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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2/17 23:03:24
Name   눈시
Subject   삼국통일전쟁 - 12. 백제는 죽지 않았다


충남과 전북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니 행정구역 지도를 따로 띄워놓고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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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지방행정조직에는 5방이 있었고, 말기엔 5부로 바뀝니다. 북방인 웅진 외에에 동방은 충남 은진, 중방은 전북 고부로 비정됩니다. 서방과 남방은 충청도와 전라북도 쪽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전라남도로 가기도 하는 등 위치를 비정하기 어렵습니다. 백제부흥군이 일어난 임존성이나 중심지인 주류성이 이 서방과 남방 쪽 근처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만.

이 지역들이 신라의 5소경처럼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지고, 당이 설치한 5도독부 역시 기본적으로는 이 5방 지역에 설치한 게 아닐까 추정합니다. 물론 반론도 많죠. 이 위에 도호부가 따로 있었을 거라고 보기도 합니다만, 확실하진 않죠. 이후 웅진도독부만 남아서 밑에 7주 52현으로 개편됩니다.

이민족을 정벌한 후 도호부-도독부를 설치하고, 거기에 현지인을 임명해 다스리는 정책을 기미정책이라 합니다. 백제에 대한 정책도 같은 걸로 평가됩니다. 웅진도독만은 당나라 관리를 임명했지만요.

당의 괴뢰정부라 하지만, 660년부터 10년 넘게 이어진 정권인 만큼 그 형태와 운영 방식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이걸 제대로 다루긴 힘들겠군요. 부흥운동 동안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만 생각하면 되겠죠. 당군은 사비성, 웅진성을 방어하기도 힘겨웠습니다. 만약 백제 내 큰 세력이 그들을 도왔다면 얘기는 달라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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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 오층석탑

백제의 양식을 알 수 있는 유명한 탑이지만 전혀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평제탑, 백제를 평정한 걸 기념한 탑이라는 거죠. 혹은 소정방비라고도 불립니다.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기념으로 비문을 새기고 갔기 때문이죠. [대당평백제국비명]입니다. 참 남의 땅 와서 뭐 하는 짓인가 싶죠. 내용은 당과 참전 장수들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차 있지만, 그래도 참전 장수들 명단을 볼 수 있고 전후처리에 대한 것도 나와서 괜찮은 사료가 되긴 합니다.

얼마나 신났을까요? 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깨버릴 일이 생겨나죠.

백제 잔당의 저항 자체야 예상했을 겁니다. 하지만 너무 빨랐고, 거기에다 너무 가까웠죠. 당장 웅진 부근에서도 달솔(2등관직) 여자진이 일어났고, 좌평(1등) 정무도 두시원(충남 청양)에서 일어납니다. 거기에 임존성(충남 예산)에서도 한 무리가 일어났구요.

"복신 등이 드디어 같은 나라 사람들을 모아 함께 왕성을 지켰다. 오직 복신만이 신기하고 용감한 꾀를 내어 이미 망한 나라를 부흥시켰다”고 아뢰었다." - 일본서기

"듣건대 당나라는 신라와 약속하기를 백제 사람들 중 노인과 젊은이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이고, 그런 후에 나라를 신라에 넘겨주기로 하였다고 하니, 죽음을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생각하여, 이렇게 모여 스스로 진지를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 - 복신, 661년 3월

복신, 성은 귀실이었습니다. 기존 관등은 한솔(5위) 혹은 은솔(3위), 무왕의 조카로 첫 등장은 무왕 때인 627년, 당에 사자로 갔을 때입니다. 다만 당서에는 이름이 거꾸로인 신복으로 돼 있어서 다른 인물이 아닐까 하기도 하죠. 거기다 무왕의 조카, 의자왕의 사촌이면 왕족인데 관등이 낮은 편인 것도 의문이 되구요. 통설은 동일인물이지만요. 복신이나 여자진이 활약하면서 사람들은 그를 좌평(1등)으로 불렀다 합니다.

+) 백제나 고구려도 신라의 골품제처럼 혈통에 따른 승진 상한선이 있는 걸로 분석됩니다. 왕족이면서 3~5등이면 높은 편은 아니죠. 그리고 왕족이 아니면서 백제부흥운동을 그 정도로 이끌었다면, 능력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하겠죠. 일단 왕족이 맞다는 쪽에선 부여씨로부터 갈라져 나온 성으로 보고, 무왕도 왕이 되기 전 성씨가 귀실씨가 아니었나 하는 학설도 있죠.

