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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6/09/02 01:39:24 |
Name | 피아니시모 |
Subject | 예송논쟁 대충 알아보기 |
1. 그들에게는 목숨보다 중한 일이었으니.. 효종과 인선왕후(효종 마누라)가 죽고 그들의 계모이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몇년상의 상복을 입느냐로 아가리파이팅을 하게 된다.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하는데 효종이 죽었을 때 한번 인선왕후가 죽었을떄 한번 해서 총 2번이다. 지금에와서 보면 뭐 저런 머저리쉐키들이 병크짓을 하나 싶긴 하지만 그 당시 그들에겐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는데 바로 왕가의 정통성이 걸린 문제였기때문 전제왕조에서 왕실의 정통성이란 건 그 어떤 무엇으로도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으며 동시에 집권당인 서인 야당이라 할 수 있는 남인 그리고 왕실 대표 임금(현종)의 권력강화를 위한 싸움이기도 했기때문에 어느 한쪽도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특히 현종입장에서 (물론 이 일이 백성들의 삶과는 딱히 관련이 없었기때문에 지금에와서 우리는 이걸 보고 멍청이들이라고 욕하지만 그때는 그게 아니였다는 소리..) 2.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죽음 - 소현세자와 강빈이 오랜 볼모생활을 끝내고 조선으로 영구귀국 - 하지만 인조가 그들을 싫어함 이미 인조의 권위는 땅바닥에 쳐박혀버렸었고 반면 소현세자는 청나라라는 뒷배를 갖고 있던데다가 그들의 영향력을 강력하게 받고 있었기때문 - 과거의 선조와 광해군과 유사하지만 인조의 상황은 선조보다 심각했는데 어쩃든 선조는 일본놈들로부터 토끼는데 성공한 반면 인조는 붙잡혀 무릎꿇고 살려주셈하고 빌어야했기때문 게다가 그 당시 광해군은 명나라 안의 사정떄문에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거부하면서 광해군과 척을 졌던 반면 (이건 만력제의 문제가 컸다. 만력제 죽은 다음엔 광해군과 친하게 지냈고 나중에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을때 명나라가 분개해했다. 어쨋든 자기들한테 파병했던 왕인데 니들이 뭔데 폐위?라면서 딴지를 걸다가 얼마 안가 인조의 집권을 인정해준다.) 소현세자는 앞서 설명한대로 청나라와 사이가 좋았다. - 떄문에 인조입장에서 이들은 자신의 가장 큰 정적이자 그 존재만으로도 자신의 권위를 지하하수구로 직행시키는 것이었다. (게다가 청나라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건 소현세자가 왕위에 오르고 그 가계가 이어지면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그만큼 심해진다....는 거였으려나?) - 그렇게 미움받던 소현세자는 귀국 한지 2달만에 꽥 - 소현세자가 죽자 인조는 완전히 작정하고 강빈을 죽이고 (자신에게는 손자가 되는) 석철 석린 석견을 제주로 유배보낸다. 석철과 석린은 제주도에서 풍토병으로 인해 죽어버린다. (석견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가계가 이어진다.) -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이 세자로 책봉되는 데 원래 예법대로라면 적장자가 죽어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없다면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적장손이 왕세손으로 책봉되어 왕위를 이어받아야했으나 .. 3. 효종의 죽음 - 왕위에 오른 효종은 나름 능력이 있었기때문에 광해군처럼 궁궐병 걸려 또라이짓은 하지 않았고 민생안정에 주력한다. - 근데 효종의 능력 유무와는 별개로 정통성문제는 여전히 취약했다. 그 떄문에 효종은 (생전에 사이가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강빈 얘기만 나오면 눈깔이 뒤집혔고 가뭄이 들어 뭔 소릴 해도 다 들어주고 다 용서해줌ㅋ하고 자신만만하게 얘기했던 주제에 이 모든게 다 강빈이 억울하게 죽어서임!이라는 말에 미쳐날뛰며 그 말 한놈을 끝내 장살시켜버린다. (사실 효종은 소현세자-강빈과 사이가 대단히 좋았고 나중에 자기가 왕이 되고나서도 조카들은 필사적으로 지켰다. 석견이 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던것도 효종과 이후 현종덕분이었다. 다만 그런것과는 별개로 강빈의 신원회복은 자신의 정통성에 치명타가 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기때문에 강빈의 신원회복과 관련된 얘기가 나오면 그 사람이 누구든 거의 무조건 죽였으며 절대로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게 하였다. 