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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9/30 10:53:43
Name   눈시
Subject   두 형제 이야기 - 황형의 유산
노론 싫어하는 이덕일이 좋아하는 게 바로 독살설이죠. 문종부터 정말 많은 독살설을 주장했구요. 당연한 얘기지만 이 중에서 전부터 독살설이 나온 이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소현세자입니다. 하지만 소현세자도 그럴 것 같다 정도죠. 현대에 와서는 인조를 마음껏 깔 수 있겠지만 그 때는 범인이 인조와 연결될 건데 함부로 말 못 하니까요. 지금 와서는 독살설이 정말 많이 퍼져 있고, 100% 확신은 할 수 없다는 분위기입니다. 물론 반론이 없진 않습니다.
덜 유명한 걸로는 영조의 아들 효장세자가 있습니다. 왕자 때 순정이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성질이 독해 애들에게 불순하게 대해서 쫓아냈다고 합니다. 그러다 세제 때 궁녀가 부족해서 불러들였는데 세자가 아닌 옹주(왕의 서녀. 적녀면 공주죠) 소속으로 넣었다고 열 받아서 영조의 자식들을 다 죽이겠다고 나섰던 것이죠. 이 때 뼛가루 등 저주하는 물건들을 곳곳에 두었고 세자와 왕녀들에게 독을 썼다고 합니다. 끔찍한 일이었죠. 영조 4년에 효장세자가 갑자기 죽었고, 화순옹주가 하혈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2년 후에 발견된 겁니다. 이 경우는 왕이 직접 독살을 인정하고 범인을 죽였죠.

한편 당대에는 정말 잘 알려졌지만 현대에는 딱히 유명하지 않은 독살설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경종이죠. 아무래도 영조에 대한 평가가 좋은 편이기도 하고, 경종에 대한 인지도가 거의 없으니 그렇겟죠. 하지만 당시엔 그 어느 독살설보다 더 많이 퍼졌고, 영조에게 치명적이었습니다.

이 독살설은 삼수의 옥과 연결됩니다. 영조의 처조카까지 관련된 역모죠. 여기서 나온 세 가지 방법 중 두 가지, 자객을 보내는 것과 거짓으로 폐출시킨다는 것은 말만 나왔을 뿐 증거가 없었습니다. (칼만 한 자루 나왔죠) 그 자체도 어처구니 없구요. 독살은 제법 구체적으로 얘기가 나왔습니다. 이 때는 독살이 실패했지만 그 이후에 다시 시도해서 성공했다는 것이죠. 게장과 생감, 마지막의 인삼차는 그걸 마무리한 것이구요. 하지만 이것에도 반론은 있습니다. 김씨 궁인에게 독을 줬다는 장씨 역관, 하지만 역관 중에 장씨는 없었습니다. 더 조사했다면 진짜든 가짜든 더 나올 수 있었겠지만, 이걸 가지고 정말 독살 시도도 있긴 했냐는 반론이 나왔죠.

어차피 근거는 없습니다. 경종이 몸이 안 좋은 건 사실이었고, 계속 아프다가 죽었으니까요. 게장과 생감을 같이 먹거나 죽기 직전에 인삼을 먹은 게 치명적일 수는 있겠지만 이걸 확실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노려서 먹였다 한다면 영조든 노론이든 너무 과대평가한 거죠. 마지막에 나선 건 문종이 죽을 때 세조가 '왜 청심원을 올리지 않느냐?'고 한 것처럼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 이런 느낌으로 봐야 될 거구요. (이덕일은 세조가 문종 독살했다고 주장하긴 합니다만)

그게 아니라 정말 독을 썼다면? 전에도 시도했으니 더 시도해서 성공했을 것이다는 추측밖에 없습니다. 이렇다면 영조가 그럴만한 사람인가를 생각해 봐야겠는데, 이후 탕평으로 오랜 시간을 통해 자기의 신원까지 이룬 걸 보면 부정적으로 기웁니다. 그런 모험을 할 인물일까 하는 것이죠.

다만 영조가 서덕수에 대해 말을 한 걸 보면 무언가 있긴 있었고, 영조가 알고는 있었던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계획이 있었고 영조가 어디까지 알고 있었냐는 것은, 영조 자신만이 알겠죠.

