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1/01/06 15:48:05수정됨 |
Name | ar15Lover |
Subject | 현대사회는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가 |
작성자가 본문을 삭제한 글입니다. 4
이 게시판에 등록된 ar15Lover님의 최근 게시물
|
유나바머 ㅋㅋ 내 이웃의 머가리를 깰 수 있다고 존엄성이 회복되는건 아닌것 같아요. 여러명의 머가리를 박살낸다고 유능함을 증명하고, 그런 나를 다른사람이 두려워 한다고 권력이 생기는것도 아니구요.
오히려 선사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던 생계에 대한 부담을 기본 소득으로 극복하고, 대리활동으로 자아실현 하는데 집중하는게 더 존엄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선사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던 생계에 대한 부담을 기본 소득으로 극복하고, 대리활동으로 자아실현 하는데 집중하는게 더 존엄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부터 생각하던 화두가 있읍니다. 사실은 비인간적으로 닭을 사육하는 방식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조금 바꾸면,
1) 과학자와 기업가들은 산업폐기물을 생산하면서 난방연료를 10$에 판매합니다.
2) 친환경 공법으로 바꾸면서 산업폐기물과 탄소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대신 난방연료는 11$이 되죠. 그리고 개발도상국의 어린이 5만명이 난방연료가 모자라서 죽게됩니다.
어느 쪽이 나은 선택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탄소배출이나 환경오염에 관심을 가지는건 선진국 사람들인 이유는 있는것 같습니다. 지난 백년간 잘도 오염물질을 뿜어낸 걔들이요. 그리고 산업화나 과학기술만의 문제는 아닌것 같습니다.
1) 과학자와 기업가들은 산업폐기물을 생산하면서 난방연료를 10$에 판매합니다.
2) 친환경 공법으로 바꾸면서 산업폐기물과 탄소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대신 난방연료는 11$이 되죠. 그리고 개발도상국의 어린이 5만명이 난방연료가 모자라서 죽게됩니다.
어느 쪽이 나은 선택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탄소배출이나 환경오염에 관심을 가지는건 선진국 사람들인 이유는 있는것 같습니다. 지난 백년간 잘도 오염물질을 뿜어낸 걔들이요. 그리고 산업화나 과학기술만의 문제는 아닌것 같습니다.
나무 창과 돌로만든 곤봉으로 무장하고 있는 원주민은 무섭습니다. 이분을 놀라게 하면 머가리가 깨져 죽을 수도 있어요. 이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원주민 부족은 훨씬 무섭습니다. 하지만, 자동소총과 기갑, 항공전력과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한 국가권력이 자행하는 살상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 수준입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현재의 국가 보다 살상이 적을것 같진 않습니다. 대량살상무기를 가졌다는것과 대량 살상을 한다는건 다른 이야기구요.
[[오히려 선사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던 생계에 대한 부담을 기본 소득으로 극복하고, 대리활동으로 자아실현 하는데 집중하는게 더 존엄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저 높으신 분들이 신과 같은 권력을 누리며 이 세상과 내 몸뚱이, 내 정신을 마음껏 주무르는 동안 기본소득 주워먹고 오락이나 하면서 만족하라는 소린데, 전 그런 상황을 받아들일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글 올려주실 때마다 읽고 있는데... 그래서 결국 기술-산업 체제를 어떻게 무너뜨릴 것이며, 그렇게 무너뜨린 다음에 세상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그럴듯한 이야기가 없는 것 같습니다. 높으신 분들에게 휘둘리는게 싫은 것이라면 스스로 높으신 분이 되는 편이 현실적이고, 체제를 극복하고 싶은 것이라면 단순히 무너뜨리고 이전 시대로 퇴행하는 것 이상의 비전과 방법이 있어야 할텐데 그런 것이 없습니다.
글쎄요. 저는 우리나라의 성인 남성으로서 의식주나 안전같은 하위 욕구에 대한 결핍을 거의 못 느끼며 살고 있어요.
그런데 수렵채집사회는 매일 끼니 걱정에, 맹수나 다른 사람이 공격할까봐 잠도 마음 편히 못 잤을 것 같아요.
그렇게 하위 욕구가 제대로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존경, 자아실현처럼 상위 욕구가 얼마나 의미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수렵채집사회는 매일 끼니 걱정에, 맹수나 다른 사람이 공격할까봐 잠도 마음 편히 못 잤을 것 같아요.
그렇게 하위 욕구가 제대로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존경, 자아실현처럼 상위 욕구가 얼마나 의미있을지 모르겠어요.
모든 것을 효율성, 경제성장, 기술 발전의 잣대로 바라보는 현대 사회 특유의 멘털리티가 있습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과학기술의 발전과 산업화에 반하는 모든 시도는 명백한 퇴행 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관점을 믿지 않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산업화의 끝에는 인간 존엄성의 상실과 재앙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사람들이 기술의 발전과 경제성장에 열광하기 시작한 것은 멀게 잡아봤자 고작 18세기부터이고, 그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서양사회, 그 중에서도 영국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한국을 기준으로 둘 경... 더 보기
모든 것을 효율성, 경제성장, 기술 발전의 잣대로 바라보는 현대 사회 특유의 멘털리티가 있습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과학기술의 발전과 산업화에 반하는 모든 시도는 명백한 퇴행 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관점을 믿지 않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산업화의 끝에는 인간 존엄성의 상실과 재앙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사람들이 기술의 발전과 경제성장에 열광하기 시작한 것은 멀게 잡아봤자 고작 18세기부터이고, 그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서양사회, 그 중에서도 영국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한국을 기준으로 둘 경우 70년밖에 안됩니다. 즉, 현재의 관점이 디폴트고 과거의 관점이 예외적인게 아니라, 과거의 관점이 디폴트고 현재의 관점이 예외적인 것입니다.
다른 질문에 대해서는, 자칫 민감한 주제일 수도 있으니 따로 쪽지 보내드리겠습니다.
다른 질문에 대해서는, 자칫 민감한 주제일 수도 있으니 따로 쪽지 보내드리겠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고 계신다면, 그건 둘중 하나입니다. 상위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극소수 행운아들 중 한명이거나, 아니면 상위 욕구를 거세당했거나, 스스로 거세한 겁니다.
[[그런데 수렵채집사회는 매일 끼니 걱정에, 맹수나 다른 사람이 공격할까봐 잠도 마음 편히 못 잤을 것 같아요.]]라는 주장은 그냥 선생님의 추측일 뿐이지, 이들을 직접 관찰한 사람들의 보고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신 바가 수렵채집인들이 현대인들보다 불행하지 않았느냐를 의미한다면, 근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단 자살율은 현대인들이 훨씬 높습니다. 물론 이거 하나로 무조건 현대인은 불행하고 수렵채집인은 행복하다고 결론내릴 순 없습니다.
[[그런데 수렵채집사회는 매일 끼니 걱정에, 맹수나 다른 사람이 공격할까봐 잠도 마음 편히 못 잤을 것 같아요.]]라는 주장은 그냥 선생님의 추측일 뿐이지, 이들을 직접 관찰한 사람들의 보고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신 바가 수렵채집인들이 현대인들보다 불행하지 않았느냐를 의미한다면, 근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단 자살율은 현대인들이 훨씬 높습니다. 물론 이거 하나로 무조건 현대인은 불행하고 수렵채집인은 행복하다고 결론내릴 순 없습니다.
가치를 어디에 어떻게 부여하느냐는 개개인의 자유지요. 하지만 자연은 그런 가치따윈 신경쓰지 않습니다. 여기서 자연이란 원시의 자연뿐만 아니라 선조들이 쌓아 우리에게 던진 문명,체제까지 포함하죠. 그것은 현대인인 우리가 선택하는 사항이 아니에요. 그저 그렇게 주어진 것이고 거기에 적응한 자들이 생존하여 대를 이을 뿐이죠.
원시사회에서 자아실현이나 욕구추구란 우선 우수한 사냥,채집 실력이나 탁월한 신체조건을 갖추어 주어진 환경을 극복해 감에 따라 최소한의 생존걱정을 덜어낸 다음의 일이었겠죠. 그런 기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주... 더 보기
원시사회에서 자아실현이나 욕구추구란 우선 우수한 사냥,채집 실력이나 탁월한 신체조건을 갖추어 주어진 환경을 극복해 감에 따라 최소한의 생존걱정을 덜어낸 다음의 일이었겠죠. 그런 기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주... 더 보기
가치를 어디에 어떻게 부여하느냐는 개개인의 자유지요. 하지만 자연은 그런 가치따윈 신경쓰지 않습니다. 여기서 자연이란 원시의 자연뿐만 아니라 선조들이 쌓아 우리에게 던진 문명,체제까지 포함하죠. 그것은 현대인인 우리가 선택하는 사항이 아니에요. 그저 그렇게 주어진 것이고 거기에 적응한 자들이 생존하여 대를 이을 뿐이죠.
원시사회에서 자아실현이나 욕구추구란 우선 우수한 사냥,채집 실력이나 탁월한 신체조건을 갖추어 주어진 환경을 극복해 감에 따라 최소한의 생존걱정을 덜어낸 다음의 일이었겠죠. 그런 기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졌을까요? 아마 극소수의 상위집단이었을 겁니다. 현대사회라고 크게 다르지 않아요. 우선 이 문명 환경이 요구하는 기초학습능력, 그로부터 파생되는 업무수행능력을 갖추어감에 따라 생존걱정을 덜어낸 사람들이 그 후의 자아실현과 욕구추구을 고민하게 되죠. 그렇게 보면 오히려 원시사회보단 현대사회가 그 혜택을 누리는 수가 더 많을 겁니다. 때문에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현 체제에 합의하고 동의해 나가는 것이구요. 그래서 이 체제는 보다 더 공고해져가겠죠.
소외되는 계층이 없는 유토피아가 이뤄진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만은, 현실적으론 원시사회보다 현대사회가 그 유토피아에 가까워져 가고 있는것일거에요. 자연이 얼마나 냉혹하고 잔인한지 말하자면 끝도 없지만, 사실 그조차 우리의 가치부여일 뿐이니까요. 자연은 그저 말 그대로 주어져 존재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죠.
원시사회에서 자아실현이나 욕구추구란 우선 우수한 사냥,채집 실력이나 탁월한 신체조건을 갖추어 주어진 환경을 극복해 감에 따라 최소한의 생존걱정을 덜어낸 다음의 일이었겠죠. 그런 기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졌을까요? 아마 극소수의 상위집단이었을 겁니다. 현대사회라고 크게 다르지 않아요. 우선 이 문명 환경이 요구하는 기초학습능력, 그로부터 파생되는 업무수행능력을 갖추어감에 따라 생존걱정을 덜어낸 사람들이 그 후의 자아실현과 욕구추구을 고민하게 되죠. 그렇게 보면 오히려 원시사회보단 현대사회가 그 혜택을 누리는 수가 더 많을 겁니다. 때문에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현 체제에 합의하고 동의해 나가는 것이구요. 그래서 이 체제는 보다 더 공고해져가겠죠.