그와 함께한 것은 승려 도침,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승려인 만큼 백제 내 불교 세력을 대표하는 게 아닌가 하죠. 복신과 세트로 나오지만 별도의 세력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불교라서 그런지 그 공(으로 추정되는 것)에 비해 그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였을 때, 그는 자기 부하를 데리고 항복하였다. 정방은 늙은 왕을 가두고 군사를 풀어놓아 크게 노략질을 하였다. 상지가 두려워하여 가까운 촌장 10여 명과 함께 달아나, 도망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임존산(충남 예산)에 웅거하며 굳게 지키니 열흘이 못 되어 그에게 귀순한 자가 3만이나 되었다. 정방이 군사를 정비하여 그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상지는 드디어 2백여 성을 회복하였다."

또 하나의 축은 흑치상지였습니다. 원래 부여씨 출신으로 흑치라는 곳에 봉해져서 흑치씨가 되었다 합니다. 20세도 되지 않아 집안에 대대로 이어져 오던 달솔(2등)을 맡았죠. 그 부하인 사타상여도 함께 했는데, 이를 사택씨로 본다면 그 역시 대성팔족 중 하나인 백제의 뼈대 있는 가문입니다.

흑치상지가 무리를 모을 때 10일 만에 3만여명이 모입니다. 이 모두가 군사일지는 알 수 없지만 충분히 많은 수죠. 소정방이 공격을 시도했지만 막힙니다. 이 때 임존성을 8월 26일에 공격했다 합니다. 소정방과 김춘추가 의자왕 데리고 잔치 열였던 게 8월 2일이죠. 좋은 순간은 정말 한순간이었던 거죠.

+) 다만 흑치상지는 그 명성에 비해 그리 중요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당에 항복하고 당에서 이미지가 좋아서 유명한 게 아닐까 싶죠. 도침과 반대 케이스라 하겠습니다. 천천히 얘기하죠.

이들 중에는 의자왕의 항복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 하고 일어선 이들도 있겠고, 흑치상지처럼 일단 받아들였다가 저항으로 바꾼 이들도 있었을 겁니다. 의자왕의 충신도 있었을 것이고, 의자왕은 솔직히 상관없고(-_-;) 백제 자체를 없애려 하는 것에 대해 반발한 이도 있었겠죠. 더 작게 보면 그냥 자기도 의자왕처럼 끌려갈 거 같으니까, 혹은 신라한테 죽을 것 같아서 합세한 귀족이나 호족도 있었을 거구요. 각자 자신의 뜻대로 일어났고, 시간이 지나면서 뭉쳐갑니다. 그들을 묶어준 건 역시 백제라는 그 이름이었죠.

+) 신라가 멸망할 때 경주 주변의 호족들의 모습을 대입해 보면 백제부흥군이 의자왕이나 기존 백제에 대해 품는 마음을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어려운 문제네요.

당군은 백제의 왕족들을 끌고 가면서 다른 백제의 유력자들을 포섭하려 했습니다. 예식진처럼 말이죠. 하지만 먼 곳도 아닌 사비와 웅진 바로 가까운 곳에서 그 유력자들이 반발을 시작한 거죠. 하지만 그들을 제대로 토벌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고구려를 칠 준비를 해야 되는 상황이었고, 군량으로 봐도 13만 대군을 더 이상 유지하고 있을 순 없을 겁니다. 신라도 한계까지 끌어모은 병력을 오래 유지할 수 없었겠죠. 일단 8월 말까지, 본거지인 임존성까진 못 깼지만 나름대로 억눌렀다고 생각하고 철수를 준비했겠죠. 의자왕을 빨리 끌고 가서 구심점을 없애야 한다는 판단도 있었을 겁니다. 9월 3일 소정방은 떠났고, 당군 1만, 신라군 7천을 제외한 연합군이 철수합니다.

일본서기에는 처음엔 백제부흥군이 무기가 없어서 막대기를 들고 싸웠고, 적의 무기를 빼앗아 썼다고 합니다. 아예 없다는 건 과장이겠지만, 그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다는 거겠죠.

