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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9/15 05:37:47
Name   王天君
File #1   antman.jpg (60.2 KB), Download : 2
Subject   [스포] 앤트맨 보고 왔습니다.


중년의 신사가 쉴드 본부에 들어서자마자 거칠게 화를 냅니다. 자신의 허락 없이 연구물을 빼돌리려 했다며 죽은 아내를 들먹이는 중역에게 세게 한 방 먹이더니 쉴드를 탈퇴해버리죠. 시간이 흐른 현대, 미국 어느 교도소에서는 거친 환송회를 마친 한 아저씨가 막 교도소를 나와 다시 일상으로 복귀합니다. 이제 새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간신히 얻은 직장은 가공할만한 뒷조사 끝에 전과자 기록이 들통나, 딸의 생일에는 변변한 선물도 못 주고 새 아빠에게 양육비 독촉만 당해, 상황이 이러니 교도소 동창인 룸메이트의 제안을 차마 흘려버리기 힘듭니다. 어쩔 수 없이 한건만 하기로 한 그는 왕년의 솜씨를 다시 살리기로 합니다. 어느 부잣집의 엄중한 경비를 뚫고 마침내 잠입에 성공하지만 거기에는 현금과 귀금속 대신 묘하게 생긴 슈트 한벌만이 있을 뿐이었죠. 그리고 다른 곳에서 이 모든 상황을 티비 화면으로 지켜보는 노년의 남자가 있었습니다. 1대 앤트맨이었던 행크 핌은 아직 정신은 못차렸지만 솜씨 하나는 나쁘지 않은 좀도둑 스콧 랭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확인합니다.

마블에서 또 다른 히어로가 나온다고 했을 때 큰 기대를 하진 않았습니다. 히어로물에는 능력을 얻고, 결국 권선징악과 세계평화로 이어지는 공식의 제약이 뒤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어떤 자연 현상을 뒤트는 능력이건, 어떤 무기를 사용하건, 그 인물 자체가 어떤 역사와 성격을 가지건 간에 히어로들 사이에서 유의미한 차별점을 끄집어내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엑스맨 시리즈 하나로도 이미 히어로들이 범람하고 있는 시대니까요. 거기다가 마블은 가디언즈 오브 갤러시를 통해 세계관을 우주까지 확장했고, 어벤져스 2를 통해 올스타전의 매력과 규모의 위력을 뽐낸 바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앤트맨이라는 낯선 히어로가 신체를 축소시킬 수 있다 한들 이게 어떤 재미가 있을까 싶었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앤트맨은 그런 의심을 납작하게 만들어버릴 만큼 잘 빠진 작품입니다. 사실 제가 마블의 역량을 높이 평가했던 이유는 캡틴 아메리카: 윈터솔져의 존재 때문이었는데, 다른 작품들과 어벤져스 2를 보면서 이게 많은 작품들 사이에서 얻어걸렸던 우연은 아니었는지, 루소 형제의 개인적인 결과물이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앤트맨을 보니 제작사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 앤트맨은 마블사가 축적해온 노하우와 제작능력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생소한 히어로를 어떻게 소개하고 재주를 부리게 할 지 캐릭터의 특성에 맞춰 최적의 이야기를 뽑아냈기 때문이지요.

