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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09/19 01:27:37 |
Name | 눈시 |
Subject | 두 형제 이야기 - 신축옥사, 장희빈의 아들 |
백일도 안 돼서 원자가 되었고, 세 살에 세자가 되었습니다. 조선 최연소 기록이죠. 여기에 태클을 걸자, 아버지는 그 송시열을 죽여버립니다. 이 정도로 숙종에게 큰 사랑을 받았죠, 장희빈에 대한 사랑도 분명 컸을 겁니다. 엄마가 좋으면 자식도 좋은 법이니까요. 거기다 서른줄에 겨우 뒤를 이을 아들이 태어난 기쁨도 컸겠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바뀝니다. 인현왕후가 돌아오면서 어머니는 왕비에서 빈으로 강등됐고, 죽습니다. 그의 나이 열네살 때였죠. 그렇게 19년이라는 기나긴 지옥이 시작됩니다. 1616년, 숙종은 병신처분으로 노론의 편을 듭니다. 노소론 분당의 원인이었던 송시열과 윤증의 갈등에서 송시열의 편을 들어준 것이죠. 아이러니라게도 송시열을 죽인 숙종이 송시열을 송자로 만들어 준 겁니다. 그리고 이듬해, 정유독대가 일어나죠. 좌의정 이이명과 단 둘이서 만난 겁니다. 사관들은 허둥지둥하다가 여기 끼어들지 못 했고, 이 1~2시간 동안 그 둘은 무언가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이후 숙종은 세자의 대리청정을 밀어붙이죠. 명분은 있었습니다. 세자도 어느새 서른살이었고, 숙종은 눈병 등 온갖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3년 후에 죽은 걸 보면 그의 몸이 안 좋았던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독대 직후 추진된 일이라는 것, 노론에서도 밀어붙였다는 것 등으로 세자에게 대리를 맡긴 후 핑계를 잡아 폐세자시킨 것이란 평가를 받습니다. 저도 여기에 이의는 없구요. 노론은 연잉군을 밀고 있었고, 숙종의 마음 역시 여기에 기울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감정과 당파의 이해 외에도 연산군이 충분히 생각날 수 있는 상황이었구요. 하지만 조선의 시스템상 왕이라도 아무 이유 없이 세자를 갈아치울 순 없었죠. +) 인현왕후도 그냥 어질고 다 용납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장희빈에 대한 사랑을 아니까 먼저 나서서 궁에 들이자고 했지만, 들인 후에는 이런저런 견제를 했죠. 한편 장희빈이 정말 그렇게 독하기만 한 여자였냐 하면, 그것도 모를 일입니다. 세자가 몸이 약하긴 했으니 정말 세자의 건강을 빌려고 했을 수도 있긴 하거든요. 하지만 인현왕후가 아플 때니까 충분히 잘못된 일이긴 했구요. 아무튼 이걸로 엮여서 그 핑계로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것이 대표적인데... 그것 말고도 장희빈이 세게 나오고 가족들이 막 나간 사례들도 있습니다. 인현왕후가 현모양처만은 아니었을 것 같고, 궁 내의 여인들간의 정치 싸움의 영향도 컸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장희빈에 대한 나쁜 기록을 마냥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간단히 말하면, 그 여인들 역시 숙종의 장기말이었고 흔히 아는 극과 극의 이미지인 것 같진 않지만, 그 이미지가 크게 왜곡된 건 또 아니라는 겁니다. 세자가 양녕대군처럼 막 나갔다면 일이 쉬웠겠지만,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일을 제대로 시켜본다면 약점이 나오지 않겠냐... 뭐 이런 얘기죠. 그 때문인지 세자는 정말 일을 무난하게 했습니다. 긍정과 부정, (큰 일에는 당연히 해야 할) 대조(숙종)께 묻겠다 외에는 유의하겠다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죠. 오죽하면 '유의하겠다'는 말 말고 구체적으로 물어보는 등 더 얘기를 해 보고 결정하라는 신하의 건의에도 대답은 '유의하겠다'였습니다. 단 한 번 그가 화를 낸 적이 있습니다. 비서인 승지들이 지각하자 미친 듯이 화내면서 다 나가라고 한 것이죠. 쌓인 게 터진 겁니다. 숙종은 이에 대해 질책하는데, 신하들이 이를 걸고 넘어집니다. 대리하는 세자에게 힘을 줘도 모자랄 판에 뭐라고 한다고요. 숙종은 부자간에 이 정도 말도 못 하냐고 물러났지만요. 당연히 여기에 강경하게 나간 건 소론이었지만, 노론도 비슷한 입장을 보입니다. 정말 실수를 노린다 해도 이 정도 일은 건수도 아니죠. 