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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1/21 00:14:56
Name   Moira
Subject   행복과 행복에 관한 생각들


2010년에 촬영된 위 TED 동영상의 강연자는 대니얼 카너먼(1934-)이라는 이스라엘 출신의 학자입니다. 영미권 저널리즘에서는 금세기 최대의 영향력을 지닌 심리학자로 간주되며, 본인은 경제학 강의는 1도 수강한 적이 없음(과외는 받았음)에도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가져가버린 무시무시한 할아버지입니다. 그를 대부님으로 모시고 있는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은 늘 비합리적인 생각을 하고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심리적 인지 편향에 사로잡힌 인간을 경제학의 기본 주체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시장과 인간의 합리성을 교리로 삼는 주류 경제학에 강력한 태클을 걸어 꽤 유의미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하는데,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됐던 <괴짜경제학> 시리즈를 읽어보면 이 분야에 대해 약간의 감을 잡을 수 있지요. 말인즉슨, 저 같은 경알못도 읽고 재미를 막 느낄 수 있는 경제학 도서라는 뜻입니다.;;

카너먼은 70년대와 80년대에 행동경제학을 개척한 후 90년대부터는 행복심리학(Hedonic Psychology)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넘어감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인간은 불쾌함을 피하고 쾌를 추구하는 행동을 하는 동물이니까요. 위 동영상은 그 '행복'을 인간이 이야기하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행복/불행을 이야기하는 자아는 둘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가 그것인데요, 경험하는 자아는 의사가 환부를 꾹꾹 누르면서 아프냐 안 아프냐를 물을 때 '아파요! 안 아파요!'로 반응할 줄 아는 자아입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때그때 쾌와 불쾌에 반응하는 것이죠. 기억하는 자아는 '여행은 어땠나요?' '요즘 잘 지내고 계신가요?' 같은 좀더 포괄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자아입니다.

경험하는 자아의 행복은 '내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가'이고, 기억하는 자아의 행복은 '내 삶을 뒤돌아보았을 때 얼마나 만족스러운가'입니다. 전자는 행복, 후자는 행복에 관한 생각입니다. 카너먼은 이 두 가지를 구분하여 행복(happiness)은 전자의 몫으로, 만족스러운 삶(well-being)은 후자의 몫으로 두자고 합니다. 실제로 이 두 자아는 너무나도 자주 혼동되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당혹스러워합니다. 부담없는 친구가 '잘 지내? 행복해?'라고 물어올 때 대부분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경험하는 자아' 상태로 ('잘 지내/별로야/그저 그래') 답하겠지만, 오랜만에 만난 옛 연인이 '너 행복해?'라고 묻는다면 어떨까요?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을 대답하는 게 맞을지, 그와 헤어진 이후로 보낸 모든 시간을 종합 판단해서 대답하는 게 맞을지, 지금 내가 느끼는 행복이나 불행은 그 지나간 시간들의 결과인 것인지 아니면 그 시간들은 마디마디 단절되어 서로 아무런 영향도 주고받지 못하는 것인지...