어찌됐든 소론 준론, 그들과 손 잡은 남인은 이 독살설을 밀어붙입니다. 이들은 그걸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경종은 독살당했고, 그 범인은 영조이며, 이런 역적은 왕이 아니라는 것이죠. 조선 역사상 왕이 이렇게 큰 부정을 당한 적은 없었습니다. 조선이 세워지면서 고려의 선비들이 은둔하긴 했지만 직접 행동으로 나서진 않았고, 그들의 제자들은 조선의 신하가 됩니다. 세조 때 사육신, 생육신이 있었고 이징옥이 있었지만 그 정도였죠. 은둔한 이들도 있었지만 사림의 시작이라 할 김종직부터 세조 때 벼슬을 했습니다. 인조, 효종 때 산당들은 출사를 꺼렸지만 오랑캐에 항복한 조정이 싫다는 거였지 왕이라는 것 자체까지 부정하진 않았습니다.

사람이 죽음 다음으로 (어쩌면 죽음보다 더) 싫어하는 것은 자신이 부정당하는 것입니다. 그게 왕이라면? 자신이 왕이라는 걸 부정당하는 거겠죠. 영조는 즉위 전부터 그게 부정당합니다. 삼수의 옥에서 이미 역적들의 왕으로 여겨진 상태였으니까요. 그건 즉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구요.

보통 왕들이라면 이럴 때 그냥 반대파들을 쓸어버렸을 겁니다. 왕을 부정하는 건 역적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영조는 정반대의 길을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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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빵 필승이라는 생각은 소론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조가 소론 정권을 유지하긴 했지만, 언제 태도를 바꿀 지 몰랐으니까요.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명분, 신임옥사의 확대를 계속 주장한 거였죠. 근 석달 동안 영조는 이를 잘 방어해 냅니다. 그에게도 경종이 옥사 확대를 금지했다는 명분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다 이의연이라는 유생의 상소가 올라옵니다. 오히려 소론을 역적이라 주장한 것이죠. 소론이 죽이라고 나왔지만 영조는 이 또한 방어해 냅니다. 그러자 소론 완론까지 지속적으로 나섰고, 결국 이의연을 국문하게 하죠. 헌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노론에서도 슬슬 반격을 시작한 것이죠. 유생 이봉명이 김일경을 탄핵한 것이었죠. 김일경 역시 벼슬을 떼고 내쫓습니다. 그러다가 양측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이의연과 김일경을 다 국문하게 합니다. 유생과 대신을 동급으로 다룬 것이죠. 공정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의연도 고문당해 죽긴 합니다.

김일경의 죄라 할 명분은 그가 지은 글에서 형제를 죽인 일을 넣었다는 것, 이를 통해 경종과 자신을 그렇게 여겼다는 것입니다만... 김일경의 반론대로 명분이라 하기엔 좀 궁색했습니다.

"신하들이 간사하고 아첨을 잘하는 자를 배척할 때마다 ‘지록위마’를 인용하였는데, 그들 모두가 그 임금을 호해에게 비겼다고 죄를 주었습니까?"

진시황의 아들로 2대 황제가 된 호해, 실권을 쥔 승상 조고는 사슴을 말이라 하면서 다른 신하들이 자기 편인지 시험했죠. 간신을 욕하기 위해 지록위마를 인용한 게 왕을 욕한 게 아닌 것처럼, 자기가 쓴 것도 왕과는 관련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신임옥사 때 간신들이 한 게 진짜 역적이라고 나섰죠.

같이 끌려온 목호룡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회맹단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고한 자는 죽는 법이니, 장차 고한 자로서 죽겠지만, 흉심(凶心)은 없었습니다. 단지 종사(宗社)를 위했던 죄가 있을 뿐이고 다른 죄는 없습니다."

이 말에 영조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의 생각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잇죠.

"종사를 위했던 죄라고 하는 것은 내가 역적을 돌보아 비호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군부(君父)를 대하여 이런 말을 하니, 지극히 흉악하고 교활하다."

회맹단은 공신으로 책봉할 때 충성을 맹세하면서 흘리는 핍니다. 신임옥사 때 공을 세운 걸 말한 것이죠. 네, 그 정도로 영조는 빠르게 상황을 바꿔버립니다. 신임옥사 때의 명분으로 가면 그 자신이 역적이 돼 버리니까요. 이렇게 김일경과 목호룡은 빠른 죽음을 맞습니다.

