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2/04/15 17:13:11
Name   化神
Subject   일상의 사소한 즐거움 : 어느 향료 연구원의 이야기 (4편)
그래서 향료 연구원이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눈치가 빠른 사람은 이전편에서 눈치 챘을 수 있다.



그림을 유심히 보면 보라색 눈금으로 표시해놓은 부분이 있는데 대부분 이 위치에서 일한다. 향료회사와 제품회사 사이에서 향료 개발과 제품 개발에 개입한다. 그렇지만 제품 회사마다 향료 연구원들의 역할이나 기능이 조금씩은 다르다. 향료 연구원은 크게 3가지 모습으로 근무한다.

1. 향료의 개발은 전적으로 향료 회사에서 진행하고 제품 회사의 개발자나 마케터가 이를 채택하는 경우

향료 회사는 제품 회사에 자신들의 상품(=향료)를 판매하기 위해 영업 활동을 한다. 컨셉을 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종류의 향료들을 제시하는데 제품 담당자들이 이를 보고 결정하는 경우, 향료와 제품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확인하지는 않고 넘어가는 편이다. 부향률(dosage)을 정할 때에도 향료 회사에서 제시하는 부향률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다. 이러한 경우에는 실상 향료 연구원이 하는 역할은 없다. 커뮤니케이션 과정은 '조향사 - 향료 회사 영업 담당자 - 제품 회사 마케터'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2. 제품 연구원들에게 향료를 제안만 하는 경우

1번 사례에서 한 단계 추가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품 개발에 대한 부분은 전적으로 제품 연구원에게 맡겨지고 향료 연구원은 회사 전체에서 운영하는 향료를 관리하는 역할만 하는 경우이다. 제품 연구원이 향료 연구원에게 "~컨셉 향 있으면 주세요." 라고 하면 향료 연구원은 그에 맞는 향료를 주고 써보라고 하는 식이다. 제품의 부향률을 정하는 것은 제품 연구원의 몫이다.  이러한 형태의 향료 연구원이 필요한 이유는 개별 연구원들에게 향료를 맡길 경우 독자적으로 채택, 도입하는 향료의 숫자가 제품 컨셉과 선호에 따라 무제한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 경우 향료 연구원은 향료 라이브러리에 있는 향료를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마치 도서관 사서와 같다고 볼 수 있다.

3. 제품에 적용하는 향료의 개발 및 제품화에 관여하는 경우

가장 많은 역할을 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제품 컨셉에 맞는 향료 개발과 함께 향이 가장 최적의 상태로 발현될 수 있도록 제품화하는 과정까지 담당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의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

 1) 제품 컨셉에 맞는 향 개발한다.

향은 인간의 감성에 작용한다. 인간의 감성은 개인의 선호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맥락에 의한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 실체를 명확하게 인식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감성에 기반한 판단, 의사결정에는 강력하게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향이 제품의 컨셉에 부합하는지 여부는 제품을 접하는 소비자가 이 제품의 컨셉을 얼마나 빠르게 인식하는지와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가령 여름에 어울리는 가볍고 산뜻한 향기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시트러스(citrus)가 기본적으로 활용될 것이다. 어쩌면 울창한 숲속 느낌을 주는 파인(pine) 노트나 허브(herb, herbal) 노트도 괜찮다. 하지만 머스크(musk)는 여름과는 거리가 멀다. 바닐라(vanilla)를 포함한 구르망(gourmand) 노트나 우디(woody) 노트도 여름에 쓰기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 이러한 노트들은 여름보다는 겨울에 어울리는 포근하고 따뜻한 향들이다.

젊고 통통 튀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딸기나 체리같으 과일(프루티, fruity) 향을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중년의 여성이 이러한 향이 들어간 제품을 사용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소비자들은 많은 경우에 꽃 향기(플로랄, floral)을 고급스럽게 느낄 것이다. 반대로 10대, 20대 소비자에게 진한 플로랄 향의 제품은 그렇게 매력적인 제품이 아닐 수 있고, 사용하더라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실제 나이보다 더 어른스럽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 수 있다.

향수같은 파인 프레이그런스(Fine Fragrance) 제품 뿐만 아니라 다른 생활용품들에서도 향은 오랜 기간동안 정립되어온 고착화된 이미지가 있다. 예를 들어 주방용 세제나 욕실 세정제 같은 제품은 레몬이나 오렌지 같은 시트러스나 파인을 주로 사용한다. 이들이 깨끗하고 시원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계열의 향이 아닐 경우에는 설거지나 청소 후 깨끗한 느낌을 덜 받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주방, 세정, 청소 등의 이미지가 매우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보니 화장품에서 사용할 때에는 매우 주의해야 하는 향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화장품에 저렴한 이미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향의 방향은 제품의 컨셉에 맞아야 하며 사회, 문화적 맥락을 벗어난 새로운 향을 시도하는 것은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틀을 벗어난 새로운 시도를 성공적으로 해내는 조향사가 높은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향료 연구원들은 향의 역할과 맥락에 대해서 이해한 후 제품의 컨셉에 맞는 향을 개발한다.

