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5/26 00:08:47수정됨
Name   Schweigen
File #1   541FE197_F1ED_4F35_B600_EFEF66DC1C1C.jpeg (21.8 KB), Download : 18
File #2   C274CC2D_28BD_433C_AEBC_885B70E9223B.png (914.9 KB), Download : 17
Subject   슈바와 신딸기.




국민학교 5학년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광주로 전학을 했습니다. 광주에 집을 산건 아니구요 예전 대동고 자리 언덕배기 반지하 방 월세이었어요. 출입문 말고는 볕도 들지 않는 그런 반지하방이요. 거기서 연탄가스 중독된 적도 있고 음주운전 트럭에 치여 죽을 뻔 한적도 있고 그 집 사는 동안 참 다이나믹 했죠.

그런 동네에도 잘사는 집은 있었어요. 약국집 아들이던 같은반 친구처럼요. 그시절에 게임기, PC, RC카, 모형헬기를 가지고 놀던 애였어요. 당연히 아이들은 한번이라도 걔네집에 따라가 같이 놀고 싶어 했죠. 물론 저도요. 어느날인가 걔네 집에 놀러갔었어요. 어떻게 게임 한번 해보고 싶어 침만 흘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친구는 자기와 친한 애만 시켜주고 저 포함 나머지는 갤러리로 구경만 할 뿐이었죠

시간이 좀 되자 어머니가 수박을 잘라 오셨어요. 애들수에 맞춰서 잘라온걸로 기억해요. 인사를 하고 수박을 다 먹어갈 때쯤 그 친구가 저에게 자기가 먹고 남은 수박 껍질을 내밀며 그러더군요.

아나~ 이것도 먹어라~ 그지새끼.

그날 이후 걔네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다른애들이 같이 놀러 가자해도 핑계를 대며 곧장 집으로 가곤 했어요. 속으로야 RC카도 만지고 싶고 게임도 하고 싶었죠. 그래도 그냥 꾹 참고 지내다 보니 조금씩 괜찮아 지더라구요. 저에겐  개구리왕눈이, 바람돌이, 붕붕이 있었으니까요. 며칠이나 지났으려나요. 그 친구가 학교에 딸기를 싸왔습니다. 딸기가 요새처럼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제눈은 번쩍 떠졌고 침이 꿀덕꿀덕 넘어갔어요. 반 아이들은 나도 하나만 주라 모여들어 손을 내밀었죠. 그 친구는 으스대며 내말 잘 듣는 사람만 나눠 주겠다 했어요. 시끌시끌한 그 모습을 애써 외면하며 책을 읽는 척 했어요.

야 땅그지!!! 너도 하나 줄까?

딸기를 하나 들고와 제게 내밀었습니다.

아니 나 딸기 안좋아해. 물컹해서 싫어. 너나 먹어.

그 말을 들은 그 친구는 피식 웃으며 다시 자기 무리로 돌아갔습니다. 아주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 순간 에이~ 그러지 말고 먹어라 손에 쥐어주길 바랬어요. 너무 먹고 싶었거등요. 그날 집에 돌아와 울었던가 그랬을거에요. 아마...

시간은 흘렀고 아이러브스쿨이 한참 유행하던 어느날 국민학교 모임에서 그 친구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따라 약사가 되었더군요. 연세대니까 모 회원님 선배일지도 모르겠네요. 여튼 그날 한참 술이 오른 뒤 그 때 그 일을 물었습니다. 거지 취급하며 왜 수박껍질 먹으라 했냐구요. 그친구는 전혀 기억을 못하더군요. 그러면서 정말 미안하다며 무안할 정도로 사과를 했어요. 저는 좀 허탈했어요. 그게 너한테는 기억도 못하는 아무일도 아니었구나 싶어서요.

