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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9/02 23:32:29
Name   호라타래
Subject   10년전 4개월 간의 한국 유랑기 #완
버스를 타고 강진으로 향했다. 눈은 계속해서 내렸다. 눈덮인 강진은 교과서에서 사진으로 보던 7~80년대 도시를 닮아있었다. 김영랑 생가를 방문했다.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생가 뒤쪽으로는 야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 있었다.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이었다. 초입에는 다산초당의 이름을 내걸고 음식을 파는 집들이 모여있었다. 그 중 한 집은 전 군수가 차린 집이었다. 얼굴을 내건 현수막이 속이 뻔해 보였다. 몇 분 걸어 올라가자 다산 초당이 나왔다. 밖에서만 보고 있으니 감흥이 크지는 않았다. 이어진 길을 따라 더 위로 올라갔다. 잿빛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발은 더욱 거세졌다. 표지판을 보고 백련사로 향했다. 점차 동백나무가 보이기 시작했다. 백련사는 고요했다. 경내를 거닐다가 스님과 한담을 나누었다. 스님은 여기서 묵고 가라고 권유를 했다. 게임 모임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던지라 거절했다. 강진 읍내로 내려왔을 때는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사우나와 찜질방이 보이지 않아 보성으로 이동했다. 녹차밭 때문에 관광객들이 좀 있을테니 강진보다 잘 곳을 구하기 편하리라는 계산이었다. 잘못된 계산이었다. 잠자리를 찾아 보성읍내를 한참을 돌아다녔다. 날이 추워 아무데서나 잘 수는 없었다. 결국은 교회의 문을 두드렸다. 사정을 설명하자 밴드부 연습실을 내어주고, 따뜻한 장판에 이불도 깔아주었다. 그렇게 한 해가 끝났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교회에는 아무도 없었다. 감사의 편지를 써두고 밖으로 나왔다. 보성 차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어제보다는 포근했다. 차밭에는 가족 관광객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얼은 길을 걸으며 휘청거렸다. 차밭을 옆에 두른 자그마한 숲을 지나고 또 작은 못을 지나니 광고에서 많이 보던 언덕 차밭이 나타났다. 차밭도 머리 부분은 하얗게 새어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회색이었다. 차밭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숲 속에서 정자를 발견했다. 아쉽게도 문은 잠겨있었다. 밖으로 돌아나오니 눈사람들이 불어나 있었다. 돌아가는 버스는 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같이 버스를 타던 여성 2분과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순천으로 가는 버스가 너무나도 따뜻해서 잠에 빠졌다.

순천에는 야학교에서 만난 친구가 살고 있었다. 내가 동아리에서 제명당할 때 나보다 더 슬퍼했던 친구다. 별 생각없이 순천에 왔다고 문자를 보냈는데, 마침 새해라 순천에 내려와 있었다. 친구는 오늘은 어디서 자냐고 물었고, 나는 얼버무려 넘어가려고 했다. 여행 기록에는 감사가 많이 쓰여있지만, 거부당한 경험도 많았다. 날이 추워서 그랬는지, 피곤해서였는지 이번에도 거절을 경험하면 가슴이 많이 아플 것 같았다. 그 친구에 대해서는 항상 좋은 기억만 가지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친구는 먼저 자신의 집에 오라고 이야기를 했다. 친구의 가족을 보면서 다시금 놀랐다. 과 선배의 가족들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다. 저녁 시간에 가족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생경했다. 단란함에 끼어들기가 힘들었다. 나와는 다른 세계라는 생각을 했다. 저런 세계에서 자랐으니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따뜻한 것일까? 당시에는 그런 미묘한 질투도 있었다. 지금이야 나도 많이 바뀌었지만 말이다.

