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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23 18:55:09
Name   에피타
File #1   1e7095d0_fa1a_11ea_b9d2_dbc3a5363dce_800_420.jpeg (37.3 KB), Download : 5
Link #1   https://www.nytimes.com/2020/09/21/magazine/ginsburg-successor-obama.html
Link #2   https://www.nytimes.com/2020/09/20/us/politics/supreme-court-barrett.html?searchResultPosition=1
Subject   나는 대체가능한 존재인가


에이미 코니 바렛(Amy Coney Barrett) /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2015년 여름, 서울에서 인턴할 때 마침 지난 금요일에 작고한 미국 긴즈버그 대법관이 한국에 왔었어요. 미국 대사관을 통해 몇몇에게만 조용히 전달된 것이 있는데 긴즈버그 대법관이 한국 대학생들과 만나는 일정이 있었습니다. 다만 참가자격이 현재 재학중인 한국 대학생이거나 미국 시민권자만 가능하다고 해서 다른 인턴들은 참가하는데 전 사무실을 지켰던 기억이 납니다. 긴즈버그 대법관을 직접 볼 수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글이 훨씬 생생해질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그 자리에 참가한 친구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긴즈버그 대법관은 생각보다 정정하고 에너지 넘치는 분이라고 하더라구요. 인턴 친구들이 말도 잘하고 그런 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친구들이라 질문 받는 자리에서 한 마디 정도는 했을 줄 알았는데 긴즈버그 대법관의 위엄에 압도 당해 질문을 하는게 어려울 정도였다고 하더라구요.

향년 87세로 지난 금요일에 작고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전 미국 대법관은 여성, 성 소수자와 관련한 진보적인 판결로 유명한 법조계 미국 여성운동의 역사적 거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제 오늘, 긴즈버그와 그 후임으로 현재 유력한 연방 상소법원 판사 에이미 코니 바렛(Amy Coney Barrett)에 대한 기사를 보며 과연 긴즈버그 같은 역사적 거인이 대체불가능한 인물인가, 여성권리신장이 마치 발전방향이 정해진 일직선상의 운동이라면 여성의 낙태를 다시 제한하는 움직임은 역사, 진보의 후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읽은 기사들을 간단히 설명하면 긴즈버그는 2006년, 다른 여성 대법관 산드라 데이 오 코넬이 사임한 후로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때마다 자신의 성 전체을 위한 답을 찾았다고 합니다. 긴즈버그도 그것이 진실이 아닐 수 있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 하네요. 긴즈버그는 1999년 대장암, 2009년 췌장암을 수술까지 받고 건강이 계속 좋지 않아서 오바마 재임시절 사임하는게 본인이나 후임자 임명을 위해 좋지 않나 하는 전망이 있었습니다. 미국 대법관은 한 번 임명되면 종신직이고 사망 또는 사임으로 공석이 생기면 미국 대통령이 지명권을 가지는데 긴즈버그는 끝까지 직을 고수하다 결국 트럼프 재임기간에 사망하여 그 후임자를 현직 대통령인 트럼프가 지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트럼프가 자기 후임자를 지명하는 걸 누구보다 원하지 않았을텐데 말이에요. 긴즈버그의 인터뷰, 여러 번의 수술을 거치면서도 사임하지 않는 모습을 봤을 때 전 그가 정말 자신의 신념에 대해 강한 자부심이 있고 자신이 '대체불가'한 존재라고 생각했을 거 같아요. 오로지 나 만이 여성인권을 위해 더욱 노력할 수 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 이런 느낌? 긴즈버그의 그런 마음가짐을 완전히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사실 여성 대법관이 여럿 있었지만 그만큼 여성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전향적인 대법관이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끝까지 대법관 직을 놓지 않았던 마음도 어느 정도는 헤아릴 수 있겠네요.

