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7/08/03 18:58:05
Name   알료사
Subject   여친 이야기
타임라인에 적다가 생각보다 길어질것 같아 또 티타임으로 건너옵니다.. 저도 투머치토커의 기질이 어느정도 있는거 같네요..

제대로 만나기 전, 소위 썸탈 때부터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타임라인과 티타임에 올렸었습니다. 이미 추측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때 그 사람과 결국 사귀게 되었습니다.


여친이 부자입니다. 집안도 부자고 본인도 부자입니다. 집안 쫄딱 망해도 본인 혼자 온가족 부양하고 잘 살수 있어요.

저는 거지에요. 부양가족도 없고 (어머니가 계시지만 제가 부양하는게 아닙니다) 잉여스러운 직업에 종사하고 그럭저럭 삼시세끼 챙겨먹고 값싼 취미생활 정도는 하고 있지만 어차피 이런건 상대적인 거니까요. 간신히 제 한몸 건사하는 인생입니다.

사귀기 전에 여친이 부자인걸 몰랐습니다. 저한테 너무 잘해주고 진심이 느껴져서 긍정적으로 만나 볼까 생각하던 순간에 부자라는걸 알게 되자 안되겠다고 속으로 거리를 뒀어요. 만약에 여친이 자신의 부를 숨겼다면 사귀는 시기가 훨씬 앞당겨졌을 겁니다. 이사람을 만나는데 가장 걸림돌이 됐던 것은 부끄럽게도 '돈많은 여자한테 한번 빌붙어 볼까'하는 제 속마음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었어요. 또 그런 마음으로 만났다가 버려졌을 때의 제 모습이 얼마나 꼴불견일까 상상하니 도저히 관계를 진전시킬 수가 없었어요. 사귀기 시작한 이후에도 조금만 다툼이 있어도 제가 연락을 끊었습니다. 그런 다툼을 이 두려운 만남을 중단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았던 거죠. 이런 놈이니까 이제 날 차버려.. 그런 태도였죠..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 입장으로 기다렸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여친은 저에게 화를 내고 제 잘못을 추궁하면서도 저를 차지는 않았어요. '너가 잘못한걸 인정하고 개선의 의지를 보여라'하고 계속해서 요구했어요. 여친의 요구에는 제가 여태까지 살아왔던 전반적인 가치관에 수정을 가해야 할 것들도 꽤 있어서 저는 최소한의 자존심으로도 거기에 굽힐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묵묵부답으로 있으면 결국 여친이 '나랑 안만날 생각이냐.' 라고 물어오곤 했어요. 짜증났어요. 어차피 차는 것은 본인이면서 헤어지자는 말은 왜 나한테 떠넘기는거야. 그런 생각이었죠. 그래서 개떡같이 사과하면서 매달렸습니다. 나는 너한테 매달린다. 하지만 사과는 제대로 안한다. 빨리 헤어지자고 해. 이런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를 받아들일 리는 없겠지.

그러면 항상 못 이긴척 여친이 제 사과를 받아들이고 관계는 이어졌어요..

여친은 정말 저를 아껴 주었고 자주 저를 감동시켰습니다. 신기하게도 자신의 부를 사용하지 않는 방식으로요.. 그런데도 워낙에 살아온 환경과 방식이 차이가 크게 나다 보니 갈등이 생기고 보이지 않는 신경전도 일상이었어요.

가장 괴로운 것이 게임과 책에 대한 태도였어요. 전화가 와서 뭐하냐고 물었을 때 게임중이라고 대답하면  "또?ㅋ" 하고 웃는데.. 제 열폭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때마다 기분이 너무 나빴어요. 막상 제가 '나 게임하는거 싫어?' 하고 물으면 죽어도 싫다고는 안합니다. 그런데 대화하다 보면 게임하는건 시간이 아깝다는 식의 이야기를 돌려서 합니다. 본인이 의식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거기서 제가 또 따지고 드는건 너무 치사한거 같아서 그냥 넘어가곤 하는데 그런 것들이 장작으로 쌓여 어느 순간 불이 붙었죠.. 몇번 붙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또 연락 끊고 빨리 나 차버려.. 게임하는 남자따위 싫잖아.. 하고 배 쨌구요.. 이런 일이 반복되자 이제는 꽤 이해해 주는듯 합니다.. 사람이 만나다 보면 싸울수도 있는데 왜 넌 자꾸 헤어지려 하냐고 그런 식이면 누구를 만날 수 있겠느냐고 구박을 하긴 하지만.. 책에 대해서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싫어합니다.. 예전부터 좋아했던 도끼나 이문열도 그렇고 여친과 만나던 시기에 읽던 필립로즈나 마거릿 에트우드 같은 작가들도요.. 그런거 읽으니까 자꾸 너가 어두워지는거다.. 라고.. 이건 그냥 내겐 유흥일 뿐이다 내 성격하고는 상관 없다.. 라고 하면 상관 없을리가 있겠느냐고.. 그래도 다행인건 책 쪽은 여친도 어쨌건 책을 읽는거 자체를 나쁘게 보진 않아요..  뭐라 하면서도 본인도 다 읽은 책들이고..

