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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12/01 12:36:34
Name   Jace.WoM
Subject   빼빼로 배달부


11월 10일 오전 교실 - 빼빼로데이 이브


내 절친한 여사친 예지는 인기가 많다. 곱상한 얼굴, 지적인 패션, 그리고 그에 어울리지 않는 털털하고 호방한 성격까지. 중학교 3년동안 알려진 고백받은 횟수만 5번이 넘어갔고, 아마도 몰래 고백했다 차인 애들을 포함하면 두자리 수는 족히 넘었을것이다.

빼빼로 데이 이브, 편의점과 마트들이 휘향찬란한 장식물까지 동원해서 한철 장사에 열 올리는 시기. 한창 이성에게 달아오를 나이에 남녀공학, 약간의 성적 긴장감을 동반한 전운이 감돌고 있는 우리반 그 중심에도 역시 예지가 있었다.

당시 나는 남녀상열지사에 관심이 없는 척을 하던 중2병 말기였기에 그 분위기가 매우 불편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1등 관객석에서 그 분위기를 양껏 즐기고 있었다. 누가 누구 준다더라, 난 누구 줄거야. 이런 친구들의 얘기를 들으며 적절한 리액션으로 그들이 더 말하고, 더 실행하도록 부추겼다. 오직 내 재미를 위해.

11월 10일 저녁 백화점 - 빼빼로 하나에 7만원을 태워?

집에와서 퍼져 누워 친한 애들한테 돌릴 빼빼로 정도는 사러 나가야 하나 하고 생각하며 뒹굴뒹굴 거리고 있는 내게, 친구 정석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준영아 뭐하냐 오늘 저녁에 약속 없지?"
"없는데 왜? 뭐하게? 노래방갈라고?"
"아니 당연히 빼빼로 사러 가야지. 일정없으면 나랑같이 현대백화점 지하나 가자"

정석이가 평소 예지랑 친하고, 관심이 있다는 티가 풀풀 나는 행동을 잔뜩 하고 있었던것이 생각나 되물었다. 너 혹시?

"그래 엉아가 오늘을 위해 용돈을 7만원 모았다. 나 그걸로 예지 줄 빼빼로 살거야"

빼빼로 하나에 7만원을 태워? 역시 정석이는 진짜 싸나이야. 배포부터가 다른 그의 용기에 감복해 바로 백화점으로 달려나갔다. 오늘따라 정석이는 괜히 평소보다 키도 커보이고 얼굴도 잘생겨보였다. 호르몬 덕분인가.

우린 바로 결전의 준비를 위해 서점으로 이동했다. 휘향찬란한 빼빼로들이 천지에 깔려 있는 약속의 장소에 도착하니 정석이가 내게 말해온다.

"자, 이제 얼른 돌아다니면서 빼빼로 골라줘"
"뭔 소리야, 니가 힘들게 모아서 사는건데 니가 골라야지"
"아니지, 받는 사람이 좋아하는게 중요하지. 나보다 니가 예지랑 친하잖아. 니 안목을 믿는다 나는"

아니 아무리 그래도 7만원 짜리 빼빼로를 남한테 맡긴다고? 뭐 내가 예지랑 친하기도 하고, 걔 취향도 대충 알고, 이쪽으로 감각도 있는편이긴 하니까. 친구의 성공을 위해 이 정도 노력은 해줄 수 있지. 그렇게 한시간쯤 돌아다니며 모든 빼빼로를 다 하나 하나 눈으로 직접 보고 검수한 내 최종적인 선택은 다음과 같았다.