거기다 말입니다. 대리청정을 하는 세자에게 힘을 몰아주는 건 당연한 거구요 그렇게 3년, 숙종은 죽습니다. 서른세살의 세자가 왕위에 오르니 경종이죠. 기나긴 시간을 이기고 왕이 됐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상황이 좋진 않았습니다. 노론은 대신들은 물론 언론을 주도하는 삼사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를 지지하는 소론도 있었죠. 그들 역시 장희빈을 빈으로 강등시키는 것부터 반대했고, 그를 위해선 몸을 던져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그 정도의 명분이 있었기에 움직일 수 있는 거였죠. 어쨌든 국본, 나라의 근본 세자를 위해서 움직인다는 명분 말이죠. 그 안에서나 움직일 수 있었죠. 노론은 그게 불안했나 봅니다. 그들이 가진 큰 힘과, 약간이나마 있는 명분을 최대한 활용했죠. 힘 외에도 그들이 믿을 게 하나 더 있었습니다. 이 왕이 뭔가 힘을 쓸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대리를 할 때나 왕이 됐을 때나 경종은 나약해 보이기만 했습니다. 상복을 벗지도 않은 즉위 한 달 후, 조중우라는 자가 장희빈의 위치를 올리자고 건의합니다. 말도 안 되긴 했죠. 너무 일렀으니까요. 속마음이 어떻든 경종은 배척했지만, 노론은 강경하게 나가서 그를 죽이자고 했고, 죽이게 됩니다. 반면 윤지술이 건의한 장희빈을 죽일 때 일을 제대로 기록하자는 것, 경종은 분노해서 그를 유배에 보내지만 노론이 지배한 삼사와 성균관의 유생들까지 나서서 무죄로 풀어줘야 했습니다. 힘의 차이는 이렇게 컸습니다. 경종은 이를 억누를 어떤 힘도 보여주지 않았고, 오히려 나약한 모습만 보이면서 정사도 제대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게 노론에게는 더욱 더 큰 힘을 실어주었죠. 즉위한 지 1년 후, 노론은 후사를 세울 것을 밀어붙입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삼종(三宗)의 혈맥을 이어야 된다는 거였습니다. 효현숙의 계보를 경종이 이었는데, 그 뒤를 끊으면 안 된다는 거였죠. 물론 서른네살에 자식이 없는 상황이니 명분이 없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많이 늦은 건 또 아니었죠. 당시 삼종의 혈맥을 잊는 자는 경종 외에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연잉군이었죠. 그들의 동생은 이미 예전에 죽었거든요. 연잉군을 왕세제로 세우라는 거였습니다. 경종은 노론 중심의 대신들과의 회의를 통해 그걸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되자 대신들은 대비에게 결재받으라 합니다. 물론 대비가 왕보다 높은 위치긴 합니다만, 왕이 아주 어리지 않은 이상 이걸 대비에게 물을 게 아닙니다. 그 정도로 왕의 권력을 무시했다는 것이고, 왕보다 높은 사람에게 인정받아서 확실히 하겠다는 것이며, 그 정도로 노론이 서둘렀다는 것이죠. 경종 1년, 8월 20일의 일입니다. +) 이 대비가 숙종의 세 번째 왕비인 인원왕후입니다. 연잉군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고, 영조 역시 그녀를 죽을 때까지 어머니처럼 모셨죠. 사도세자에게도 정말 잘 해 주었다 합니다. 정치적으로 딱히 나서거나 하진 않은 걸 보면 그냥 정말 왕실의 큰어머니로 행동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에 소론이었던 유봉휘가 상소를 했고, 예의상 반대했던 왕세제도 그걸 통해 다시 물러나겠다고 상소합니다. 이에 노론이 그를 처벌하라고 밀어붙였고, 소론 대신들과 세제도 너무 큰 벌을 주지 말라는 정도로 나섭니다. 유봉휘는 유배됐구요. 노론 세상이라 하지만 경종이 소론을 등용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조태구가 우의정이 됐고, 최석항을 정2품 참찬으로 두는 등 소론에게도 어느 정도 힘을 넣어주었죠. 하지만 이때까진 경종도 소론도 별다른 반격을 하지 않았습니다. 노론의 힘에 못 한 건지, 안 한 건지는 이후를 봐야겠죠. 연잉군을 왕세제로 앉힌 지 얼마 안 가서 노론은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정사를 볼 때 세제를 같이 앉혀서 일을 배우게 하라는 것, 다시 말해서 대리청정이죠. 경종은 이를 바로 받아들입니다. 이 사실을 몰랐던 다른 노론들조차도 반대할 정도로 큰 일이었고, 소론 최석항이 눈물로 말립니다. 