석견 역시 신원이 회복되고 경안군이라는 군호를 받는 건 효종이 아닌 현종때이다. 강빈의 신원이 회복되는 건 정통성 개쩔어주는 숙종대가서야 된다. 참고로 숙종은 정종과 단종의 신원도 회복시켜주었다. 개쩌는 정통성의 위엄) - 효종하면 유명한 북벌 역시 실제로는 그냥 자기 정통성과 권위를 인정받기 위함이었다. 자세한건 너무 기니깐 생략 (당장 효종은 소현세자와 마찬가지로 심양에 볼모살이하면서 걔네들 어느정도 강한지는 볼 건 다 봣다) - 근데 그런 효종이 결국 죽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기니 그럼 인조의 계비이자 효종의 계모(이긴 하지만 더 어림) 자의대비는 상복을 몇년 입어야 하는가? - 원래 예법대로라면 장남이 죽었을때는 3년 그 외에는 1년이었다. 문제는 효종은 왕이었다는 것이다. - 어쩃든 소현세자는 죽었고 효종이 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니 그를 적장자로 보아야한다 vs 걍 차남이지 뭔 개소리야로 나뉘게 된다. - 이 과정에서 송시열이 체이부정(體而不正)이란 말을 하는 데 즉 장자가 아닌 자가 후사를 이었다는 말이었고 이 말을 들은 당시의 영의정 정태화가 경악하며 송시열의 주둥아리를 막아버린다. -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 소현세자의 아들 이석견이 살아있었기때문이다. 송시열의 저 말대로라면 지금의 효종은 정통성이 없고 그 정통성은 이석견에게 있다는 말이 될 수 있었기때문이다. - 바로 이 정통성 문제가 예송논쟁을 2차까지 벌어지게 하고 왕과 사대부들간의 초특급 극한 아가리파이팅을 하게 만드는 원인중 하나가 된다. - 여러차례 핵폭탄급 미사일들이 터져나갔지만 귀찮으니 생략 - 어쩃든 1차 예송논쟁은 송시열과 서인(정확히는 그 계파에 속하는 산당)의 판정승을 거둔다. - 이때 현종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어버버하다가 송시열의 말을 따라줘버린다.(..) - 후폭풍이 엄청나서 이후 남인계열 신하들은 물론이고 유생들 역시 미친듯이 반발한다. 이게 몇년동안 계속이어지면서 불길은 꺼지지 않고 살아있게 되고 이는 곧 다시 한번 대ㅋ폭ㅋ발ㅋ 4. 인선왕후의 죽음 - 대충 15년후 효종의 왕비이자 현종의 어머니 인선왕후가 죽는다 - 당연히 다시 자의대비의 상복갖고 말이 나온다. 맏며느리는 1년 그 외에는 9개월이 예법이라고 한다. - 송시열과 서인은 처음에 왕후니깐 1년복으로 주장했다가 생각해보니 지들이 예전에 효종을 차남이니깐 1년복 ㅇㅋ?해서 관철시킨 적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실수함 9개월 ㅇㅋ?한다 - 개빡친 현종이 이 신발럼들아를 외치며 예조의 주요담당자들 해고시켜버리는 데 송시열은 효종 장남 아니고 차남이니깐 인선왕후도 차남의 아내자나?라고 주장한다 - 근데 이렇게 되면 생기는 문제중 하나는 그럼 효종-현종에 이르기까지 민회빈 강씨는 역강(역적 강씨)라고 불리웠는데 그러면 (당시로는) 역적이었던 강빈을 맏며느리가 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 현종이 시바 전에는 지금 법으로 1년복하자해서 했더니 이번엔 옛날법으로 1년복하자고 하냐 븅신들아 니네들은 무슨 일관성이 없어 이자식들아를 외치며 송시열과 서인을 깐다. 결국 자의대비는 1년복을 입는것으로 결정됬는데 덕분에 자의대비 혼자 예법붕괴를 맛보게 된다 자의대비 지못미 5. 당시에 이게 왜 이리 중요하게 다루어지게 되었나? 정통성 왕과 사대부는 같다 vs 왕과 사대부는 다르다 일단 당시에 예송논쟁이 격화된 첫번째 이유는 정통성떄문이다. 앞서 말한대로 효종은 정통성이 굉장히 취약한 왕이었다. 당장 소현세자가 죽고 난 뒤 효종이 후계자로 지목되는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던데다가(왜 적장손이 아닌 차남이 왕위를 잇는가?에 대한 적합한 대답이 나오지 못했다) 효종이 죽고 예송논쟁이 격화되는 시기에 소현세자의 셋째인 이석견이 살아있었다. 위에서 말한대로 송시열이 주장하는 건 효종의 정통성을 완전히 병신으로 만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실 송시열이 말한 내용은 같은 서인들도 경악할만한 내용이었다.) 무엇보다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은 왕이나 사대부나 다 같은 사대부지 무슨 ㅋ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괜히 그들이 효종을 그냥 차남이죠ㅋ 라고 주장한게 아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왕은 딱히 특별한 게 없었고 효종 역시 그냥 다른 사대부들과 마찬가지로 집안의 차남일 뿐이었다. (이기일원론) 반면 왕은 사대부와 달라서 일단 왕위를 이어받은 것이 정통이 될 경우 효종은 장남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 경우엔 정통성 문제에 휘말릴 여지 자체를 아예 원천차단할 수 있었고 이는 주로 동인계열(이때는 남인)의 생각이었다 (이기이원론) (참고로 서인은 율곡이이의 학통을 이어받았는데 그가 주장했던 게 이기일원론이었고 반면 동인계열(이때의 남인)은 퇴계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았고 이황은 이기이원론을 주장했었다. 