다). 한식도 개자추를 기리는 게 중요하다기보다는, 양기가 성한 날에 마침 의미까지 있기 때문에 명절로 기리던 쪽에 더 가깝지 않았나 싶습니다. 추석과 동지야 뭐 굳이 말할 건 없을 것 같구요, 납일은 동지 뒤 미일(未일, 자축인묘 진사오미 신유술해의 그 미)을 말합니다. 조선 초기에는 이 6개의 날을 명절로 하여 제사를 지내는 날이자 중요한 날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중 원일, 단오, 추석 3일을 가리켜서 삼명일이라 하여 다른 명절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선조실록을 보면... (선조 33년 11월 25일)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 친향의(親享儀) 소주(小註)에 ‘속절(俗節) 은 [정조(正朝)·동지(冬至)·한식(寒食)·단오(端午)·중추(中秋)]이다.’ 하였으며...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정조는 설날을 말합니다. 위 제사를 드리는 여섯 개 명절 중 납일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요. 납일로 검색해 보면 영조실록이나 정조실록 등에서 납일에 제사를 드려 한 해 동안 지은 농사의 형편과 여러 이야기를 신에게 고하는 등의 이야기가 있는 만큼 납일에 제사를 안 드리지는 않았습니다만, 아무래도 다른 날짜에 비하여 좀 무게감이 떨어졌던 모양이긴 합니다. 건원릉과 제릉은 각각 이성계의 능과 이성계의 첫째 부인이자 태종의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의 능입니다.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은 당시 능을 지키던 석조 건축물을 갖다가 청계천 다리에 거꾸로 처박았을 정도로 능다운 능 취급을 못 받았던 만큼 예조에서 언급하는 것은 가히 자살행위였을 겁니다. 예조에서의 언급이 없는 사실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죠. 세종 13년 8월 10일 이번에는 세종과 신하의 입씨름 이야기입니다. 허조가 아뢰기를, "헌릉(獻陵)에 본월 14일에 친히 행행하사 제향하시고, 또 15일에 대신을 보내어 행하게 하시면, 추석은 한 번인데 두 번 제향함은 모독(冒瀆)함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소전과 헌릉에 내가 추석 제사를 친히 행하고자 하나, 하루에 두 곳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13일은 문소전에 제사하고, 14일에는 헌릉에 제사하는 것이며, 15일은 정작 명일인즉 어찌 이미 제사를 행하였다 하여 그대로 궐할 수야 있겠느냐. 이러므로 두 번 제사하는 것이다." 하니, 허조 등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친히 행하지 못하시는 곳에는 대신으로 하여금 섭행(攝行) 하게 명하시는 것이 옳사온데, 하필 두 번 제사하오리까." 하니, 임금이 묵묵히 생각하였다. 하이고, 말이 겁나게 어렵네요. 헌릉은 세종의 부모인 태종과 원경왕후를 모신 쌍릉이고, 문소전은 신의왕후 한씨를 모신 사당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부모와 할머니에게 제사를 드리는 걸 의논한 것이죠. 의역을 감수하고 나름대로 좀 머리를 굴려서 다음과 같이 풀어봤습니다. 허조 : 아니 전하, 부모님 제사를 14일에 직접 드리고, 또 15일에 대신을 보내시면 어캄요? 추석은 한 번인데 제사를 두 번 드리면 이거야말로 신성모독 아닙니까? 세종 : 야, 내가 할머니 제사하고 우리 부모님 제사를 직접 지내고 싶은데, 하루에 제사를 두 탕 뛸 수가 없잖아. 그래서 일단 할머니 제사 먼저 드리고, 다음날에 아부지 제사 드리는 거고. 