소외되는 계층이 없는 유토피아가 이뤄진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만은, 현실적으론 원시사회보다 현대사회가 그 유토피아에 가까워져 가고 있는것일거에요. 자연이 얼마나 냉혹하고 잔인한지 말하자면 끝도 없지만, 사실 그조차 우리의 가치부여일 뿐이니까요. 자연은 그저 말 그대로 주어져 존재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죠.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현상은 초기 문명부터 있어왔죠. 하지만 정도의 차이를 봐야합니다. 고대 이집트 파라오, 고대 중국 천자의 권력이 아무리 드높았던들 모든 백성의 인적사항을 파악하는건 불가능했습니다. 현대는 그게 가능한 시대죠. 현대인들의 처지는 가축과 유사합니다. 공교육의 존재 의의가 뭔데요. 체제의 입맛에 맞는 인간을 양성하는거죠.
인류의 생활수준은 농업을 시작하면서 오히려 떨어졌습니다. 영양불균형으로 인해 키가 작아졌고, 평균수명은 줄어들었으며, 기근과 전염병에 취약해졌습니다. 계급이 등장하면서 제도적인 착취가 시... 더 보기
인류의 생활수준은 농업을 시작하면서 오히려 떨어졌습니다. 영양불균형으로 인해 키가 작아졌고, 평균수명은 줄어들었으며, 기근과 전염병에 취약해졌습니다. 계급이 등장하면서 제도적인 착취가 시... 더 보기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현상은 초기 문명부터 있어왔죠. 하지만 정도의 차이를 봐야합니다. 고대 이집트 파라오, 고대 중국 천자의 권력이 아무리 드높았던들 모든 백성의 인적사항을 파악하는건 불가능했습니다. 현대는 그게 가능한 시대죠. 현대인들의 처지는 가축과 유사합니다. 공교육의 존재 의의가 뭔데요. 체제의 입맛에 맞는 인간을 양성하는거죠.
인류의 생활수준은 농업을 시작하면서 오히려 떨어졌습니다. 영양불균형으로 인해 키가 작아졌고, 평균수명은 줄어들었으며, 기근과 전염병에 취약해졌습니다. 계급이 등장하면서 제도적인 착취가 시작되었고, 전쟁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아사망률이 높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수렵채집인들은 이에 대해 별로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현대인들이 낙태에 대해 별로 슬퍼하지 않는 것 처럼요.
선사시대인들도 문화생활을 즐겼습니다. 라스코 벽화에 대해 알아보세요.
네, 수렵채집인들의 삶은 고달펐고, 가끔씩 폭력적이었고, 가끔씩 잔인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인간의 삶입니다.
인류의 생활수준은 농업을 시작하면서 오히려 떨어졌습니다. 영양불균형으로 인해 키가 작아졌고, 평균수명은 줄어들었으며, 기근과 전염병에 취약해졌습니다. 계급이 등장하면서 제도적인 착취가 시작되었고, 전쟁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아사망률이 높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수렵채집인들은 이에 대해 별로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현대인들이 낙태에 대해 별로 슬퍼하지 않는 것 처럼요.
선사시대인들도 문화생활을 즐겼습니다. 라스코 벽화에 대해 알아보세요.
네, 수렵채집인들의 삶은 고달펐고, 가끔씩 폭력적이었고, 가끔씩 잔인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인간의 삶입니다.
[[여기서 자연이란 원시의 자연뿐만 아니라 선조들이 쌓아 우리에게 던진 문명,체제까지 포함하죠. 그것은 현대인인 우리가 선택하는 사항이 아니에요.]] 전 여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자연과 인간이 발명한 체제는 명백하게 다릅니다. 체제의 등장이 불가피하다면 그건 노화나 가뭄이 불가피한 방식으로 불가피한 것이 아닙니다. 체제를 쌓아올리고 지키려는 자들 때문에 불가피한 것입니다. 이들을 막는게 불가능하게 때문에 이들을 비난할 수 없다면, 똑같은 논리로 살인을... 더 보기
[[여기서 자연이란 원시의 자연뿐만 아니라 선조들이 쌓아 우리에게 던진 문명,체제까지 포함하죠. 그것은 현대인인 우리가 선택하는 사항이 아니에요.]] 전 여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자연과 인간이 발명한 체제는 명백하게 다릅니다. 체제의 등장이 불가피하다면 그건 노화나 가뭄이 불가피한 방식으로 불가피한 것이 아닙니다. 체제를 쌓아올리고 지키려는 자들 때문에 불가피한 것입니다. 이들을 막는게 불가능하게 때문에 이들을 비난할 수 없다면, 똑같은 논리로 살인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살인범을 비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원시사회에서 자아실현이나 욕구추구란 우선 우수한 사냥,채집 실력이나 탁월한 신체조건을 갖추어 주어진 환경을 극복해 감에 따라 최소한의 생존걱정을 덜어낸 다음의 일이었겠죠. 그런 기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졌을까요? 아마 극소수의 상위집단이었을 겁니다.]] 라는 주장은 그냥 선생님의 추측일 뿐이지, 이들을 직접 관찰한 사람들의 보고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원시사회에서 자아실현이나 욕구추구란 우선 우수한 사냥,채집 실력이나 탁월한 신체조건을 갖추어 주어진 환경을 극복해 감에 따라 최소한의 생존걱정을 덜어낸 다음의 일이었겠죠. 그런 기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졌을까요? 아마 극소수의 상위집단이었을 겁니다.]] 라는 주장은 그냥 선생님의 추측일 뿐이지, 이들을 직접 관찰한 사람들의 보고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음, 저는 체제는 인간의 발명과는 결이 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기간 수많은 집단들이 시도한 체제들 중 대다수는 폐기되고 남은 것들이 발전해 왔다고 보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에서의 생명의 진화와 밸런싱에 비유를 하는 편이지요. 체제를 쌓아올리고 지키려는 자들이 있다면, 그것을 무너뜨리고 바꾸려는 자들도 있을텐데요. 오히려 불가능한건 체제를 전복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체제를 전복하기를 선택하도록 하는것 아닌가요?
어차피 대중은 자연스럽게 선택할 겁니다. 현 체제가 불합리하고 밸런스가 무너졌음이 대다... 더 보기
어차피 대중은 자연스럽게 선택할 겁니다. 현 체제가 불합리하고 밸런스가 무너졌음이 대다... 더 보기
음, 저는 체제는 인간의 발명과는 결이 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기간 수많은 집단들이 시도한 체제들 중 대다수는 폐기되고 남은 것들이 발전해 왔다고 보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에서의 생명의 진화와 밸런싱에 비유를 하는 편이지요. 체제를 쌓아올리고 지키려는 자들이 있다면, 그것을 무너뜨리고 바꾸려는 자들도 있을텐데요. 오히려 불가능한건 체제를 전복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체제를 전복하기를 선택하도록 하는것 아닌가요?
어차피 대중은 자연스럽게 선택할 겁니다. 현 체제가 불합리하고 밸런스가 무너졌음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동의되고, 현 체제에 순응함으로 발생하는 리스크가 뒤엎는데 따르는 리스크보다 크다면. 그 체제는 어떤 권력집단도 인위적으로 지켜내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 과정들을 이미 역사속에서 겪어왔기 때문에 현대사회는 과거에 비해 밸런스가 갖춰져 왔고 대다수가 동의한 체제들 위주로 살아남아 있는것이죠. 그것이 설령 동물원같은 안락한 감금이라 할지라도요.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이보다 앞서서 구체화해야 할 것이, 실제로 '체제를 쌓아올리고 지키려는 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을 의미하는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체제를 수호하고 있는지도요.
어차피 대중은 자연스럽게 선택할 겁니다. 현 체제가 불합리하고 밸런스가 무너졌음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동의되고, 현 체제에 순응함으로 발생하는 리스크가 뒤엎는데 따르는 리스크보다 크다면. 그 체제는 어떤 권력집단도 인위적으로 지켜내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 과정들을 이미 역사속에서 겪어왔기 때문에 현대사회는 과거에 비해 밸런스가 갖춰져 왔고 대다수가 동의한 체제들 위주로 살아남아 있는것이죠. 그것이 설령 동물원같은 안락한 감금이라 할지라도요.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이보다 앞서서 구체화해야 할 것이, 실제로 '체제를 쌓아올리고 지키려는 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을 의미하는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체제를 수호하고 있는지도요.
'폭력으로 죽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교통사고로 죽는다' 이건 틀린 명제입니다
유나바머는 천조국 사람이니까 천조국 기준으로 생각한 것 같은데 (미국 기준 1:2.5 정도 됩니다. 한국은 더 벌어집니다)
전세계적 스케일로 보면 WHO피셜 한 해에 폭력으로 인한 사망자는 160만명 안팎인 반면 교통사고는 130만명 선입니다
오차가 있을 수 있지만, 절대로 저렇게 `훨씬 더 많은`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준은 아닌 것이지요
그리고 교통사고도 비난까진 아니라도 줄이기 위한 많은 노력을 합니다. 기술적인 방법, 기술을 ... 더 보기
유나바머는 천조국 사람이니까 천조국 기준으로 생각한 것 같은데 (미국 기준 1:2.5 정도 됩니다. 한국은 더 벌어집니다)
전세계적 스케일로 보면 WHO피셜 한 해에 폭력으로 인한 사망자는 160만명 안팎인 반면 교통사고는 130만명 선입니다
오차가 있을 수 있지만, 절대로 저렇게 `훨씬 더 많은`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준은 아닌 것이지요
그리고 교통사고도 비난까진 아니라도 줄이기 위한 많은 노력을 합니다. 기술적인 방법, 기술을 ... 더 보기
'폭력으로 죽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교통사고로 죽는다' 이건 틀린 명제입니다
유나바머는 천조국 사람이니까 천조국 기준으로 생각한 것 같은데 (미국 기준 1:2.5 정도 됩니다. 한국은 더 벌어집니다)
전세계적 스케일로 보면 WHO피셜 한 해에 폭력으로 인한 사망자는 160만명 안팎인 반면 교통사고는 130만명 선입니다
오차가 있을 수 있지만, 절대로 저렇게 `훨씬 더 많은`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준은 아닌 것이지요
그리고 교통사고도 비난까진 아니라도 줄이기 위한 많은 노력을 합니다. 기술적인 방법, 기술을 동원하지 않는 방법 둘 다 연구되고 있읍니다.
이것 역시 유나바머가 현직(?)인 시절엔 교통사고에 대한 경각심이나 피해를 줄이려는 노력이 21세기보다 덜했기 때문에 저렇게 생각하는게 아닌가 추측합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이 부분은 전공 분야와 연관되어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네요
유나바머는 천조국 사람이니까 천조국 기준으로 생각한 것 같은데 (미국 기준 1:2.5 정도 됩니다. 한국은 더 벌어집니다)
전세계적 스케일로 보면 WHO피셜 한 해에 폭력으로 인한 사망자는 160만명 안팎인 반면 교통사고는 130만명 선입니다
오차가 있을 수 있지만, 절대로 저렇게 `훨씬 더 많은`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준은 아닌 것이지요
그리고 교통사고도 비난까진 아니라도 줄이기 위한 많은 노력을 합니다. 기술적인 방법, 기술을 동원하지 않는 방법 둘 다 연구되고 있읍니다.