하지만 8월 26일, 연합군의 임존성 공격을 막아냈고, 근거지를 지켜냅니다. 적의 대군은 떠났습니다. 이제 세력을 뻗을 때였죠. 그리고 단순한 저항이나 생존을 넘어서, 백제의 부활을 꿈꾸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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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 백제부흥군은 사비성으로 들이닥칩니다. 이 때 당군은 유인원만이 당군 1만을 거느렸고, 김춘추의 아들 김인태가 신라군 7천을 거느리고 이 일대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백제군은 공성을 시도하지만 실패하죠. 하지만 사비성 근처에 성을 네 곳 쌓은 후 포위작전을 개시합니다.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거죠. 이렇게 되자 부흥운동에 호응한 성이 20여개가 됩니다. 흑치상지 열전의 경우 소정방이 있을 때 이미 200여성이 호응했다고 합니다. 진행상황을 보면 200여개는 전성기일 때를 말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편, 당에서 신임 웅진도독 왕문도가 도착합니다. 9월 28일 삼년산성에서 김춘추와 만나서 황제의 조서를 전하죠. 헌데 이 과정에서 갑자기 죽어버립니다. 황당한 일이었죠. 포위가 계속되고 있을 걸 생각하면 웅진성이나 사비성엔 들어가지도 못 했을 것 같네요. 일단 유인원이 그 뒤를 맡은 것으로 보이구요.

신라 입장에서도 예상 밖의 상황이 계속되었을 겁니다. 대군을 일으켰으니 이제 쉬면서 고구려 공격을 준비해야 되는데, 이렇게 돼 버렸으니까요. 김춘추는 직접 김법민과 함께 사비성의 구원에 나섭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사비성으로 가는 길도 적지가 돼 버렸죠. 10월 9일 이례성(충남 논산)을 공격해 18일에 함락했고, 부흥군에 호응했던 20여성이 항복합니다. 이어 30일 사비성 근처에 도달, 포위망을 공격해서 적 150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며 포위를 풀었고, 이어 11월 5일에는 사비성 근처인 왕흥사 잠성을 공격해 700명을 사살합니다. 겨우 포위를 풀었고, 고립된 방어군에 군량을 보급했죠.

사비성 공격이 실패하면서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듭니다. 겨울이 오기도 했구요. 부흥군으로서는 웅진-사비와 신라를 잇는 길, 웅진도(혹은 운량도)를 막는 게 실패한 게 패인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이 웅진도를 막느냐 뚫느냐가 중요한 부분이 되었죠.

나당연합군으로서는 고구려 공격을 신경써야 하는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일 여력이 없었습니다. 거기다 신라는 같은 시기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칠중성(파주)을 지키는 필부가 군량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20일이나 버티다가 전사하였죠. 이 때 함락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구려 멸망까지 양국이 뺏고 뺏기기를 반복한 것으로 보입니다. 공격은 10월 중순부터 11월 초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가 사비성을 구원하러 간 그 타이밍이었습니다. 고구려가 신라군의 상황을 예의주시한 것을 볼 수 있죠. 혹은 부흥군과 손을 잡았을 수도 있겠구요. 이러니 사비성을 지키는 정도에만 만족할 수밖에 없었죠.

+) "충신과 의사는 죽을지언정 굽히지 않는 것이니 힘써 노력하라! 성의 존망이 이 한번 싸움에 달렸다." - 필부가 성 내의 배신자를 죽이면서 한 말이라 합니다. 신라 쪽 기록만 많이 남아서 그렇겠지만 충신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죠.

복신은 이 전투가 진행되던 10월에 왜국으로 사신을 보냅니다. 당군의 포로 100명과 함께 말이죠. 자신들이 이기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죠. 그러면서 왜국에 있는 백제 왕족, 의자왕의 다섯째 아들인 부여풍의 귀환을 요청합니다. 왕족들이 다 끌려간 상황, 새로운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서였겠죠.

왜국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백제부활을 위한 지원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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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되기까지, 부흥군은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 복신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른 곳이 주류성으로, 백제부흥운동에서 중심이 되는 곳이죠. 다만 그런 중심지임에도 위치에 대한 논란이 많은 곳입니다. 조건은 왜국의 지원을 받기 쉬운 곳, 그리고 일본서기에 기록된, 방어하기엔 좋지만 농사짓기엔 좋지 않은 곳이죠.