즉 서로의 학맥의 정체성문제도 함께 걸려있었던 것.. 지금 우리가 보기엔 겁나 찌질거리면서 병신짓 하는 것 같지만 그 당시 왕실에겐 정통성이 직접적으로 걸려있는 문제였으며 서인과 남인에겐 자신들의 학문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입지문제까지 걸려있는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상복입는 거 갖고 싸우는걸로 찌질하다고하기엔 걸린게 너무 많았던데다가 조선이란 나라가 유교를 근간으로 하던 나라였다는 사실도 알아야한다 조선이란 나라에서 유교적 윤리라는 건 곧 사회적 규범이었으며 법을 제정하는 데 있어서도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었다 바꿔말하면 이건 당시로는 법을 정하고 그걸 따르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를 따지는 문제였기때문에 (적어도 당시 사람들에겐)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 (사실 별것도 아닌걸로 아가리파이팅한다고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도 별것도 아닌걸로 아가리파이팅은 얼마든지 하고 있다!) ------------------------- 간단하게 알아보자면서 글이 엉망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내용에 살을 붙이기 위해 네이버나 구글에서 이것저것 검색해서 좀 짜맞췄습니다. 100% 제 글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냥 아 이렇게 써놓는 놈도 있구나 하고만 봐주십시오 ㅠㅠ 태클 환영합니다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09-12 09:42)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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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게 사실 왕이 뭔가 하고자해서 밀어붙이면 결국 신하들이 지긴 졌습니다.
단종같이 진짜 뭐 할수조차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떤 왕을 제외하면 우리가 호구로 아는 왕들도 대부분 자기가 뭔가 하고자 마음먹으면 다 할 수 있었어요
근데 그러지 않았죠 어쩃든 왕들도 명분이라거나 이런게 중요했기떄문에 진짜 어지간히 빡치는 일이 아닌 이상 대부분 전례를 살펴보거나 하면서 어느정도 적당히 줄다리기를 하면서 갔습니다
이 모든걸 다 썡까고 지 멋대로 하면서 진짜 킹왕짱 권력을 휘두른게 연산군인데 연산군이 반정으로 쫓겨나면서 후대왕들은 연산... 더 보기
단종같이 진짜 뭐 할수조차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떤 왕을 제외하면 우리가 호구로 아는 왕들도 대부분 자기가 뭔가 하고자 마음먹으면 다 할 수 있었어요
근데 그러지 않았죠 어쩃든 왕들도 명분이라거나 이런게 중요했기떄문에 진짜 어지간히 빡치는 일이 아닌 이상 대부분 전례를 살펴보거나 하면서 어느정도 적당히 줄다리기를 하면서 갔습니다
이 모든걸 다 썡까고 지 멋대로 하면서 진짜 킹왕짱 권력을 휘두른게 연산군인데 연산군이 반정으로 쫓겨나면서 후대왕들은 연산... 더 보기
아 그게 사실 왕이 뭔가 하고자해서 밀어붙이면 결국 신하들이 지긴 졌습니다.
단종같이 진짜 뭐 할수조차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떤 왕을 제외하면 우리가 호구로 아는 왕들도 대부분 자기가 뭔가 하고자 마음먹으면 다 할 수 있었어요
근데 그러지 않았죠 어쩃든 왕들도 명분이라거나 이런게 중요했기떄문에 진짜 어지간히 빡치는 일이 아닌 이상 대부분 전례를 살펴보거나 하면서 어느정도 적당히 줄다리기를 하면서 갔습니다
이 모든걸 다 썡까고 지 멋대로 하면서 진짜 킹왕짱 권력을 휘두른게 연산군인데 연산군이 반정으로 쫓겨나면서 후대왕들은 연산군떄문에 눈치 좀 보긴 봐야했습니다. "님 그거 연산군이 하던 행동패턴인데!?" 라는 말 나오면 (..) 그냥 아 미안 내가 잘못함 하고 이런식으로..
실제로 호구로 취급받는 경종조차도 죽기직전에 사자후 한방에 노론 세력들 다 살려달라고 빌어야했을 정도니깐요
나중에 세도정치에 의해 개호구왕으로 취급받는 순조~철종시기의 경우 순조의 책임이 가장 큰데 임마는 의지를 갖고 행하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자신이 하고자하는 정치를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지가 없었어요 정치에 관심도 흥미도 없어서..너무 무관심했죠 그마저도 세자였던 효명세자가 똑똑하니깐 대리청정으로 맡겼는데 요절해버리니깐 완전히 정치에 관심을 끊어버렸죠
다만 동시기 명나라보다 왕권이 약했던건 맞는 거 같아요 명나라는..중국역사속에서도 황제권이 가장 강했떤 나라중 하나이다보니 비교가 좀 되었을 거에요(..)
