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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7/10/27 14:25:22 |
Name | Liebe |
Subject | 컴패션, 이타심 |
Compassion이라는 단어에 딱 맞는 단어가 어떤 단어가 있을런지 생각이 잘 나지 않는데요. 제가 해석하기로는, 풀어본다면 컴패션이라는 단어는 타인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이 부분이 중요해요.) 타인과함께 사는 세상 타인의 도움이 없다면 오늘의 내가 없다는,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나에 적용되는 이타심을 이야기하는것 같아요.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공감하는 데서 출발하는것 같은데요. 그래서, 가끔 상대에게 상대를 생각해주거나 손을 내밀어주는것만으로 우리 함께사는거야 라는 싸인을 보여줄수 있을때도 있는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상대의 신호로 만약 그 순간에 외롭다 느끼던 힘든 순간에 있던 개인도 세상에 나혼자만이 아니구나하는 여유 혹은 따뜻한 마음을 가질수 있는것 같아요. 주고 받는 모두가 따뜻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데요. 그런 컴패션을 생각하다 이어진 생각인데요. 사람들 개개인의 고통의 레벨을 잴 수 있다면 개개인들은 모두 10/10의 고통을 체험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싶어요. 개개인들은 주관적으로 내가 체험하는 고통을 너는 이해할 수 없지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외부 3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타인의 고통의 레벨은 제각기 깊이가 다른것 같기도 한데요. 물론 계량화할수 없다고보아요. 어쨋든 모두들 고통의 늪에서 빠져나와서 서로 도움도 주고 받고 해서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님 적어도 고통스럽더라도 어떻게 고통을 달래가면서 견디는 노하우를 아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견디는 노하우 중에 하나는 위에서 나온 이야기랑 비슷한데요. 나의 고통의 깊이를 알수 없다고 느끼지만 세상에 나를 생각해주는 따뜻한 이가 있구나! 누구지? 도와달라고 해보자 연락해보아야겠다라는 생각을 가지는걸로 나의 고통이 경감될수 있어요. 부끄럽기도하고 자존심도 상하고 어려운 이야기인데도 이야길 하는 순간 내 맘을 이해하는 사람이 생기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손을 내밀때, 컴패션이 있는 분들은 선뜻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어제 테드 토크쇼에서 토니 로빈슨(동기부여로 유명한 강사)의 강의를 오랜만에 다시 보았는데요. 그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기적은 어느날 자기 가족과 아무 상관도 없는 어떤 분이 자기네 가족을 도와준 일이 일어났었다고 그 이후로 자신의 인생은 남을 돕는 생각하는 인생으로 바뀌었다고 하네요. 사람들은 모두 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런 나의 고민에서 한 발짝 나아가서... 주위에 있는 친구들, 가족들도 들여다보고 그리고 게시판에 있는 친구들 근황도 가끔 안부도 물어주고 댓글도 달아주면서 정답게 나이드는 것이 인터넷의 긍정적 미래에 대한 역할이 될 것 같은데요. 그래서 저는 늘 인터넷에다 본인이 아는 지식을 무료로 나누는 분들께 무척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모두들 늘 듣는 이야기가 "강하게 너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거야", "바보처럼 표현을 하지 말라" 이런식으로 사회적으로 나의 아픈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시되어왔다면, 그래서 술자리에서나마 술의 힘을 빌어서 나의 어려움을 털어놓을 수 밖에 없을 때가 있는데요. 만약 정말로 힘들다면 나를 약자로 보지 않는 컴패션을 가진 따뜻한 사람에게 "내가 아파요. 마음이 아파요." "나를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방법이 있을까요?" 라고 물어보는 것, 용기가 있어야 가능하겠지만... 인생에 있어서 한 두 번은 이런 카드는 한 두 번은 써봄직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주위에 오히려 악용하는 이들이 골치일수도 있는데요. 사회가 좀 더 주위를 챙겨주는 사회가 되었음합니다. 가족 -> 친구-> 커뮤니티 동네 -> 그리고 지역 사회-> 시-> 나라 .....이런 순서로 주위를 챙겨주었음 해요. ## 공익광고: 컴패션은 컴퓨터 패션이 아닙니다!! :)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11-06 09:34)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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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지만 한국은 커뮤니티에서 경쟁하고 충돌만해서.. 집값관련에서만 뭉쳐서 이익단체가 되고.. 좋은 의미로서의 공동체는 책에서만 보는 느낌입니다. 기부나 봉사를 해도 커뮤니티밖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요. 한국은 뭔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간거 같다는... 일단 이웃과 인사도 안하고 눈도 안마주치는데 어떻게 연대감이 생기겠어요. 요즘은 가족도 그런 느낌이
오늘 읽은 공감에 관한 칼럼도 인상적이었어요. 동정과 공감, 그저 사전적인 한국어 지식으로는 구별이 잘 가지 않는 난해한 쌍이지만...