주로 충청남도 서천의 한산 쪽으로 비정되고, 그 외에 홍성, 연기(세종?) 등의 설이 있습니다. 반면 전라북도 부안설도 있죠. 이는 이후 백강 전투의 백강을 어디로 보느냐는 것과 연결됩니다. 금강으로 본다면 충청남도 쪽이고, 전라북도의 동진강으로 본다면 부안설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각 지자체들이 이걸로 자존심 싸움하는 느낌도 들고요. -_-; 현재는 주로 서천(한산)vs부안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얘기는 백강 전투에서 하는 걸로 하죠.

"웅진의 중국 병사 1천 명이 가서 적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적에게 깨져서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 패배 이후로 웅진으로부터 오는 병사의 요청이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 답설인귀서 중

이렇게 남쪽으로 넓히면서 동쪽으로도 진격, 다시 길을 끊어버립니다. 이 때가 661년 2월, 다음 단계는 역시 사비성 공격이었죠. 당군은 이를 구원하기 위해 신라에게 지름길로 지원오라고 합니다. 김춘추는 김품일을 대장으로 장수 11명을 파견합니다. 적은 수는 아니었겠죠. 한편 당도 바다로 지원을 보냅니다. 유인궤, 백제부흥군에겐 악몽과도 같은 이름이 되죠.

+) 이 때 (661년 초) 부여풍이 와서 부흥군의 사기가 오르고 다른 성들도 호응했다 하는데, 어느 설로 보든 너무 이릅니다. 복신 측에서 부여풍이 온다고 언플했을 수 있겠네요.

그가 한 일을 보면, 그리고 왕문도를 대신해 왔다는 걸 보면 웅진도독으로 올 만한데 임시로 대방주자사로 옵니다. 이전에 백제 공격 때 군량을 운반했는데, 가기 힘든 상황인데 독촉받아서 가다가 침몰했고, 평민이 되어 백의종군해서 참전했다 합니다. 아직 웅진도독으로 올리기엔 격이 안 맞아서 그랬을 수가 있겠네요. 자기도 이걸 기회로 여겼는지 "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를 부귀하게 하려는 것이다"하면서 기뻐했고, 동쪽 오랑캐를 정복하고 당의 달력을 반포하겠다면서 포부를 밝혔다 합니다.

부흥군에서도 이걸 막기 위해 웅진강 어귀에 목책 두 개를 만들어 막으려 합니다. 작년 꼴은 나지 않겠다는 거겠죠. 하지만 유인궤는 신라군과 협공하여 이걸 뚫어냈고, 부흥군은 1만여의 전사자를 내고 포위룰 풀고 임존성으로 후퇴합니다. 부흥군으로서는 이번에도 사비성을 얻지 못했으니 아쉬울 수밖에 없겠죠.

중국의 기록에는 여기서 부흥군 측을 이끈 게 도침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이걸 보고 썼을 삼국사기에는 복신으로 나오죠. 숭유억불의 느낌이 풀풀 납니다. 도침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큰 걸 알 수 있고, 이래서 충남 쪽 사비성 공격은 도침이 주도하고, 주류성 남쪽으로 영역을 넓히는 건 복신이 맡은 걸로 추정합니다. 투트랙 전략일까요.

유인궤는 병력이 적고 (전투 중 피해를 봤던 걸 수도 있겠죠) 사비성 구원에만 만족합니다. 당의 기록에는 신라군도 3월에 군량이 떨어져 떠났다고 돼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그 후의 전투가 나오고 있습니다. 반면 웅진강에서의 전투는 기록돼 있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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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라군을 이끌던 김품일은 가는 길에 병력을 나눠 두량윤성을 공격합니다. 처음에 소수 병력으로 근처까지 갔다가 적습을 받아 패했고, 3월 12일에는 (아마도 웅진강에서 전투를 끝내고 왔을) 본군이 도착해서 공격했지만 무려 한 달이 넘도록 깨뜨리지 못 합니다. 결국 4월 19일에 포기, 병력을 돌렸는데 빈골양에서 적의 공격을 받아 패하고, 각산에서도 적을 만나서 승리합니다.

죽은 사람은 적지만 물자를 많이 잃었다는 정도로 변명하고 있는데, 김춘추는 놀라서 금순(김흠순인 듯) , 천존 등을 보내 구원하려 할 정도였습니다. 작지 않은 패배라는 거죠. 다행히 적의 공격이 더 없어서 그대로 철수하지만요.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가 또 공격을 공격을 가합니다. 당이 다시 공격해오기 전에 신라를 밟아 놓기 위해서였겠죠. 뇌음신이라는 장수가 말갈 장수 생해와 함께 술천성과 북한산성을 공격해 왔고, 투석기까지 동원한 강력한 공격을 가합니다. 하지만 북한산성의 성주 동타천의 활약으로 20일이나 버텼고, 벼락을 동반한 비가 오면서 고구려군이 물러났죠.

