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8/30 16:21:52
Name   아침커피
Link #1   https://crmn.tistory.com/103
Subject   한복의 멋, 양복의 스타일
(작년 이맘 때쯤, 추석 직후에 쓴 글입니다)

추석 때 짐 정리를 하던 중 17년 전에 입던 한복이 나와서 옛 생각을 떠올리며 입어봤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때와 비교하면 몸무게가 10kg 넘게 늘었는데도 한 치의 어색함 없이 맞춤복처럼 잘 맞았습니다. 마침 그 당시에 입던 청바지도 나와서 입어봤는데 단추조차 잠기지 않아서 제대로 입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맞추었던 양복이 체중이 고작 몇 kg 늘자 안 맞게 되어서 수선했던 일도 생각나네요.

세계 어느 나라든 박물관에 가면 그 나라의 전통 의복을 볼 수 있습니다. 옷이 문화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복과 양복을 비교하면 한국과 서양 문화의 차이를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복은 옷이 사람에 맞춥니다. 허리는 두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통이 크게 되어 있어서 남는 길이를 몸에 둘러 감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7년 전의 내가 입으나 몸무게가 10kg에 추가로 추석 음식만큼 늘어난 지금의 내가 입으나 그저 겹쳐서 몸에 두르는 길이만 짧아질 뿐 한복 바지는 딱 맞게 되어 있습니다. 허리띠도 필요한 대로 길이를 조절해서 묶으면 됩니다. 두루마기의 옷고름도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자연스럽게 늘어뜨리는 게 한복의 멋입니다.

양복은 사람이 옷에 맞춥니다. 기성복이 아니라 맞춤복이라고 해도 양복은 한 번 만들어지면 그 옷에 사람이 맞춰야 합니다. 흔히들 말하는 양복의 핏(fit)은 한 치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도 디올 옴므를 입으려고 다이어트를 해야 했다는 에피소드가 양복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양복은 벨트를 조이고 넥타이를 꽉 매야 하는 옷입니다. 그래서 양복을 잘 입으면 멋이 아니라 무슨 브랜드 이름마따나 스타일이 납니다. 스타일과 석판에 무언가를 긁어서 새긴다는 뜻의 스타일러스(stylus)는 어원이 같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이 언급한 대로 나를 긁고 깎아내서 만들어내야 하는 것, 한번 새겨지면 변형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스타일입니다.

그래서 한복과 양복이 다르고 멋과 스타일이 다릅니다. 멋이 아니라 스타일을 따르게 되면서 사람들이 옷 입는 것이 많이 비슷비슷해졌습니다. 개성을 따른다고 하지만 이미 사회에서 개성이라고 용인되어 있는 정형(定形)을 따를 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대충 입는 것 같아도 정해진 방식대로 대충 입어야 하는 것이 현대 한국 패션이고 한국 패션의 비극입니다.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이라는 제목의 수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덕수궁(德壽宮)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硯滴)은 연꽃 모양으로 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整然)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均衡)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破格)이 수필인가 한다."

피천득 선생님이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라고 했던 혼자서 옆으로 꼬부라진 꽃잎 하나를 저는 한국인의 정서 속에 존재하는 멋이라고 봅니다. 정해진 규칙, 즉 정해진 스타일에 답답함을 느끼고 누가 뭐래도 내가 해보고 싶은 대로 청자 연적의 꽃잎 하나처럼 옆으로 꼬부라져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 한국인의 멋을 억누르지 말고 살려줘야 합니다. 그것을 '멋대로 한다'며 부정적으로 취급하지 않고 '멋지다'고 인정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5
  • 이거슨 문과의 글이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1481 문화/예술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2010년대 추천 애니메이션 28편+1편 (추가) 17 이그나티우스 21/03/11 7963 11
11395 문화/예술시로바코 극장판 리뷰 4 이그나티우스 21/02/04 4205 5
11374 문화/예술푸틴 궁전 (추정?) 항공샷 3 Curic 21/01/24 4888 3
11225 문화/예술강운구 '마을 삼부작' 중 goldfish 20/12/14 3800 4
11137 문화/예술리갈하이 3화 (스포) 4 알료사 20/11/15 4600 5
11028 문화/예술지금까지 써본 카메라 이야기(#04) – Ricoh GR-D2 2 *alchemist* 20/10/05 5209 8
11004 문화/예술여백이 없는 나라 10 아침커피 20/09/29 4827 27
10989 문화/예술초가집과 모찌떡과 랩실 5 아침커피 20/09/24 4512 15
10942 문화/예술추천하는 최신 애니메이션 OST 2 이그나티우스 20/09/09 5314 2
10900 문화/예술한복의 멋, 양복의 스타일 3 아침커피 20/08/30 4674 5
10876 문화/예술오색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 13 아침커피 20/08/23 6010 11
10874 문화/예술무료 영화 감상 사이트 추천 10 리니시아 20/08/22 5873 8
10864 문화/예술술도 차도 아닌 것의 맛 7 아침커피 20/08/17 3995 19
10808 문화/예술지금까지 써본 카메라 이야기(#03) – Leica X2 (이미지 다량 포함) 10 *alchemist* 20/07/23 6376 6
10715 문화/예술쿄토 애니메이션의 마스터피스: <타마코 러브 스토리> 7 이그나티우스 20/06/26 5661 7
10638 문화/예술간송미술관 두 보물 불상의 경매 유찰, 그리고 아무 소리 13 메존일각 20/06/01 4399 18
10553 문화/예술드라마) 이어즈 & 이어즈(2019) 짧은 리뷰 3 울적새 20/05/05 3693 8
10528 문화/예술일요일(4월 26일) 조성진의 도이치 그라모폰 유튜브 라이브 주소입니다 3 이그나티우스 20/04/25 3828 8
10489 문화/예술[번역] 오피니언 : 코로나 19와 동선추적-우리의 개인적 자유를 희생시킬 수는 없다. 37 步いても步いても 20/04/13 4394 6
10464 문화/예술[스포포함] 억압받는 수인 세상에서 살아남기, BNA(Brand New Animal) 4 kaestro 20/04/06 6371 1
10357 문화/예술이집트 기자45 면과 남성 고급 브랜드 셔츠 8 들풀처럼 20/03/08 6673 4
10315 문화/예술수메르의 '속담' 3 치리아 20/02/22 5052 11
10314 문화/예술케이온과 교지편집부와 영화감상반과 '리크루팅'에 대한 이야기 8 이그나티우스 20/02/22 4928 1
10286 문화/예술fan letter for BBoy The End, BBoy Born 3 No.42 20/02/14 4625 6
10279 문화/예술설국열차 공동각본가가 본 봉준호 Hong10Kong20 20/02/10 5006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