지금에와 생각하면 별로 친하지도 않은 애가 만날 놀러오니 얼마나 귀찮았있나 이해가 됩니다. 지지리도 가난한 목욕도 잘 안해 냄새나고 꿰제제한 행색의 아이가 자꾸 같이 놀려 했을테니... 어린 나이에 그럴법도 하지요.  그 친구 결혼한 뒤로 연락 끊어졌지만 그 친구와는 이후로 잘 지냈어요. 가끔 만나 술도 먹고 클럽도 같이 다니고 어울려 여행도 한번도 갔었고요.

긍까 그 친구를 탓하려는 게 아니라요...

좀전에 그 사람이 나폴레옹에서 딸기케익을 사왔어요. 같이 너한입 나한입 떠먹여 주다 보니 문득 그일이 생각 났습니다. 동일한 일도 누군가에겐 비극, 상대에겐 드라마, 또 누군가에겐 동화가 되기도 하지요.

여튼간에 딸기는 맛있습니다. 넵넵.



33
  • 할아버지, 옛날 얘기 자주 해주세요.
  • 결론의 상태가..
  • 가해자는 내가 때렸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은것 같습니다..
  • 기억은 안나더라도 저 또한 누군가에게 반드시 가해자였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나 다른 누군가에게 그럴거예요. 잘 읽었습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2772 기타[홍터뷰] 헬리제의우울 ep.1 - 걸잘알 헬리제 27 토비 22/05/03 3058 33
12740 기타[홍터뷰] 예고편: 헬리제의우울 33 토비 22/04/19 3529 33
12509 기타[홍터뷰] 다람쥐 ep.3 - 위기의 다람쥐 18 토비 22/02/11 3527 33
11709 육아/가정오늘 있었던 7살 딸과의 대화 18 shadowtaki 21/05/22 3724 33
11234 일상/생각아이들을 싫어했던 나... 28 whenyouinRome... 20/12/15 3653 33
10994 창작애기 홍차신입 17 업무일지 20/09/25 5338 33
10619 일상/생각슈바와 신딸기. 22 Schweigen 20/05/26 3219 33
10502 기타기부이벤트 총선 스코어 맞추기 결과 발표. 21 Schweigen 20/04/16 2968 33
10334 역사역사학 강연에서 의용대를 자처하는 이들을 만난 이야기 8 Chere 20/02/29 4030 33
7433 육아/가정나는 비 오는 아침의 엄마 9 짹짹 18/04/23 4608 33
6822 일상/생각20~30대에게 - 나이 40이 되면 느끼는 감정 17 망고스틴나무 17/12/24 4914 33
5526 정치동성애 이슈와 팬덤정치 이야기 138 기아트윈스 17/04/26 7156 33
5388 일상/생각김치즈 연대기: 내 반려냥이를 소개합니다 50 lagom 17/04/06 5297 33
4614 일상/생각타임라인과 속마음 나누기 35 Toby 17/01/13 4955 33
14306 일상/생각한 사람의 이야기. 30 비오는압구정 23/12/03 1739 32
13525 일상/생각내 인생 가장 고통스러운 명절연휴 6 당근매니아 23/01/31 2136 32
12096 게임월간 스타여캠 9월호 (비정기 간행) 22 알료사 21/09/18 3640 32
11999 일상/생각족보 4 私律 21/08/20 3194 32
11284 요리/음식(내맘대로 뽑은) 2020년 네캔만원 맥주 결산 Awards 36 캡틴아메리카 20/12/27 5397 32
11276 일상/생각어느 택배 노동자의 한탄 11 토비 20/12/26 3609 32
11828 일상/생각안티테제 전문 25 순수한글닉 21/06/29 3696 32
10815 의료/건강벤쿠버 - 정신건강서비스 4 풀잎 20/07/25 4919 32
9874 일상/생각착한 여사친 이야기 9 Jace.WoM 19/10/23 5148 32
9788 기타참치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갔습니다. 29 김독자 19/10/07 4789 32
9419 사회사회가 감내할 수 있는 적정비용을 찾아서 35 Fate 19/07/10 6216 3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