여기서 경종이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죠. 바로 그 말을 받아서 대리를 철회합니다. 이렇게 판이 시작됩니다. 소론은 이를 반대하지 않은 대신들을 공격했고, 명분이 떨어진 노론은 절차에 어긋났다느니 하는 지엽적인 문제로 맞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둘 다 물러날 상황이 아니었죠. 하지만 경종은 여전히 자신의 몸이 약하다는 걸 들며 대리청정을 명합니다. 이후로 사흘 동안 세제는 물론 노소론 가리지 않고 모든 신하들이 반대합니다. 반면 경종은 대리를 물리지 않았죠. 이렇게 되자 노론이 태도를 바꿉니다. 경종의 뜻이 확고하니 반대를 접자는 것, 소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들은 '모든 일을 세제에게 맡기라는 명은 반대하지만 숙종 때의 대리청정 정도로 하자'는 상소를 올리고 반대를 접게 되죠. 여기에 참가한 노론의 4대신이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입니다. 이렇게 노론이 물러난 상황, 소론이 더 강경하게 나오지만 역시 노론이었던 승지들이 막습니다. 역시 노론이 지배한 삼사 역시 계속 반대하는 소론을 벌주라 하죠. 이렇게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에서조차 막힌 상황, 소론은 환관(내시)을 통해 경종을 만나려 합니다. 그리고 경종은 알현을 청한 우의정 조태구를 만나겠다 했구요. 이 소식을 들은 노론 4대신들도 온 상황, 눈물로 반대하는 조태구의 말을 듣고 경종은 대리를 물리게 되죠. 뜻밖의 반전, 하지만 이건 이 이후의 일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궁지에 몰린 노론은 여전히 절차를 물고 늘어집니다. 그러자 경종은 이렇게 말했죠. "결탁이니 교통이니 하는 따위의 말은 자못 심히 무엄하다.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경종다운 말이 아니었죠. 깜짝 놀란 노론이나 뜻을 관철시킨 소론이나 이후 다툼은 잠시 수그러듭니다. 그렇게 50여 일이 흐른 12월 6일, 상소가 올라오죠. 김일경을 필두로 한 소론의 연명 상소였습니다. 당연히 승정원에선 흉측한 상소니 물리치라고 했습니다만, 경종은 화를 내며 이들을 물리쳤고, 상소를 보며 이렇게 답합니다. "응지(應旨)하여 진언(進言)한 것을 내가 깊이 가납(嘉納)한다" 상소한 내용을 깊이 받아들인다는 거죠. 그리고 이걸로 모든 게 바뀝니다. 경종의 입에서 나오는 그대로 말이죠. 노론이 모두 잘려나간 겁니다. 삼정승부터 군권, 왕의 비서인 승지, 언론인 삼사까지 모두 말이죠. 숙종의 환국처럼 줄줄이 목이 잘려나가진 않았지만, 노론 대신들이 귀양 가고 노론이 모두 소론으로 바뀐 것은 같았습니다. 이를 신축옥사, 혹은 신축환국이라 합니다. 상황을 보면 환국이라 해도 상관 없을 문제죠. 통설이야 노론과 소론이 싸우다가 소론의 승리입니다. 경종은 여기서 나약한 임금일 뿐이죠. 하지만 이 과정을 보면 경종이 그저 소론에게 따라갔다고 보기 힘듭니다. 노론에게 그렇게 양보하고 양보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밀어붙였으니까요. 평가에 정도는 있겠지만, 이 사건의 주인공은 소론이 아니라 경종입니다. 노론에겐 힘이 있었고 명분도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경종은 그 힘에 밀리는 척 하면서 명분을 소론에게 주었죠. 이 정도로 명분이 넘어간 이상 노론이 아무리 군권을 비롯한 모든 걸 장악해도 한 방에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왕이라는 자리는 그 누구보다 명분이 있는 자리이자, 백만대군을 이끈 장군의 목도 자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자리였으니까요. 이렇게 경종은 조선의 진정한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진 않았습니다. 이제 확실히 집권당이 된 소론은 노론을 그냥 둘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는 노론의 왕이었던 연잉군에게도 향했구요. 그리고 노론 역시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었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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