이것 역시 유나바머가 현직(?)인 시절엔 교통사고에 대한 경각심이나 피해를 줄이려는 노력이 21세기보다 덜했기 때문에 저렇게 생각하는게 아닌가 추측합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이 부분은 전공 분야와 연관되어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네요
우선 퇴행이 아니라고 하시니 회귀라고 바꿔 이야기하겠습니다. 뭐라고 부르는지가 별로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현대의 관점이 예외적인 것이라면 한 번이라도 이전 시대로 회귀했을 때 다시 현대적인, 기술-산업 체제의 등장은 일어나지 않거나 적어도 극히 드문 확률로 발생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지식을 후대에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릴 방법은, 심지어 핵전쟁이나 전염병 등으로 인한 회귀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없어보이고, 따라서 체제의 부활은 필연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원천적인 차단이 성공 할 때 조차 체제의 등장이 필연적인... 더 보기
현대의 관점이 예외적인 것이라면 한 번이라도 이전 시대로 회귀했을 때 다시 현대적인, 기술-산업 체제의 등장은 일어나지 않거나 적어도 극히 드문 확률로 발생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지식을 후대에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릴 방법은, 심지어 핵전쟁이나 전염병 등으로 인한 회귀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없어보이고, 따라서 체제의 부활은 필연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원천적인 차단이 성공 할 때 조차 체제의 등장이 필연적인... 더 보기
우선 퇴행이 아니라고 하시니 회귀라고 바꿔 이야기하겠습니다. 뭐라고 부르는지가 별로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현대의 관점이 예외적인 것이라면 한 번이라도 이전 시대로 회귀했을 때 다시 현대적인, 기술-산업 체제의 등장은 일어나지 않거나 적어도 극히 드문 확률로 발생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지식을 후대에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릴 방법은, 심지어 핵전쟁이나 전염병 등으로 인한 회귀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없어보이고, 따라서 체제의 부활은 필연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원천적인 차단이 성공 할 때 조차 체제의 등장이 필연적인 것이라고 여깁니다. 애초에 원시적 자연 상태에서 인류가 체제를 쌓아올린 것이 지금의 역사니까요.)
그렇다면 체제를 완전히 극복한, 이전 시대와는 다른 형태의 문명을 이륙하던가 체제가 부활 할 때마다 반드시 체제를 다시 무너뜨리는 방법이 존재해야 할텐데 그런 것을 지금까지의 글에서는 찾을 수 없었네요.
현대의 관점이 예외적인 것이라면 한 번이라도 이전 시대로 회귀했을 때 다시 현대적인, 기술-산업 체제의 등장은 일어나지 않거나 적어도 극히 드문 확률로 발생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지식을 후대에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릴 방법은, 심지어 핵전쟁이나 전염병 등으로 인한 회귀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없어보이고, 따라서 체제의 부활은 필연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원천적인 차단이 성공 할 때 조차 체제의 등장이 필연적인 것이라고 여깁니다. 애초에 원시적 자연 상태에서 인류가 체제를 쌓아올린 것이 지금의 역사니까요.)
그렇다면 체제를 완전히 극복한, 이전 시대와는 다른 형태의 문명을 이륙하던가 체제가 부활 할 때마다 반드시 체제를 다시 무너뜨리는 방법이 존재해야 할텐데 그런 것을 지금까지의 글에서는 찾을 수 없었네요.
그 질문에 대해서는 "산업사회와 그 미래" 207~212 문단으로 대답해드리겠습니다.(오타가 좀 많아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가 언젠가 한번 전반적으로 수정하겠습니다.)
[[우리가 제안한 혁명에 대해, 역사적으로 테크놀로지는 항상 진보해 왔고 단 한번도 후퇴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테크놀로지의 후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혁명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주장은 틀린 것이다.
우리는 테크놀로지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소규... 더 보기
[[우리가 제안한 혁명에 대해, 역사적으로 테크놀로지는 항상 진보해 왔고 단 한번도 후퇴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테크놀로지의 후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혁명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주장은 틀린 것이다.
우리는 테크놀로지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소규... 더 보기
그 질문에 대해서는 "산업사회와 그 미래" 207~212 문단으로 대답해드리겠습니다.(오타가 좀 많아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가 언젠가 한번 전반적으로 수정하겠습니다.)
[[우리가 제안한 혁명에 대해, 역사적으로 테크놀로지는 항상 진보해 왔고 단 한번도 후퇴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테크놀로지의 후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혁명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주장은 틀린 것이다.
우리는 테크놀로지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소규모 테크놀로지며, 다른 하나는 조직 의존형 테크놀로지다. 소규모 테크놀로지는 소규모 공동체가 외부 지원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를 말한다. 조직 의존형 테크놀로지는 대규모의 사회 조직에 의존하는 테크놀로지다. 우리는 소규모 테크놀로지가 후퇴한 적은 한 번도 없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조직 의존형 태크놀로지는 그것이 의존하고 있는 사회 조직이 붕괴할 때 함께 후퇴한다.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도 로마의 소규모 테크놀로지는 살아남았다. 영리한 시골 장인(匠人)이라면 누구든 물레방아를 만들 수 있었고, 숙련된 대장장이라면 로마식 제련법에 의해 얼마든지 철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조직 의존형 테크놀로지는 후퇴했다. 로마의 대수로는 무너졌고 다시는 재건되지 않았다. 로마의 도로 건설 기술은 잊혀졌다. 로마의 하수도 시스템은 잊혀졌으며 최근까지도 유럽 도시들의 하수도는 로마 제국이 아니라 고대 로마의 시스템에 머물러 있었다.
테크놀로지가 항상 진보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산업 혁명 이전 1,2세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테크놀로지가 소규모 테크놀로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 혁명 이후 개발된 테크놀로지는 대부분 조직 의존형 테크놀로지다. 냉장고를 예로 들어보자. 공장에서 생산된 부품이나 최첨단 공구들 없이 몇 사람의 지역 장인(匠人)들이 모여서 냉장고 한 대를 만드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기적적으로 그들이 냉장고를 만들어 낸다고 해도 안정적인 전기 공급 없이는 무용지믈이다. 그러니 강물을 막아 댐을 만들고 발전기를 세워야 한다. 발전기에는 엄청난 구리선이 필요하다. 현대적 공작 기계 없이 구리선 만드는 일을 상상해 보라. 이번엔 냉동을 위한 냉매(冷媒) 가스를 어디서 구할 것인가? 차라리 냉장고가 발명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얼음 창고를 만들거나 음식을 말리고 절여서 보관하는편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그러니 일단 산업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면, 냉장고 테크놀로지는 곧 사라져 버릴 것이 틀림없다. 다른 조직 의존형 테크놀로지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일단 이 테크놀로지가 한 세대 동안 잊혀지면, 그것을 다시 세우는 데는 그것을 처음 세우는 데 수백 년이 걸린 것처럼 역시 수백 년이 걸릴 것이다. 기술 서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것이며, 남아 있다고 해도 사방에 흩어져 있올 것이다. 만약 그 잔해 속에서 외부의 도움 없이 어떤 산업 사회가 다시 건설되려면, 다음과 같은 일련의 단계를 밟아야 할 것이다. 도구를 만들기 위해 도구가 필요하고, 그 도구를 만들기 위해 도구가 필요하고 그 도구를 만들기 위해... 길고 긴 경제 개발 과정과 사회 조직의 발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때에는 이미 테크놀로지에 저항하는 이데을로기가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어 있을 것이며, 설령 그런 이데올로기가 없다 해도, 산업 사회를 재건설하는데 흥미를 느낄 사람은 전혀 없으리라는 점에 대해서는 믿어도 종다. '진보'에 대한 열광은 현대 사회에 국한된 현상일 뿐이며, l7세기 이전까지는 그런 현상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세 후기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진보한 네 개의 중심 문명이 있었다. 유럽. 이슬람권. 인도, 그리고 극동(증국. 일본. 한국) 문명이다. 이들 문명 중 세 문명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상태로 머물렀다. 오직 유럽만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럽이 그 때 왜 그렇게 역동적으로 변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사가들은 이런저런 이론을 내세우지만, 공허한 이론에 불과하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테크놀로지 사회로의 급속한 발전은 한정된 특수 조건 아래서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기간에 걸친 테크놀로지의 후퇴가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결국에는 산업-테크놀로지 형태의 사회가 다시 발전할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500년 혹은 l,000년 뒤에 벌어질 일을 예측하고 통제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 문제는 미래에 살아갈 사람들이 해결할 문제다.]]
[[우리가 제안한 혁명에 대해, 역사적으로 테크놀로지는 항상 진보해 왔고 단 한번도 후퇴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테크놀로지의 후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혁명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주장은 틀린 것이다.
우리는 테크놀로지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소규모 테크놀로지며, 다른 하나는 조직 의존형 테크놀로지다. 소규모 테크놀로지는 소규모 공동체가 외부 지원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를 말한다. 조직 의존형 테크놀로지는 대규모의 사회 조직에 의존하는 테크놀로지다. 우리는 소규모 테크놀로지가 후퇴한 적은 한 번도 없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조직 의존형 태크놀로지는 그것이 의존하고 있는 사회 조직이 붕괴할 때 함께 후퇴한다.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도 로마의 소규모 테크놀로지는 살아남았다. 영리한 시골 장인(匠人)이라면 누구든 물레방아를 만들 수 있었고, 숙련된 대장장이라면 로마식 제련법에 의해 얼마든지 철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조직 의존형 테크놀로지는 후퇴했다. 로마의 대수로는 무너졌고 다시는 재건되지 않았다. 로마의 도로 건설 기술은 잊혀졌다. 로마의 하수도 시스템은 잊혀졌으며 최근까지도 유럽 도시들의 하수도는 로마 제국이 아니라 고대 로마의 시스템에 머물러 있었다.