단종같이 진짜 뭐 할수조차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떤 왕을 제외하면 우리가 호구로 아는 왕들도 대부분 자기가 뭔가 하고자 마음먹으면 다 할 수 있었어요
근데 그러지 않았죠 어쩃든 왕들도 명분이라거나 이런게 중요했기떄문에 진짜 어지간히 빡치는 일이 아닌 이상 대부분 전례를 살펴보거나 하면서 어느정도 적당히 줄다리기를 하면서 갔습니다
이 모든걸 다 썡까고 지 멋대로 하면서 진짜 킹왕짱 권력을 휘두른게 연산군인데 연산군이 반정으로 쫓겨나면서 후대왕들은 연산군떄문에 눈치 좀 보긴 봐야했습니다. "님 그거 연산군이 하던 행동패턴인데!?" 라는 말 나오면 (..) 그냥 아 미안 내가 잘못함 하고 이런식으로..
실제로 호구로 취급받는 경종조차도 죽기직전에 사자후 한방에 노론 세력들 다 살려달라고 빌어야했을 정도니깐요
나중에 세도정치에 의해 개호구왕으로 취급받는 순조~철종시기의 경우 순조의 책임이 가장 큰데 임마는 의지를 갖고 행하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자신이 하고자하는 정치를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지가 없었어요 정치에 관심도 흥미도 없어서..너무 무관심했죠 그마저도 세자였던 효명세자가 똑똑하니깐 대리청정으로 맡겼는데 요절해버리니깐 완전히 정치에 관심을 끊어버렸죠
다만 동시기 명나라보다 왕권이 약했던건 맞는 거 같아요 명나라는..중국역사속에서도 황제권이 가장 강했떤 나라중 하나이다보니 비교가 좀 되었을 거에요(..)
결론은
이론상으론 조선왕은 뭐든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게 맞습니다
다만 (..)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만 그런거고 실제로는 이런저런 문제때문에 신하들과 적당히 줄다리기를 해야했고 왕들 스스로도 어느정도는 눈치를 보면서 행동해줬습니다.
다만 이 이론에 부합해서 최강의 권력을 휘두른 왕이 2명이 있는데 연산군과 숙종입니다
(아 세종이나 문종 역시 마찬가지로 볼 수 있겠지만 세종의 경우 태종이 미리 외척이나 공신 권신이 될만한 인간들을 모조리 다 족치고 물려줬고 문종은 조선왕조 최초로 제대로 적장자승계원칙에 따라 왕위에 올랐기... 더 보기
이론상으론 조선왕은 뭐든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게 맞습니다
다만 (..)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만 그런거고 실제로는 이런저런 문제때문에 신하들과 적당히 줄다리기를 해야했고 왕들 스스로도 어느정도는 눈치를 보면서 행동해줬습니다.
다만 이 이론에 부합해서 최강의 권력을 휘두른 왕이 2명이 있는데 연산군과 숙종입니다
(아 세종이나 문종 역시 마찬가지로 볼 수 있겠지만 세종의 경우 태종이 미리 외척이나 공신 권신이 될만한 인간들을 모조리 다 족치고 물려줬고 문종은 조선왕조 최초로 제대로 적장자승계원칙에 따라 왕위에 올랐기... 더 보기
결론은
이론상으론 조선왕은 뭐든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게 맞습니다
다만 (..)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만 그런거고 실제로는 이런저런 문제때문에 신하들과 적당히 줄다리기를 해야했고 왕들 스스로도 어느정도는 눈치를 보면서 행동해줬습니다.
다만 이 이론에 부합해서 최강의 권력을 휘두른 왕이 2명이 있는데 연산군과 숙종입니다
(아 세종이나 문종 역시 마찬가지로 볼 수 있겠지만 세종의 경우 태종이 미리 외척이나 공신 권신이 될만한 인간들을 모조리 다 족치고 물려줬고 문종은 조선왕조 최초로 제대로 적장자승계원칙에 따라 왕위에 올랐기때문에 가능했는데 포함시키지 않은 건 둘 모두 포악과는 거리가 멀어서 ㅋㅋ)
연산군은 앞서 말한대로고
숙종의 경우 진짜 조선왕조에서 정통성 최강자이자 끝판왕이었거든요 원자 - 왕세자 - 왕 테크를 탄 왕이었는데 단종 역시 마찬가지기는 하나 단종에게는 수양대군(..)이 존재했던 반면 숙종에겐 그따위 대군놈들이 없었고 연산군처럼 다른 대체제가 있어서 폐위시킬 수 있는 그런것도 없었어요. 제가 알기로 숙종은 원자-왕세자-왕 테크를 탔는데 장수까지 한 유일한 조선왕이거든요(..) 괜히 숙종이 정종이나 단종 강비를 신원시켜줄 수 있었던 게 아닙니다.