그런데 현재 후임으로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는 에이미 코니 바렛은 공화당인 트럼프 측 후보자로 이야기되니 엄청 보수적일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다른 후보자들에 비해서는 비교적으로 온건한 편이라고 합니다. 법률적으로는 '근원주의자(originalist, 헌법을 입법할 당시의 의도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라는 평을 듣구요. 다만 오바마케어로 유명한 건강보험시스템이나 여성의 낙태에 대해서는 최근의 진보적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평가받습니다. 특히 낙태에 관해서는 낙태를 반대하는 카톨릭 모임의 회원일 정도로 완고한 입장인데 자녀 7명 중 2명은 아이티에서 입양했고 한 명은 임신 중 검사로 아이가 다운증후군 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출산해서 양육하고 있어요. 그래서 여성의 권익을 위한 낙태찬성론자들의 공격이 어렵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그대로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사실 그 신념에 대한 논리적인 타당성을 부여해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정말 그 사람의 신념이 강하다, 특히 바렛과 같은 예에서는 낙태 반대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가치라는 점을 행동으로 증명할 뿐이죠. 그로 인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건 덤이구요. 물론 장애가 있는 아이를 충분히 양육할 수 있는 바렛의 경제적 풍요로움 바탕이 되는 건 사실이겠지만 장애, 특히 다운증후군이 있는 자녀를 돌본다는 것은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는 저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고난일 것입니다. 더구나 그런 다섯 살 아이를 매일 등에 업고 자택 계단을 내려오며 아이와의 유대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법관 후보인 바렛이 낙태를 반대하는 확고한 입장이라 트럼프도 오히려 바렛의 지명이 부담되는 모습입니다. 낙태를 찬성하는, 교육수준 높고 도시에 거주하는 민주당 지지층 여성들의 반발이라면 감당 할 수 있는데, 낙태에 찬성하고 트럼프를 지지하는 교외지역의 여성들이 낙태에 대해 완강한 바넷의 지명으로 트럼프에게 등을 돌릴 수 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여성, 소수자 인권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긴즈버그의 사망과 그 후임으로 바넷이 지명된다면 여성 진보운동 역사가 후퇴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없기를 희망하지만 사실 누구나 대체가능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물론 나 만이 할 수 있는, 디테일한 면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오늘 내가 쓰러져도 내 직장에서는 적어도 몇 달안에 후임자가 들어오고 회사는 아무일 없다는 듯 돌아가겠죠. 다만 아무리 모든 사람이 대체가능하더라도 한 명에게만, 자신이 특별해지고 대체불가능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지위가 높은 긴즈버그, 또는 뛰어난 과학자들과 같은 역사적 거인들은 대체불가일까요? 만약 여성운동의 발전을 위해 긴즈버그가 꼭 필요하고, 아인슈타인이 현대에 살아있어서 장기이식 등을 통해 최소 100년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면 전 인류적 차원에서 그가 연구에 매진하도록 계속 생명연장을 해야할까요? 이제 이 정도의 질문은 공상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질문이 아닐겁니다. 아마 수 십년 내로 실제 마주하게 될 수도 있을거에요. 그렇다면 이런 역사적 거인의 수명 연장을 통해 인류는 더욱 정치적, 기술적으로 진보된 삶을 누릴 수 있을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9명 정원의 미국 대법관에 적절한 여성 대법관 수가 몇명이냐는 질문에 9명이라고 대답한 급진적 성향의 긴즈버그,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 발표 후 통일장 이론을 연구하다 수십년의 세월을 사실상 의미없이 보낸 것 처럼 새로운 이론은 새로운 세대, 새로운 생각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긴즈버그의 여성, 성소수자에 대한 급진적 성향, 아인슈타인의 천재성과 아이디어는 그 시대의 패더라임을 바꾸고 물리학의 한 장을 새로 쓰는데 효용을 다 한거에요. 긴즈버그의 영향을 받은 후세대는 그들만의 가치관과 지향점을 설정하여 계속해 나갈 것이고, 설령 아인슈타인이 옳아서 훗날 통일장 이론을 완성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세대, 새로운 아이들의 업적일 것 입니다.

사실 논리를 여기까지 전개시키면 좀 슬퍼지는 것도 사실이에요. 모든 사람이 대체될 수 있고, 대체되어야 한다면 내 삶의 존재 가치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거지. '긴즈버그'로 설명할 수 있는 여성, 낙태에 대한 자유, 성적 다양성 존중이라는 사회운동의 가치가 '바넷'으로 설명할 수 있는 종교적, 낙태에 대해 보다 엄격한 가치기준으로 대체된다면 그것을 '후퇴'라고 말할 수 있나. 사회운동의 발전과정이 일직선상의 진보, 후퇴가 아니라 포도송이 같은 다양한 발전방향의 한 모습이라면 그 신념에 일생을 바치는 것이 정말 의미있는 일인가.
저도 아직 답을 찾을 순 없어요. 아마 영원히 찾지 못할지도 모르겠지요. 다만 제 바람은 내 역할도 언제나 실직, 죽음 등으로 대체될 수 있지만 내가 존재했던 세상과 그렇지 않았을 세상이 조금이라도 달랐으면 좋겠어요. 사회운동에 대한 가치판단을 당장 그 세대에서는 유보할 수 밖에 없더라도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하고 더 나은 방향을 찾아 서로 힘을 모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면 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과는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것이 제가 이런 글을 쓰고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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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춫천
  • 공정하고 따뜻한 글 감사합니다.
  • 나는 사회적으로는 대체 가능하지만, 그게 나를 규정할 수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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