"자신이 겪지 않은 일을 자신이 겪은 일처럼 생각하는 것이 꼭 공감은 아니다. 공감은 증언의 가치를 인정하는 의견이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6400.html?_fr=mt5#csidx3c0e3c45d45e728a381cfb9431ed09e
"자신이 겪지 않은 일을 자신이 겪은 일처럼 생각하는 것이 꼭 공감은 아니다. 공감은 증언의 가치를 인정하는 의견이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6400.html?_fr=mt5#csidx3c0e3c45d45e728a381cfb9431ed09e
컴패션과 동정은 공교롭게도 비슷하게 어원의 의미가 탈색된 사례라 봅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Compassion의 어원은 라틴어 compassionem인데, 이건 '함께'라는 의미의 Cum과 고통이라는 의미의 pati, path 등이 어근으로서 결합된 어휘로, 결국 '함께 고통 받는다'라는 뜻 정도로 직해할 수 있죠. pati, path 등과 관계 있는 어휘들이 sympath, patience, passion 같은 것들이고...동정 같은 경우도 같을 동同에 정 정精의 결합으로, '동일한 감정을 느낀다' 쯤 될 테고요. 특히 정精이란... 더 보기
컴패션과 동정은 공교롭게도 비슷하게 어원의 의미가 탈색된 사례라 봅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Compassion의 어원은 라틴어 compassionem인데, 이건 '함께'라는 의미의 Cum과 고통이라는 의미의 pati, path 등이 어근으로서 결합된 어휘로, 결국 '함께 고통 받는다'라는 뜻 정도로 직해할 수 있죠. pati, path 등과 관계 있는 어휘들이 sympath, patience, passion 같은 것들이고...동정 같은 경우도 같을 동同에 정 정精의 결합으로, '동일한 감정을 느낀다' 쯤 될 테고요. 특히 정精이란 낱말이 정념情念, 열정熱情, 온정溫情 등 영어의 path나 pati에 대응되는 기능을 한다는 점이 재미있죠. 결국 두 어휘 모두 근원적으로는 신영복 식;;으로 말하자면 '입장의 동일함에 기반하는 상호 적극성을 띠는 유대감' 쯤 될 텐데, 사회적으로는 투박하게 측은지심 정도로 쓰이죠. 어휘가 유통되면서 사회적 관념이나 용법에 따라 의미가 변하는 일, 특히 본질적인 의미적으로 간소화/경량화 되는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만 전혀 다른 문화권의 언어에서 유사한 현상이 일어난 게 재미있다 싶네요. 어쩌면 사람 자체가 긍휼과 동질감을 심리적으로 잘 구별 못하다는 방증이 아닌가 싶네요. 혹은 개인 차원에서는 상호 간에 섬세한 심리적 접근으로서의 '동-정'이 가능해도 사회적으로는 '동정'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언어든 내면이든 광막한 매스 피플의 장으로 들어가면 표피적으로만 소비되는 거겠죠. 옆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은 나에게도 실존적인 아픔을 주지만, 반 발짝만 떨어지면 아무리 처참한 비극일지라도 그를 내면화하기가 쉽지 않듯...