(정종이나 단종 모두 신원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얘기들이 여러차례 오고갔지만 결국 정통성문제라던가 이런저런 일들로 미뤄졌는데 숙종은 워낙에 정통성이 후덜덜해서 그냥 다 해결해버렸..)
이론상으론 조선왕은 뭐든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게 맞습니다
다만 (..)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만 그런거고 실제로는 이런저런 문제때문에 신하들과 적당히 줄다리기를 해야했고 왕들 스스로도 어느정도는 눈치를 보면서 행동해줬습니다.
다만 이 이론에 부합해서 최강의 권력을 휘두른 왕이 2명이 있는데 연산군과 숙종입니다
(아 세종이나 문종 역시 마찬가지로 볼 수 있겠지만 세종의 경우 태종이 미리 외척이나 공신 권신이 될만한 인간들을 모조리 다 족치고 물려줬고 문종은 조선왕조 최초로 제대로 적장자승계원칙에 따라 왕위에 올랐기때문에 가능했는데 포함시키지 않은 건 둘 모두 포악과는 거리가 멀어서 ㅋㅋ)
연산군은 앞서 말한대로고
숙종의 경우 진짜 조선왕조에서 정통성 최강자이자 끝판왕이었거든요 원자 - 왕세자 - 왕 테크를 탄 왕이었는데 단종 역시 마찬가지기는 하나 단종에게는 수양대군(..)이 존재했던 반면 숙종에겐 그따위 대군놈들이 없었고 연산군처럼 다른 대체제가 있어서 폐위시킬 수 있는 그런것도 없었어요. 제가 알기로 숙종은 원자-왕세자-왕 테크를 탔는데 장수까지 한 유일한 조선왕이거든요(..) 괜히 숙종이 정종이나 단종 강비를 신원시켜줄 수 있었던 게 아닙니다.
(정종이나 단종 모두 신원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얘기들이 여러차례 오고갔지만 결국 정통성문제라던가 이런저런 일들로 미뤄졌는데 숙종은 워낙에 정통성이 후덜덜해서 그냥 다 해결해버렸..)
개인적으로 루이14세에 비하면 조선 왕은 거의 절대권력에 가깝다 생각합니다.
다만 역사의 기록과 과거의 관습 때문에 명분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하거나 국가의 안정을 위해 필요성의 부재로 감정을 참은 것에 가깝지 진짜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었죠.
아무리 신하들이 기를 쓰고 반대해도 본인이 원하면 정말 거의 모든 걸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위에 쓰신 경종의 경우도 그렇고, 신권이 강했다는 성종 때도 살인죄로 인해 창원군 처벌에 대해 한명회, 모든 신하들, 하물며 성종의 친형인 월성대군조차 강하게 처벌을 요구했음에도 성종의 ... 더 보기
다만 역사의 기록과 과거의 관습 때문에 명분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하거나 국가의 안정을 위해 필요성의 부재로 감정을 참은 것에 가깝지 진짜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었죠.
아무리 신하들이 기를 쓰고 반대해도 본인이 원하면 정말 거의 모든 걸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위에 쓰신 경종의 경우도 그렇고, 신권이 강했다는 성종 때도 살인죄로 인해 창원군 처벌에 대해 한명회, 모든 신하들, 하물며 성종의 친형인 월성대군조차 강하게 처벌을 요구했음에도 성종의 ... 더 보기
개인적으로 루이14세에 비하면 조선 왕은 거의 절대권력에 가깝다 생각합니다.
다만 역사의 기록과 과거의 관습 때문에 명분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하거나 국가의 안정을 위해 필요성의 부재로 감정을 참은 것에 가깝지 진짜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었죠.
아무리 신하들이 기를 쓰고 반대해도 본인이 원하면 정말 거의 모든 걸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위에 쓰신 경종의 경우도 그렇고, 신권이 강했다는 성종 때도 살인죄로 인해 창원군 처벌에 대해 한명회, 모든 신하들, 하물며 성종의 친형인 월성대군조차 강하게 처벌을 요구했음에도 성종의 반대로 끝내 실패했던 적이 있었죠.
성종이 고작 20대 초반 때이고 성종 vs 친족과 신료의 싸움이었음에도 성종이 이겼을 정도로 왕이 정말 마음을 강하게 먹으면 신하들 입장에서도 도리가 없었습니다.
반정으로 왕이 되어 왕권이 약할 거라는 이미지가 있는 중종과 인조조차 본인이 죽이고자 마음 먹으면 다 죽일 수 있었고요.
특히 중종같은 경우 중종에게 찍혀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기 했을런지...