일단 개별시리즈 최초의 작품인만큼 앤트맨은 할 이야기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행크 핌, 스콧 랭, 호프 반 다인 등 각 인물의 캐릭터와 사연을 어떻게 납득시킬 것인지, 히어로의 능력은 무엇이며 거기에 어떻게 적응해나가는지, 아버지와 딸이라는 중심 드라마는 어떻게 풀어갈 지, MCU에 앤트맨이라는 히어로를 어떻게 편입시킬지, 직면한 과제가 한 둘이 아니었죠. 그런데 앤트맨은 이걸 자연스럽게 펼쳐놓습니다. 성공적이었던 마블의 전작들의 장점들만을 참고한 부분들이 눈에 띄는데, 앤트맨이 훈련을 통해 슈트에 적응하는 모습은 아이언맨1에서 토니가 마크 시리즈에 적응하는 모습을, 행크 핌의 고집은 캡틴 아메리카를 연상시킵니다. 또한 마블의 전작들은 클라이맥스 전까지를 주인공의 성장이나 장비를 준비시키는 이야기로 메꿨습니다. 본격적인 퍼포먼스가 펼쳐지기 전까지 준비운동을 시키고 현란한 말빨로 기대감을 고조시키는 일종의 차력쇼 같았죠. 그에 반해 앤트맨은 적을 만나는 과정 자체를 하이스트 장르 공식으로 채워놓았습니다. 어떻게 앤트맨의 능력을 발휘해서 개미들과 함께 침투할 것인지, 기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마블의 이번 작품은 훨씬 세련되고 다채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앤트맨의 커다란 강점 중 하나는 유머입니다. 심지어 마블 작품 중 가장 웃겼다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보다도 더 웃깁니다. (사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웃기기보다는 유쾌한 분위기 조성이 그 의도처럼 느껴졌어요) 역대 마블 작품 중 유머의 스트라이크 존이 가장 넓고 적중률 또한 높습니다. 이런 유머들이 짧은 호흡의 단타로 시종일관 치고 들어옵니다.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설명해야 하는 지루한 부분을 유머가 메꿔주는 것은 물론이고, 가장 진지한 부녀 관계의 드라마나 주적인 옐로우재킷과 싸울 때조차도 유머가 튀어나오지만 그게 거슬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나오면서 앤트맨이라는 히어로와 영화 자체의 개성이 됩니다. 한편으로는 진지한 드라마 강박증이나 시덥지 않은 유머를 슬쩍 끼워넣고 잰체 하는 마블의 다른 영화들을 놀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또 다른 강점은 앤트맨이 줄어든 이후 현미경 시야로 바라보는 세계입니다. 아이가 줄었어요 류의 어드벤쳐가 어느 정도 익숙한 장르공식이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설정은 영리하다 할 수 있는데, 히어로물이 넘어야 하는 여러 장애물을 저절로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전지구적 위기나 거대한 규모의 위험을 끌어올 필요도 없고, 앨리스 인 원더랜드처럼 익숙하던 일상 자체가 환상적인 공간으로 기능하게 되니까요. 앤트맨의 핵심은 늘었다 줄었다 하며 선보이는 액션뿐 아니라 줄어든 이후 작은 세계가 거대하게 펼쳐지는 관찰에서도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공 청소기로부터 달아나야 하고, 목숨이 오가는 와중에도 서류 가방 안에서 필기구와 엉키고, 토마스 기차의 위협에 두려워하는 귀여움이 앤트맨만의 개성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앤트맨은 다른 히어로물에 없는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습니다. 스콧이 원자화해서 미립자의 세계까지 나아가는 장면은 히어로물의 틀을 벗어나 다른 모든 SF의 비쥬얼과 사유에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경외감마저 들게 합니다.

이 작품이 그렇게까지 커다란 감동을 안긴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오밀조밀 박혀 있는 유머와 촘촘하게 짜여진 이야기 구조를 보면 앤트맨은 공산품으로서 히어로물이 보여줄 수 있는 한계점에 거의 도달한 작품입니다. 파격 없이도 자잘한 아이디어들을 어떻게 어디에 배치하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흠없는 상업영화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은 꽤나 충격적입니다. 앤트맨은 마블이란 제작사, 그리고 헐리우드란 영화 시장이 얼마나 치열하고 창의적으로 영화를 만드는지를 증명하는 하나의 샘플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오색빛깔 귀여운 디자인의 팝콘이 물리지 않는 맛으로 재미에 대한 허기를 채워줄 수 있다면, 팝콘 무비란 단어는 생각 없는 오락영화와 동의어가 될 수 있을지 좀 고민이 되는군요.

@ 앤트맨의 핵심 기술은 질량 보존의 법칙일텐데 이게 모순을 일으키는 장면들이 좀 거슬리네요. 80kg의 성인을 어떻게 자그만 개미들이 업고 다니는지, 몇톤이 나가는 탱크는 어떻게 열쇠고리로 만들어서 들고 다니는지…

@ 로버트 레드포드에 이어 마이클 더글라스가. 이런 배우들만이 채워줄 수 있는 순간을 발견하는 것도 꽤나 즐거운 경험입니다.

@ 페기 카터!!! 나이든 여자 캐릭터가 최루용이 아닌 역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도 의미가 있네요.

@ 왜 하워드 스타크의 묘사가 자꾸 와리가리 하는 걸까요. 윈터 솔져에서는 죽은 당시의 사진이 배우 도미닉 쿠퍼의 사진으로 나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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