테크놀로지가 항상 진보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산업 혁명 이전 1,2세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테크놀로지가 소규모 테크놀로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 혁명 이후 개발된 테크놀로지는 대부분 조직 의존형 테크놀로지다. 냉장고를 예로 들어보자. 공장에서 생산된 부품이나 최첨단 공구들 없이 몇 사람의 지역 장인(匠人)들이 모여서 냉장고 한 대를 만드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기적적으로 그들이 냉장고를 만들어 낸다고 해도 안정적인 전기 공급 없이는 무용지믈이다. 그러니 강물을 막아 댐을 만들고 발전기를 세워야 한다. 발전기에는 엄청난 구리선이 필요하다. 현대적 공작 기계 없이 구리선 만드는 일을 상상해 보라. 이번엔 냉동을 위한 냉매(冷媒) 가스를 어디서 구할 것인가? 차라리 냉장고가 발명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얼음 창고를 만들거나 음식을 말리고 절여서 보관하는편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그러니 일단 산업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면, 냉장고 테크놀로지는 곧 사라져 버릴 것이 틀림없다. 다른 조직 의존형 테크놀로지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일단 이 테크놀로지가 한 세대 동안 잊혀지면, 그것을 다시 세우는 데는 그것을 처음 세우는 데 수백 년이 걸린 것처럼 역시 수백 년이 걸릴 것이다. 기술 서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것이며, 남아 있다고 해도 사방에 흩어져 있올 것이다. 만약 그 잔해 속에서 외부의 도움 없이 어떤 산업 사회가 다시 건설되려면, 다음과 같은 일련의 단계를 밟아야 할 것이다. 도구를 만들기 위해 도구가 필요하고, 그 도구를 만들기 위해 도구가 필요하고 그 도구를 만들기 위해... 길고 긴 경제 개발 과정과 사회 조직의 발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때에는 이미 테크놀로지에 저항하는 이데을로기가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어 있을 것이며, 설령 그런 이데올로기가 없다 해도, 산업 사회를 재건설하는데 흥미를 느낄 사람은 전혀 없으리라는 점에 대해서는 믿어도 종다. '진보'에 대한 열광은 현대 사회에 국한된 현상일 뿐이며, l7세기 이전까지는 그런 현상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세 후기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진보한 네 개의 중심 문명이 있었다. 유럽. 이슬람권. 인도, 그리고 극동(증국. 일본. 한국) 문명이다. 이들 문명 중 세 문명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상태로 머물렀다. 오직 유럽만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럽이 그 때 왜 그렇게 역동적으로 변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사가들은 이런저런 이론을 내세우지만, 공허한 이론에 불과하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테크놀로지 사회로의 급속한 발전은 한정된 특수 조건 아래서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기간에 걸친 테크놀로지의 후퇴가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결국에는 산업-테크놀로지 형태의 사회가 다시 발전할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500년 혹은 l,000년 뒤에 벌어질 일을 예측하고 통제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 문제는 미래에 살아갈 사람들이 해결할 문제다.]]
지적 감사합니다. 그 부분은 제가 확인을 안해봤습니다. 해당 문장은 1971년 미국에서 써졌으니, 지금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논점이 반박되지는 않습니다. 폭력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인간의 목숨을 귀하게 여겨서 폭력을 비난한다면, 교통사고도 동등하게 비난해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폭력을 비난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교통사고를 폭력만큼 비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폭력을 비난하는건 인간의 목숨을 귀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폭력을 사악한 것으로 여기는 자신의 이념을 타인에게 강요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논점이 반박되지는 않습니다. 폭력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인간의 목숨을 귀하게 여겨서 폭력을 비난한다면, 교통사고도 동등하게 비난해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폭력을 비난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교통사고를 폭력만큼 비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폭력을 비난하는건 인간의 목숨을 귀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폭력을 사악한 것으로 여기는 자신의 이념을 타인에게 강요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오랜 기간 수많은 집단들이 시도한 체제들 중 대다수는 폐기되고 남은 것들이 발전해 왔다고 보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에서의 생명의 진화와 밸런싱에 비유를 하는 편이지요.]] 이 말씀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선택이 인간 집단에도 적용해서, 더 진보한 기술을 가진 집단이 다른 집단을 제거하거나 흡수하는 방식하다가 결국 수렴한게 현대의 기술-산업 사회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제기하신 의문점들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 의문점들은 제가 예전에 번역해 홍차넷에 올린 글로 부분적으로 답변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https://redtea.kr/pb/pb.php?id=free&no=11195
제기하신 의문점들은 일리가 있습니다. 그 의문점들은 제가 예전에 번역해 홍차넷에 올린 글로 부분적으로 답변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https://redtea.kr/pb/pb.php?id=free&no=11195
아나키스트신가봐요.... 저는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사람이라 님의 사상?에 동의하기는 힘들겠네요. 아마도 선사시대였다면 저같은 사람은 무슨 병인지도 모른 채로 20대에 죽어야 했을테니...
농업을 시작하면서 생활수준이 떨어진 건 저도 들은 바 있고, 제가 쓴 댓글에는 없는 내용이라 생략합니다.
낙태는 의도적인 행위이고 영아의 사망은 비의도적인 일입니다. 현대에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유산에는 슬퍼합니다. 낙태 또한 고민고민해서 결정하는 게 현실이고,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는 사람도 많죠.
선사시대의 벽화는 대개는 주술... 더 보기
농업을 시작하면서 생활수준이 떨어진 건 저도 들은 바 있고, 제가 쓴 댓글에는 없는 내용이라 생략합니다.
낙태는 의도적인 행위이고 영아의 사망은 비의도적인 일입니다. 현대에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유산에는 슬퍼합니다. 낙태 또한 고민고민해서 결정하는 게 현실이고,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는 사람도 많죠.
선사시대의 벽화는 대개는 주술... 더 보기
아나키스트신가봐요.... 저는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사람이라 님의 사상?에 동의하기는 힘들겠네요. 아마도 선사시대였다면 저같은 사람은 무슨 병인지도 모른 채로 20대에 죽어야 했을테니...
농업을 시작하면서 생활수준이 떨어진 건 저도 들은 바 있고, 제가 쓴 댓글에는 없는 내용이라 생략합니다.
낙태는 의도적인 행위이고 영아의 사망은 비의도적인 일입니다. 현대에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유산에는 슬퍼합니다. 낙태 또한 고민고민해서 결정하는 게 현실이고,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는 사람도 많죠.
선사시대의 벽화는 대개는 주술적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 여가를 즐기기 위한 게 아니고 생존을 목적으로 한 거죠. 더 많은 사냥감을 잡게 해달라는...
인간의 삶...이란 게 따로 정의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사람이 다른 동물들보다 똑똑해서 이 지경이 된 거죠. 뭐, 사람이 어느정도는 가축하고 유사하다는 생각은 저도 하긴 하는데, 님은 거기서 좀 더 가셨나 보네요.
농업을 시작하면서 생활수준이 떨어진 건 저도 들은 바 있고, 제가 쓴 댓글에는 없는 내용이라 생략합니다.
낙태는 의도적인 행위이고 영아의 사망은 비의도적인 일입니다. 현대에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유산에는 슬퍼합니다. 낙태 또한 고민고민해서 결정하는 게 현실이고,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는 사람도 많죠.
선사시대의 벽화는 대개는 주술적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 여가를 즐기기 위한 게 아니고 생존을 목적으로 한 거죠. 더 많은 사냥감을 잡게 해달라는...
인간의 삶...이란 게 따로 정의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사람이 다른 동물들보다 똑똑해서 이 지경이 된 거죠. 뭐, 사람이 어느정도는 가축하고 유사하다는 생각은 저도 하긴 하는데, 님은 거기서 좀 더 가셨나 보네요.
아나키스트라고 부르셔도 좋습니다. 인류가 지구에 등장한게 250만년 전입니다. 문명과 국가들이 등장한건 1만 2천년 전에 불과합니다. 인류는 존재했던 기간 대부분을 문명 없이 지냈죠. 전염병에 대해서는, 인간은 오히려 문명이 등장하면서 전염병에 취약해졌습니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소규모 부족을 이루어 떠돌아 다녔기 때문에 전염병이 발생해도 그게 넓은 지역에 확대될 여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사람들이 좁은 지역에 밀집해서 살고, 비행기 같은 이동기술 덕분에 한 지역에 발생한 전염병이 순식간에 전 지구에 확산됩니다. 우리가 지... 더 보기
아나키스트라고 부르셔도 좋습니다. 인류가 지구에 등장한게 250만년 전입니다. 문명과 국가들이 등장한건 1만 2천년 전에 불과합니다. 인류는 존재했던 기간 대부분을 문명 없이 지냈죠. 전염병에 대해서는, 인간은 오히려 문명이 등장하면서 전염병에 취약해졌습니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소규모 부족을 이루어 떠돌아 다녔기 때문에 전염병이 발생해도 그게 넓은 지역에 확대될 여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사람들이 좁은 지역에 밀집해서 살고, 비행기 같은 이동기술 덕분에 한 지역에 발생한 전염병이 순식간에 전 지구에 확산됩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처럼요. 코로나 바이러스도 과학기술의 발전과 산업화의 결과물이죠.
선사시대 평균수명이 짧았다는건 높은 영아사망률 때문에 왜곡된 통계죠. 일단 2살까지 생존하면, 대부분은 60~70세까지 살았습니다.
선사시대의 벽화는 주술적 의미가 있지만, 당시에는 종교활동과 여가활동이 구분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셔야 합니다. 심지어 현대의 공휴일조차도 종교적인 배경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은 인간 답게 살아야 합니다.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려고 해선 안됩니다.
선사시대 평균수명이 짧았다는건 높은 영아사망률 때문에 왜곡된 통계죠. 일단 2살까지 생존하면, 대부분은 60~70세까지 살았습니다.
선사시대의 벽화는 주술적 의미가 있지만, 당시에는 종교활동과 여가활동이 구분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셔야 합니다. 심지어 현대의 공휴일조차도 종교적인 배경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은 인간 답게 살아야 합니다.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려고 해선 안됩니다.
https://plato.stanford.edu/entries/technology/
요거 한 번 읽어보실래요? 스탠포드 대학 자료여요. 지난 번 기술교육 커리큘럼 분석해서 국가 비교 논문 쓸 때 참고했던 자료인데, 그간 올려주시는 글 보면서 언젠가 한 번 추천드려야겠다 하고 있었어요. 영어로 된 글을 읽는데 진입장벽이 적으신 듯해서...
저번에 언뜻 자크 엘룰 이야기를 나누었었(카진스키가 인용했었으니)는데, 엘룰이 기술철학 사조에서... 더 보기
요거 한 번 읽어보실래요? 스탠포드 대학 자료여요. 지난 번 기술교육 커리큘럼 분석해서 국가 비교 논문 쓸 때 참고했던 자료인데, 그간 올려주시는 글 보면서 언젠가 한 번 추천드려야겠다 하고 있었어요. 영어로 된 글을 읽는데 진입장벽이 적으신 듯해서...
저번에 언뜻 자크 엘룰 이야기를 나누었었(카진스키가 인용했었으니)는데, 엘룰이 기술철학 사조에서... 더 보기
https://plato.stanford.edu/entries/technology/
요거 한 번 읽어보실래요? 스탠포드 대학 자료여요. 지난 번 기술교육 커리큘럼 분석해서 국가 비교 논문 쓸 때 참고했던 자료인데, 그간 올려주시는 글 보면서 언젠가 한 번 추천드려야겠다 하고 있었어요. 영어로 된 글을 읽는데 진입장벽이 적으신 듯해서...