다만 역사의 기록과 과거의 관습 때문에 명분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하거나 국가의 안정을 위해 필요성의 부재로 감정을 참은 것에 가깝지 진짜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었죠.
아무리 신하들이 기를 쓰고 반대해도 본인이 원하면 정말 거의 모든 걸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위에 쓰신 경종의 경우도 그렇고, 신권이 강했다는 성종 때도 살인죄로 인해 창원군 처벌에 대해 한명회, 모든 신하들, 하물며 성종의 친형인 월성대군조차 강하게 처벌을 요구했음에도 성종의 반대로 끝내 실패했던 적이 있었죠.
성종이 고작 20대 초반 때이고 성종 vs 친족과 신료의 싸움이었음에도 성종이 이겼을 정도로 왕이 정말 마음을 강하게 먹으면 신하들 입장에서도 도리가 없었습니다.
반정으로 왕이 되어 왕권이 약할 거라는 이미지가 있는 중종과 인조조차 본인이 죽이고자 마음 먹으면 다 죽일 수 있었고요.
특히 중종같은 경우 중종에게 찍혀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기 했을런지...
2차 예송에서 옛날 법 지금 법 얘기가 나오는데 이에 대해 설명을 추가하자면...
1차 예송이 처음에는 예법과 학문 해석으로 가다가 윤선도의 '송시열 저거 정통성 없다고 나랏님 욕하는 역적입니다 역적!' 상소 때문에 난리가 납니다. 서인이라고 다 송시열 편들어준 건 아니라서 '송시열 영감 거 말씀이 지나친 거 아니오?'하던 이들이 꽤 있었는데 윤선도가 송시열 죽이자고 하니 화들짝 놀라 단합, 결국 서인 대 남인의 생사결로 발전하죠. 현종은 아직 미숙해서 세종처럼 '니가 그렇게 예법을 잘 알아? 어전으로 따라와'를 외칠 수가 없... 더 보기
1차 예송이 처음에는 예법과 학문 해석으로 가다가 윤선도의 '송시열 저거 정통성 없다고 나랏님 욕하는 역적입니다 역적!' 상소 때문에 난리가 납니다. 서인이라고 다 송시열 편들어준 건 아니라서 '송시열 영감 거 말씀이 지나친 거 아니오?'하던 이들이 꽤 있었는데 윤선도가 송시열 죽이자고 하니 화들짝 놀라 단합, 결국 서인 대 남인의 생사결로 발전하죠. 현종은 아직 미숙해서 세종처럼 '니가 그렇게 예법을 잘 알아? 어전으로 따라와'를 외칠 수가 없... 더 보기
2차 예송에서 옛날 법 지금 법 얘기가 나오는데 이에 대해 설명을 추가하자면...
1차 예송이 처음에는 예법과 학문 해석으로 가다가 윤선도의 '송시열 저거 정통성 없다고 나랏님 욕하는 역적입니다 역적!' 상소 때문에 난리가 납니다. 서인이라고 다 송시열 편들어준 건 아니라서 '송시열 영감 거 말씀이 지나친 거 아니오?'하던 이들이 꽤 있었는데 윤선도가 송시열 죽이자고 하니 화들짝 놀라 단합, 결국 서인 대 남인의 생사결로 발전하죠. 현종은 아직 미숙해서 세종처럼 '니가 그렇게 예법을 잘 알아? 어전으로 따라와'를 외칠 수가 없었고, 개판을 정리할 능력이 없던 현종은 결국 서인 중신들이 만든 타협책을 선택합니다. 1년설을 채택하긴 하되 고대의 예법을 근거로 장남/차남 따져서 1년으로 한 게 아니라 국조오례의, 그러니까 지금 법의 '장남도 1년, 다른 아들도 1년'을 근거로 그냥 1년 하자는 거죠. 이래서 그냥 승리가 아니라 서인들의 판정승이라는 거고, 어쨌든 승리는 승리라서 송시열 깠던 윤선도는 서인들에게 배터지도록 욕 먹고 귀양 갑니다(만약 세자 시절 스승이 아니었다면 짤 없이 죽었을 겁니다).
근데 문제는 2차 예송에서 논란이 된 며느리 상복 역시 국조오례의에선 다 1년으로 묶었다는 거죠. 아들의 상복은 원래 3년/1년이었던 걸 후대에 1년으로 통합-간소화시킨 건데, 며느리는 1년/9개월이었던 걸 1년으로 한데 묶은 겁니다. 그래서 1차예송에선 서인이 국조오례의를 가져와 1년설을 주장해도 큰 문제가 안 됐습니다만 2차예송에선 그게 안 통한 거죠. 결국 머리가 좀 굵어진 현종은 '니네 저번 예송 때는 지금 법인 국조오례의 갖고 오면서 1년이라더니 이제는 왜 또 주자가례 갖고 와서 9개월이라는 거야? 장난까냐?'라면서 서인을 족쳐버렸고요. 그래도 현종이 아예 쓸어버린 것도 아니고, 예송 직후에 사망해서 직접 손봐준 건 숙종 대의 일입니다. 뭐 이쪽은 예법 대신 장희빈과 원자 책봉, 그리고 뒤를 이은 경종-영조의 후계구도가 아주 재밌죠. 맨날 찍던 것처럼 이번 장희빈은 또 어떤 미녀배우니, 무슨 재해석을 했니 이런 거 하지 말고 정도전처럼 정치 사극 찍으면 아주 죽여줄 겁니다.