최대한 안 튀면서도 (그래도 튐) 이쁜 빼빼로 바구니 55,000원
예지가 평소 자주 사는 브랜드의 가방고리 10,000원
장식용 빼빼로 꽃 1송이 3,000원

그 외 애들 줄 우정 빼빼로도 몇개 고르고 목적을 달성한 우리는 해산하기로 했다. 그때 정석이가 말하길

"야, 진짜 하나만 더 부탁할게, 미안한데 그 빼빼로 니가 들고가주면 안되냐? 내가 내일 아침에 찾으러 갈게, 나 집이 좀 멀잖아. 우리집서부터 가져가긴 좀 힘들거 같아"

확실히 정석이네 집은 학교에서 걸어서 1시간은 걸린다. 아침 학교 문 열자마자가서 자리에 두고 고백은 따로 할거라고 했으니, 버스도 다니기 전부터 나와야 되는데, 1시간동안 저걸 들고 학교에 오는건 무리겠지, 반면 우리집은 현관만 나가면 학교까지 10분 거리, 친구의 용기를 생각하면 못 들어줄 제안은 아니었다.

"그래 임마, 친구 좋은게 뭐냐, 걱정말고 들어가, 낼 아침에 보자."

그렇게 7만원 상당의 빼빼로를 들고 집에 가는 길. 나는 정석이가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말도 안되게 큰 빼빼로를 들고 낑낑대며 버스에 올라가는 나를 사람들이 대놓고 쳐다보는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거 제꺼 아니에요. 친구 꺼에요. 그렇게 항변할수도 없고,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그냥 그 시선을 즐겼다. 맞아. 나 사랑꾼이야.

11월 11일 아침 집 - 늦잠

다음날 아침, 정석이와 함꼐 일찍 등교하기 위해 나는 평소보다 1시간 일찍 일어나서 학교 갈 준비를 마쳤다. 내 우정빼빼로를 쇼핑백에 담고, 크고 아름다운 정석이의 빼빼로 바구니를 현관에 갖다 놓고 친구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런데 6시까지도 연락이 오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도 없다. 학교가 열자마자 바로 들어가려면 최소한 6시 20분에는 출발해야 하는데, 정석이가 집에서 아직 자고 있다면 이미 골든타임은 지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조금 더 기다려봤지만 역시나였다. 이 새끼 쳐자는구나. 7만원 짜리 빼빼로를 준비해놓고 그 당일날 늦잠이라니, 상남자도 이런 상남자가 없다.

그냥 집에 놓고 가려고 생각하니 어제의 그 설레던 정석이의 모습이 눈 앞에 자꾸 아른아른 거린다. 하, 그래. 모든것은 다 친구를 위해, 의리있는 남자가 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그렇게 나는 6시 20분에 7만원짜리 뺴빼로님을 다시 모시고 집에서 학교로 출발했다.

당시 유행하던 인터넷소설등의 전개라면 여기서 마침 반 애한테 걸리고, 내가 빼빼로를 준다는 소문이 나고, 삼각관계가 시작되어 우정에 금이 간다.뭐 이런 전개가 기다렸겠지만, 다행히도 현실에서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1등으로 교문을 통과해 반에 들어가 예지의 자리에 빼빼로를 갖다 놓는데 성공했다. 갖다놓고 다시 나와 학교 앞 아파트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보니 정석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안해, 내 빼빼로 어떻게 됐어? 짜식아 형이 이미 갖다놨다. 형제란 이런거야. 영웅본색의 송자호라도 된 듯 자렁스럽게 떠벌리는 나를 정석이는 온갖 미사여구를 다해 추켜세워줬다. 좋아. 더 해봐. 더!

11월 11일 오후 - 빼빼로데이

그 날 우리반은 당연히 난리가 났다. 누가 갖다놓은거야. 와 미쳤다 진짜 대박이다 말도 안된다 등등... 내가 준건 아니지만 왠지모르게 괜히 내 코끝이 찡해졌다. 이게 바로 그 '기른정'이구나 싶었다.

예지는 그 바구니를 제외하고도 정말 많은 빼빼로를 받았다. 책상 옆에 내려놓은것도 한다발이고, 3시쯤 슬쩍 사물함을 열어보니 그 안도 빼뺴로로 가득차 있더라. 다른반 애들도 정말 많이 왔다.

