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19/07/16 21:47:06수정됨
Name   化神
Subject   수신의 어려움
1.

언제부터 핸드폰의 데이터 네트워크가 잘 끊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창 잘 듣던 노래가 끊긴다거나 인터넷 검색이 막힌다거나. 가끔은 블루투스 이어폰과 연결이 좋지 않아서 지직거릴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마다 은근히 거슬리고 신경쓰였다.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다는게 이 정도로 기본적인 것이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본이 충족되지 않을 때 느끼는 불쾌함에 대해서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자 오히려 그러한 불쾌함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언제부터 이런 것들이 가능했었다고. 처음에는 이런 기술을 접하게 되면서 좋게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못 누리게 될 때 불편함을 더 크게 생각한다.

2.

아는 사람 중에 자기는 전혀 비난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결국엔 비난하는 이야기라서 듣다 보면 기분이 나빠지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또 기분 나쁘게 듣네, 좋게 이야기하는데 왜 이상하게 받아들이고 그래, 내가 뭐라고 하는거 아니잖아. 처음엔 나만 그렇게 곡해하는건가 싶어서 가만히 살펴봤는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게 아니라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해서 대화를 피한다. 정작 당사자는 모른다. 아니 왜들 그렇게 사람 말을 못 알아듣고 그래. 못 알아듣는거야 못 알아듣는 척 하는거야. 그런데 정작 모르겠는건 나다. 정말로 자신이 어떻게 말하는지 모르는건지 모르는 척 하는건지 잘 모르겠다. 그런식으로 말하는데 기분 나빠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모르겠는건 하나 더 있다. 말하는 사람이 제대로 전달했는데 듣는 사람이 제대로 못 들은건지, 말하는 사람이 잘 못 말하는데 듣는 사람이 알아서 잘 들어야 하는건지.

3.

이제는 논쟁이 지겹다. 직접 대면하는 이와는 애초에 논쟁을 하지 않으려 하고 인터넷을 통해 만나는 이와는 논쟁이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시간 낭비 혹은 감정 소모에 불과하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회의적인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는 나에 대한 확신이 없어졌다. 내가 합리적으로 판단한 건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른 사람을 설득할만한 주장인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 하다보니 자신있게 이야기하기 어려워졌다. 나를 중심으로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산해서 내 주변을 바꾸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잘 알고 있는 모범답안이지만, 아직 나는 채 중심조차 잡지 못 해서 헤메는 중이다.

4.

어쩌면 그 이유는 내가 너무 나의 이야기를 하려고 조급한 나머지 제대로 듣지 못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그 진의를 알아차리려 노력하기 보다는 저 사람의 말에 어떻게 대응할지부터 고민하고 끼어들 타이밍만 노리다보니 제대로 듣지도 못 하고 그러니 제대로 말하지도 못 하는 상황인 것이다. 대부분 사람은 그렇지 않나 하면서 나를 변호해본다. 사람들이 모이면 자연스레 말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생긴다. 그런데 곰곰히 보면 말 하는 사람만 말하고 듣는 사람은 듣기만 한다. 나도 말하고 싶은 욕망이 앞서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것 같다.

5.

누군가를 온전히 들어본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한참 신나게 이야기한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무슨 이야기를 했었나 싶다. 진심을 담은 대화를 즐기고 싶다. 그런데 가능할 지 모르겠다. 뭔가 많이 들리는데 듣다보면 다 노이즈다. 자기 말만 하고 있다.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내 말을 안 들어주니까 계속 말 하거나 어차피 듣지 않으니 말 하지 않거나. 아아 감명도 하나.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7-29 20:48)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5
  • 메일이 성공적으로 발신 되었읍니다.
  • 종이컵 전화기처럼 말하는 게 행복해지셨음 좋겠습니다
  • 修身齊家治國平天下
  • 이 형님 글 잘 쓴다...
  • 송신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89 여행속초, 강릉 여행 가볍게(?) 정리 36 수영 20/07/27 5384 9
1031 체육/스포츠손기정평화마라톤 첫풀코스 도전기 12 오디너리안 20/11/17 3879 22
1121 일상/생각손님들#1 7 Regenbogen 21/08/25 3764 31
1125 일상/생각손님들#2 - 할매 고객님과 자존심을 건 대결 27 Regenbogen 21/09/09 4928 47
261 철학/종교손오공과 프로도 배긴스 32 기아트윈스 16/09/04 8112 18
1208 일상/생각손절의 시대 24 nothing 22/06/01 5536 52
369 역사솔까 절세미남 자랑 좀 하겠습니다 31 파란아게하 17/02/18 8361 15
62 과학쇠똥구리곤충의 GPS, 밀키웨이 13 눈부심 15/08/26 7727 0
488 일상/생각수박이는 요새 무엇을 어떻게 먹었나 -完 26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7/08/07 6159 18
1356 요리/음식수상한 가게들. 7 심해냉장고 24/01/17 1961 20
832 일상/생각수신의 어려움 7 化神 19/07/16 4932 15
174 일상/생각수업시간 추억 한 폭 7 기아트윈스 16/03/26 5284 31
1065 정치/사회수준이하 언론에 지친 분들을 위해 추천하는 대안언론들 20 샨르우르파 21/03/03 7928 24
82 일상/생각수줍수줍..이런걸 한번 해봤어요.. 23 얼그레이 15/09/29 8247 21
775 과학수학적 엄밀함에 대한 잡설 29 주문파괴자 19/03/05 8918 18
452 일상/생각숙제 무용론 국딩의 최후 11 Homo_Skeptic 17/06/14 6011 7
598 일상/생각순백의 피해자 3 라밤바바밤바 18/02/27 6032 15
503 의료/건강술, 얼마나 마셔야 적당한가? 63 빈둥빈둥 17/08/30 9435 10
998 문화/예술술도 차도 아닌 것의 맛 7 아침커피 20/08/17 4409 19
634 의료/건강술을 마시면 문제를 더 창의적으로 풀 수 있다?!!!! 61 소맥술사 18/05/15 7751 23
402 일상/생각쉽게 지킬 수 있는 몇 가지 맞춤법. 25 에밀 17/03/30 5537 10
962 일상/생각슈바와 신딸기. 24 Schweigen 20/05/26 5335 33
764 체육/스포츠슈퍼볼 53(Super Bowl LIII) 프리뷰 (약스압) 5 Fate 19/02/02 6473 11
1341 꿀팁/강좌스몰웨딩 하고싶은 티백들에게-1 31 흑마법사 23/11/30 2575 23
1346 기타스몰웨딩 하고싶은 티백들에게-2 4 흑마법사 23/12/16 1835 8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