이렇게 되자 상황은 뒤바뀝니다. 소론 대신들은 스스로 물러나거나 쫓겨났고, 노론들로 다시 바뀐 것이죠. 이렇게 정권이 바뀌자마자 신임옥사에 대한 신원(억울함을 풀어줌), 재평가가 시작됩니다. 건저(여기서는 세제 책봉), 대리는 경종이 후사가 없고 병이 심해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고 삼수의 옥에서 나온 것들은 어디까지나 고문에 의해 나온 진술일 뿐 무고라는 거였습니다. 영조도 바로 찬성했고, 이렇게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노론 4대신이 신원됩니다.

준론의 영수 김일경이 죽고 완론도 숨 죽인 상황, 노론은 소론 자체를 몰살시키려 합니다. 그들의 목표는 소론의 5적, 조태구, 최석항, 유봉휘, 이광좌, 조태억이었죠. 이들을 다 죽이고 (이미 죽은 이들도 역적으로 하고) 소론 자체를 역으로 모는 것이었죠. 토적(적을 토벌함)을 주장한 거였습니다. 헌데 여기서 왕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렇게 3년 정미년까지 토적을 주장하는 노론과 이를 반대하는 영조의 대립이 계속됐고, 그 끝에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죠.

"붕당의 폐해가 나온 뒤부터 점점 더하여 각각 원수를 이루어서 죽이려는 것으로 한계를 삼아왔다. 아! 마음 아프다. 지난 신축년 ·임인년의 일은 그 가운데 반역할 마음을 품은 자가 있기는 하나 다만 그 사람을 죽여야 할 뿐이지, 어찌하여 반드시 한편 사람을 다 죽인 뒤에야 왕법(王法)을 펼 수 있겠는가? 옥석(玉石)을 가리지 않고 경중을 가리지 않아서 한편 사람들이 점점 불평하게 하는 것은 이 또한 당습(黨習)이다. (중략) 신하의 도리로서는 탕평(蕩平)할 마음을 품고 공도(公道)를 힘써야 도리가 당연한데, 만약 지위를 잃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속에 싹트고 무엄한 뜻이 가슴속에 개재되 있다면 다스려야 하겠는가, 다스리지 않아야 하겠는가? 아! 선왕에 대하여 공경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면 후왕에게 어찌 충성한다 할 수 있겠으며, 선왕에 대하여 충성을 다하는 마음이 있다면 후왕에게 어찌 충성하지 않는다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다만 마땅히 인재를 취하여 쓸 것이니, 당습에 관계된 자를 내 앞에 천거하면 내치고 귀양보내어 국도(한양)에 함께 있게 하지 않을 것이다. 사문의 일로 말하면 본디 조정에 올릴 일이 아니니, 만일 다시 어지럽히면 반드시 엄하게 배척할 것이다. 아! 임금의 마음은 이러한데 신하가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내 신하가 아니다."

1727년, 정미년 7월 4일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101명에 달하는 노론을 몰아내고 벌을 줬던 소론 62명의 벌을 거뒀으며, 4대신 중 조태채를 뺀 나머지의 신원을 철회합니다. 그리고 다시 소론 정권으로 바꿔버리죠. 4대 환국의 마지막으로 꼽히는 정미환국입니다.

여기서 영조는 자신의 의지, 탕평을 확고하게 주장합니다. 더 이상 각 당파의 당론만을 주장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거였죠. 그것을 위해 삼수의 옥의 재평가를 철회했고, 곧 자신에 대한 재평가도 뒤로 미룹니다.

탕평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죠. 이후 그가 등용한 이들은 각 당의 온건파, 이후 탕평파로 불리는 이들이었습니다. 당론보다는 왕과 나라를 더 중히 여기는 이들이었죠. 이를 위해 영의정이 노론이면 좌의정은 소론으로 앉히는 등 균형 있게 등용하는 쌍거호대를 시작하죠.

하지만 갈 길은 멀었습니다. 노론 강경파가 먹은 충격이야 당연하겠지만, 그건 소론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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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경이 죽은 후, 소론 준론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어차피 그들에게 영조는 경종을 독살한 찬탈자에 불과했습니다. 김일경이 죽으면서 확실하게 적이 됐구요. 그들은 남인 강경파들과 힘을 합쳐서 영조를 몰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천한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것도 합쳐졌고, 아예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말까지 나왔죠.

