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8/01/03 18:45:04
Name   기쁨평안
Subject   정보 기술의 발달이 지식 근로자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추억
(글이 길어져서 탐라에서 튕겼습니다.)

전 회사는 금융회사였는데요, 회사는 내부 데이터의 활용을 위해 전격적으로 SAS 시스템을 도입을 합니다.

SAS 통계프로그램을 이용해 회사 DB에 접속을 해서 데이터를 뽑아오는 건데요. 문제는 몇십년 동안 DB관리가 제대로 안되어있다보니
이 데이터가 어느 DB에 들어가있는지 이 테이블에 있는 값은 무엇인지 알기가 어려운거에요.

몇년동안 계속해서 내부 교육을 진행한 결과 각 부서에는 한명씩 비공식적인 "SAS 주특기" 인원이 생겨났어요.

그 직원들은 그냥 하루종일 SAS만 돌리는 거에요. 부서장 및 임원보고를 위한 실적을 뽑는 거죠. 주간/월간/분기 보고..과거 실적을 위한 분석과 미래 예측을 위한 분석을 보고 또 보고..

그리고 신입이 오면 개중  IT적 재능(?)이 있으면 사수-부사수 개념으로 전수하고..그러면서 이들은 일종의 신종 직종(?)이 됩니다.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철밥통이에요. 조직개편마다 이들이 모여서 한부서가 되기도 하고, 각 부서에 한두명씩 찢어지기도 했지만, 절대 잘리지 않았거든요. 이들이 없으면 보고서를 못쓰니까요. 대신 매일 야근에 주말근무에..

그러다 몇천억원짜리 시스템 업그레이드가 됩니다. 빅데이터가 적용이 된거죠.
부하 때문에 새벽에만 서버를 긁어야 하고 며칠동안 작업해야 하는 데이터가 한방에 나오는 거에요.

다들 패닉에 빠졌죠. 더이상 존재의 이유가 사라진 직업군이 된거에요.
이 직업군이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진입장벽이 높은 기술을 가진 숙련공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들 내부적으로는 몇개의 노하우만 알면 그 다음에는 단순 작업만 반복하는 노가다였던 것이지요.

오랜 시간동안 부서별 T/O 도 SAS 기능자를 감안해서 배분이 되어있었어요.
즉 다른 업무들은 이미 그들 없이도 잘 굴러가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사실 그것 말고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가 튀어나왔는데요.
그것은 바로 "우리는 어떤 데이터를 알고 싶은가?" 인 거에요.

기존에는, 지난주 매출 현황 뽑고, 인건비 뽑고, 이탈율 뽑고 그러면 그거 보고,
예쁘게 표로 정리해서 보고서를 쓰면,
'어 영업 잘됐구나, 어 여기는 왜그래? 어 그래 잘해보자 화이팅.' 이러면 끝났는데,
이제는 그게 큰 의미가 없어진 거에요.

그냥 모니터에서 따닥따닥 조작만 하면 바로 튀어나오니까, "겨우 이거 말하려고 보고서를 썼냐?"
이런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는 거에요.

1차 패닉이 소위 "SAS장인 길드"에서 시작이 되었는데, 2차 패닉이 중간 관리자들에게 발생을 한거에요.
이제 무엇이든 물어보면 답을 해주는 마법의 상자는 손에 얻었는데,
거기에 무엇을 물어봐야할지 고민해본 사람이 없었던 거죠.

즉, 데이터의 측면에서 문제를 고민하고 데이터의 측면에서 해답을 찾으려면
그에 맞는 질의를 쿼리로 던져야 하는데,
그런 입체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거에요.
(솔직히 회사 통틀어 한 두명 정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위에서는 "야, 몇천억 들여서 시스템 업그레이드 해놨는데, 왜 달라진게 없냐?" 이런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러면 뭐하나요..

결국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를 두려워한 지식근로자들은
그들을 그토록 오랜시간동안 괴롭혔던 야근과 주말근무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는 시스템의 성능을 봉인한채
다시금 SAS 서버를 긁으며 보고서를 만드는 삶으로 되돌아가버립니다.