그리고 제사를 드리고 보니 다음날이 명절인데 명절에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손가락 빨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나 그렇게 못 함. 그러니까 제사를 두 번 드리는 거지. 허조 : 아니, [제사는 딱 한 번, 그리고 전하께서 가지를 못하시면 대타를 보내시고 손 떼셔야죠.] 세종 : ...... 뭐 웃어넘길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제사라는 거 말이죠, 조선 시대 그것도 유교 성리학의 나무가 왕성했던 이 땅에서 제사를 빼먹는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조선 후기에조차 제사 안 지내고 신주 불태웠다고 윤지충의 목이 날아가던 나라 아닙니까? 그런 만큼 왕실의 제사라는 것은 그야말로 국가적인 중요한 의식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죠. 그런 의식, 그것도 다른 날도 아닌 3대 대명절 추석에 지내는 중요 의식에 대해서 허조가 왕을 상대로 입씨름을 벌인 겁니다. 니가 옳네 내가 옳네 하면서요. 그것도 [너님 그거 신성모독임]이라는 표현까지 써 가면서 아득바득 기어오른 겁니다. 이 허조, 엄청나게 깐깐하기로 악명(?)이 높은 양반이었습니다. 아니 뭐 하긴 왕을 상대로 저렇게 대놓고 모독이니 뭐니 운운할 깡이 있는 양반이니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오죽했을까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대놓고 [강직한 성품을 가졌다]고 되어 있으며, [유교적 윤리관을 보급해야 하는 조선 초기에 태종, 세종을 도와 예악제도를 정비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절 운운할 때 꼰대라고들 하잖아요. 그런 이미지 생각하시면 얼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깐깐하게 회초리를 들어 가며 똑바로 하라고 아랫사람들을 갈궈댔을지 상상이 가지 않네요. 일단 우의정까지 올랐고 세종조의 능력있는 문신이었다보니 답 없는 꼰대라기보다는 강직한 신하라는 쪽이 좀더 평가에 맞겠습니다만. 아, 이로부터 6년 후에 예조에서 아뢴 게 하나 있는데, 이 당시 예조 판서가 허조였습니다. 근데 그 내용이 말이죠... (세종 19년 6월 28일) 예조에서 아뢰기를, "경외(京外)의 모든 관리들이 죽은 아내의 기일로서 고가(告暇)하는 자가 매우 많사온데, 고금의 기식(忌式)을 자세히 참고하건대, 《두씨통전》 기일의(忌日議)에 있는 제의(祭義)에 이르기를, ‘군자는 종신(終身)의 상이 있기 때문에 기일이라고 이른다. ’고 하였는데, 주해에는, ‘기일은 어버이가 죽은 날이었다. 기라고 이르는 것은 다른 일은 행하지 아니함이었다.’ 하였고, 《문공가례(文公家禮)》의 주에 이르기를, ‘사기(私忌)는 벼슬에 있는 이나 있지 아니한 이나 조부모·부모에게는 모두 하루씩 하며, 고조부(高祖父)와 증조부를 섬기는 데에도 같다. ’고 하고, 《원례전(元禮典)》의 시향제 의식(時享祭儀式) 가운데에는, ‘만일 조부의 기일에는 조부와 조모에만 제사하고, 조모의 기일에는 조모만 제사하고 반드시 다 행하지 아니하며, 인해 신주(神主)를 중당(中堂)에 나오기를 청하여 제사하고, 다른 위(位)의 기일에도 같다. 외조부모와 처부모의 기일에도 제사를 주장할 이가 없으면, 마땅히 설[正朝]·단오(端午)·추석(秋夕) 및 각 기일(忌日)에 시속 의식대로 제사한다. ’고 하였으니, 삼가 이상의 기식(忌式)으로써 그 본래의 뜻을 생각하면, 대저 기라고 하는 것은 종신의 상을 의미하는 까닭으로 존속(尊屬)을 위하여 고가(告暇)함은 사리에 당연하나, 비속(卑屬)을 위해 고가한다는 글은 없으니, 원컨대, 이제부터 죽은 아내의 기일에는 고가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쉽게 해석하면, 예조에서 아뢰기를... "서울과 서울 밖의 모든 관리들이 말입죠, 거 아내 죽은 기일이랍시고 휴가 내는 양반들이 더럽게 많더라구요? 옛날 책을 뒤져보면... 