저번에 언뜻 자크 엘룰 이야기를 나누었었(카진스키가 인용했었으니)는데, 엘룰이 기술철학 사조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인문학적 관점에서 기술을 바라보는 문제를 공유한다 해요. 이건 하이데거니, 아렌트니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 하고요. 전 하이데거는 못 읽었고, 아렌트만 좀 읽었는데 돌이켜보면 노동-제작-행위라는 삼단도식에 내재한 관점이 디자인-테크놀로지라는 이분법에 포개지는 것 같기도 해요.
우리가 흔히 접하는(엘룰이나 카진스키의 통찰도 같이 범주화 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철학이 공유하는 문제는, 기술을 블랙박스로 보고 내부 역동에 따라 생겨나는 한계나 자체적인 질서를 경시한다는 거거든요. 그 흔히 인터넷에 떠도는 '기획자는 개쩌는 아이디어를 생각한 후 기술자에게 이제부터 해결책은 너가 생각하라고 한다는'는 밈(디자인-테크놀로지 이분법) 처럼이요 ㅋㅋㅋ 근데 생각하는 모든 것을 기술이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인문학자들은 꼭 디자이너처럼 구는 경향이 있대요.
위 자료의 장점은 인문학적 관점에서 기술의 인간 종속(그게 뭔지는 차치하고서라도)을 비판 혹은 경외시 하는 관점과 동시에, 공학 등의 배경을 지닌 철학자들이 만들어 낸 '기술' 내부의 논리나 역동을 분석하는 관점도 다루고 있거든요. 디테일하게요. 중간에 나오는 삼원불가능성 정리 같은 건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예전에 fate님이 티탐에 다른 분과 영역에 빗대어 소개해주기도 하셨었지요. 여튼 기술은 도라에몽도 아니고, emerging technology만 기술인 것도 아니여요.
어차피 티타임이 각잡고 스텝 바이 스텝스로 이론 배틀, 데이터 배틀하는 곳은 아니잖아요. 디테일한 사실관계를 하나씩 하나씩 파고든다 해도 각자의 패러다임을 폭☆파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여.
근데 적어도 위 자료는 기술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변화 하는데는 도움이 될 거예요.
요거 한 번 읽어보실래요? 스탠포드 대학 자료여요. 지난 번 기술교육 커리큘럼 분석해서 국가 비교 논문 쓸 때 참고했던 자료인데, 그간 올려주시는 글 보면서 언젠가 한 번 추천드려야겠다 하고 있었어요. 영어로 된 글을 읽는데 진입장벽이 적으신 듯해서...
저번에 언뜻 자크 엘룰 이야기를 나누었었(카진스키가 인용했었으니)는데, 엘룰이 기술철학 사조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인문학적 관점에서 기술을 바라보는 문제를 공유한다 해요. 이건 하이데거니, 아렌트니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 하고요. 전 하이데거는 못 읽었고, 아렌트만 좀 읽었는데 돌이켜보면 노동-제작-행위라는 삼단도식에 내재한 관점이 디자인-테크놀로지라는 이분법에 포개지는 것 같기도 해요.
우리가 흔히 접하는(엘룰이나 카진스키의 통찰도 같이 범주화 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철학이 공유하는 문제는, 기술을 블랙박스로 보고 내부 역동에 따라 생겨나는 한계나 자체적인 질서를 경시한다는 거거든요. 그 흔히 인터넷에 떠도는 '기획자는 개쩌는 아이디어를 생각한 후 기술자에게 이제부터 해결책은 너가 생각하라고 한다는'는 밈(디자인-테크놀로지 이분법) 처럼이요 ㅋㅋㅋ 근데 생각하는 모든 것을 기술이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인문학자들은 꼭 디자이너처럼 구는 경향이 있대요.
위 자료의 장점은 인문학적 관점에서 기술의 인간 종속(그게 뭔지는 차치하고서라도)을 비판 혹은 경외시 하는 관점과 동시에, 공학 등의 배경을 지닌 철학자들이 만들어 낸 '기술' 내부의 논리나 역동을 분석하는 관점도 다루고 있거든요. 디테일하게요. 중간에 나오는 삼원불가능성 정리 같은 건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예전에 fate님이 티탐에 다른 분과 영역에 빗대어 소개해주기도 하셨었지요. 여튼 기술은 도라에몽도 아니고, emerging technology만 기술인 것도 아니여요.
어차피 티타임이 각잡고 스텝 바이 스텝스로 이론 배틀, 데이터 배틀하는 곳은 아니잖아요. 디테일한 사실관계를 하나씩 하나씩 파고든다 해도 각자의 패러다임을 폭☆파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여.
근데 적어도 위 자료는 기술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변화 하는데는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럴리가요.. 70세를 고희, 고래희(古來稀)라 부르는 이유는 옛날부터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야생에 사는 개/고양이과 동물들과 애완동물 개/고양이의 수명비교나
20년전 애완동물 수명 vs 케어가 강화된 요즘 애완동물 수명만 비교해봐도
자연상태의 수명이 얼마나 짧은지 알 수 있습니다.
야생에 사는 개/고양이과 동물들과 애완동물 개/고양이의 수명비교나
20년전 애완동물 수명 vs 케어가 강화된 요즘 애완동물 수명만 비교해봐도
자연상태의 수명이 얼마나 짧은지 알 수 있습니다.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읽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요새 읽고 있는 에세이 한편 추천해드릴게요.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pii/S0016328719303507
미국의 경제학자가 쓴 글인데, 문명의 탄생을 홀로세의 따뜻하고 안정적인 기후 덕분에 발생할 수 있었던 일시적 현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기후변화... 더 보기
저 역시 요새 읽고 있는 에세이 한편 추천해드릴게요.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pii/S0016328719303507
미국의 경제학자가 쓴 글인데, 문명의 탄생을 홀로세의 따뜻하고 안정적인 기후 덕분에 발생할 수 있었던 일시적 현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기후변화... 더 보기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읽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요새 읽고 있는 에세이 한편 추천해드릴게요.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pii/S0016328719303507
미국의 경제학자가 쓴 글인데, 문명의 탄생을 홀로세의 따뜻하고 안정적인 기후 덕분에 발생할 수 있었던 일시적 현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다음 세기 즈음엔 다시 플라이스토세와 유사한 불안정한 기후가 찾아올 것이고, 그때까지 인류가 살아남는다면 원하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수렵채집생활을 할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호라타래님 말씀이 맞습니다. 티타임이 각잡고 배틀 뜰만한 곳은 아니죠.
앞으로 기술에 관한 글들을 제3자의 입장에서 소개하는 정도로만 해야지, 저의 급진적인 입장을 적극적으로 게시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역시 요새 읽고 있는 에세이 한편 추천해드릴게요.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pii/S0016328719303507
미국의 경제학자가 쓴 글인데, 문명의 탄생을 홀로세의 따뜻하고 안정적인 기후 덕분에 발생할 수 있었던 일시적 현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다음 세기 즈음엔 다시 플라이스토세와 유사한 불안정한 기후가 찾아올 것이고, 그때까지 인류가 살아남는다면 원하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수렵채집생활을 할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호라타래님 말씀이 맞습니다. 티타임이 각잡고 배틀 뜰만한 곳은 아니죠.
앞으로 기술에 관한 글들을 제3자의 입장에서 소개하는 정도로만 해야지, 저의 급진적인 입장을 적극적으로 게시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 사회를 경멸하는 이들이 야생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성장해서 야생에서 사는 이들의 생활을 위협할 테니까요. 이미 그린란드 원주민들은 산업 폐기물로 인한 중금속 오염으로 건강을 잃고 있고, 중남미 원주민들은 기후변화로 인한 생태계 파괴로 생계를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https://theconversation.com/hunter-gatherers-live-nearly-as-long-as-we-do-but-with-limited-access-to-healthcare-104157
수렵채집인들은 의료 서비스 없이 거의 우리만큼 오래 살았다.
https://link.springer.com/referenceworkentry/10.1007%2F978-3-319-16999-6_2352-1
수렵채집인들은 옛날 학자들이 생각했던 것 만큼 짧게 살지 않았다.
수렵채집인들은 의료 서비스 없이 거의 우리만큼 오래 살았다.
https://link.springer.com/referenceworkentry/10.1007%2F978-3-319-16999-6_2352-1
수렵채집인들은 옛날 학자들이 생각했던 것 만큼 짧게 살지 않았다.
그건 그린란드나 중남미 원주민 얘기고.. 그들은 그곳에 생활의 기반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변경되어서 생기는 피해라 할 수 있겠죠.
새로이 야생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산업폐기물 배출이 없는 지역에서 야생생활을 시작하면 되고, 이후 그 지역에서 폐기물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 문제를 개별적으로 대처하면 될 것입니다.
굉장히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에 대해 그 선택을 할 수 없는 이유로 드는 것이 지나치게 광범위한 일반적 제약이고,
실질적으로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는 사유가 될 수 없는 이유들이라 생각됩니다.
못하는게 아니라, 안하는 걸로 보인다는 것이죠.
새로이 야생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산업폐기물 배출이 없는 지역에서 야생생활을 시작하면 되고, 이후 그 지역에서 폐기물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 문제를 개별적으로 대처하면 될 것입니다.
굉장히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에 대해 그 선택을 할 수 없는 이유로 드는 것이 지나치게 광범위한 일반적 제약이고,
실질적으로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는 사유가 될 수 없는 이유들이라 생각됩니다.
못하는게 아니라, 안하는 걸로 보인다는 것이죠.
간단히 요약하면 '체제는 아마 부활하지 않을거고 만약 부활해도 그건 나중 일이니까 신경쓰지 말자.' 가 되네요. 어떻게 무너뜨리겠다는 답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아마 부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 자체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인류가 처음으로 로마 제국을 건설할 때까지 걸린 시간과 다시 그에 준하는 기술을 갖추기까지 걸린 시간을 비교한다면 알 수 있는 점인데 기술이 부분적으로만 남는다 한들 다시 기술이 발전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비약적으로 줄여줍니다. 두번째로 지구상의 인구는 끊임없이 증가해왔죠. (인공 비료 생산... 더 보기
그리고 아마 부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 자체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인류가 처음으로 로마 제국을 건설할 때까지 걸린 시간과 다시 그에 준하는 기술을 갖추기까지 걸린 시간을 비교한다면 알 수 있는 점인데 기술이 부분적으로만 남는다 한들 다시 기술이 발전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비약적으로 줄여줍니다. 두번째로 지구상의 인구는 끊임없이 증가해왔죠. (인공 비료 생산... 더 보기
간단히 요약하면 '체제는 아마 부활하지 않을거고 만약 부활해도 그건 나중 일이니까 신경쓰지 말자.' 가 되네요. 어떻게 무너뜨리겠다는 답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아마 부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 자체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인류가 처음으로 로마 제국을 건설할 때까지 걸린 시간과 다시 그에 준하는 기술을 갖추기까지 걸린 시간을 비교한다면 알 수 있는 점인데 기술이 부분적으로만 남는다 한들 다시 기술이 발전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비약적으로 줄여줍니다. 두번째로 지구상의 인구는 끊임없이 증가해왔죠. (인공 비료 생산이 가능해진 뒤에야 폭발적인 증가를 보이기는 하지만) 산업 혁명 이전부터 꾸준히 늘어왔습니다. 많은 인구는 자연스레 조직의 크기를 키우며 이것은 조직에게 필요한, 조직에 의한, '조직 의존형 기술'의 발전을 유도합니다.
