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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4/05/31 23:08:16
Name   골든햄스
Subject   트라우마와의 공존
트라우마 관련 전문가인 주디스 허먼은 집단이 단체로 트라우마를 겪은 일은 그 공동체가 서로 이해하고 지지해주며 사회에서도 영향력을 갖는 등, 조금 더 트라우마 회복에 용이한 조건이 있지만 각기 개별로 특이한 일을 겪는 가정폭력 등의 트라우마 피해자는 “거의 치료가 어렵다”고 한 바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지가 6년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가끔 걱정이 들어 확인해보는 아버지의 쇼핑 목록은 햇반, 운동기구 정도가 다입니다. 다행입니다. 예전에는 캠핑 나이프를 구매했기에 조금 긴장했습니다. 아버지는 임금체불을 하는 사장에게 부엌칼을 싸들고 간 적이 있는 사람이라서요. 그외 가스통을 공기관에 들고 가 터뜨려야 한다고 한 적도 있어 혹시 화학 용품 쪽을 사나 늘 노심초사했는데, 아버지를 벗어난 제가 나날이 건강해지는 것과 반대로 아버지는 심약해진 모양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에너지가 됐는지는 분명하죠.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걸 생각해보면, 저희 아버지가 이리도 이해하기 힘든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늘 부모는 내리사랑을 하기 마련”이라며 자부심에 찬 얼굴로 웃다가, 폭력을 일삼고, 뜬금없는 데 정의감을 불태우다가, 다시 폭력을 일삼는 지킬 앤 하이드 같던 그 모습은 이제 ‘해독 불능’이란 꼬리표를 붙여 서랍의 안 쓰는 오래된 칸 깊숙이 밀어넣는 기억이 됐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아직도 저는 종일 사람에 대한,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잃고 있고 종종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자주 무력감, 악몽,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늘 내가 이용당하고 착취당할까 무섭고, 달콤하고 좋은 말도 아버지의 ‘내리사랑 운운’이 생각 나 도무지 믿지를 못합니다. 피해자 특유의 패턴인지, 20대까진 톡식한 관계를 많이 맺었고 이기적인 사람들을 많이 만난 편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한순간이라도 날 사랑했을까? 생각해보면, 본인은 본인 딴에는 그랬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와 별개로 저를 매일 폭행하고 소리지르며 잠을 못 자게 하고 저의 물건을 찢고 버리고 인간관계에 개입하며 진로를 갖고 협박하는 것도 ‘아버지에게는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었거나.
적어도 경찰이 오면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아닌 척 사람 좋은 척 비굴하게 웃던 모습을 보면 일부 심리치료사에서 언급되듯 ‘사실은 다 알고 이용하는 가해자’였던 것 같습니다.
답은 모릅니다.
평생 알 수 없을 겁니다.
아버지조차 스스로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학대를 견디며 형성된 인격이기에 가끔은 그저 아버지가 다른 방에 누워있는 상태가, 편했단 걸, 그 상태에 결국은 끝끝내 적응해버렸었던 걸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전투적인 제 성격상 아버지의 치료에 희망을 놓지 않고 언젠가는 정신과 진료를 꼭 보게 해서 성격장애 등을 치료시킬 생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 자체를 4년간 외면하며 병을 키우다, 허리디스크 환자에게 가구를 안 옮겨준다, 쓰레기를 안 버려준다 화를 벌컥 내다 ‘내가 널 곱게 키웠지 흐흐’ 하고 웃는 모습 등에서 전 코스믹 호러를 맛봤고 잠시 절 대신해 로스쿨 내내 아버지를 담당해준 제 남자친구에게도 아버지는 그사이를 못참고 매번 수십 통의 문자와 전화로 ‘이제 보니 순둥이네 순둥이 흐흐흐흐’ 식으로 가스라이팅을 계속해서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가끔 초등학생 남자애처럼 삐진 얼굴로 눈을 안 맞추고 고개를 비뚜름하게 들 때가 있었습니다.
왜 때렸냐 왜 또 술 마셨냐 왜 또 이상한 사업을 했냐 하면
안 들리는 척, 정말 안 들어버리고 그게 이 세상에 없던 일이 된 양 저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벌벌 뛰었습니다.

그래서 전 이상하게도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 같기도 합니다. 그 어떤 패배도 자신의 슬픔도 잘못도 받아들이지 못하니까요.

한편 양지의 세상으로 나가려 노력하는 저는, 왜 남자의 발소리와 감자칩 먹는 소리 혼자 술 먹는 행동 정치적 광신 콤플렉스 등을 무서워 하는지 남들에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 평생 안고 가겠지요. 그래도 이젠 ‘이것도 삶이다’ 싶습니다. 이 탓에 사람을 잘 못 믿는 저는, 다소 표정도 까칠하고 여성스러운 상냥함이 부족한 사람으로 늘 인식되고 기억되겠지요. 거기다 대고 ‘내가 아버지에게 이십 년 바친 헌신’ 운운을 할 수는 없습니다. 남보다 겁 많고 사회생활도 이상할 정도로 나이 치고 못하고 추억도 없고 예민하고 바보 같고 가끔 급발진 해서 좀 두려운 사람.