받은만큼은 아니지만 예지 자신도 꽤 많은 우정빼빼로를 사와서 돌렸다. 심플하게 딱 두 종류를 사와서 친한 애들한테는 남녀 할거 없이 한개짜리 큰 빼빼로를 주고, 별로 안 친한 애들에게는 그냥 1000원짜리 롯데 빼빼로를 사와서 돌렸다. 나도 사온 빼빼로 하나를 주고 한개짜리 큰 빼빼로 하나를 받아왔다.

전체적으로 우리반은 내 기대와 달리 남녀할거 없이 그냥 많이 사와서 잔뜩 나눠먹는 분위기가 되었다. 아쉽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것도 그것대로 재밌었기에 나름 만족했다. 

11월 11일 방과후 교실 - 슬픈 예감

집에가기 전 예지한테 문자가 왔다.

"준영아 뭐하냐 오늘 학교 끝나고 약속 없지?"
"없는데 왜? 뭐하게? 노래방갈라고?"
"아니, 중요한 얘기 할게 있어서 그래, CA 끝나구 나한테 좀 와봐"

기시감이 느껴지는 대화인데,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 CA가 끝나고, 우리반 교실로 가니 모르는 애들 사이에 예지가 자기 자리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는게 보였다. 그리고 슬픈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다고 했던가, 나가가서 말을 거니 예지는 수줍게 웃으며 내게 무언가를 내민다.

바로 어제 내가 골라서, 내가 집에 들고가서, 내가 학교로 가져온 바로 그 빼빼로다.

"나 오늘 빼뺴로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데, 집에 같이 들고가줘"

아, 
걍 제발 둘이 그냥 만나라 사고방식도 똑같은데 
이 개같은 자식들아

11월 11일 저녁 귀가길 - 뺴빼로 배달부

처음엔 성질이 났지만 막상 빼빼로를 들고 집에 가다보니 예지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봉지 하나 + 쇼핑백 하나 꽉차게 + 4만 5천원 짜리 바구니라니. 연예인도 아니고 말이지.

아, 그리고 정석이에게 미안하지만, 그의 마음은 받아들여지지 않을거라는 확신도 했다. 왜냐면 그 바구니를 내가 들고 가고 있었으니까. 대충 누가 보낸지 다 알텐데, 마음을 받아줄 생각이었다면 나한테 쇼핑백을 들게 하고 이걸 본인이 들고 갔을테니까.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예지의 집 근처까지 왔다. 여기까지면 됐으니 이제 달라는 말에 바구니를 들어 예지에게 내미는데, 웃음이 나온다.

내가 고른 이 빼빼로 바구니.
백화점에서 내가 집까지 가져와서 
노 내가 집에서 학교로 가져왔다가
결국 학교에서 예지 집까지도 내가 가져오는구나

무슨 빼빼로 배달부 같네, 하고 속으로 생각하니 슬쩍 웃음이 나온다.
실 없이 왜 웃냐고 물어보는 예지에게 부러워서 그런다 이 기집애야 라고 대답해줬다.

"야, 힘들게 들고왔는데 뭐 없냐? 노래방이라도 쏘냐?"
"뭐 얼마나 왔다고 그래, 됐고, 빼빼로나 하나 줄게"
"야 아무리 그래도 남한테 받은걸 또 주는게 어딨어 준 사람 성의가 있지"
"뭐래, 아까 내가 학교에서 돌린거 남은거야. 미쳤냐 나도 최소한의 도리가 있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한개자리 큰 빼빼로 하나를 꺼내서 내민다

"야, 사람 그렇게 부려먹고 씨 어린 나이에 벌써 양아치같이 장사 잘하네, 나 간다"


* 에필로그

집에 오는 길에 허기가 져서 예지가 준 빼빼로를 한참 쳐다보다가 가방을 열어 아까 학교에서 받은 빼빼로를 꺼냈다.
역시나 또 한번 느낌이 맞았다. 방금전에 받은게 좀 더 크고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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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 : 팩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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