그래서 체제가 아마 부활하지 않을거라는 말은 안이해보입니다. 카잔스키가 지적하는 문제들은 분명 중요한 것들이고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 것 같네요.
그리고 아마 부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 자체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인류가 처음으로 로마 제국을 건설할 때까지 걸린 시간과 다시 그에 준하는 기술을 갖추기까지 걸린 시간을 비교한다면 알 수 있는 점인데 기술이 부분적으로만 남는다 한들 다시 기술이 발전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비약적으로 줄여줍니다. 두번째로 지구상의 인구는 끊임없이 증가해왔죠. (인공 비료 생산이 가능해진 뒤에야 폭발적인 증가를 보이기는 하지만) 산업 혁명 이전부터 꾸준히 늘어왔습니다. 많은 인구는 자연스레 조직의 크기를 키우며 이것은 조직에게 필요한, 조직에 의한, '조직 의존형 기술'의 발전을 유도합니다.
그래서 체제가 아마 부활하지 않을거라는 말은 안이해보입니다. 카잔스키가 지적하는 문제들은 분명 중요한 것들이고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 것 같네요.
다운 완료했습니다 ㅎㅎ 꼭 읽고 이따가 댓글 달게유. 공부 끝내고 저녁에 읽을테니 음... 한국 시간으로는 6~7시간 정도 이후?
전 ar15lover님과 여러 면에서 의견을 달리하는데, 한 가지 일치한다 느끼는 건 사회 속에서 기술의 역할을 재조명하고 중요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거거든요. 이게 존재론적 관점에서는 flat ontology와 연결되기도 하고(인간 > 비인간이라는 위계의 해체), 사회 이론은 new materialism과도 연결되기도 하고요. 교육학 전공자인 제 입장에서는 '꼭 학습에서 교사가 필요한가?' 등... 더 보기
전 ar15lover님과 여러 면에서 의견을 달리하는데, 한 가지 일치한다 느끼는 건 사회 속에서 기술의 역할을 재조명하고 중요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거거든요. 이게 존재론적 관점에서는 flat ontology와 연결되기도 하고(인간 > 비인간이라는 위계의 해체), 사회 이론은 new materialism과도 연결되기도 하고요. 교육학 전공자인 제 입장에서는 '꼭 학습에서 교사가 필요한가?' 등... 더 보기
다운 완료했습니다 ㅎㅎ 꼭 읽고 이따가 댓글 달게유. 공부 끝내고 저녁에 읽을테니 음... 한국 시간으로는 6~7시간 정도 이후?
전 ar15lover님과 여러 면에서 의견을 달리하는데, 한 가지 일치한다 느끼는 건 사회 속에서 기술의 역할을 재조명하고 중요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거거든요. 이게 존재론적 관점에서는 flat ontology와 연결되기도 하고(인간 > 비인간이라는 위계의 해체), 사회 이론은 new materialism과도 연결되기도 하고요. 교육학 전공자인 제 입장에서는 '꼭 학습에서 교사가 필요한가?' 등등의 의문으로 연결되요. 교육학 내에서는 이미 상황학습 이론이니, community of inquiry 프레임워크, knowledge building 이론이니 해서 인간의 경험이 일어나는 환경(기술 배경) 혹은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기술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고요.
눈치채셨겠지만, 전 ar15lover님의 현대문명진단에는 동의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제 반대가 뭔가 특별한 근거를 지니는 건 아니에요. 이건 제가 깊게 파고들지 않은, 그냥 삶에 대한 자연스러운 만족감 같은거라 ㅋㅋ; 등 따습고, 배부르고... 굳이 이름 붙이자면 '기술'을 통해 증대된 삶의 질 그리고 하한선 상승이 저한테 만족스러워서 그래요. 아마 이건 제가 한궈런으로 성장해서 그런 걸지도 몰라요. 미궈런들 얘기 들어보면 [자유]에 대한 감각이 또 남다르더라고요.
아마 ar15lover님은 현대문명 비판에 뿌리를 두고 그 기저에 기술을 통해 확대된 지배층(혹은 지배체제)의 통제역량을 드는 거라 생각해요. 제가 스탠포드 대학의 기술철학 자료를 소개한 까닭은, 도대체 '그 기술이라는 게 무엇이냐?', '기술이 발전한다고 지배체제의 통제 역량이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것인가?' 등등을 따져보면 어떨까 해서 그런 거였어요. 기술이 무엇인가부터 시작하는 게 낫지 않나 싶어서요. 만약 ar15lover님의 의견이 현대문명 비판에 더 방점이 찍혀있고, 기술 비판은 부가적인 거였다면 제가 제시한 문헌들은 그리 쓸모가 없는 거지만요 ㅋㅋ
아 오히려 제가 의견 듣는 학자들은 과연 지금 같은 형태로 현대문명이 지속 가능한가?를 더 중요하게 다루더라고요. 이건 여기서 논하기에는 더 큰 주제니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ㅎㅎ
급진적인 입장이라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제가 섹슈얼리티 연작을 통해 소개하는 주제(쓰리썸, 수간, 애널자위, 크로스드레싱 등등)이 더 급진적이고 도발적이라 느끼거든요. 근데 ar15lover님 글에서는 불이 날 때가 많고, 제 글에서는 호호 그렇군요 후후 하하 그렇습니다 하면서 조용히 넘어갈 때가 많아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전 [다르게 생각하시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근데 이런 이런 맥락에서는 이래이래 되더라고요. 전 이렇게 생각해요. 님은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요?] 이렇게 글을 쓰거든요. 급진적인 입장도, 적극적인 게시도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아닌가 운영진이라서 욕 안 하고 넘어가는 건가 그런 거신가...
근데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은 아래 메존일각님이 말씀하셨듯이 ar15lover님의 확신과, 수긍없이 강화되는 태도인 것 같아요. 그것만 좀 줄이셔도 지금보다는 더 갈등을 덜 빚고 의견을 표출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전 ar15lover님께서 [현대문명]을 비판하는 반문명적 이상을 지향한다고는 느끼는데, 그렇다고 반사회적이라 여기지는 않거든요. 사실 반사회적이면 이렇게 온라인 게시판에 글을 써서 자신의 입장을 타인에게 전달하려고 할 필요도 없잖아요. 그냥 나 혼자 생각하고 넘어가거나, 정말 폭탄 들고 어디 던지면 그만이지...
한 번 천천히 생각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모두 칭긔칭긔가 의외로 또 즐겁고 괜찮거든요. 츄라이츄라이 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전 ar15lover님과 여러 면에서 의견을 달리하는데, 한 가지 일치한다 느끼는 건 사회 속에서 기술의 역할을 재조명하고 중요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거거든요. 이게 존재론적 관점에서는 flat ontology와 연결되기도 하고(인간 > 비인간이라는 위계의 해체), 사회 이론은 new materialism과도 연결되기도 하고요. 교육학 전공자인 제 입장에서는 '꼭 학습에서 교사가 필요한가?' 등등의 의문으로 연결되요. 교육학 내에서는 이미 상황학습 이론이니, community of inquiry 프레임워크, knowledge building 이론이니 해서 인간의 경험이 일어나는 환경(기술 배경) 혹은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기술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고요.
눈치채셨겠지만, 전 ar15lover님의 현대문명진단에는 동의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제 반대가 뭔가 특별한 근거를 지니는 건 아니에요. 이건 제가 깊게 파고들지 않은, 그냥 삶에 대한 자연스러운 만족감 같은거라 ㅋㅋ; 등 따습고, 배부르고... 굳이 이름 붙이자면 '기술'을 통해 증대된 삶의 질 그리고 하한선 상승이 저한테 만족스러워서 그래요. 아마 이건 제가 한궈런으로 성장해서 그런 걸지도 몰라요. 미궈런들 얘기 들어보면 [자유]에 대한 감각이 또 남다르더라고요.
아마 ar15lover님은 현대문명 비판에 뿌리를 두고 그 기저에 기술을 통해 확대된 지배층(혹은 지배체제)의 통제역량을 드는 거라 생각해요. 제가 스탠포드 대학의 기술철학 자료를 소개한 까닭은, 도대체 '그 기술이라는 게 무엇이냐?', '기술이 발전한다고 지배체제의 통제 역량이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것인가?' 등등을 따져보면 어떨까 해서 그런 거였어요. 기술이 무엇인가부터 시작하는 게 낫지 않나 싶어서요. 만약 ar15lover님의 의견이 현대문명 비판에 더 방점이 찍혀있고, 기술 비판은 부가적인 거였다면 제가 제시한 문헌들은 그리 쓸모가 없는 거지만요 ㅋㅋ
아 오히려 제가 의견 듣는 학자들은 과연 지금 같은 형태로 현대문명이 지속 가능한가?를 더 중요하게 다루더라고요. 이건 여기서 논하기에는 더 큰 주제니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ㅎㅎ
급진적인 입장이라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제가 섹슈얼리티 연작을 통해 소개하는 주제(쓰리썸, 수간, 애널자위, 크로스드레싱 등등)이 더 급진적이고 도발적이라 느끼거든요. 근데 ar15lover님 글에서는 불이 날 때가 많고, 제 글에서는 호호 그렇군요 후후 하하 그렇습니다 하면서 조용히 넘어갈 때가 많아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전 [다르게 생각하시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근데 이런 이런 맥락에서는 이래이래 되더라고요. 전 이렇게 생각해요. 님은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요?] 이렇게 글을 쓰거든요. 급진적인 입장도, 적극적인 게시도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아닌가 운영진이라서 욕 안 하고 넘어가는 건가 그런 거신가...
근데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은 아래 메존일각님이 말씀하셨듯이 ar15lover님의 확신과, 수긍없이 강화되는 태도인 것 같아요. 그것만 좀 줄이셔도 지금보다는 더 갈등을 덜 빚고 의견을 표출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전 ar15lover님께서 [현대문명]을 비판하는 반문명적 이상을 지향한다고는 느끼는데, 그렇다고 반사회적이라 여기지는 않거든요. 사실 반사회적이면 이렇게 온라인 게시판에 글을 써서 자신의 입장을 타인에게 전달하려고 할 필요도 없잖아요. 그냥 나 혼자 생각하고 넘어가거나, 정말 폭탄 들고 어디 던지면 그만이지...
한 번 천천히 생각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모두 칭긔칭긔가 의외로 또 즐겁고 괜찮거든요. 츄라이츄라이 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쭉 읽고 왔어요. 정독은 아니고 훓어보기에 가깝지만, 저자의 논지는 무척 흥미롭네요. 잘 읽었습니다.