이 과정에서 제품 회사의 이상적인 요구 조건들을 달성가능하도록 현실화하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이 수반된다. 모두가 좋아하고 고급스럽게 느껴야 하지만 가격은 저렴해야 한다거나, 가볍고 산뜻한 느낌을 주지만 잔향은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거나... 이러한 조건을 모두 갖춘 향이 있다면 아마도 그 향은 이 세상의 모든 향들을 제압하고 향료 시장을 독점할 것이다. 이상적인 조건들이 달성되면 이보다 더 좋을수는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달성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이상적'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러한 개발 조건을 듣게 되면 나는 마치 누군가로부터 "1,000원 줄게 빵이랑 우유 사고 500원 남겨와."같은 주문을 받는것 같다. 향료 연구원들은 이러한 모든 이상적인 주문들을 잘 갈무리해서 현실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결과물을 유도한다.

 2) 향과 제품 베이스의 적합성을 확인한다.

이전 글에서 조향사는 향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데 초점을 맞춘다고 하였다. 하지만 조향사는 제품 회사에서 만드는 베이스에 대해서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베이스를 상정하고 향료를 구성할 수 밖에 없다. 제품 회사는 항상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제품, 소비자들의 눈길을 잡아끄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베이스도 새로워질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향과 베이스 사이의 적합성도 매번 새로 확인해야한다.

우선적으로 향이 가장 잘 발현될 수 있는 최적의 부향률을 찾는다. 제품 종류마다 다르지만 부향률은 1% 정도이다. 그렇지만 모든 제품에 일괄적으로 이 1%라는 부향률을 적용할 수 없다. 향료가 어떤 물질들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따라 같은 1%의 부향률이더라도 어떤 향은 너무 강하게 느껴지고 어떤 향은 너무 약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향료는 부향률에 비례해서 향의 퍼포먼스가 좋아지지 않는다. 향의 퍼포먼스라는 것에 대해서는 정의하기 매우 어렵지만 적당히 '가장 향이 잘 느껴지는 상태'라고 해보자. 경험상 부향률이 낮으면 향이 잘 느껴지지 않다가 부향률이 높아지면서 향의 특징이 잘 발현되는데 특정 지점을 지나가게 되면 오히려 과잉상태가 되어 잘 느껴지지도 않는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다가 그 한계를 넘어서 스펀지 주변으로 물이 찰랑찰랑해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비유할 수 있다.



간단히 그림으로 나타내었는데, 향료 연구원의 과제 중 하나는 베이스에 따라 달라지는 향료의 최적 부향률을 찾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베이스와의 안정성을 확인한다. 계속해서 반복하는 이야기이지만, 향료는 여러가지 향료 물질의 혼합물이다. 그리고 제품 또한 여러가지 물질들이 혼합되고 계면활성제를 통해 형태가 안정화되어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열어본 화장품 통에서 물이 생긴다던지 하는 경우가 가장 대표적으로 안정성이 깨진 상태이다. 최소 수십에서 수백가지 화학물질들이 섞여있는 상태에서 시간이 지나게 되면 내부에서 화학 반응이 일어날 수 있고 어떤 화학 반응은 제품의 물리적 특성을 달라지게 만들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바닐라 향을 표현하기 위해 대표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에틸 바닐린(Ethyl Vanillin)은 제품 내 킬레이팅 에이전트(Chelating agent)와 만나게 되면 붉은 색으로 변한다. 이처럼 색깔이 변하는 경우는 제품의 겉면에 '시간이 지나면 색깔이 변할 수 있습니다.' 정도의 문구를 붙이는 것으로 그나마 감수할 수 있는 변화일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제품의 점성이 낮아져서 물처럼 흐른다거나 반대로 너무 굳어져서 아무리 힘을 써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경화되기도 한다. 판매중인 제품에서 이러한 상황이 발생된다면? 아마도 회사에서는 누구의 잘못인지 책임 소재를 묻겠지.

제품 판매 중에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향료 연구원은 개발 단계에서 베이스와 향료를 구성하는 물질들을 살펴보고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조치를 취한다. 컨셉에 맞는 향을 구현하기 위해 베이스를 조정하던지, 아니면 향료 물질을 일부 변경하더라도 느껴지는 향취는 같도록(최대한 유사하도록) 향료를 변경하던지 선택해야 한다.