+) 무수리는 일개 하녀일 뿐, 궁녀들과 달리 기혼자도 가능했습니다. 이미 남편이 있었고 그 남편의 아들이라는 논리였죠. 하지만 영조 이전에 낳은 아들도 있으니 선동일 뿐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소론 정권이 만들어집니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계획을 바꿀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소론 완론은 역적과 손 잡은 이들일 뿐이었으니까요. 이들이 결국 일을 벌이니 1728년, 영조 4년의 이인좌의 난입니다. 무신년이라 무신란이라 부르기도 하죠.

이전에도 반란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의 반대파 개인을 중심으로 일부 지역에서 일으키는 정도였죠. 한양에서 일어난 반란들도 그렇고 이징옥, 이시애의 난부터 정여립, 이몽학, 이괄의 난 역시 그 지역에서만 일어났습니다. 이후에도 그랬죠. 홍경래의 난이 컸다 하나 평안도에 집중돼 있었으니까요. 후기의 민란들은 전국적이었지만 성격이 달랐고, 왕을 부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동학 역시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이인좌의 난은 충청, 전라, 경상의 하삼도와 평안도까지 뻗습니다. 전국적인 규모였죠. 이들 모두가 영조를 부정하면서 일어난 거였습니다.

다행이랄지, 계획은 영 치밀하지 못 했습니다. 다 따로따로 일어나서 각개격파 당했으니까요. 이인좌는 충청도에서 일어나 계략으로 청주성을 먹고 한양으로 진격했지만, 토벌군 오명항이 효과적으로 막아내면서 쉽게 격파됩니다. 전라도에서는 태인 현감 박필현이 일어나 전라 감영으로 진격했지만, 내응하기로 했던 정사효가 이인좌의 패배 소식을 듣고 성문을 열어주지 않으면서 스스로 무너집니다. 경상도에서는 이응보와 정희량 등이 일어나 거창, 합천 등을 점령하고 나름 오래 버텼지만 역시 얼마 안 가 토벌됐죠. 한양과 평안도에서의 거병은 하기도 전에 진압됐구요.

한 나라의 왕에게 있어 자신이 왕이라는 걸 부정당하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은 없을 겁니다. 영조는 그걸 당한 거죠. 하지만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습니다. 정말 엄청난 인내력을 보여줬죠.

만약 영조가 노론의 주장을 받아 소론 완론까지 다 쓸어버리려 했다면 반란은 더욱 커졌을 겁니다. 아예 막아낼 수 없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정반대의 상황이 나왔습니다. 이광좌가 모든 걸 통솔했고, 이인좌를 상대한 오명항과 그를 수행한 박문수, 조현명 등은 모두 소론이었습니다. 이걸로 소론 완론은 자신들의 능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들의 영조에 대한 충성심을 다시 보여줬죠. 덕분에 그 큰 반란은 최소한도로 그쳤고, 피 역시 주모자들 일부로 한정됩니다. 탕평정치의 효과가 시작하자마자 나온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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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탕평이라고 정말 둘이 동등하게 될 순 없었습니다. 준론이 일으켰다 하나 소론이었고, 소론은 그 점에서 큰 약점을 가지게 됐으니까요. 그리고 영조의 정통성은 결국 노론에 있었습니다. 탕평은 결국 노론이 횡포를 막으면서 소론을 지켜주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면서도 소론에게도 큰 양보가 필요했죠.

다음 해, 소론측 탕평파인 송인명이 영조에게 한 가지 건의를 합니다. 건저와 대리는 역이 아니라 충이라는 거였죠. 또한 삼수의 옥에 관련된 4대신 중에서도 이건명, 조태채는 역모와 관련이 없다는 거였습니다. 나머지 두 명 김창집과 이이명은 각기 아들과 손자가 역모에 가담했으니 역모가 맞겠지만요. 반충, 반역, 이게 소론 탕평파의 타협이었습니다.

양쪽 강경파는 당연히 반대했죠. 4명 다 역이면 역이고 충이면 충이지 어찌 두 명만 역이고 두 명은 아니냐는 거였습니다. 영조는 이 둘을 다 물리치고 반충반역의 재평가를 내리니 기유처분입니다.

