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3/09/30 12:43:56
Name   심해냉장고
File #1   F7MxsduaYAA3PLq.jpg (177.1 KB), Download : 8
Subject   나의 은전, 한 장.


최근 몇 년간 여러가지 일들로 고생하고 있을 때, 아니 솔직히 말하면 단 한 가지, 그러니까 돈 문제로 고생하고 있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빚 갚고 싶다. 근데 빚을 갚으면 뭐하지. 그래. 돈이 있다면 역시 물건을 사야겠지. 사고자 하는 물건들이 몇 떠올랐다. 머리 속 위시리스트를 천천히 검토해보자. 이건 굳이 필요한가? 에이, 딱히 필요하지가 않다. 이거는 너무 비싼데? 무리를 한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로군. 그리고 저것은 너무 삶에 필요한 물건이라 어떤 유쾌한 기념이 될 만한 느낌이 아니야.

그러니까, 은전 한 닢이 가지고 싶었다.

피천득 선생이 상하이에서 마주친 거지가 '그냥' 가지고 싶어했던, 분수에 맞지 않는, 쓸모가 없는, 하지만 필요하고, 예쁘고, 반짝이고, 너무 절실하게 가지고 싶은 그런 거 말이다. 일종의 현실 도피였다. 물론 눈 앞의 현실을 직시하고, 더 구체적인 계획들을 세우고 실천하는 쪽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돈이 없어 대가리가 빠갈난 상태에서는 현실 도피 정도면 안전한 선택지가 된다. 그렇지 않다가는 이상한 생각을 하며 잘못된 실수를 많이 저지르게 된다. 실제로 돈이 없던 시절 나는 꽤 많은 이상한 생각과 멍청한 짓을 저질렀고. 돈이 있었으면 안 그랬을 거 같냐고? 네. 그렇습니다. 절대로 그렇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돈이 있어도 이상한 짓을 하고, 나도 마찬가지겠지만, 저 시절의 내 문제는 결국 오직 돈이었다. 물론 돈이 없게 된 건 내 잘못인데, 이를테면 코로나 시대에 술집을 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 쪽이 좋다. 물론 술집을 십년째 하는 중에 코로나가 온 거지만. 코로나를 못 막은 게 내 잘못일 것이다 아무래도. 지난 일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 쪽이 좋다, 아무래도.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당뇨도 얻었고, 제일 친한 친구의 아버지 장례식도 못 갔고(그래서 의절당했다), 멘탈도 와장창하고, 인간관계들도 소소하게 파탄나고(뭐 돈 없는 장사꾼의 보통의 현실이다), 여러가지로 힘들었지만 사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다만 돈이 없던 게 문제였던 것처럼, 가지고 싶은 것이야 팔천개쯤 있지만 막상 '진짜로' 그냥 가지고 싶은 걸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저 은전 한 닢 정도가 남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은전 한 닢은 옛 시절 씨디 한 장이었다.

--
도테이 옴니버스 Vol 1. 1996년, 오사카 음악대학 재학생들이 자체 제작한 동인 앨범. 1000장이 발매되었고, 당시 판매가는 2000엔. 길에 깔리고 널린 아마추어 동인 앨범이다. 다만 그 시절 내가 좋아하는 가수, 그러니까 aiko 여사님이 오사카 음악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19곡의 수록곡 중에 그 분의 노래가 세 곡 들어있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발매 직후에 여사님이 메이저로 데뷔하고 이듬해 밀리언 셀러 아티스트로 등극해버리는 바람에 구하기가 매우 힘들어진 앨범이라는 문제도 있다(본인도 없다고 얼핏 들었다). 뭐 아이유의 아마추어 시절 마지막 한정판 앨범 같은 것이다(양 팬덤 모두에게 적절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역시 나는 얼핏 들은, '아이유가 20년간 꾸준히 활동한다고 해봐, 대충 그게 aiko야'라는 표현을 꽤 좋아한다. 전성기에 한 시대를 풍미하고, 후로도 꾸준한 싱어송라이터라는 점에서).
--