여기 나온 주제들, 예를 들어 'Will we be too stupid to be hunter-gatherers?' 같은 꼭지만 잘 번역해서 티타임에 푸셔도 훨씬 더 주장에 설득력을 얻으시겠는데요? 지금까지 ar15lover님 주장은 근거가 다변화 된 느낌이 아니었는데(카진스키 사랑꾼), 이 에세이가 발판으로 삼는 논조들이 도움이 많이 될 듯해요. 물론 결론으로 주장하는 정책적 접근이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네요 ㅋㅋ 전 이 쪽... 더 보기
여기 나온 주제들, 예를 들어 'Will we be too stupid to be hunter-gatherers?' 같은 꼭지만 잘 번역해서 티타임에 푸셔도 훨씬 더 주장에 설득력을 얻으시겠는데요? 지금까지 ar15lover님 주장은 근거가 다변화 된 느낌이 아니었는데(카진스키 사랑꾼), 이 에세이가 발판으로 삼는 논조들이 도움이 많이 될 듯해요. 물론 결론으로 주장하는 정책적 접근이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네요 ㅋㅋ 전 이 쪽... 더 보기
쭉 읽고 왔어요. 정독은 아니고 훓어보기에 가깝지만, 저자의 논지는 무척 흥미롭네요. 잘 읽었습니다.
여기 나온 주제들, 예를 들어 'Will we be too stupid to be hunter-gatherers?' 같은 꼭지만 잘 번역해서 티타임에 푸셔도 훨씬 더 주장에 설득력을 얻으시겠는데요? 지금까지 ar15lover님 주장은 근거가 다변화 된 느낌이 아니었는데(카진스키 사랑꾼), 이 에세이가 발판으로 삼는 논조들이 도움이 많이 될 듯해요. 물론 결론으로 주장하는 정책적 접근이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네요 ㅋㅋ 전 이 쪽은 전공이 아니라 어떻게 가타부터 말을 못하겠어요.
아니 근데 이 주장에 동감하시면 그레타 툰베리는 왜 싫어하시는 거예요 ㅋㅋㅋㅋㅋ 기후변화라는 문제의식은 동감하지만 Virtue signalling이라 느끼셔서 그런가 싶은데 흠흠. 뭐 지나간 논의이니 다시 끌어올 필요는 없겠쥬
저자가 경제학자인데 몇몇 논조들은 너무 거칠게 끌어쓰는 게 아닌가 싶은 우려도 있기는 한데, 페이퍼 성격이 에세이니 충분히 가능한 접근이라고 봐요. 어차피 이론은 체험을 통해 발전한 직관을 통해 시작될 수 밖에 없기도 하고 ㅎㅎ 몇몇 이야기들은 위에 윤지호님께서 짚어주셨듯이 '사피엔스'에서 다루었던 주장이기도 하네요.
신기한 건 저자가 논지를 발전시키면서 인류세 이야기는 잘 안 하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제가 이 쪽 얘기를 접하는 루트에서는 티모시 립톤 & 브뤼노 라투르의 가이아 2.0 논의를 얘기하거나, 현재와 같은 상태조차도 기술 발전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논지를 비판하거나 하거든요. 다 따라가고 있지는 못하는데 normative한 분야기도 하니 워낙에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어요. 그 중에 제가 동의하는 점은 인간(기술)과 자연 사이의 이분법이 과연 적합한 거냐? 라는 문제의식이거든요. 이를테면, ar15lover님이 희구하시는 상태로 변화한(가능성은 차지하고서라도)다고 하더라도 그건 또다른 문명의 형태가 아닌가? 싶다는 거죠. 그럼 원하시는 방향으로 세상이 또다시 변화한다면 지금까지 변화(발전이라는 표현은 안 쓸게요. 저도 단선적 발전관에는 반대하는 입장이라)해 온 과정에서 성취한 virtue들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 싶은 의문도 들어요.
여튼 오랜만에 정리하지 않고 수다스럽게 썰을 푸니 재밌네요. 카진스키의 문제의식에 주로 동의하시더라도, 가지시는 문제의식은 현재 진행 중인 논의들과 충분히 공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도 좋은 논의 소개 부탁드리고, 위에서 당부했듯이 많은 이들을 설득하고 소통하고자 좀 더 노력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여기 나온 주제들, 예를 들어 'Will we be too stupid to be hunter-gatherers?' 같은 꼭지만 잘 번역해서 티타임에 푸셔도 훨씬 더 주장에 설득력을 얻으시겠는데요? 지금까지 ar15lover님 주장은 근거가 다변화 된 느낌이 아니었는데(카진스키 사랑꾼), 이 에세이가 발판으로 삼는 논조들이 도움이 많이 될 듯해요. 물론 결론으로 주장하는 정책적 접근이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네요 ㅋㅋ 전 이 쪽은 전공이 아니라 어떻게 가타부터 말을 못하겠어요.
아니 근데 이 주장에 동감하시면 그레타 툰베리는 왜 싫어하시는 거예요 ㅋㅋㅋㅋㅋ 기후변화라는 문제의식은 동감하지만 Virtue signalling이라 느끼셔서 그런가 싶은데 흠흠. 뭐 지나간 논의이니 다시 끌어올 필요는 없겠쥬
저자가 경제학자인데 몇몇 논조들은 너무 거칠게 끌어쓰는 게 아닌가 싶은 우려도 있기는 한데, 페이퍼 성격이 에세이니 충분히 가능한 접근이라고 봐요. 어차피 이론은 체험을 통해 발전한 직관을 통해 시작될 수 밖에 없기도 하고 ㅎㅎ 몇몇 이야기들은 위에 윤지호님께서 짚어주셨듯이 '사피엔스'에서 다루었던 주장이기도 하네요.
신기한 건 저자가 논지를 발전시키면서 인류세 이야기는 잘 안 하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제가 이 쪽 얘기를 접하는 루트에서는 티모시 립톤 & 브뤼노 라투르의 가이아 2.0 논의를 얘기하거나, 현재와 같은 상태조차도 기술 발전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논지를 비판하거나 하거든요. 다 따라가고 있지는 못하는데 normative한 분야기도 하니 워낙에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어요. 그 중에 제가 동의하는 점은 인간(기술)과 자연 사이의 이분법이 과연 적합한 거냐? 라는 문제의식이거든요. 이를테면, ar15lover님이 희구하시는 상태로 변화한(가능성은 차지하고서라도)다고 하더라도 그건 또다른 문명의 형태가 아닌가? 싶다는 거죠. 그럼 원하시는 방향으로 세상이 또다시 변화한다면 지금까지 변화(발전이라는 표현은 안 쓸게요. 저도 단선적 발전관에는 반대하는 입장이라)해 온 과정에서 성취한 virtue들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 싶은 의문도 들어요.
여튼 오랜만에 정리하지 않고 수다스럽게 썰을 푸니 재밌네요. 카진스키의 문제의식에 주로 동의하시더라도, 가지시는 문제의식은 현재 진행 중인 논의들과 충분히 공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도 좋은 논의 소개 부탁드리고, 위에서 당부했듯이 많은 이들을 설득하고 소통하고자 좀 더 노력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도발적인 게시글 작성 및 분쟁유발성 대화에 대해 이용정지 1일 드립니다.
본문과 이 댓글, 이 글에 작성하신 다른 댓글들에 대한 제재를 포괄하여 처리하는 것인데요.
단순히 도발적인 주장을 하실 수도 있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수긍하지 않고 본인의 주장을 하실 수도 있고, 논쟁이 되는 글을 여러번 올리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러한 사항들이 중복이 되어서 지속 활동을 하시는 것은 곤란합니다.
본인의 의견에 반하는 의견이라고 하더라도 상대의 의견을 인정하는 자세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의견을 내신다면 ar15Lover님의 글에서 발생하는 모든 감정소모적 대립의 책임은 ar15Lover님께 있습니다.
이후에 올리시는 도발적이며 논쟁유발적인 글에 대해서는 다른 회원분들 보다 더 엄격한 잣대가 적용될 것입니다.
가급적 논쟁이 되는 글을 올리시는 것 자체를 피하시는게 더 좋겠습니다.
본문과 이 댓글, 이 글에 작성하신 다른 댓글들에 대한 제재를 포괄하여 처리하는 것인데요.
단순히 도발적인 주장을 하실 수도 있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수긍하지 않고 본인의 주장을 하실 수도 있고, 논쟁이 되는 글을 여러번 올리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러한 사항들이 중복이 되어서 지속 활동을 하시는 것은 곤란합니다.
본인의 의견에 반하는 의견이라고 하더라도 상대의 의견을 인정하는 자세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의견을 내신다면 ar15Lover님의 글에서 발생하는 모든 감정소모적 대립의 책임은 ar15Lover님께 있습니다.
이후에 올리시는 도발적이며 논쟁유발적인 글에 대해서는 다른 회원분들 보다 더 엄격한 잣대가 적용될 것입니다.
가급적 논쟁이 되는 글을 올리시는 것 자체를 피하시는게 더 좋겠습니다.
1. 상황이 70년대와 달라진 것은 아니고, 예나 지금이나 상황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즉 당시에도 틀렸던 것이 지금도 여전히 틀린 것이고, 틀린 이유도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같습니다. 교통사고 사망자수가 살인 통계에서 말하는 살인 발생건수보다 2-3배쯤 많다는 것은 미국 내에선 참인 진술이고, 전세계 평균으로 보더라도 대체로 사실에 부합하는 진술입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살인 통계에서 말하는 ‘살인’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기본형 고의살인의 기수만을 포함하는 다소 제한적인 개념이고, 이렇게 제한적인 개... 더 보기
그러나 살인 통계에서 말하는 ‘살인’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기본형 고의살인의 기수만을 포함하는 다소 제한적인 개념이고, 이렇게 제한적인 개... 더 보기
1. 상황이 70년대와 달라진 것은 아니고, 예나 지금이나 상황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즉 당시에도 틀렸던 것이 지금도 여전히 틀린 것이고, 틀린 이유도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같습니다. 교통사고 사망자수가 살인 통계에서 말하는 살인 발생건수보다 2-3배쯤 많다는 것은 미국 내에선 참인 진술이고, 전세계 평균으로 보더라도 대체로 사실에 부합하는 진술입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살인 통계에서 말하는 ‘살인’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기본형 고의살인의 기수만을 포함하는 다소 제한적인 개념이고, 이렇게 제한적인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각종 고의성 사람 죽이기 및 그 시도는 통계상 ‘살인’보다 최소 몇배쯤 많기 때문에, 실제로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경우와 시도했으나 실패한 경우를 다 포함하면 교통사고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이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A.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2. 비난의 정도는 당연히 구체적인 행위 양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A 손에서 날아간 볼링공이 B 뚝배기를 깨서 B가 죽었습니다. A가 받는 비난의 정도는 구체적으로 볼링공이 어떤 경위로 B뚝을 향해 날아가게 되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애초부터 B를 죽이려고 던졌거나, C를 죽이려고 던졌는데 B가 맞아죽었거나, 꼭 누굴 죽이고 싶은건 아니었지만 누군가 맞아죽어도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이 있는 곳에 던졌는데 B가 맞아죽었다면 A는 살인의 고의로 살인 행위를 한 것이이고, 유기징역을 선택한다면 5-30년 징역입니다. 반면 단순히 B를 볼링공으로 때릴 의사(특수폭행) 또는 때려서 상해를 입히려는 의사(특수상해)로 행위를 했는데 사망이라는 결과가 발생했다면 특수폭행치사/상해치사고, 3-30년 징역입니다. 아예 누군가를 맞추거나 던질려는 생각 자체가 없었는데, 단지 부주의하게 볼링공을 빙빙 휘두르며 놀다가 손가락에서 빠져 날아간 공이 B뚝을 날렸으면 과실치사고, 1월-2년 금고입니다.