칠중성에 이어 백제부흥군과 싸우는 틈을 타서 고구려가 쳐들어 온 케이스입니다. 이번 역시 신라군은 제대로 대응을 못 했고, 그저 현지에서 잘 버텨주기만 빌 뿐이었죠. 신라군은 다시 옛 백제 땅으로 가야 했습니다.

"우리의 병마는 크게 손해를 입었고, 이로움을 잃고 되돌아왔다. 남쪽 지방의 여러 성들도 일시에 반란을 일으켜서 복신에게 복속하니, 복신이 승세를 타고 또다시 부성을 포위하였다." - 답설인귀서 중

신라군이 이렇게 물러나자, 부흥군은 다시 세를 넓힙니다. 도침은 영군장군, 복신은 상잠장군이라 자칭하면서 기세를 떨쳤죠. 당군은 이를 막기 위해 1천명을 뽑아 막으려 하지만 실패,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 할 정도의 패배를 당합니다.

"듣건대 당나라는 신라와 약속하기를 백제 사람들 중 노인과 젊은이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이고, 그런 후에 나라를 신라에 넘겨주기로 하였다고 하니, 죽음을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생각하여, 이렇게 모여 스스로 진지를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

도침은 유인궤에게 사자를 보내 이렇게 전했다 합니다. 유인궤는 최대한 달래보려고 편지를 써서 도침에게 보내지만, 도침은 그 사신을 바깥 숙소에 두면서 이렇게 말 했다 합니다.

"사자의 벼슬은 낮고, 나는 일국의 대장이므로 말할 상대가 되지 않는다."

병사가 많은 것을 믿고 교만해져서라고 평가하고 있죠. 답장도 주지 않고 그냥 보냈다 합니다. 협상은 없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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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신라군을 출정시킬 것을 요청했고, 당에서도 신라에 명령을 내립니다. 김춘추는 김흠(순?)을 보냈는데, 고사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복신이 요격해서 패합니다. 그가 패해 돌아간 후 신라는 감히 다시 출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눈치를 보고 있던 남쪽의 성도 복신에게로 돌아섰고, 또 다시 사비성이 포위당합니다.

답설인귀서에서는 이 때 신라군이 다름 아닌 적의 중심 주류성을 공격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군의 병력이 적었고, 적이 그걸 눈치 채고 공격했다고 하죠.

이 661년 여름까지의 전투도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옵니다. 일단 주류성이 포함됐으니 전장이 충남이었느냐 전북이었느냐가 있겠죠. 여기에 하나 더 있으니, 3월의 두량윤성이 곧 주류성, 혹은 못해도 그 근처가 아니냐는 겁니다. 두 개의 전투로 나뉘어져 있지만 실은 하나의 전투였다는 거죠.

각각의 전투일 경우 2월부터 6월까지,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신라군이 두 번이나 왔다 가야 합니다. 거기다 두번째의 경우 유인궤가 합류한 후 중국에 다시 사람을 보내고, 당에서 다시 신라에 사람을 보내서 출발해야 하기에 필요한 시간이 더 짧습니다. 한 번에 일어난 거라면 시간이 충분하죠. 주류성과 두량윤성이 다른 성이라도 그렇게 여러 성을 한번에 공격하려 했기에 주류성 공격에 병력이 적었다고 할 수 있구요. 다만 이럴 경우 주류성은 충남에 있어야 하겠죠.

두 번의 전투로 볼 경우 사료상으로 확실히 순서가 나눠지는 걸 (도침이 거만해진 사건으로요) 무시할 수 없죠. 그리고 그 시간이 짧았기에 주류성을 공격할 병력이 적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주류성은 모르겠지만 두량윤성은 충남에 있어야 하겠죠. 두량윤성은 보통 충남 청양으로 비정됩니다. 맨 처음 일어났다는 좌평 정무의 두시원과 같은 곳으로 보기도 하죠. 이럴 경우 두량윤성 전투는 그가 주도했을 겁니다. 그리고 주류성 공격은 모험의 성격이 컸겠구요.