멍청했던 것은 그 날도 게임 모임 일을 한다고 컴퓨터를 붙잡고 있다가, 치킨 먹으라고 부르는데 한참을 늦었다는 것이다. 기껏 고생한다고 집까지 데려왔다니 혼자 방에 박혀서 컴퓨터를 하고 있는 꼬라지였다. 당시에 그런 행동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몰랐다기 보다는, 해야 할 일은 해야한다는 이상한 의식이 있었다. 경험이 부족하기에 유연하게 대응하지를 못하고, 우왕자왕하다가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어설프게 챙기고는 했다. 나름 가치 체계 내에서 우선순위도 뚜렷했으니 말이다. 고작 몇 달 간의 유랑으로 사람이 쉽게 바뀌겠는가. 친구와 미드를 보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시 길을 나섰다. 친구는 순천만은 꼭 가보라고 했다. 순천의 오전은 서늘했다. 이 날의 기억과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순천 시내를 헤멨다. 순천만으로 이동하고자 버스를 탔는데, 깜빡 조는 사이에 광양으로 넘어갔다. 광양에서는 잘 곳이 마땅치 않았다. 외곽에 있는 한려대학교에 갔다. 모든 문이 잠겨있었기에, 강의실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서 졸았다. 날이 추웠기에 잠을 자기는 힘들었다. 광양 읍내를 헤메다가 찜질방을 찾았다. 찜질방 입구 소파에 앉아서 쉬었다. TV에서는 쾌도 홍길동의 첫 화가 방영되고 있었다. 그 날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 어찌되었건 날을 샜다.

아침에 하동으로 출발했다. 버스는 굽이진 산길을 빙글빙글 돌았다. 할머니들이 짐을 싸들고 버스에 드문드문 타 있었다. 꾸벅꾸벅 졸다보니 하동이었다. 하동은 조용했다. 주변 상가에는 제첩국을 판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저 멀리 들판 너머 섬진강이 보였다. 마을을 가로질렀다. 길을 돌아가기가 귀찮아 마을 돌담을 몰래 넘어다녔다. 길고 굵은 나무작대기에 의지해 언덕으로 올라갔다. 섬진강이 보다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섬진강 위로 기차가 달리는 다리가 발을 뻗고 있었다. 한겨울이라 강 위에 얼음이 둥둥 떠다녔다. 보기에는 참 맑은 물이었다. 그러나 한 모금 마셔보니 짜고 미끈거렸다. 괜히 심통이 나서 얼음을 막대기로 휘저으며 놀다가, 엎어져서 강에 빠졌다. 다행히 많이 젖지는 않았다. 바람이 많이 불어 몸은 오들오들 떨렸다. 사진을 찍고 강가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밤을 샌 피로는 많이 가셨다.

조금만 이동하면 진주였고, 더 많이 가면 창원이었다. 창원 사는 대학교 친구가 오면 꼭 연락하라고 했었던 것이 기억났다. 어느 쪽으로 갈지 명확하게 정하지는 않았지만, 버스에서 자다가 눈을 뜨니 이미 창원이었다. 친구에게 연락을 보냈다. 터미널 근처에서 또 잠시간 헤멨다. 친구의 집은 창원시청 근처였던 걸로 기억한다. 저녁 밥에는 나물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피시방에서 시간을 잠시간 보낸 후, 집으로 들어가서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읽었다.

다음 날 오전 중에 길을 나섰다. 친구 아버지께서 여비에 보태쓰라고 돈을 주셨다. 사양하다가, 거절하는 것이 예의에 더 어긋나는 것 같아서 돈을 받았다. 이 날도 무엇을 했는지는 명확한 기억/기록이 없다. 밥 대신 먹던 건빵과, 밤이 찾아올 때까지 창원을 돌아다녔던 것만 기억난다.

방향을 돌려 양산으로 향했다. 게임 모임 회원 중 한 명을 보기 위해서였다. 모임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던 사람이었다. 다른 회원들은 그 사람 성격이 이상하다며, 나에게는 너무 인간을 좋게 보려고만 한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여행을 떠나면서는 최소한의 관리 외에 인간 관계까지 조율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미안한 마음에 고기와 술을 사주었다. 만났을 당시에는 온라인에서 보던 것보다는 괜찮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임을 나갔다. 여행 후 몇 년이 지나 알게 된 것은, 그 사람이 이후 디씨에서 오랜 기간 동안 넷카마로 활동했다는 점이다. 그 넷카마에게 크게 낚였던 사람이 지금은 나름 인지도 있는 방송인이 되었기에, 방송을 보다가 가끔 그 때의 만남을 떠올리고는 한다. 당시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나름대로의 과거가 있는 사람이었다. 어릴 적에는 아픔을 경험한 사람들은 한층 성숙한다고만 믿었다. 이제는 꼭 성숙이라는 방향만을 향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양산에서 부산까지는 걸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도로를 20여분 걸으니 옆에 화물차 한 대가 멈췄다. 운전자 아저씨가 어디까지 가는지 물었다. 기왕 버스를 타기 시작한 마당에, 히치하이킹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부산으로 향하는 화물차였다.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행에 대해 말하면 대개 놀라는 경우가 있는데, 운전수 아저씨는 자신도 젊었을 때 그랬다며 껄껄 웃었다. 교통량이 적어 부산 외곽에는 금새 도착했다. 헤어지기 전 초콜릿 한 통을 선물 받았다.