1차 예송이 처음에는 예법과 학문 해석으로 가다가 윤선도의 '송시열 저거 정통성 없다고 나랏님 욕하는 역적입니다 역적!' 상소 때문에 난리가 납니다. 서인이라고 다 송시열 편들어준 건 아니라서 '송시열 영감 거 말씀이 지나친 거 아니오?'하던 이들이 꽤 있었는데 윤선도가 송시열 죽이자고 하니 화들짝 놀라 단합, 결국 서인 대 남인의 생사결로 발전하죠. 현종은 아직 미숙해서 세종처럼 '니가 그렇게 예법을 잘 알아? 어전으로 따라와'를 외칠 수가 없었고, 개판을 정리할 능력이 없던 현종은 결국 서인 중신들이 만든 타협책을 선택합니다. 1년설을 채택하긴 하되 고대의 예법을 근거로 장남/차남 따져서 1년으로 한 게 아니라 국조오례의, 그러니까 지금 법의 '장남도 1년, 다른 아들도 1년'을 근거로 그냥 1년 하자는 거죠. 이래서 그냥 승리가 아니라 서인들의 판정승이라는 거고, 어쨌든 승리는 승리라서 송시열 깠던 윤선도는 서인들에게 배터지도록 욕 먹고 귀양 갑니다(만약 세자 시절 스승이 아니었다면 짤 없이 죽었을 겁니다).
근데 문제는 2차 예송에서 논란이 된 며느리 상복 역시 국조오례의에선 다 1년으로 묶었다는 거죠. 아들의 상복은 원래 3년/1년이었던 걸 후대에 1년으로 통합-간소화시킨 건데, 며느리는 1년/9개월이었던 걸 1년으로 한데 묶은 겁니다. 그래서 1차예송에선 서인이 국조오례의를 가져와 1년설을 주장해도 큰 문제가 안 됐습니다만 2차예송에선 그게 안 통한 거죠. 결국 머리가 좀 굵어진 현종은 '니네 저번 예송 때는 지금 법인 국조오례의 갖고 오면서 1년이라더니 이제는 왜 또 주자가례 갖고 와서 9개월이라는 거야? 장난까냐?'라면서 서인을 족쳐버렸고요. 그래도 현종이 아예 쓸어버린 것도 아니고, 예송 직후에 사망해서 직접 손봐준 건 숙종 대의 일입니다. 뭐 이쪽은 예법 대신 장희빈과 원자 책봉, 그리고 뒤를 이은 경종-영조의 후계구도가 아주 재밌죠. 맨날 찍던 것처럼 이번 장희빈은 또 어떤 미녀배우니, 무슨 재해석을 했니 이런 거 하지 말고 정도전처럼 정치 사극 찍으면 아주 죽여줄 겁니다.
훈구파가 몰락하고 근본주의 사람이 득세하여 문제가 발생했다는 말은,
현재의 수구정당이 몰락하고 진보정당이 득세하여 문제가 발생했다는 말과 거의 흡사하게 들리네요.
훈구의 몰락과 사림의 득세는 훈구가 초래한 시대적 부름이지 그것 자체가 어떠한 문제나 그런 게 아닙니다.
역사에 선악관계를 놓는 것도 웃기지만 굳이 선악관계를 놓는다면 오히려 사림선에 훈구악에 가깝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훈구가 몰락하지 않았으면 그로인해 사회적 혼란이 가중됐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습니다.
관학파 이후 조선시대 왕권과 시스템이 제대로 돌... 더 보기
현재의 수구정당이 몰락하고 진보정당이 득세하여 문제가 발생했다는 말과 거의 흡사하게 들리네요.
훈구의 몰락과 사림의 득세는 훈구가 초래한 시대적 부름이지 그것 자체가 어떠한 문제나 그런 게 아닙니다.
역사에 선악관계를 놓는 것도 웃기지만 굳이 선악관계를 놓는다면 오히려 사림선에 훈구악에 가깝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훈구가 몰락하지 않았으면 그로인해 사회적 혼란이 가중됐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습니다.
관학파 이후 조선시대 왕권과 시스템이 제대로 돌... 더 보기
훈구파가 몰락하고 근본주의 사람이 득세하여 문제가 발생했다는 말은,
현재의 수구정당이 몰락하고 진보정당이 득세하여 문제가 발생했다는 말과 거의 흡사하게 들리네요.