물론 노론 강경파들은 계속 반대하고 나섭니다. 그들에게 있어 소론은 역적일 뿐이었으니까요. 토적 주장이 계속됐고, 영조는 이들을 당론에 젖었다며 쫓아내고 다시 부르기를 반복합니다. 그들의 공격은 주로 유일하게 살아있던 5적 이광좌에게 집중됐는데, 왕이 대신을 감히 이름으로 부르냐고 하는데도 '노론에선 애들도 광좌라고 부른다'고 나올 정도였습니다.

영조의 노력도 계속됐죠. 양쪽 강경파이자 수장인 이광좌와 민진원의 손을 잡게 하면서 화해하게 했고, 민진원이 죽자 수장이 된 김재로도 불러서 이광좌와 손을 잡게 합니다. 영조의 논리는 소론에도 역이 있고 노론에도 역이 있으니 이들은 쫓아내고 탕평하자는 거였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이를 위해 영조는 계속 시위를 계속해야 했습니다. 정사 보는 것을 거부하고, 단식 투쟁을 하고, 세자에게 양위하겠다고 나선 것이죠. 그 때마다 신하들은 눈물을 흘리며 만류하면서 '당론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합니다. 그 주요 대상이야 탕평을 거부한 노론이었겠지만, 이를 통해 소론 역시 왕의 뜻으로 기울게 됩니다.

+) 세자의 고생은 이 때 이미 시작되었죠.

그리고 소론 준론과 남인은 반역을 멈추지 않았구요. 맨 위에서 얘기했던 효장세자를 독살했다는 순정, 그녀에게 독을 준 것은 정사효 등을 중심으로 한 무신란의 잔당이었습니다. 순정이 죽은 지 얼마 안 가 최필웅이란 자가 화약으로 궁을 불태우려다 걸리는데 이 역시 배후엔 이들이 있었죠. 개인적인 불만을 품은 이들을 포섭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정사효는 무신란 당시 내응을 포기했던 전라 감사, 이 때 다시 가족과 친인척들을 모아 계획을 꾸민 거였습니다. 이게 사전에 들통나면서 또 다시 피바람이 불었죠. 이 때 발견된 책에서 김일경, 목호룡을 띄우면서 이들이 영조를 '나리'라 불렀다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들에게 있어 김일경은 성자가 되어 있었죠.

+) 사육신 패러디인데, 사육신 역시 실록에 국문 과정이 나와 있는만큼 나리라 불렀다느니 조카라 불렀다느니 하는 건 육신전에 나온 창작일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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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론에 대한 토적은 막았지만, 삼수의 옥에 대한 신원은 영조 역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할 수 없었고,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죠. 이광좌 등 강경파는 노론의 공격에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고, 그 이광좌도 죽으면서 소론은 탕평파 위주로 흘러갑니다. 슬슬 때가 된 것이었죠. 다수파는 결국 노론이었고, 영조는 노론의 주장에 본격적으로 힘을 실어줍니다. 남은 두 대신의 신원, 삼수의 옥에 대한 완전한 재평가였죠.

영조가 이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소론은 기유처분을 들어 반대했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또 신난 노론이 소론을 다 쓸어버리자고 주장했다가 또 강경파들이 쓸려나가기도 했죠 (...) 마침 이광좌가 죽으면서 소론의 반대는 더 이상 힘을 얻지 못 합니다. 영조는 먼저 왕위에서 물러나겠다는 쇼를 벌인 후 계획을 진행합니다.

영조 16년, 남은 두 대신 김창집,이이명이 신원되었고 다음 해에는 삼수의 옥의 명단, 삼수역안을 불태워 버립니다. 이름도 임인국안으로 바꿨죠. 영조야 다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소론의 동의를 받으려면 그럴 순 없었습니다. 이름을 임인국안으로 바꾸고, 확실히 역모와 관련됐다 할 5명을 따로 두게 됩니다.

이 때가 영조 17년, 이렇게 재평가를 완료한 것이죠.