그렇게 '수습 가능한 선까지 대출을 줄이고 나면 나의 은전 한 닢을 구할테다' 라는 것이 삶의 작은 목표가 되었다. 뭐, 그런 현실 도피 덕에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코로나 시절에 건너건너 아는 어떤 분들은 죽었다. 뭐 또 어떤 분들은 치열함을 무기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나는 치열한 현실 도피로 살아남아 목표에 도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것이 간사해, 막상 목표에 이르고 나니 딱히 별 생각이 없어졌다. 뭐랄까 은전 한 닢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기분이랄까. 그 돈이면 차라리 좋은 술을 좀 마시거나, 여행이라도 가서 머리를 식히는 쪽이 낫겠지 싶은(저축 같은 건 선택지에 없다는 걸 글을 퇴고하며 발견했다. 돈이 없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병에서 회복된 사람이 굳이 병들었던 시절의 병든 꿈을 계속해서 찾을 필요는 없다. 아니, 필요가 없는 걸 넘어, 그러지 않는 쪽이 좋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꿈을 찾아 떠나는 게 맞을 것이다.

같은 멀쩡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병든 시절을 버티게 해 준 것에 대한 예의 같은 건 아니다. 다만 조금 뒤틀린 자기애나 집착 뭐 그런 것일 것인데, 깊게 생각하기는 귀찮다. 병이 낫지 않은 것인 지도 모르겠는데, 아무렴 어떤가. 그렇게 빚과 일들을 정리하고 짧게 여행을 다녀와 약간 멘탈을 회복했다. 그렇게 다행히 의절당한 친구와의 관계도 일단 연락은 할 정도로 회복했고, 조각난 인간관계도 모아붙이려 노력하고 있으며. 건강도 많이 나아졌고. 물론 나는 남은 인생 평생 당뇨일 것이고, 의절당했던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에 갈 수도 없겠지만.

그래, 이런저런 생각 끝에 역시 아무래도 은전 한 닢은 필요하다는 그런 결론이 나고, 그렇게 나는 은전 한 닢을 구하게 되었다.

도쿄에 사는 친구 편으로 받아, 도쿄에 놀러간 김에 직접 받았다. 몇 겹으로 둘둘 쌓인, 친구가 인수한 포장 채로 그렇게. 여행 중에는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괜히 열어봤다가 짐만 복잡해지고, 그러다 분실하거나 깨먹기라도 하면 아마 나는 울고 말 것이니까. 집으로 돌아와, 포장을 열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오래 보고 있으면 안 될 거 같은 기분이 되어 사진만 찍고 다시 둘둘 포장해두었다. 아마 상하이의 거지도 은화를 구한 후에 곁눈질로 힐끗 보고는 주머니 속 깊숙한 곳에 고이 넣어두었을 것이다. 사진은 찍지 못했겠지. 상하이의 거지에게는 스마트폰이 없었을 테니까. 나는 있는데. 그의 은전 한 닢은 그의 은전 한 닢이며 동시에 그저 수만은 은전 중의 한 닢이겠지만, 나의 은전 한 닢은 세계에 천 닢 밖에 없는 건데. 그리고 그가 구한 은전 한 닢이 조폐청에서 나온 상태 그대로 이십 몇년동안 모셔진 미개봉판도 아니었을 것이다. 히히, 내 거는 미개봉판인데. 그런데 상하이의 거지는 언제쯤 은전 한 닢을 직시할 수 있었을까나. 일단 나는 적어도 오늘 내일까지는, 싸매진 상자 속의 앨범을 정면에서 볼 수 없을 것 같다. 또 모르지, 점심을 먹고 나면 신이 난 채로 열어서 보고 있을지.