해운대까지는 3~4시간이 걸렸다. 오랜만에 걸어서 그런지 다리가 아팠다. 눈에 비치는 차들과, 건물들과, 다리를 보며 커다란 도시라는 건 느꼈지만, 여기가 부산이라는 실감은 나지 않았다. 흡사 서울로 돌아온 것 같은 기시감이었다. 해운대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는 자정 무렵이었다. 빨간 불빛이 보이는 집에서 누나들이 놀다가라고 불렀다. "괜찮아요!" 크게 외친 후 해운대로 뛰었다. 달리는 뒤로 깔깔대는 소리가 들렸다. 해안은 생각보다 좁았다. 밤바다를 바라보면서 저 어둠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했다. 바다에 손을 담아보다가, 어디로 가면 좀 더 바다 쪽으로 갈 수 있을까 해안을 따라 거닐어보다가, 전화기를 들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 이제 부산에 도착했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여행을 하면서 내 쪽에서 부모님께 연락을 드린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피시방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울산으로 이동했다. 게임 모임에 있는 1살 어린 동생을 만나러 간 것이었다. 소도 때려잡을 듯한 덩치였다. 얼마 전 수능을 끝내고, 가까운 대학에 붙었다고 했다. 6개월 후에 군대를 가는데 나처럼 꼭 도보 여행을 다녀보고 싶다고 했다. 나에게 그 때 같이 가자고 이야기를 했다. 결국에는 그러지 못했다. 날이 어두워졌고, 고등학교 친구가 사는 대구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2주를 쉬었다.

유랑을 하면서 생활 습관이 많이 건강해졌다고 느끼고,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뭔가 열심히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순진한 믿음은 금새 깨졌다. 친구 자취방에서의 생활은 반폐인이었다. 어떻게 여행을 다녔는지 신기할 정도로 나태하게 지냈다. 친구는 알바하랴, 여자친구 만나랴 바빴기에 얼굴 볼 시간도 많지 않았다. 1주일쯤 되어서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다시 길을 나서고자 했다. 그러나 친구가 곧 시간을 낼테니, 같이 동성로나 구경가자고 하는 바람에 또 1주일을 머물러 있었다. 동성로는 일반적인 거리보다 규모가 꽤 크다는 것 외에는 큰 차이를 못 느꼈지만, 상당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밤의 정취와 거리를 채운 사람들, 주변에서 팔던 사과사탕과 감자 정도가 기억난다.

그 즈음에서는 유랑의 동기는 거의 사라져 있었다. 걸어서 종단을 했고, 버스를 타고 횡단을 했으니 말이다. 돌아다니면서 만날 사람들도 거의 다 만났다. 그러나 돌아가기는 못내 아쉬웠다. 기차를 타고 강릉으로 가보기로 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강릉까지는 찍고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강릉까지 가는 모든 길을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그러나 눈은 저절로 감겼다. 졸음을 참아가면서 안동을 지났다는 것과 어둠을 재우고 푸름이 가득차던 걸 확인했던 건 기억난다. 그 이후의 풍경은 기억나지 않는다. 정동진 부근에서 다시 기억이 이어지고, 눈이 가득 차 있던 강릉역에서 방점을 찍는다.

강릉역에 도착하자 유랑도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내를 조금 벗어나자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주변을 감싸고 있는 눈들. 도서관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발견하고 반가워서 찾아갔으나, 휴관일이었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경포대로 방향을 잡았다. 생각보다 거리가 멀었다. 차가 지나다니는 소음에 정취가 깨져서 터벅터벅 걷다가, 추수를 끝낸 논에 눈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신나서 달려갔다. 주변에 보는 사람도 없어서 눈밭을 데구르르 구르다가, 몸을 대자로 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리도록 파랬다. 이후 한참을 길을 가다가 사진기를 떨어트리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육갑을 떤 대가였다. 되돌아가서도 한 시간을 눈밭을 헤멨다. 경포대는 보수 중이었다. 물론 나에게는 여기서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안성으로 가는 차표를 끊었다. 선생님을 만나뵈려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한바퀴를 다 돌 줄은 몰랐다고 했다. 나는 유랑을 나섰던 데는 선생님의 영향도 있었다며 살짝 투덜거렸다. 선생님은 그걸 생각한다고 실행에 옮기는 정신나간 녀석이 여기 있다며 웃었다.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를 읽다가 잠들었던가. 아니면 자고 읽어나서 뒤적거렸던가. 명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의심스러워 확인해보니 착각이었다.