훈구의 몰락과 사림의 득세는 훈구가 초래한 시대적 부름이지 그것 자체가 어떠한 문제나 그런 게 아닙니다.
역사에 선악관계를 놓는 것도 웃기지만 굳이 선악관계를 놓는다면 오히려 사림선에 훈구악에 가깝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훈구가 몰락하지 않았으면 그로인해 사회적 혼란이 가중됐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습니다.
관학파 이후 조선시대 왕권과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간 건 그나마 사림이 힘을 얻으면서 부터이고,
조선시대의 몰락은 사림의 몰락에서 출발합니다.
현재의 수구정당이 몰락하고 진보정당이 득세하여 문제가 발생했다는 말과 거의 흡사하게 들리네요.
훈구의 몰락과 사림의 득세는 훈구가 초래한 시대적 부름이지 그것 자체가 어떠한 문제나 그런 게 아닙니다.
역사에 선악관계를 놓는 것도 웃기지만 굳이 선악관계를 놓는다면 오히려 사림선에 훈구악에 가깝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훈구가 몰락하지 않았으면 그로인해 사회적 혼란이 가중됐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습니다.
관학파 이후 조선시대 왕권과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간 건 그나마 사림이 힘을 얻으면서 부터이고,
조선시대의 몰락은 사림의 몰락에서 출발합니다.
상업이 신분 최하위에 배치된 건 조선 뿐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였고, 자급자족 농경사회는 고려나 조선이나 똑같았습니다.
그래도 일본의 돈많은 상인은 엥간한 무사보다 높은 위치를 누렸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건 조선 역시나 마찬가지였고,
조선 상업의 경우는 조선 정부가 억제한 것이 아닌 고려 때 상업유통 체계가 실패하면서 조선시대 일반 백성들의 풍습 자체가 상업에 대한 엄청난 거부감을 띈 것에 가깝습니다.
조선이 정말 자급자족 농경사회만을 추구했던 국가라면 태종부터 숙종 때까지 화폐유통을 위해 전 사대부가 골머리를 싸며 고민했을리가 없겠죠.
그래도 일본의 돈많은 상인은 엥간한 무사보다 높은 위치를 누렸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건 조선 역시나 마찬가지였고,
조선 상업의 경우는 조선 정부가 억제한 것이 아닌 고려 때 상업유통 체계가 실패하면서 조선시대 일반 백성들의 풍습 자체가 상업에 대한 엄청난 거부감을 띈 것에 가깝습니다.
조선이 정말 자급자족 농경사회만을 추구했던 국가라면 태종부터 숙종 때까지 화폐유통을 위해 전 사대부가 골머리를 싸며 고민했을리가 없겠죠.
현대적 관점에서 봐도 별 것 아닌 것 갖다 싸운 건 아니죠. 표층적으로 보면야 그깟 상복 논쟁이지만 심층적으로 보면 통치자의 정통성에 대한 논쟁이고, 더 나아가서 뿌리를 보자면 조선의 국체가 일인정인지 과두정인지에 대한 논쟁이니까요. 이게 쓸데없는 논쟁이라고 치면 현대의 개헌 논의 같은 것도 공리공론이라고 봐야지요. 게다가 대개의 정쟁을 위한 논변들이 그때그때 시의적인 이해타산의 쟁취를 위해서 유리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끌어오느라 상대방에 대한 협잡으로만 점철되어 있고 뚜렷하게 통일된 입장이 보이지 않아 밥그릇 싸움에 그치는 반면, ... 더 보기
현대적 관점에서 봐도 별 것 아닌 것 갖다 싸운 건 아니죠. 표층적으로 보면야 그깟 상복 논쟁이지만 심층적으로 보면 통치자의 정통성에 대한 논쟁이고, 더 나아가서 뿌리를 보자면 조선의 국체가 일인정인지 과두정인지에 대한 논쟁이니까요. 이게 쓸데없는 논쟁이라고 치면 현대의 개헌 논의 같은 것도 공리공론이라고 봐야지요. 게다가 대개의 정쟁을 위한 논변들이 그때그때 시의적인 이해타산의 쟁취를 위해서 유리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끌어오느라 상대방에 대한 협잡으로만 점철되어 있고 뚜렷하게 통일된 입장이 보이지 않아 밥그릇 싸움에 그치는 반면, 예송논쟁의 경우 각 정파가 기반하고 있던 정치철학/이론철학에 철저하게 기반하여 자신들의 논리적/사상적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기에 그네들만의 도덕적/정치적/사상적 신념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는 차이가 있지요. 북한이나 의석 개편을 둘러싼 새누리와 더민당의 논쟁보다 훨씬 수준 있고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리꾼들의 메갈 일베 논쟁 따위와는 비교할 것도 안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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