썸에서 사귀는 관계로 이어질락 말락 할 시기에 정말로 헤어진적이 있습니다. 그때 티타임에도 그 이야기를 올렸었구요. 딱 일주일 안만났어요.

일주일 후에 여친한테 연락이 와서 교양수업 중국어 시간 과제로 중국 영화 보고 감상문 쓰는거 있는데 DVD방 가서 보려고 한다, ㅇㅇ에 한군데 있는걸로 아는데 정확한 위치를 모르겠다, 같이 좀 가주라, 사례로 밥 사주겠다... 라는 겁니다.. 같이 가긴 뭘 같이가.. 네이버 지도랑 실제 거리 사진 여러 각도에서 캡쳐해서 보냈습니다. 이거 보고 찾아가라고.. 길치라 이런걸로 도저히 못찾겠답니다.. 사실 이런 상황은 상대도 알고 저도 아는거 같아요.. 상대도 사실 저 만나고 싶은 거고 그걸 거절하지 못하는 한 저도 상대를 만나고 싶은 거겠죠.. 겉으로는 인정 안하지만.. 네 결국은 DVD방 찾아준다는 핑계로 다시 만났습니다. 밥 먹으면서는 정말 헤어진 옛 연인 대하듯 했는데 DVD방 들어가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 하더라구요. 그때 내가 그런 말 했던거는 그런 의도는 아니였는데 왜 너는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느냐.. 어쩌고 저쩌고.. 제가 물었어요. 맨날 물었던 질문.. 왜 나한테 잘해주는데? 예전에는 이런저런 종류의 대답을 했었는데 그날은 잠깐 침묵하다가 몰라! 하고 소리지르면서 울더라구요.. 남자의 주먹과 여자의 눈물은 반칙이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만큼 힘이 쎈걸요.. 외면할 도리가 없었어요. 결국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친은 교우관계가 매우 폭이 넓습니다. 그중에 남자들도 많구요.. 한번은 어떤 남자가 계속 만나자면서 귀찮게 군다고 저보고 같이 가서 좀 못따라다니게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고.. 본인이 만나는 이런저런 남자들 이야기를 하면서 얘는 이래서 마음에 안들고 쟤는 저래서 마음에 안들고 그러는걸 듣고 있자면.. 다들 저랑은 비교도 안될 정도로 괜찮은 남자들인겁니다.. 내 주위에는 이정도로 괜찮은 남자들이 많다고 자랑하는거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너도 나한테 잘하라고 경고하는것 같기도 하고.. 제가 묻습니다..  도대체 나를 왜 만나는거냐고.. 내가 좋기는 한거냐고.. 그럼 모르겠대요..

가장 잘 통하는 부분은..  약간은 19금 같기도 해서 민망한데 육체적인 교감 쪽입니다.. 꼭 잠자리까지 얘기하지 않아도.. 그냥 꼭 안고 있으면 정말 좋아요. 모두들 퇴근한 직장에서든 차 안에서든 좀 으슥한 상가건물 복도나 지하주차장이든 학교든.. 시도때도 없이 제가 찾아가기도 하고 여친이 찾아오기도 하고 해서 그냥 아무 말 없이 손 잡고 있고 안고 있고 그러다가 전후사정 다 생략하고 미안해.. 아니야 내가 미안해.. 그러면 그때까지 싸웠던게 다 시시하게 느껴져요.. 평생 게임 안하고 살 수 있을거 같고 도끼랑 이문열 다 소각해버릴 수 있을거 같아요..