경기도 남부에 사는 작은 고모를 찾아뵈었다. 내가 나에게만 관심을 쓰고 있던 몇 년 사이 슬픈 일들이 많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촌 여동생을 보며 알 수 없는 반가움에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눌 이야기와 감정들은 많았다. 둘째 사촌 여동생은 부끄러운지 계속 방으로 숨기만 했다. 할머니께 받은 돈을 고모께 드리려고 했으나 한사코 거절하셨다. 다음 날에는 고모와 등산을 했다. 등산을 하면서 아버지 원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들을 채우는 시간이었다.

마지막은 인천에 있는 야학교였다. 야학교 친구들은 거지 같은 몰골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깊은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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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유랑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의식적으로 꺼려왔었다. 가끔 누군가 묻거나, 계기가 있으면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단편적이거나, 조각난 내용들 뿐이었다. 나는 유랑을 관통하는 주제와 의미에 관해 생각하기를 의식적으로 피했었다. 이 4개월 간의 정처없는 유랑을 언어로 평가하고 싶지 않았다. 발로 오랫동안 걸으며 느꼈던 감각 중 하나는 사유에 깃들어 있는 허랑함이었다. 언어와 사고는 당장 내 주린 배를 채워주거나, 추위를 녹여주지 못했었다. 보수주의적 냉소로 사유의 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경계하고 싶었던 것은 언어와 언어 간의 연쇄를 통해 쌓아올린 성채가 내가 발을 디딘 현실과 지나치게 유리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배고프고 추운 경험을 많이 해서 그럴 것이다.

유랑에 대해 이야기를 자주 하지 않았던 것은 다른 이유도 있다. 나는 내가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낸 것마냥 군다면 스스로가 역겨울 거라고 느꼈다. 혹은 내가 이 유랑을 통해서 무엇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도 섣부른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와서 느끼기에도 유랑 전후로 내가 많이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다. 몇몇 태도에서 부분적인 변화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나는 서툴렀고, 여전히 좁은 틀에 갇혀있는 면도 많았다. 특히 사회적 세계는 더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배워야 했던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오랫동안 홀로 돌아다니기만 했던 유랑은 영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광주에서 일을 하며 지냈던 사람들 또한 결국 거대한 사회적 세계의 일부만 보여주었을 뿐이니까.

친한 친구는 차라리 유랑할 시간에 술이나 마시는 것이 더 나았으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랑을 하면서 나에게 생겼던 경로 중 하나는 일부러 남들 안 하는 힘든 일을 찾아가보는 성질머리였고, 그거는 때로 매우 비효율적이기도 했으니까. 유랑을 통해 꼭 좋은 것만 얻었다고 여긴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어떤 후배는 그건 내가 남자여서 가능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일종의 무용담 같은 이런 이야기가 다른 젠더였다면 가능하지 않았으리라는 지적이다. 그것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 행위를 내 의지로 환원하여서 설명할 수는 없다. 운이 좋았다는 표현은 유용하다.

그렇지만 유랑을 통해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도 세상을 살아갈 수는 있으리라는 환상 정도는 얻을 수 있었다. 그 환상 덕분에 그 이후로도 이런 저런 경험을 더 해본 것 같다. 남들은 안 하는 공부를 붙잡고 앉아있는 이유도 일부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요새 머리 좋은 사람들 중 누가 공부를 하겠는가. 나처럼 멍청한 인간이나 좋지 않은 미래를 염두에 두면서도 하는 거지. 또한 사회적 세계의 바닥에 가까운 면은 그 나름대로의 따뜻함이 있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 곳에서 입은 상처는 딱히 아프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후 10년 정도를 더 경험하면서 느낀 것은, 사회적 세계의 위쪽에 가까운 영역이 더 잔인하다는 점이었다.

10년이 지난 이 기록을 정리하면서 매우 비효율적인 글쓰기 방식이라는 생각을 했다. 일지는 다시 읽어봐도 지리멸렬하다. 일부러 특정한 서사나 혹은 의미부여를 통해 시각을 제약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사와 의미를 온전히 벗어난다는 것은 환상이다. 오히려 내가 경험했던 사실 관계를 정리하는데 초점을 맞추려는 내 의도에, 어떠한 목적이 있는가를 따지고 봐야 할 것이다. 경험을 언어에 가두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불가능한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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