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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07/16 15:21:46수정됨
Name   골든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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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가장 풍요로운 시대의 가장 빈곤한 청춘, 한로로를 위하여



가장 풍요로운 시대의 가장 빈곤한 청춘, 한로로

한국이 일본의 1인당 GDP를 추월한 지 오래다. 거리를 걸으면 스타벅스 음료를 들고 숙제를 하고 있는 미성년자 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한국 문화를 바탕으로 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ost들은 빌보드 차트를 점령했고 바다 밖 한국인들은 높아진 한국의 위상이 실감 난다며 연이어 기쁨을 표한다. 우리가 한때 부끄러워하던 ‘한국적인’ 것들은 이제 라벨을 다르게 붙여 동남아시아로, 저 먼 나라들로 팔려나가며 국내 회사들의 주가를 상승시킨다.

“무언가 잘못 됐는데.” 라는 생각을 하는 비뚤어진 당신. 물론 이 글은 당신을 위해 적혀진 글이다.

“우리의 청춘은 어디 있나요.” 별안간 등장한 인디 레이블의 인디 아티스트, 한로로는 데뷔 스토리부터 특별하다. 코로나 시기, 어센틱의 한 아티스트의 뮤직 비디오를 보고 있던 한로로는 왠지 모르게 이 소속사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뒤 한로로는 아무 맥락도 없이 작곡을 시작했다. 수 개월 뒤, 작곡에 성공한 한로로는 소속사와 미팅을 했다. 결과는 계약 체결이었다.

“혁신, 성장이라는 미명 아래에서 우리 중 다수는 오히려 행복, 안정과 조금씩 멀어짐을 느낍니다. 고도로 복잡해진 사회에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고민해야 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동시에 경쟁, 증오, 원망에 노출되어야만 합니다. 급변하는 시대의 가운데에서 서로의 안녕을 묻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것이 그녀가 문을 두드렸던 작은 소속사의 홈페이지의 메인 화면 문구다. 별 다른 이미지 없이 이런 글만 떠있는 홈페이지. 그리고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있던 키 158cm의 부유하는 청춘. 둘이 일으킨 공명에 대해 지금부터 적어보고자 한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청년답게 자신의 곡마다 빠짐없이 설명을 붙이는 한로로(*참고로 굿즈 중에도 한로로가 직접 쓴 편지 포함 같은 구성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그녀의 가장 유명한 곡일 입춘(立春) 공연에 이와 같은 문구를 붙였다.

- 개화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유독 동북아시아에 만연하다는 청년기를 봄(春)으로 비유하는 증상, 그중에서도 푸른 봄이라는 청춘(靑春), 한로로라는 아티스트는 이와 떼놓을 수 없는 아티스트다. 처음으로 공개한 곡(위의 입춘)도 인터뷰에 따르면 극도의 불안 속에서 쓴 내용이라고 하는데, 가사가 다음과 같다.

아슬히 고개 내민 내게
첫 봄인사를 건네줘요
피울 수 있게 도와줘요
-한로로 <입춘> 중에서

그녀의 애절한 노래를 듣노라면, 개화는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시기의 축복이라기보다는 넘어가야 할 하나의 무서운 장벽이고 도전이며 시험이다. 고개를 내미는 것은 ‘아슬아슬’하며, 마음은 ‘얼어붙’어 있다. ‘초라한’ 나지만 ‘낭만’을 꿈꾼다. 그리고 그녀의 개화를 도와주는 것은 바로 이 노래를 듣고 있는 우리다.

대학 때 행정학 시간에 지나가며 배웠던 책의 내용이 생각난다. 지나친 소유권, 재산권의 설정이 오히려 성장의 독이 되고 뒤이어 등장하는 후세대들에게는 걸음을 막는 지형이 된다나? 그 말에 동의할 생각은 없지만, 한국의 청춘의 ‘푸름’이 마냥 아름다운 청춘의 것이라기보다는 절망과 좌절, 멍듦의 ‘푸르름’이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이야기인 듯 싶다.

이미 만들어진 모든 이데올로기. 완성된 조직. 준비된 위원회. 정확한 결정. 판례. 완성된 동양의 집단주의 사회는 새로이 등장한 어린 아이들을 잠재적 위험으로 보며 끝없이 시험하고, 학습시키며, 자신들이 준비해놓은 작은 틈을 채우는 나사나 못 따위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준비된 대로 태어나지 못한다.

선택할 수 없어요
그게 나예요
-한로로 <자처> 중에서

배불리 먹고살고, 사상 갖고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일만 줄어들어도 멋진 신세계가 될 것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록 말로 제대로 표현되지 않더라도 세상에 있는 ‘폭력성’의 잔재와 흐름들을 예민한 영혼들은 느끼고 절규한다.

맛없어도 씹어 보는 더러운 관습
-한로로 <먹이사슬> 중에서

곡 내내 시원한 샤우팅이 맴도는 펑키한 노래 <먹이사슬>은 끊임없이 소년들이 싸우고 시체가 쌓여가는 광경을 이야기한다. 누가 카페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필경 그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볼 것이다. 하지만 다행인가. 우리에게는 예술이 있다.

