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6/10/21 14:49:21
Name   마르코폴로
Subject   골목길을 걷다가




밤에 산책 나서는 걸 좋아합니다. 주로 인적 드문 골목길을 찾아 걷곤 하죠.
제가 사는 곳이 서울의 구시가지, 종로이다 보니 좁고 어두운 뒷골목이 많습니다.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걷다 보면 자주 만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길에서 사는 고양이들이죠.
예전엔 어두운 길에서 고양이와 만나면 화들짝 놀라곤 했는데, 요즘은 으레 고양이일 거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크게 놀라는 일은 드뭅니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저보단 고양이가 더 놀랄 일이죠.
자신보다 크고 힘센, 자신을 해할 수도 있는, 무언가를 좁은 골목길 모퉁이에서 만났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실제로 저와 맞닥뜨린 고양이들은 기겁하며 도망가곤 합니다.

며칠 전 평소와 다름없이 삼청동 골목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골목길 모퉁이를 도는데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오더군요.
저야 자주 겪는 일이라 그러려니 했지만 상대방은 깜짝 놀란 듯 했습니다.
20대 초중반의 여성분이었는데, 너무 놀라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더군요.
그 낯빛에 덩달아 저도 놀랐네요.
저도 모르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게 되더라고요.

요즘 마을버스 정류장 근처를 지나다 보면 노란 조끼를 입은 여성분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여성 안심귀가스카우트들입니다. 밤길에 홀로 귀가하는 여성들을 위해 서울시에서 마련한 제도죠.
종로구같이 어두운 골목길이 많은 동네에선 특히 유용한 제도 같습니다.
한편으론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불안과 공포가 제도로써 실체화된 사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과 동행하는 어색함이 불안과 공포보단 훨씬 견딜만한 종류의 것이겠죠.

어제 여성 안심스카우트를 보다가 문득 며칠 전, 저와 골목길에서 마주쳤던 여성이 생각났습니다.
길고양이만큼이나 놀라던 그 낯빛이 떠올랐죠.
고양이가 사람을 보고 놀라 도망치는 이유는 긴 세월, 많은 세대 -길고양이의 평균 수명은 3년 정도입니다-를 거치며 몸으로 겪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겠죠.
이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내재된 공포가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요즘 인터넷 상에서 남성 역차별 등에 관한 말이 많습니다. 서브컬쳐, 메갈리아, 워마드 사태로 인해서 페미니즘 전반에 대한 조롱도 꽤 보이고요.
그 밖에 다른 논란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죠.
그런데 어제 우연히 안심스카우트의 안내를 받으며 귀가하는 여성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아직도 더 많은 여성주의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죠.


사진은 구글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10-31 09:43)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5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39 일상/생각냉장고에 지도 그린 날 4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7/01/06 5976 15
    218 일상/생각겨자와 아빠 7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6/06/14 6043 14
    98 문학[조각글 2주차] (1주차와 약간 믹스, 약 기독) 노래는 가사지 18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5/10/30 6374 14
    1300 정치/사회편향된 여론조사를 알아보는 방법 10 매뉴물있뉴 23/05/18 2875 25
    1110 과학예측모델의 난해함에 관하여, .feat 맨날 욕먹는 기상청 47 매뉴물있뉴 21/07/25 6218 42
    1080 정치/사회택배업계의 딜레마 19 매뉴물있뉴 21/04/16 5224 11
    1310 과학(아마도) 후쿠시마 오염수가 안전한 이유 25 매뉴물있뉴 23/07/09 2809 13
    565 일상/생각20~30대에게 - 나이 40이 되면 느끼는 감정 25 망고스틴나무 17/12/24 9193 41
    318 기타아직도 이불킥하는 중2병 썰, 20 마투잘렘 16/12/06 7923 16
    1101 역사왜 작은 어머니를 숙모라고 부를까. 24 마카오톡 21/06/30 5264 24
    171 창작[조각글 18주차] 궁극의 질문 9 마스터충달 16/03/13 5870 4
    150 정치/사회생생함, 그 이상의 효과 38 마스터충달 16/02/05 6216 17
    288 일상/생각골목길을 걷다가 20 마르코폴로 16/10/21 6840 5
    205 요리/음식덴뿌라와 튀김의 기원 29 마르코폴로 16/05/14 15075 11
    187 요리/음식한식판 왕자와 거지, 곰탕과 설렁탕 45 마르코폴로 16/04/18 9648 13
    124 문학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12 마르코폴로 15/12/03 8299 6
    117 기타연말, 연초에 선물하기 좋은 와인 30 마르코폴로 15/11/24 8222 7
    92 기타세계화, 무역 그리고 전염병 12 마르코폴로 15/10/20 8446 11
    78 요리/음식중국의 면과 젓가락문화 22 마르코폴로 15/09/22 12994 8
    64 역사원자폭탄을 두번 경험한 남자 5 마르코폴로 15/08/29 9580 1
    60 요리/음식더운 여름에 마셔볼만한 값싸고 시원한 화이트와인 13 마르코폴로 15/08/11 11152 2
    56 요리/음식마트 와인 코너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을 위한 팁(드라이 스파클링 와인편) 8 마르코폴로 15/07/30 12008 1
    55 요리/음식마트 와인 코너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을 위한 팁(달콤한 스파클링 와인편) 23 마르코폴로 15/07/28 9764 1
    54 요리/음식연인 혹은 아내에게 선물하기 좋은 의미를 가진 와인(~3만원이하) 26 마르코폴로 15/07/27 10233 1
    48 요리/음식콩국수, 서민음식과 양반음식의 하이브리드 33 마르코폴로 15/07/21 7343 0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