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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9/10/23 13:04:30 |
Name | Jace.WoM |
Subject | 착한 여사친 이야기 |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나온 내 대학동기 여사친은 참 긍정적이고 밝은 친구였어요. 그래서 선천적으로 틱틱대고 딴지를 걸기 좋아하는 저하고는 궁합이 안 맞는듯 참 잘 맞았죠. 내가 오늘도 강의실로 가는 언덕에 어두운 그늘이 져 있다고 말하면 그 친구는 오늘은 참 태양이 밝다고 말했어요.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언덕위를 바라보면 태양 아래서 그늘을 만들며 서 있는 이쁜 나무 한 그루를 볼 수 있었죠. 어느날 늦게까지 술자리에서 잔뜩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친구와 실랑이를 한 적이 있어요. 주제는 무려 '사람은, 인류는 과연 선해질 수 있는가.' 이게 20살 갓 넘은 남녀가 술 먹고 집에 오면서 할 대화 내용인가 싶기도 하지만 당시 우린 서로를 이성으로 보는것이 불가능하다는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할 얘기가 저런 얘기밖에 없더라구요. "천년전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사회가 얼마나 살기 좋아졌는지 몰라, 우린 끝끝내 선함에 도달할 수 있을거야." 친구가 말했어요 "그것은 규제와 시스템 발전덕일뿐 인간은 지금도 여전히 감정적이고 악행의 충동을 참을 능력이 없다." 내가 말했어요. 그렇게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이 열심히 실랑이를 하다가 보니 어느새 친구집에 거의 다 도착했어요. 걸음을 돌려 집으로 가는 내게 그 친구는 내게 얘기했어요. "니 말도 일리가 있는데, 넌 틀렸어. 우린 선해질 수 있어 난 사람들의 가능성을 믿어." 이후 가정사로 인해 대학생활을 포함한 모든 교류 활동을 잠시접고 칩거를 했다 돌아온 저는, 거진 2년만에 그 친구와 다시 만날 수 있었는데, 예전에 비해 우린 서로 많이 달라져 있더라구요. 죽을 고생을 하고도 무사히 살아돌아온 저는 예전에 비해 많이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고 그 친구는 페미니즘에 심취해 있었어요. 그것도 꽤 과격한 수준으로.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이 지금처럼 유행한것보다는 한 1~2년 정도 이른 시점에 말이에요. 메갈이니 한남이니 하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을때인데... 무엇이 그렇게 밝고 긍정적이고 인간의 가능성을 믿고 있던 친구가 믿음의 대상을 인간에서 여성으로 좁히게 했을까요? 내가 사라지고 얼마 안돼서 생애 첫 연애를 했는데, 그때 만난 남자가 참 나쁜놈이더라구요. 그게 1번 여초과에 있을땐 몰랐지만 졸업해서 취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성별로 인해 차별받았다. 이게 2번 그리고 위의 과정에서 주위 남자들의 무감각한 태도와 상처주는 언행에 실망했다. 결정적 3번 듣고보니 그럴만하네 쯧쯧 안됐다 안쓰럽다 그렇게 얘기해주는 내게 친구가 물었어요. 그래도 너도 남잔데 내가 이런 얘기 하는게 불편하지 않냐고 "솔직히 내 생각이 지금 네 생각이랑 좀 다르긴 하지만, 어차피 예전에도 너랑 나는 딱히 의견이 맞지 않았고, 지금도 그냥 마찬가지일뿐이다. 내 머리속에선 예전에도 내가 맞고 니가 틀렸고, 지금도 내가 맞고 니가 틀렸어. 그래서 내가 남자여도 니가 불편하지 않고 괜찮으면 난 괜찮아. 근데 만약 내가 남자라서 니가 안 괜찮으면... 사실 그래도 난 괜찮아. 그리고 사실 난 엄밀히 말하면 남자도 아니야. 난 남자들 싫어" "그럼 뭔데? 막 성소수자 그런거야?" "아니 그런건 아니고 난 [슈퍼짱짱남자]"야 어이없어하면서도 재밌어하더라구요. 사실 그때 나는 농담을 한게 아니지만... 난 야차야 저 개들하고 달라, 난 저 개들을 잡아먹을거야. 여튼 그래서 이후로도 우린 쿨하게 지낼 수 있었어요. 메르스 갤러리 사태가 터지고 메갈리아 워마드가 생기면서 가끔 그 토픽과 관련되어 서로의 말에 심하게 거부감을 느낄때도 있었지만, 너무 심하게 의견이 대립하는 부분은 서로 자제하고, 아주 심하지 않은 의견 대립은 걍 적당히 뭉개서 넘기는 식으로 현명하게 잘 넘겼죠. 가끔 카톡으로 연애 관련해서 조언도 받고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분기마다 한번 정도는 얼굴도 보고 그랬어요. 그런데 제가 또 작년에 아프면서 또 잠수를 타게 됐어요. ㅋㅋㅋㅋ 그래서 이번달에 또 1년 반의 공백을 두고 오랜만에 다시 만났어요. 만나자마자 뭐 어디가 얼마나 아팠길래 잠수를 타냐 무슨 사람이 잠수가 특기냐 하는 매번 사람들한테 듣는 핀잔을 한참 듣고, 요새 친구 하는일은 어떤지, 당직 때문에 힘들진 않은지 뭐 이런 얘길 주고 받는데 뭐랄까 우리가 만날때마다 페미니즘 관련 얘기를 하는건 아니었지만 이번엔 친구가 노골적으로 그 토픽에 대해 좀 피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반가운 마음에 괜히 얘길 꺼내기 싫다 이런게 아닌... 그래서 돌직구로 물어봤어요. "너 이번에 82년생 김지영 개봉하는데 그거 볼거야? 나랑 보러갈래?" 근데 돌아온 대답이 글쎄 "아니 난 이젠 그런거 관심없어, 좀 별로야." 더라구요. 대답을 듣자마자 마음이 너무 아파왔어요. 왜냐면, 아무리봐도 친구의 태도가 예전만큼 다시 밝아지진 않았거든요. 여전히 사회와 인간관계가 준 피로와 상처가 누적되어 있는거 같이 고단해 보이는 모습 그대로인데, 이제 페미니즘에 마저 손을 뗐다는 말을 들으니, 전여친이 같은 환경에서 비슷한 얘길 했던 건도 있고 해서 이유가 짐작이 가는거에요. 그래도 살만큼 살았다 볼 수 있는 20살에도 그 누구보다도 순수하게 인류애를 믿었던 내 친구는 나쁜 남자들과 동조하는 사회에 배신을 당해 페미니스트가 되더니 나쁜 여자들과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폐쇄적 환경에 또 한번 배신당해서 빛나던 인류애를 모두 잃었어요 야이 개 자식들아의 19금 버전으로 욕설이 나오려고 하는것을 참았어요. 안 그래도 얼마 없는 인류애가 더 없어질까봐. 참고 간신히 원래 내 캐릭터를 붙잡고 말했어요 "그래? 그럼 됐고, 근데 나랑 영화보기 싫어서 관심 없어진척 하는건 아니지?" "그것도 좀 있구..." 아 그래... 어제 동생이랑 같이 동네에서 잠깐 만났는데, 얘길 들어보니 여전히 결혼은 모르겠지만 연애는 이제 다시 하고 싶대요. 내 착한 친구가 부디 이번엔 멀쩡한, 잃은 사랑을 많이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요.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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