기부나 봉사에서 경계해야하는 것이 동정 sympathetic 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회적으로 동정에서 시작하는 기부인들이 많을수록 혜택을 받는것은 필요한 이들일텐데요.
기부자들은 수혜자 또한 나와 같이 생각하고 공감하며 함께 즐기는 아파하는 그들도 나랑 같은 이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하는데 그런 내면적인 성숙함을 지닌 이들을 만나기는 어려워요. 아마 그래서 그 단어가 우리나라에서는 소외되어온지도 모르겠어요. 컴패션이 사회에 문화적으로 자리잡지 못하는 것 또한 비극이라고 보아요.
대신에 우리는 정이라는 ... 더 보기
기부자들은 수혜자 또한 나와 같이 생각하고 공감하며 함께 즐기는 아파하는 그들도 나랑 같은 이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하는데 그런 내면적인 성숙함을 지닌 이들을 만나기는 어려워요. 아마 그래서 그 단어가 우리나라에서는 소외되어온지도 모르겠어요. 컴패션이 사회에 문화적으로 자리잡지 못하는 것 또한 비극이라고 보아요.
대신에 우리는 정이라는 ... 더 보기
기부나 봉사에서 경계해야하는 것이 동정 sympathetic 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회적으로 동정에서 시작하는 기부인들이 많을수록 혜택을 받는것은 필요한 이들일텐데요.
기부자들은 수혜자 또한 나와 같이 생각하고 공감하며 함께 즐기는 아파하는 그들도 나랑 같은 이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하는데 그런 내면적인 성숙함을 지닌 이들을 만나기는 어려워요. 아마 그래서 그 단어가 우리나라에서는 소외되어온지도 모르겠어요. 컴패션이 사회에 문화적으로 자리잡지 못하는 것 또한 비극이라고 보아요.
대신에 우리는 정이라는 단어가 있어서 반대로 그 정은 영어로 번역이 어려운것 같아요. 정 이라는 문화적 공감대가 컴패션을 크게 필요치 않게 그 간극을 메꾸는 역할을 해온것이 아닌가 싶기도해요.
기부자들은 수혜자 또한 나와 같이 생각하고 공감하며 함께 즐기는 아파하는 그들도 나랑 같은 이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하는데 그런 내면적인 성숙함을 지닌 이들을 만나기는 어려워요. 아마 그래서 그 단어가 우리나라에서는 소외되어온지도 모르겠어요. 컴패션이 사회에 문화적으로 자리잡지 못하는 것 또한 비극이라고 보아요.
대신에 우리는 정이라는 단어가 있어서 반대로 그 정은 영어로 번역이 어려운것 같아요. 정 이라는 문화적 공감대가 컴패션을 크게 필요치 않게 그 간극을 메꾸는 역할을 해온것이 아닌가 싶기도해요.
절판된(저도 지금 알았네요) 책이긴 한데 린 헌트의 <인권의 발명>이란 책 혹시 안 읽어 보셨다면 언제 한 번 읽어 보시라고 권하고 싶어지네요. 인권이란 개념을 가능하게 해준 공감(empathy)의 출현을 얘기하는데, 인권 개념의 벽두에는 empathy라는 단어는 쓰이지 않았고 sympathy가 쓰였다고 했던 것 같아요. 처음에 공감은 동정과 잘 구분되지 않다가 언젠가부터 확고히 다른 것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한국 사회와 공감의 문제, 또는 사회적 연대성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최정운의 <한국인의 탄생>이 흥미로운 얘기들을 해 주는 것 같아요. 제 인상에 아주 완결적인 저작은 아니긴 했고 실제로 후속작 격인 책도 최근에 나왔는데 그건 아직 읽어 보지 못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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