위 그래프는 대장내시경 검사 과정에서 두 환자가 자신이 느낀 고통을 그때그때 표시한 내역입니다. 환자 A는 10분이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고통을 겪었고, 환자 B는 20분 넘게, 수치상으로는 두 배 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검사가 끝난 뒤 고통의 총량은 어땠냐고 물어봤더니 더 많은 고통을 호소한 사람은 환자 A였습니다. 여기서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가 모순된다는 게 확실히 드러납니다. 환자들이 그때그때 경험하는 자아로서 느낀 고통은 그래프에 숨김 없이 나타나 있습니다. 반면에 기억하는 자아는 검사 전체를 하나의 스토리로 만들어서 판단합니다. 환자 A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기억에 남겼고, 환자 B는 고통스러웠지만 후반부에는 그 강도가 점점 줄어 해피엔딩으로 귀결된 검사를 기억합니다. 환자 A를 데리고 재실험을 했을 때, 즉 튜브를 넣을 때 좀더 조심스럽고 흔들림이 적도록 하면서 검사 시간을 대폭 늘리는 실험을 했을 때 환자 A는 고통의 수치적 총량이 더 늘어났음에도 훨씬 만족스러워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프게 하지 않는 의사'라는 전설 속의 존재가 어떻게 가능한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시술의 마지막 단계에 쓸데없고 덜 아픈 프로세스를 진지한 얼굴로 추가함으로써 환자로 하여금 '아, 나는 자랑스럽게도 고문을 이겨냈어...' 하는 환상을 심어줄 줄 아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카너먼에 따르면 우리는 삶을 살아갈 때(경험하는 자아), 그리고 삶에 대해 생각할 때(기억하는 자아) 서로 다른 것을 떠올립니다. 태양이 빛나는 캘리포니아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실제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 태양빛은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 둘 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억하는 자아가 대부분의 경우 최종 결정권을 가집니다. 그래서 '태양'을 이유로 캘리포니아로 이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죠. 분명히 그들은 더 행복해졌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이사의 대차대조표를 그려볼 때 그들은 예전에 살던 동네의 나쁜 날씨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자신들이 옳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니까요.

카너먼은 마지막에 갤럽 설문조사를 하나 인용합니다. 소득의 차이에 따라 '경험하는 자아'가 행복을 느끼는 정도는 어떻게 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6만불이 기준이라고 하네요. 연봉 6만불 이하의 사람들은 연봉이 줄어들수록 더 불행하고 늘어날수록 행복해지는 일반적인 단조함수 그래프로 나타납니다. 6만불 이상은 어떨까요? 카너먼은 미소지으면서 말합니다. "내가 말이지 그렇게 평평한 곡선을 본 적이 없어요!" 6만불 이상을 버는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돈을 벌더라도 6만불짜리 인생보다 더 많은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겁니다. 반면 '기억하는 자아'의 입장에서는 부유하면 부유할수록 만족도가 높아집니다. 기억하는 자아라는 녀석은 자기 자신과 타인을 늘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내가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나보다 더 많이 버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나도 더 벌고 싶어질 것입니다. 쾌락에는 한계가 있지만 욕망에는 한계가 없는 법입니다.

말하자면 미국에서 절대적/상대적 빈곤의 경계선은 연봉 6만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6만불 이상을 버는 사람이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상대적 빈곤이고, 그 이하를 버는 사람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사민주의 정부의 경우) 정책 결정에 참고할 수 있는 유의미한 데이터로 볼 수 있다는 이야기겠죠. 2014년 한국 중산층의 이상적인 기준이 4인 가족 월소득 515만원에 순자산 6억 6천이라고 하는데, 적어도 그 이상의 부를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를 빈곤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에게는 '기억하는 자아'를 좀 객관적으로 훈련하라고 상기시켜 주는 일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작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앵거스 디턴에 관한 기사들을 읽다가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았는데요, 그는 가난한 나라에서 삶의 만족도가 높게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들(따라서 물질적 부와 행복은 무관하다는 주장들의 느슨한 근거가 되어주는)은 실제 조사 과정의 오류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나라에서 여론조사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부자들이며, 가난한 이들은 전화가 없기 때문에 표본에서 애당초 배제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부탄이나 방글라데시에서도 분명히 물질적 부와 행복은 긴밀한 관련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앞에 놓고 너희의 물질적 상태와 너희의 행복은 무관하다고 설교하는 자들은 사기꾼인 셈이죠. 하지만 아마도 최소한 6만불의 고지를 넘어선 사람들에게는 사기가 아니며, 그들에겐 좀더 넓은 선택의 가능성이 있을 것입니다. 행복을 시시각각 경험하며 살아갈 것인지, 행복에 대한 담론을 머릿속에 그리며 살아갈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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