여기까지 오면 영조의 본심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의 신원을 위해선 신임옥사는 모두 역모가 아니어야 했습니다. 힘으로만 한다면 소론을 다 쓸어버리면 됐죠. 이인좌의 난이라는 아주 좋은 명분도 있었구요. 하지만 그래선 안 됐습니다. 자신이 무죄라는 게 '노론의 당론'이면 안 됐으니까요. 당론이 아닌 모두가 동의하는 진실이 돼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소론의 동의가 필수였죠. 그는 노론의 왕이 아니라, 조선의 왕이어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이 때, 소론의 동의를 받아 자신의 신원을 이루어냅니다. 무려 17년이나 걸린 기나긴 길이었죠. 경종이 신축옥사를 통해 진정한 왕이 되었다면, 영조는 이 때서야 진정한 왕이 됐다 할 수 있을 겁니다. 정말 기나긴 계획이었고, 대단한 인내였습니다. 소론이 힘을 많이 잃긴 했지만 둘 중에 하나가 다 죽어야 끝날 것 같던 상황이 이렇게 최대한 피를 덜 흘리고 완성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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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이게 다 끝났냐 하면... 또 아니었죠. 영조의 열등감은 평생 그를 짓눌렀을 겁니다. 준론이 아직 다 안 죽었고, 끝까지 그를 인정하지 않았거든요. 24년에 이미 무신란 잔당이 또 한 번 일을 일으키려다 일망타진됐고, 31년에는 '나주 괘서 사건'이 일어납니다. 역시 무신란 잔당인 윤지가 일으킨 거였죠. 그는 영조를 까는 글을 퍼뜨리면서 다시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이를 통해 또 여럿 죽었죠. 하지만 이들이 그냥 조용히 죽어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얼마 후에 영조가 직접 보는 가운데 과거가 있었는데, 여기서 심정연이란 자의 답지에서 소론 준론의 주장 그대로가 나옵니다. 국문을 시작하자 참 당당하게 그게 자신의 생각이라면서 생각을 같이한 자들을 말하죠. 줄줄이 끌려왔고, 다들 같은 말을 합니다. 자기들이 옳다는 것, 김일경이 옳다는 것, 소론이 옳다는 것 말이죠. 이런 말까지 나옵니다.

"성상께서 이미 이처럼 의심하시니, 신은 자복을 청합니다. 신은 갑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逆心)이며, 심정연의 흉서 역시 신이 한 것입니다." - 신치운

말 그대로 나 잡아 죽이소 하는 말입니다. 이 기간의 옥사로 죽은 이들이 200여명이라 합니다. 소론 준론은 마지막까지 영조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힘이 있으면 반란을 일으켰고, 그 힘을 모두 잃자 이렇게 마지막까지 영조를 건드리고 죽음을 택했죠. 서른 하나에 왕위에 오른 영조는 60대가 되어서도 자신을 부정당한 거였죠.

+) 만약 경종이 계속 있었다면 노론 강경파들도 이렇게 했을 것 같네요. 대체 무엇이 그들을 이리 만든 건지.

탕평이 노론으로 기운 건 기본적으로 영조가 노론 편일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준론 역시 이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반란이 계속되니 소론은 그저 살려줍쇼 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죠. 대표적으로 박문수가 있습니다. 옥사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나왔고, 영조가 그를 보호했지만 스스로 물러납니다. 이후 속죄의 의미로 세수도 빗질도 안 했다고 하죠.

영조부터도 소론에 너무 온건하게 나왔다고 생각하게 됐구요. 이 때 자신의 벌이 너무 너그러웠다면서 노론의 요구였던 조태구, 유봉휘를 역적으로 하고 죽은 이광좌의 관직도 없애 버립니다. 물론 명분일수도 있고, 이 때는 영조가 충분히 고집불통이 된 터라 이게 아니었어도 그럴 수는 있겠습니다. 그래도 노론이 이걸 소론 전체로 확대하려고 하자 '이광좌는 그냥 그 때 소론의 영수였던 죄밖에 없는데 왜 소론 역사 전체로 거슬러 올라가냐'는 식으로 노론에게 역정을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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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이 계속됐지만 소론은 갈수록 힘을 잃었고, 노론 천하가 됩니다. 힘도 힘이지만 결국 노론의 명분을 들어줘서 소론이 명분을 다 잃어버린 탓도 있었죠. '자신들의 의리'를 완전히 잃은 거니까요. 이후에도 소론은 계속 살아남았지만 개인 단위일 뿐 집단이 되지 못 합니다. 정조 역시 이에 대해선 노론 편을 확실히 들었구요.