어쩌구저쩌구... 하여간 이것저것 다 뒤져봤을 때, 부모의 항렬을 위해서 연차 내는 건 당연한데, [아내를 위해서 연차를 내는 법은 없다는 말입죠?] 그러니 죽은 아내 기일이랍시고 연차 내는 짓거리는 하지 못하게 하시죠." 그러니까 아내 기일이라고 연차 못 내게 한 겁니다. 직장인이면 다 공감하시겠지만 연차 하루 빠지는 것도 참 부들부들하게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관행 내지는 그런대로 합법적으로 연차를 낼 수 있는 거를 하루 날려먹은 셈이 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들거렸을지는 뭐 안 봐도 비디오겠습니다. 그리고 그걸 또 뒤에서 욕 먹을 거 뻔히 알면서도 밀어붙여서 그대로 하게 만드는 허조의 깡다구는 정말... 연산군 3년 8월 15일 이건 진짜 뭐랄까요, 재수가 없다고 해야 할지... 일단 보시죠. 문소전(文昭殿) 추석(秋夕) 제향에 대축(大祝) 윤은보(尹殷輔)가 제4실(第四室)의 신위판(神位板)을 받들다가 발이 헛놓이는 바람에 땅에 떨어져서 독(櫝)이 깨져 금이 갔다. 왕이 이르기를, "신(神)이 놀라서 동요되었을 것인데, 고유제(告由祭)를 드리는 예가 있지 않느냐? 예관으로 하여금 고례를 상고하여 행하게 하라." 하고, 윤은보를 의금부(義禁府)에 하옥시켜 국문하게 하였다. 그러니까... 윤은보라는 문신이 있었습니다.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중이었는데 가다가 실수로 발을 헛디뎌서 넘어졌거든요. 근데 하필이면 이 때 신위가 땅에 떨어져서 그만 금이 가 버렸고... 연산군 왈, "신을 놀라게 했으니 그 사유를 제사로 드려야 하지 않겠냐? 야 예관, 빨랑 찾아봐. [그리고 그 신위 떨군 XX는 잡아다가 하옥시켜!!]" 이렇게 된 거죠. 아시다시피 연산군은 폭군이 맞습니다. 근데 즉위 초반에는 멀쩡했다는 기록이 꽤 있고, 실제로 평가에 따라 갑자사화 직전까지 멀쩡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죠. 무오사화도 연산군 4년에 일어났으니 이 때는 그래도 연산군이 정상적이었던 때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무오사화도 연산군이 멀쩡했다 vs 이 때부터 폭군이 되었다고 평이 갈리는 시점이죠. 저는 전자). 사실 아시다시피 제사가 얼마나 귀찮습니까? 연산군일기 11년 6월 30일, 그러니까 갑자사화 이후 확실히 연산군이 홰까닥 맛이 간 그 시점에서 연산군이 뭐라고 했냐면 말입니다... 전교하기를, "3년의 상기(喪期)는 성인(聖人)이 제정한 바로, 상하(上下)가 통행(通行)한 지 오래다. 그러나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제도를 새로이 한 것도 또한 시왕(時王)의 제도인 것이니, 달을 날로 바꾸는 제도[以日易月制] 를 위에서 이미 행하였거늘, 아랫사람이 홀로 삼년상을 행하는 것이 가하랴. 또 쓸 만한 사람을 상제(喪制)에 얽매어 일을 맡기는 데에 때를 잃으니, 이는 옳지 못하다. 일을 맡기는 때를 당하여 비록 기복(起復)을 한다 하여도 그 마음에 친상(親喪)을 마치지 못하였다 생각하는데 고기를 먹고 관직에 임하려 하겠는가. 정해진 제도가 있다면 자식된 마음은 비록 그지없더라도 또한 왕제(王制)를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양부모의 상은 백일로 마치고 친부모의 상도 참작하여 강쇄(降殺)함이 어떠한가? 삼공(三公)·예관(禮官)을 불러 의계(議啓)하게 하라." 하매... 역시 좀 풀어 쓰면 이렇습니다. "거 옛날의 양식이 오래 되긴 했는데, 그거 시간에 따라서 좀 고치는 게 맞잖아. 그리고 왕이 (일 때문에)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여 상을 치르는데 니들이 3년을 뻐기면 쓰냐? 그리고 3년상하면 소는 누가 키워? 거시기머시기 어쩌구저쩌구 아무튼, 야 [키워 준 부모에 대한 상은 무조건 100일, 그리고 친부모의 상도 줄여!]" 