제 생활에 대한 이런저런 간섭들도 이제는 없으면 서운해질거 같은 것들도 있어요. 예를 들면 전화와서 밥 먹었어? 응. 뭐 먹었어? 라면. 이러면 라면 먹지 말랍니다. 왜~ 라면이 얼마나 맛있는데~ 하고 대수롭지 않게 몇번 넘기고, 그러다가 자꾸 너 라면 먹으니까 속상해. 하고 웁니다 ;;; 아니 무슨 라면 먹는다고 우나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하다가도 어느순간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지더라는 겁니다..  영어나 컴퓨터 등 이런저런 공부도 막 시키는데 처음에 건성으로 응 할께 ~ 하고 얼렁뚱땅 넘어가려는데 진짜로 인강 아이디 공유해주고 기출문제 프린트해주고 그러는겁니다.. 이건 곤란하다 싶어서 아니 이나이에 무슨 공부야 공부는.. 이러면 공부에 시기가 어딨냐고 계속 잔소리해요.. 이런 구속감을 느끼는게 정말 오랜만인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묘하게 싫지가 않아요.. 정작 게을러서 공부는 안하지만..

홍차넷이 유부남 유부녀 형누나들이 많아서 이런 글을 써도 비교적 죽창 덜 맞는 분위기라 좋습니다...ㅎ 다른 분들도 타임라인에서 남친 여친 이야기 자주 올리시니 저도 비교적 눈치 안보고 올립니다. 임지금 유튜브 보다가 남녀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제 케이스는 어떤가 생각해 보다가 스스로 정리하는 의미에서 수다 떨어 봤는데 전혀 정리되지 않은거 같네요 ㅎ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08-14 08:13)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8
  • 춫천
  • 죽창
  • 예쁜 사랑하세요~ 이 멘트 볼때마다 식상하다 생각했는데 역시 많이 쓰이는 표현은 다 이유가 있는 듯..ㅋㅋ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02 IT/컴퓨터컴쫌알이 해드리는 조립컴퓨터 견적(2017. 9월) 25 이슬먹고살죠 17/08/29 8632 23
419 정치/사회동성애 이슈와 팬덤정치 이야기 137 기아트윈스 17/04/26 8631 34
221 일상/생각홍씨 남성과 자유연애 62 Moira 16/06/22 8627 14
26 문학문학을 사랑하는 고등학생께 14 니생각내생각b 15/06/14 8618 0
477 역사백작이랑 공작이 뭐에요? 24 Raute 17/07/20 8601 15
397 과학명왕성이 행성 지위를 상실한 이유와 복귀 가능성 16 곰곰이 17/03/24 8596 15
403 꿀팁/강좌움짤을 간편하게 만들고 업로드해보자 (데이터 주의) 6 익금산입 17/04/01 8584 16
497 영화그레이스 켈리를 찾아서 15 구밀복검 17/08/20 8573 8
27 역사두 신화의 엔딩 17 눈시 15/06/16 8526 0
220 게임트위치를 다음팟으로 보기 (이미지, 2MB, 재업) 10 메리메리 16/06/19 8499 4
23 문화/예술레코딩의 이면 그리고 나만의 레퍼런스 만들기 30 뤼야 15/06/12 8490 0
16 문학남자의 詩, 여자의 詩 11 뤼야 15/06/08 8478 1
149 역사일본군이 져서 분하다는 말 19 Moira 16/02/05 8476 13
6 일상/생각잘 지내요?.. (2) 9 박초롱 15/06/04 8447 0
430 문학[인터뷰 번역] 코맥 매카시의 독기를 품은 소설(1992 뉴욕타임즈) 8 Homo_Skeptic 17/05/13 8443 6
486 일상/생각여친 이야기 28 알료사 17/08/03 8441 28
42 요리/음식이탈리안 식당 주방에서의 일년(3) 20 뤼야 15/07/08 8430 0
594 체육/스포츠축구에서 세트피스 공격은 얼마나 효과적일까 11 기아트윈스 18/02/18 8429 13
384 일상/생각(변태주의) 성에 눈뜨던 시기 12 알료사 17/03/10 8426 21
76 문화/예술goodbye. printmaking 18 1일3똥 15/09/24 8421 4
141 꿀팁/강좌만장일치의 역설 30 눈부심 16/01/11 8418 11
410 꿀팁/강좌원룸 구할 때 고려해야 할 것 (#원룸 #부동산 #월세 #자취) 5 이슬먹고살죠 17/04/12 8416 7
498 문화/예술브로드웨이와 인종주의 - 흑인 배우가 앙졸라스를 할 때 16 코리몬테아스 17/08/22 8412 8
46 요리/음식이탈리안 식당 주방에서의 일년(5) - 마지막 이야기 48 뤼야 15/07/11 8403 0
485 과학알쓸신잡과 미토콘드리아 7 모모스 17/08/02 8397 10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