우 우
활활 타오르는 나의 집
우 우
바삐 죽어가는 나의 집
-한로로 <ㅈㅣㅂ> 중에서

따뜻하고 온화한 장소로만 묘사되는 집은 그녀에게 자모음이 형편없이 부숴진 ‘ㅈㅣㅂ’이 되고, 그곳에서 아이는 봄날을 꿈꾸지 못하고 죽어간다. 그곳에서 살아있음은 차라리 저주다. 매순간 고통을 느껴야 하기 때문에.

청년들은 어디에 있는가. 청년들의 ‘집’은 어디에 있고 ‘생존법’은 어디에 있는가. 엔터 사업, 전기차 사업으로 부지런히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사회는 아이들을 책 앞에 방치하고 떠났다. 그 사이 남은 아이들은 여러 질문을 던졌다. ‘남자와 여자가 정말 평등한가요?’, ‘자본주의 경쟁이 너무 무서워요.’, ‘학벌이 정말 중요한가요?’, ‘친구에게 어디까지 해줘야 하나요?’, ‘왜 다들 환경 문제를 놔두고 있나요?’, ‘사랑이 뭔가요?’

강단에 선 교사들은 교육청에서 내려온 지침을 확인하고 그 해, 그 달, 그 날 나가야 할 진도를 확인한다. 공무원들은 주무관들의 요구에 맞추어 요구하는 서류의 양을 늘리고 형식을 바꾸며 자신들의 신세에 대해 한탄한다. 한 학교당 한 명씩 배치되는 상담교사들은 (터무니 없는 업무량 때문인지, 세대차이 때문인지) 정작 도움을 구하러 온 아이들에게 상처 되는 말을 많이 한 것으로 알 만한 아이들 사이에서는 웃음거리가 된 지 오래다. 아이들끼리 대화를 나누도록 만들어진 인터넷 공론장에는 제대로 된 지기가 없다. 아이들은 어느새 자극적인 싸움만 벌이고 있다. 무언가 삶이 부당하다고 느끼면서도 다른 성별, 다른 직업, 다른 집단을 공격하면서 그 자리를 빙빙 맴돌기만 한다. 빛나는 아이돌을 좇기도 하고, 헐리우드 배우를 따라가기도 하고, 애니메이션을 정주행해보기도 하지만 돌아온 자리에는 여전히 의자 하나 없다.

“그건 이미 우리 사회에서 대화가 끝난 문제야.”
“저희는 처음인데요.”
“너희가 부지런히 배워서 따라와야지.”

좋은 가족, 또는 희소한 경우 매우 좋은 친구들을 만나 서로를 가르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사회가 왜 이토록 ‘완벽해’ 보이면서 동시에 내 마음 속이 왜 이토록 ‘비참한’ 것인지를 모른다. 자신이 겨울 동토 속에 묻힌 씨앗인 것을 느끼면서도, 개화해서 나아갈 세상이 과연 충분히 살 만한 곳인지 장담하지 못한다.

젊은 사람들을 노린 전세 사기가 기승을 부린다. 공채 문화도 점점 사라져간다. 무참한 스펙 싸움. 누군가는 끝없이 서열을 나누며 자신을 위로하고, 누군가는 끝없이 자해하고 타해한다. 20대 여성의 우울증 환자 수는 2018년 대비 2022년에 110.65% 증가했다. 청소년들의 30%는 등교가 어려울 정도의 심각한 우울을 겪었다고 보고했다. 쉬는 청년의 숫자는 45만 가량이다.

얼굴은 젖었지만, 그 속은 말라 있어
세상과 싸우기엔 내 맘은 멍들었어
-한로로 <생존법> 중에서

하지만 조직의 말단에서, 학교와 학원의 끝없는 레벨 테스트 현장에서, 가족의 가장 약한 고리로서, 청년들은 끊임없이 다음 임무에 투입되어야 한다. 방황했던 자들은 그만큼 공백기가 있는 사람이 되어 버려진다. 친구의 힘든 이야기조차 들어주기가 힘든 세상이 되었다. ‘에너지 뱀파이어’ 따위의 말이 유행하게 된 현실 배후에는, 조금의 에너지도 남김 없이 활용되고 있는 청년들이 있다. 타인의 고통에도, 자신의 고통에도, 사회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로로는 “이 세상에 사랑을 잔뜩 퍼뜨리고 싶어” ([취한로로](https://youtu.be/H1KaPTsTfLM?si=JjP1Y9ObJKGGGKtX)) 노래를 한다며 눈물을 쏟는다. 어른들 입장에서는 ‘왜 그리 힘든지’ 모를 일이다. 혹은 ‘지나가면 돼. 너도 버티면 돼.’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깎여봐!

우리들은 그냥, 말할 힘도 없어서, 한로로 노래에 손을 흔들고 만다.

“우리 아기 락스타, 잘한다! 응원한다. 대로로. 황로로!”

그게 말할 힘조차 빠진 우리의 마지막 봄 소리다.
방황조차 유튜브 칸에서밖에 할 수 없는 이 시대 청춘들을 위하여.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5-07-29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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