즉 유교의 국가였던 조선에서 그 최선봉에 있는 왕이 앞서서 3년상을 개박살을 내는,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전교를 내릴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예법이니 뭐니 하는 게 매우 거추장스러웠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네요. 자기 부모의 죽음을 기리는 것도 이 모양인데, 뭐 신이고 뭐고 이 때의 연산군에게 눈에 뵈는 게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앞선 기사에서는 "신이 놀랐을 테니 제사를 드려서 사유를 고해드리고, 사고친 놈은 잡아다가 족쳐!"라고 이야기한 거죠. 너무나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연산군이 초기에는 좀 멀쩡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겠습니다. 저 재수가 더럽게 없었던 윤은보라는 양반은 이 때의 일로 국문을 당했고(!!), 의금부에서 형량을 아뢰기를... "윤은보(尹殷輔)의 죄는 율(律)에 의하여 곤장 90대와 도배(徒配) 2년 반에 해당하오나 도배(徒配)는 속(贖)하여 주소서." 라고 했습니다. 곤장 90대도 일단 어마어마...한데, 도배가 문제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도배라고 하면 강제노역형이거든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거의 [아오지탄광행]같은 느낌인 겁니다. 노역도 살벌한 게 문자 그대로 염전노예(정확히는 소금굽기) 내지는 대장간행(철 녹이기). 그 외 종이 뽑기, 기와 굽기, 숯 만들기 등등... 도배에는 반드시 곤장형이 따랐고, 다섯 등급이 있었습니다. 60 ~ 100대 각 5개 단계에 각 단계별로 1년부터 3년에 이르기까지 역시 5개 단계. 그러니까 윤은보가 먹은 징계는 무려 4단계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수준의 징계였던 겁니다. 종신성을 띄지 않았으니 가벼운 형벌이라 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글쎄요... 저거 장 90대면 진짜 죽어라 맞아야 하는 거거든요. 윤은보는 그래도 그나마 약간 운이 좋은 축에 속했습니다. 저 속하여 달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벌금형으로 대체하시죠라는 말과 동일했거든요. 그러니까 원래는 곤장 다 맞고 2년 반 동안 노예생활해야 할 걸 노예생활은 벌금형으로 빼 주고 곤장만 맞아라, 이겁니다. 단, 곤장 맞는 건 얄짤없었습... 뭐 당연히 파직되었겠죠. 실록을 보면 연산군 4년 12월 22일에 사간원 정언으로 관직이 제수되었다고 하니 복권에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린 건 아니었습니다. 윤은보는 이후 중종대에도 계속 등용되어 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오릅니다. 그 때 사고쳤던 그 양반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입지전적인 인물이 된 거죠. 세 번의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에서도 멀쩡히 살아남았는데 그게 좀 아니꼬웠던지 사림에서 비난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평가는 "학식은 좀 거시기한데 관리로서의 업무에는 탁월한 인물임" 정도라나요. 이상으로 세 가지 기록을 살펴보았습니다. 좀더 재미있는 기록이 있을 법도 합니다만 약간 귀찮고(...) 글이 길어지는 관계로 여기에서 줄입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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