+) 장소 찾기도 어렵고 시간 순서 잡기도 어렵고 한데, 어쩔 수 없죠 뭐 -_-; 그 부여풍이 온 날도 설이 두 개로 나뉘어져 있는데, 무려 8개월 차이가 납니다.

어느 쪽으로 보든, 이 전투의 결과로 당군은 포위를 계속 당한 채로 신라군이 특공대를 조직해 몰래몰래 소금을 보내주는 걸로 연명하는 처지에 처하게 됩니다. 사비성을 지켜낸 것일 뿐, 상황은 더욱 더 악화돼 가고 있었죠.

이런 상황을 김춘추는 더 이상 버티지 못 합니다.

"6월, 대관사의 우물물이 핏물이 되었고, 금마군 땅에 피가 흘렀는데 그 넓이가 다섯 걸음이나 되었다.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의 북쪽에 장사 지냈다."

대관사, 금마군은 현재의 전북익산입니다. 이것과 죽음이 이어져있기 때문에 김춘추가 익산에서 어떤 식으로든 죽은 게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런 게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것 자체는 그냥 이야깃거리지만, 주류성이 전북이 아닐까 하는 설에는 도움을 주는 편이죠. 신라군이 익산에서 싸우고 있었거나 익산이 신라로 돌아섰다가 보복당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으니까요.

당시 신라는 전염병이 돌고 있었고, 백제를 물리쳤음에도 병력과 물자는 사비성을 구하는 데 쏟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고구려 공격을 위한 준비를 더 해야 했죠.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이 때 김춘추의 나이 56~57세, 그 때를 생각하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지만, 과로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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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1년 6월,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그렇게 세상을 떠납니다. 뛰어난 외교력으로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고, 문무왕으로 이어지는 삼국통일의 초석을 닦았죠. 위대한 업적을 세웠기에 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태종이라는 묘호를 올릴 정도로 큰 공을 세운 왕입니다. 지금이야 이에 대한 반발로 민족을 판 배신자로 까이고 있죠.

뭔가 길게 평가해야 될 인물이지만, 아쉽게도 한가롭게 평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군요. 태자 김법민이 짊어진 짐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평가할 부분이 있다면 나중에 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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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법민이 그의 뒤를 이으니 바로 문무왕입니다. 그의 나이 36세, 아버지를 이어 당으로 가서 외교전을 벌이고 황산벌 전투 등 전투에 참전한, 말 그대로 문무 왕 쪽으로 경험을 쌓은 왕이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아버지의 일을 마무리할 큰 임무가 주어졌죠. 그것도 백제에서는 부흥군이 계속 일어나고 고구려는 아직도 치지 못 한 상태에서 말입니다.


"대사 등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마땅히 사람을 보내 전송하여 주겠다"

백제부흥군은 661년 동안 전성기를 누립니다. 포위된 유인원 등을 이렇게 조롱했다 합니다. 심리전인 면이 크겠지만, 내세울 만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신라로 가는 길은 다시 끊었고, 고구려 공격 때문에 증원 걱정도 없었습니다. 반면 왜가 부흥군을 본격적으로 지원했고, 병력도 보내줬죠.

하지만, 그 뒤의 모습을 보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창 잘 나간다 싶을 때, 내분이 시작됐으니까요. 그리고 당군은 작전을 바꿔서 그 내분을 더욱 가속화시킬 수 있는 인물을 데리고 왔죠.

하지만 당장은 더 급한 일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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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고종에게 백제는 부차적인 목표였고, 주적은 역시 고구려였습니다. 백제부흥운동이 얼마나 어렵게 돼 가든간에 작전을 바꿀 순 없었죠. 그는 661년까지 고구려의 우방을 제거했고, 이제 고구려를 다시 치려 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말이죠. 645년 이후 16년 만에 대규모 병력이 고구려로 향합니다. 육군과 수군, 남쪽의 신라군까지 합친 병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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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테면 오라우. 먼저 오는 xx부터, 개박살 내주갔어!!"

661년, 이렇게 2차 여당전쟁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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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저엉말 오랜만에 고구려로 가게 되겠네요.

1차의 안시성(혹은 그 전의 을지문덕)의 영광과 3차의 허무함에 가려져서 그런지 2차는 좀 덜 알려진 것 같네요. 하지만, 만약 나당전쟁 이전에 만약에?를 넣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661년 말부터 662년이 되는 부분입니다. 이제 그 때로 가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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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항상 지켜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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