이렇게 쓰자면 뭔가 굉장히 그럴싸한 느낌이지만, 사실 이건 팬질의 어느 한 끝에 있는 아이템이자, 콜렉터들의 시작 아이템으로 여겨진다. 이제 여기부터 방향제 비즈가 들어간 지역 한정 초회한정판 앨범의 미개봉판으로 시작해, 데모 씨디, 프로모션용 구형LP 같은 '발매가가 없는 물건들'의 세계가 있으니, 콜렉터의 길을 걷자면 갈 길이 멀고 그 시작점에 있는 게 이 앨범이다만 뭐 아마 나는 거기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다. 상하이의 거지에게 굳이 금화 한 닢이 필요하지 않을 것처럼. 은화 한 닢이면 차고 넘친다. 뭐, 집도 있고 차고 있고 하면 좋겠고 대충 그럴만한 나이지만 애저녁에 망한 인생에 굳이 그런 게 꼭 필요하지도 않은 느낌이고.

그렇게 인생의 어느 한 단계가 이제 끝난 느낌이다. 뭐, 콜렉터의 길을 걷지는 않겠지만, 이제 나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은 든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도테이 옴니버스 Vol. 1의 소유자 이니까. 겸사겸사 인생에서 가장 빚이 없는 상황이기도 하고(아무래도 4년치 학자금대출 함께 세상에 던져지면 이후의 인생이 꽤 오래 힘들어진다). 인생이 조금 즐겁다. 비록 어제 라이브 투어가 끝나, 내년까지 라이브는 없고 출근은 계속되는 삶을 살아야 하겠지마는. 그래도 나는 지난 투어의 마지막 라이브를 보고 온 참이고, 도테이 옴니버스 Vol. 1을 가지고 있으니까.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10-09 20:48)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4
  • 늘 글 재밌게 읽고 갑니다
  • 여기 거지가 있어요.
  • 축하드립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08 일상/생각충동적 강아지 입양과 그 뒤에 대하여 4 골든햄스 24/08/31 1414 15
1406 일상/생각통닭마을 10 골든햄스 24/08/02 1981 31
1405 일상/생각머리에 새똥을 맞아가지고. 12 집에 가는 제로스 24/08/02 1599 35
1394 일상/생각삽자루를 추모하며 4 danielbard 24/05/13 2053 29
1391 일상/생각방문을 열자, 가족이 되었습니다 9 kaestro 24/04/29 2019 11
1390 일상/생각나는 다마고치를 가지고 욕조로 들어갔다. 12 자몽에이슬 24/04/24 2565 19
1386 일상/생각개인위키 제작기 7 와짱 24/04/17 2075 13
1381 일상/생각육아의 어려움 8 풀잎 24/04/03 1872 12
1379 일상/생각인지행동치료와 느린 자살 8 골든햄스 24/03/24 2406 9
1378 일상/생각아들이 안경을 부러뜨렸다. 8 whenyouinRome... 24/03/23 2203 28
1376 일상/생각삶의 의미를 찾는 단계를 어떻게 벗어났냐면 8 골든햄스 24/03/14 2283 19
1371 일상/생각소회와 계획 9 김비버 24/03/03 1846 20
1361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4, 完) 6 양라곱 24/01/31 3921 37
1359 일상/생각한국사회에서의 예의바름이란 18 커피를줄이자 24/01/27 7489 3
1358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3) 17 양라곱 24/01/22 7127 22
1357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2) 17 양라곱 24/01/17 6591 14
1355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1) 9 양라곱 24/01/15 3583 21
1350 일상/생각아보카도 토스트 개발한 쉐프의 죽음 10 Soporatif 23/12/31 2299 19
1347 일상/생각빙산 같은 슬픔 10 골든햄스 23/12/17 2309 37
1344 일상/생각비오는 숲의 이야기 38 하얀 23/12/14 2664 56
1342 일상/생각이글루스의 폐쇄에 대한 잡다한 말들. 10 joel 23/12/03 2663 19
1337 일상/생각적당한 계모님 이야기. 10 tannenbaum 23/10/30 2682 48
1333 일상/생각살아남기 위해 살아남는 자들과 솎아내기의 딜레마 12 골든햄스 23/10/01 3239 20
1332 일상/생각나의 은전, 한 장. 6 심해냉장고 23/09/30 2664 24
1330 일상/생각아내는 아직 아이의 이가 몇 개인 지 모른다 2 하마소 23/09/25 2691 21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