그래도 그런 사람도 살 수 있는 거니까. 자존심 안 세우고 이젠 제 모습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가끔 운이 좋으면 이해받고 설명할 기회도 있겠죠.

아버지가 그토록 저를 매일 때리던 때. 어쩌다 아버지가 쓴 물리학 책의 서문을 읽었습니다. ‘육아로 인해 책에서 멀어져있다가 어느 날 ..’ 식으로 자신이 다시 물리로 돌아온 이야기를 적어놓은 서문에 울컥 눈물이 나 펑펑 울고 어린 맘에 꿈을 접은 아버지가 딱하다는 생각에 ‘내가 효도해야겠다’ 생각했었습니다. 9살에 절 버리고 떠난 엄마를 두고도 고급 화장품 하나 못사준다며 버스 창가에 기대 울던 순진한 딸이 저였습니다.

아버지를 포옹해주고 안아주고 같이 영화를 보러 가고, 비싼 초밥도 사드리고, “아빠는 이걸 좋아하네!” 취향을 발견해주고, “아빠 내가 존경하는 거 알지?” 해주고, 선물을 사주고, 제가 사준 옷을 아빠는 친척이 모인 자리서 자랑하고, 제 학점을, 학벌을, 성취를 또 자랑하러 다니고 .. 매일 아빠가 예전에 본 물리학 교과서를 다시 같이 공부하자고 매달리고 자존감을 채워주려고 하고 .. 정말로 전 아버지에게 무한히 사랑을 베풀려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는 아파서 누워서 오줌을 싸는 상태에서도 ‘로스쿨을 출석하라’ 는 엄명과, 아빠 친구들에 대한 저에 대한 끝없는 자랑, 나는 때려도 되고 술먹고 대학교수인 친구에게 전화한 건 혹시 실수했냐고 정신이 확 든 얼굴로 묻는 표정에 정나미가 다 떨어졌었읍니다 ..

감사한 장학회 분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나도 그런 식으로 옛날에 도움을 청하고 다닐걸. 내 사업 망한 빚도 그런 식으로 하면 장학 재단 기업이 전부 갚아줬을 수도 있는데.’ 라고 말하던, 정말 이기적인 우리 아빠. 사람 같지 않은 우리 아빠. 짐승 같이 까만 눈에, 뼈밖에 없는 마른 몸으로 끝없이 정치 음모론을 읽고 울부짖고 밤에는 술을 먹고 때리러 들어오고 …

그럼에도 그리도 날 ‘곱게 키웠다’며 나 같은 여자 만만치 않지? 하고 제 남자친구에게 전화해 이간질을 시도하며 킬킬 웃던 우리 아빠.

평생 법원에서도, 사회에서도 이해받지 못할 내 트라우마.
아무리 날 믿는 사람도 5번 이상은 이야기를 듣고 내 멀쩡한 모습을 봐야 그때서야 믿어주기 시작하는, 정말 흔치 않은 유형의 피해. 당연히 증거도 없고, 기록도 없고, 어릴 때는 사실 스마트폰도 없었지요. 겨우 있는 카메라와 노트북은 늘 전당포를 왔다갔다 했고요.

그 결과 저는 사랑이 쪼그라들었는지 남들에게 자꾸 화가 납니다. 결국, 결국은 못된 사람이 된 게 맞지요. 그래도 뭐, 어쩌겠습니까. 사람으로 태어나 자기 부모 포기하기가 그리 쉽나요 …. 괜찮아요. 몸에 새겨진 두려움이 부들부들 떨릴 때도, 억지로라도 햇빛을 받으며 생각합니다. 나는 이제 사진도 공부할 수 있고, 뭔가 하고 싶은 건 할 수 있어…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다. 만일 새 회사에 들어가 내 이런 복잡한 의사소통의 꼬인 패턴 때문에 내가 빌런이 된다 해도, 뭐 그것도 괜찮다. 어떻게든 살아야죠. 이제 끓여놓은 닭배추탕에 칼국수 사리를 넣으려고 주문했는데, 떡사리는 주문을 못했네요. 항불안제를 입에 털어넣고 또 잠에 듭니다. PTSD 관련 온갖 치료법을 앞으로 서서히 시도는 해보려고요. 전기충격, EMDR, 고압산소, 유전자 분석.

그래도 여러분 덕분에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냥, 속풀이 겸 가끔 쓰니 너무 염려해주시진 않으셔도 된답니다. 그리고 또 누가 압니까. 나중에 저 같은 가정폭력 학대 피해자가 제 글들을 읽고 희망을 품을지.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6-09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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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스로를 사랑으로 잘 키웠어요. 앞으로도 많이많이 사랑해주세요.
  • 마지막 말이 멋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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