나중에 가면 상황이 더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노론을 견제한다는 건 같았지만, 정말 자신의 뜻만을 따를 이들을 중히 한 것이죠. 그럴려면 역시 피가 이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외척이죠. 세자의 장인 홍봉한을 비롯한 홍씨 가문이었습니다. 탕평의 끝이 아이러니하게도 척신 정치라니... 어쩔 수 없는 게 탕평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왕권 강화였으니까요. 영조가 너무 늙은 탓도 있을 겁니다. 더 복잡하게 살기 싫었겠죠. 이 홍봉한의 '탕평당'이 영조의 뜻을 따르는 데는 좋았고, 영조의 권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절대권력에 가까워집니다. 하지만 늙을수록 이들의 권력이 더 세지는 건 당연했습니다. 이에 맞서 소장파들이 '청명당'으로 이들과 대립합니다. 헌데 여기서도 정순왕후의 가문인 김귀주를 비롯한 김씨들이 있었다는 거였죠. 정조는 즉위 후 이 외척들을 사이좋게 숙청하고 다시 탕평을 외칩니다. 헌데 그 끝도 척신정치가 돼 버렸죠.

+) 영조의 탕평은 이렇게 자기의 당보다 왕의 뜻을 더 따르는, 온건파를 위주로 해서 '완론 탕평'이라 부릅니다. 반면 정조는 노론이 확실히 충이 맞고 소론은 다 잘못됐지만 나는 다 등용하겠다. 니들 다 니들의 '의리'를 마음껏 펼쳐라면서 강경파도 받아들이는 '준론 탕평'을 했죠. 정조의 탕평 역시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점들이 있다고 그의 탕평을 폄하할 순 없습니다. 일단 상황이 극단적으로 흐르는 걸 확실하게 막아냈으니까요. 정말 최선을 다해서 타협을 한 거구요. 노론 천하가 됐다 한들 박문수 등 소론 명신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싸움보다 국정에 더 신경쓴다는 목적도 충실히 이뤄냈습니다. 균역법부터 왕족들이 재산을 축적하는 걸 제한하고, 서원을 제한하는 등 꽤 강력한 정책을 폈던 것들 말이죠.

거기다 숙종 때부터 역적으로 몰리고 영조 때도 역모를 했던 남인 역시 다시 등용합니다. 특히 체제공은 정조 때 자신들의 '새로운 의리'를 들고 나와서 벽파와 대결했죠. 탕평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었고, 노론 천하가 훨씬 더 심화됐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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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경종을 정말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정말 그 자신만이 알겠죠. 그 자신을 왕으로 앉혀줬지만, 평생을 시달릴 약점을 준 것도 경종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재위기간은 경종의 유산을 이겨내는 시간이었죠. 말로는 정말 황형(왕의 형)의 은혜를 평생 부르짖습니다. 경종이 자신을 지켜준 게 아니라면, 경종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안 됐을 테니까요. 영조가 경종을 부르짖은만큼 그의 컴플렉스가 심했다는 것이죠. 물론 진짜 형이 고마웠을 수 있습니다. 고마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죠. 하지만 정말 그가 형을 사랑했을지, 그냥 겉으로 좋은 가족인 척 했을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무려 50년에 이르는 영조의 집권을 글 한두개로 더 파 보기는 힘들겠죠. 탕평과 그 자신의 신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의 아들 얘기를 해야겠죠.

위의 사실들과 함께 생각해 봅시다. 정말 힘든 왕 생활을 했습니다. 끝 없는 열등감과 분노에 시달렸겠지만, 그걸 모두 이겨내고 인내와 끈기로 계획을 세웠고, 성공했습니다. 정말 치열하게 살았죠.

그의 아들에게도 그게 필요했습니다. 아버지가 한 것을 완벽하게 이어줄 아들 말이죠. 자신이 치열하게 산 만큼, 자식도 치밀하게 왕이 될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자기처럼 힘들게 살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거기다 세상 좋아졌잖아요. 아버지는 목숨을 걸 위기를 계속 넘겼지만, 세자는 왕 될 준비만 하면 됐습니다.

네, 그렇게 크게 기대를 걸었을 겁니다. 자기 아들에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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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하게 길어졌네요 =_=; 전에 쓰다가 날려서 시간이 더 걸렸고, 두 개로 쪼개다간 다음 편은 더 늦어질 것 같아서요.
후... 그럼 사도세자 얘기로 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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