 3) 소비자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한다.

향을 인식하는 과정은 매우 주관적이고 또 문자로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다. 같은 향을 두고서도 사람마다 좋다 나쁘다 말이 달라진다. 그리고 향을 맡아보고 제품을 사는 경우는 향수나 화장품이 아니면 거의 없다. 아마 마트에서 처음보는 섬유유연제의 냄새를 맡아보고 사겠다며 제품 포장을 뜯어본다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것이다. 물론 판촉행사 같은 경우에 향을 맡아보는 기회가 있을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제품을 사서 써보기 전에는 그 냄새가 어떤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샀는데 내가 좋아하지 않는 향이라면? 다른 무엇보다 '향 때문에 그 제품을 쓰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향료 연구원들은 최대한 자세하고 소비자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표현을 연구한다. 향이 중요한 제품들에 대해 광고, 마케팅하는 사람들은 많이 공감하겠지만 제일 어려운 부분이다.


헨켈의 '버넬' 이라는 섬유유연제 광고 문구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적당히 찾은 것으로 광고는 아님을 알아주시길 (본인이 근무 하는 회사 제품도 아니고 써본적도 없는 제품이다.)
'유러피안 가든' 에서 느껴지는 '프리미엄 꽃 향기', '생화'의 향을 블렌딩하여 '풍성해진' '고품격' 향기. 천연 아로마 에센셜 오일로 기분이 좋아지는 '상쾌함' 등의 단어를 사용하여 최대한 소비자들에게 이 향이 어떤 향인지 설명하려고 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설명을 보고도 '그래서 도대체 어떤 향이라는 거야?'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 설명을 보고 샀는데 정작 포장을 뜯어서 냄새를 맡아보니 기대했던 향과 달라서 실망할 수도 있다.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소비자들에게 제품이 가진 향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도록 문장을 고민하는 것들도 향료 연구원이 하는 일 중 하나이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2-04-26 10:48)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2
  • 이렇게 지식이 늘었읍니다.
  • : )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16 기타비 내리는 진창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걷는 자. 8 심해냉장고 24/10/30 724 20
1415 기타명태균 요약.txt (깁니다) 21 매뉴물있뉴 24/10/28 1501 18
1414 기타트라우마여, 안녕 7 골든햄스 24/10/21 875 36
1413 기타뭐야, 소설이란 이렇게 자유롭고 좋은 거였나 14 심해냉장고 24/10/20 1456 40
1412 기타"트렌드코리아" 시리즈는 어쩌다 트렌드를 놓치게 됐을까? 28 삼유인생 24/10/15 1743 16
1411 기타『채식주의자』 - 물결에 올라타서 8 meson 24/10/12 876 16
1410 요리/음식팥양갱 만드는 이야기 20 나루 24/09/28 1186 20
1409 문화/예술2024 걸그룹 4/6 5 헬리제의우울 24/09/02 2041 13
1408 일상/생각충동적 강아지 입양과 그 뒤에 대하여 4 골든햄스 24/08/31 1371 15
1407 기타'수험법학' 공부방법론(1) - 실무와 학문의 차이 13 김비버 24/08/13 1992 13
1406 일상/생각통닭마을 10 골든햄스 24/08/02 1944 31
1405 일상/생각머리에 새똥을 맞아가지고. 12 집에 가는 제로스 24/08/02 1558 35
1404 문화/예술[영상]"만화주제가"의 사람들 - 1. "천연색" 시절의 전설들 5 허락해주세요 24/07/24 1410 7
1403 문학[눈마새] 나가 사회가 위기를 억제해 온 방법 10 meson 24/07/14 1880 12
1402 문화/예술2024 걸그룹 3/6 16 헬리제의우울 24/07/14 1634 13
1401 음악KISS OF LIFE 'Sticky' MV 분석 & 리뷰 16 메존일각 24/07/02 1515 8
1400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3) 26 삼유인생 24/06/19 2736 35
1399 기타 6 하얀 24/06/13 1832 28
1398 정치/사회낙관하기는 어렵지만, 비관적 시나리오보다는 낫게 흘러가는 한국 사회 14 카르스 24/06/03 3049 11
1397 기타트라우마와의 공존 9 골든햄스 24/05/31 1900 23
1396 정치/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2) 18 삼유인생 24/05/29 3045 29
1395 정치/사회한국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1) 8 삼유인생 24/05/20 2622 29
1394 일상/생각삽자루를 추모하며 4 danielbard 24/05/13 2021 29
1393 문화/예술2024 걸그룹 2/6 24 헬리제의우울 24/05/05 2110 16
1392 정치/사회취소소송에서의 원고적격의 개념과 시사점 등 9 김비버 24/05/02 2196 7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