중간관리자들도 자기들이 골치아프게 고민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기존방식을 선택합니다.

그럼 그런 좋은 시스템은요?
일단 서버 자체가 속도가 빨라지고 용량이 커져서, 그냥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을 다 집어넣는 보관창고로 쓰였다고 합니다.
경영진에게도 어필을 하는 건 시스템 안정성이 좋아지고, 조회속도가 빨라졌다는 쪽으로 보고를 하고요.

그래서 아주 비싸고 훌륭한 자동차를 들여왔는데,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보기 좋은 장식용 창고가 되었다는 이야기에요.

세월이 흘러도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 경험이었어요.



* 수박이두통에게보린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1-15 09:20)
* 관리사유 : 추천 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3
  • ㅊㅊ
  • 매너리즘에 빠져 있구나 느끼면서도 뭔가 새로이 배우려고는 안하는 저에게 자극을 주네요. 늘 하던 질문과 행동이 아닌 내가 알고자 하는 정보를 확인하고 맞게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네요.
  • 기쁨평안님 예전 정모 때 뵀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데이터 엔지니어링에 종사 중이라 감상이 묘하네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77 음악자장가의 공포 81 문학소녀 18/01/15 10045 65
576 경제원전으로 보는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 24 소맥술사 18/01/10 8347 18
575 역사작전과 작전 사이 (1) - 이대도강 1 호타루 18/01/09 6325 12
574 문학내 것이 아닌 것에 낄낄대며 울기. 메도루마 슌, 물방울 4 quip 18/01/08 6426 8
573 체육/스포츠잉글랜드 축구는 왜 자꾸 뻥뻥 차댈까요. 35 기아트윈스 18/01/07 8248 10
572 역사무굴제국의 기원 26 기아트윈스 18/01/06 6371 24
571 일상/생각고3담임이 느낀 올해 입시 20 당당 18/01/04 7703 26
570 IT/컴퓨터정보 기술의 발달이 지식 근로자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추억 11 기쁨평안 18/01/03 9680 23
569 의료/건강타 커뮤에서 상처받은 이들이 홍차넷 탐라를 찾는 이유 31 소맥술사 18/01/03 8005 16
568 IT/컴퓨터아마존이 만든 사고를 역이용한 버거킹의 혁신적인 광고 7 Leeka 17/12/29 9355 19
567 일상/생각할머니가 돌아가셨다. 8 SCV 17/12/28 6788 27
566 의료/건강완벽한 보건의료제도는 없다 ('완벽한 보건의료제도를 찾아서'를 읽고) 18 Erzenico 17/12/26 7194 24
565 일상/생각20~30대에게 - 나이 40이 되면 느끼는 감정 25 망고스틴나무 17/12/24 9342 41
564 일상/생각이상하게도 슬리퍼를 살 수가 없다 21 소라게 17/12/21 7408 22
563 체육/스포츠필승법과 그그컨 사이(브금 주의) 17 구밀복검 17/12/20 8576 15
562 게임그래도 게임은 한다. 25 세인트 17/12/14 8612 21
561 음악[번외] Jazz For Christmas Time - 국내 스트리밍 사이트를 중심으로 (3) 4 Erzenico 17/12/11 6995 3
560 일상/생각내가 사회를 바라보는 눈 9 다시갑시다 17/12/08 7349 20
559 의료/건강제목은 못 정하겠음 32 mmOmm 17/12/07 7199 23
558 IT/컴퓨터'옵션 열기'의 정체 16 Toby 17/12/07 11755 37
557 정치/사회온라인 공간과 인간의 상호작용(상) 84 호라타래 17/12/06 7809 39
556 일상/생각나도 결국 이기적인 인간 2 쉬군 17/12/02 6106 13
555 일상/생각SPC 직접고용 상황을 보며 드는생각.. 20 二ッキョウ니쿄 17/12/01 6921 15
554 일상/생각삶의 무게... 12 사나남편 17/11/29 5422 22
553 기타짧은 유치원 이야기 13 CONTAXS2 17/11/28 7008 7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