운전도 마찬가지라서, 일부러 사람을 죽일 의사로 쳐죽였거나 누가 죽더라도 할 수 없지 같은 마음가짐으로 인도에서 고속주행 같은 행위를 하다가 누굴 쳐서 죽였으면 살인인데, 음주운전하다 실수로 사고 내서 누군가 죽었으면 위험운전치사로 1-30년 징역이고, 그냥 실수로 사고를 냈는데 누가 죽었으면 교특법위반죄로 1월-5년 금고입니다. 법정형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실수로 볼링공을 날려서 사람을 죽인 것보다는 운전하다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때 다소 강한 비난을 받고, 폭행/상해고의로 쳤는데 결국 죽었거나 애초 살인고의가 있었던 경우보다는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인 쪽의 비난이 약간 적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3. 교통사고 사망자수가 상당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해선 자동차를 몰고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사회적으로 강하게 교통사고를 비난하지 않는 것(혹은 살인에 준할만큼 높은 형을 정하자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 것)은 일차적으론 이게 과실범이기 때문이고, 이차적으론 자동차의 운행이 사회에 불러오는 위험보다 그것을 타고 다녔을 때의 가치가 더 크다는 쪽으로 사회적 합의가 모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게 반드시 다수의 편의 따위의 가치를 위해 소수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을 감수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진국의 교통사고 사망률이라는 것은 대략 수십만대의 차량이 서울-부산을 한번씩 왕복했을 때 사망자가 한 명 나오는 수준입니다. 차와 기차 등이 없는 세상에서 수십만명이 같은 거리를 왕복하면 자릿수가 다른 사망자가 발생하겠죠. 즉 생명 대 생명으로 봐도 위험을 감수하고 타는게 이득입니다. 차보다 뚜렷하게 안전한 교통수단(기차 등)이 존재함에도, 그렇게 뚜렷하게 안전한 교통수단만을 허용하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은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구급차가 매년 몇 명을 살릴지, 꼭 구급차가 아니라도 차량의 운전이 직간접적으로 몇 명을 살릴지를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4. 폭력 행위에 대한 비난이 오로지 생명 존중에서 기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을 살짝 밀치면 일반적으로 그 사람이 죽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다소간의 기분 나쁨 외에 뭔가 영구적인 피해가 남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이건 폭행으로 처벌될 수 있습니다. 그보다 훨씬 심하게 손에 함마질을 해서 장애인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그 정도로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점은 동일한데, 역시 특수중상해로 2-20년 징역입니다. 생명위험과 사실상 무관한 이들 행위를 처벌하는 이유는, 남의 신체의 안전이나 완전성을 해하는 행위가 나쁘다는데 사회적 합의가 모아졌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사회적 합의가 모아졌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가 자기 손에 오함마를 내리찍어도 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5. 마지막 문단은 가타카가 필연이라는 취지인데, 인류에 적대적인 강 인공지능(스카이넷 같은)의 등장과 마찬가지로 가능성은 인정할 수 있으나 당연하게도 그게 필연은 아니겠지요. 강 인공지능과 마찬가지로 이게 되는건지 안 되는건지(또는 가부를 떠나 인간이 거기 도달할 수 있을지)부터가 일단 확실하지 않고, 도달한다 하더라도 가타카는 여러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비슷하게 되는지 안 되는지 불명확하면서 불가능하다고 입증하기 어려운 시나리오야 많고, 걔중엔 결론이 정 반대인 것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①완전한 핵융합과 ②인류를 적대하지 않는 강 인공지능 그리고 ③사실상 무한정 자가복제가 가능하며 서로 결합하여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나노로봇이 완성된다면, 전인류가 일생 동안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는 것쯤이야 아마 어렵지 않게 가능할 겁니다. land-rich cash-poor 귀족만 하더라도 대체로 일생 내내 자기가 흥미 생기는 것만 하고 사는데, 자릿수가 10개 이상 높은 에너지 사용이 가능해진다면 까짓거 전 인류가 못 할 이유가 별로 없겠죠.
사실 현재 기술 수준이라는 것은 상당히 보잘 것 없어서 전인류가 먹고 싶은 것만 먹는 것조차 지탱할 수가 없는 수준입니다. 모두가 자기가 먹고 싶은 만큼 최상등급 와규의 최상급 부위만을 먹는다고 칩시다. 최상등급 와규가 10마리당 하나꼴로 나오고 최상급 부위는 마리당 10kg 나온다고 가정하고, 원하는 만큼 먹었을 때 1인당 소비량이 연평균 100kg라면, 75억명의 소비 지탱을 위해선 매년 7,500억마리의 소를 죽여야 합니다. 즉 소 사육량이 지금의 천 배 이상으로 늘어나야 하는데, 지금 사육량만 하더라도 사료재배 등을 위해 전세계 농경지의 과반을 점유하고 있는 상태라서, 이걸 천 배 이상으로 확대하려면 모든 농경지에 수백층짜리 아파트형 농장을 짓고 담수화로 끌어온 물과 인공조명을 이용해 사료용 옥수수를 재배하고 소 사육을 해야 합니다. 지금 기술로는 당연히 어림도 없습니다만, 핵융합에 자가복제 나노로봇이라면 반드시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
A. 유나바머 현역시절은 미국 역사상 교통사고 사망자수가 피크점을 기록하던 시기입니다. 70년대 미국 인구 10만명당 교통사고 사망자수는 약 25명 언저리였는데, 그 후 지속적인 제도, 도로설계/환경 및 자동차 안전기술 발달로 인하여 10만명당 10명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이는 차량 보급이 막 시작되던 1910년대와 비슷한 수준이고, 주행거리를 기준으로 하면 1910년대의 1/30 내지 1/20, 1970년대의 1/5 내지 1/3 수준으로 줄어든 것입니다. 대부분은 제도/환경 및 기술 발전으로 인한 감소입니다.
다만 당시 미국의 살인사건 발생비도 10만명당 10건 근처로 지금의 두배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서구권 국가에서는 70-90년대에 모종의 이유로 살인을 포함한 각종 폭력범죄가 크게 늘어났는데, 유나바머 현역시절이 위 범죄피크 구간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구당 발생비를 기준으로 70년대와 20년대를 비교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살인:교통사고의 비례관계가 거의 비슷합니다(양쪽 다 교통사고가 2-3배 수준).
물론 국가별 사정은 달라서, 예를 들어 한국의 경우 서구권과 달리 70년대까진 자가용 보급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인구 10만명당 교통사고 사망자수가 약 10명에 불과했으나, 자가용이 보급되면서 90년대에 30명 수준까지 늘었고, 그 뒤 감소하여 지금은 약 7명 수준까지 줄어들었습니다. 살인은 기수/미수/에비는 물론이고 252-253조가지 합친 통계를 기준으로 하면 10만명당 발생비가 그때나 지금이나 10만명당 약 1-2건 수준이고, 기수만 추려보면 둘 다 1건이 안 될 겁니다(살인 발생비 변화패턴 역시 서구권과 좀 달라서, 한국에선 70-90년대 범죄폭증이 없고, 00년대에 일시적 증가가 존재합니다). 즉 한국에선 예나 지금이나 수 배 내지 수십배 정도 교통사고 사망자가 많습니다.
미국이 선진국 치고는 다소 특이할 정도로 살인이 많은 편이라 선진국이라면 2-3배 차이의 미국보다는 수배-수십배 차이의 한국에 더 가까운 것이 일반적이고, 후진국은 좀 랜덤인데 살인이 교통사고보다 많은 나라도 있고 미국 또는 한국과 비슷한 나라도 있습니다. 종합하여 전세계 평균을 내면, 인구 10만명당 발생비가 살인6:교통사고18 정도로 교통사고가 더 많습니다.
문제는 이런 류의 통계에서 말하는 살인은 주로 ‘250조 기수’ 같이 상당히 좁은 조건으로 한정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즉 미수/예비 등이 제외되는 것은 물론이고, 251-253조나 특가법 보복살인, (해상)강도살인, 강간살인 같은 고의범 역시 제외되며, (특수)폭행치사/상해치사, 현방치사 같은 결과적 가중범도 다 빠집니다. 구체적으로 한국의 경우 종래엔 250-255조만 카운트해서 리포트하다, 250조 한정 리포트로 바꿨습니다.
그런데 위와 같이 기본형과 조금 다른 범죄가 인정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살인의 의사나 용인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주먹으로 팼는데 피해자가 죽었으면 폭행, 폭행치사, 상해, 상해치사, 살인 중 하나가 성립할 수 있고, 사람을 칼로 찔러죽여도 특수상해, 상해치사, 살인 중 하나가 가능합니다. 구별은 고의와 예견가능성을 기준으로 이뤄집니다. 사망에 대해 예견가능성이 있는 상태로 폭행/상해 고의로 쳤으면 폭행/상해치사이고, 예견가능성이 없으면 그냥 폭행/상해, 살인고의면 살인입니다. 그런데 살인고의라는 것이 꼭 확정적 의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어서, 죽이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더라도 죽어도 할 수 없지 같은 생각으로 팼으면 살인고의가 있는 것이고, 그런 생각조차 없이 단순히 주먹질 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팼으면 폭행고의입니다.
사람의 심리를 읽는 기계가 있다면 읽어서 결론 내면 되는데, 범행 당시 행위자의 생각을 이처럼 정밀하게 알아내는건 당연히 불가능하고, 사실 정밀하게는 커녕 대강 어떤 생각을 했을지 조차도 정확하게 알 방법은 없습니다. 심지어 내심의 의사는 커녕 행위 당시 상황 자체도 정확하게는 모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결국 느슨하게 알려진 당시 정황을 바탕으로 뭔 생각을 가지고 그런 행위를 했는지 대강 겐또치는 형태로 고의가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 이미 거품 물고 기절한 사람의 머리통에 풀스윙 사커킥을 30방 날렸으면 최소한 죽어도 할 수 없지 같은 생각이 있었다고 볼 수 밖에 없으니 살인고의가 있는 것이고, 그냥 주먹 세방을 날렸는데 바로 죽어버린 경우 죽어도 할 수 없지 같은 생각을 했는지조차 확실치 않으니 폭행치사인 것이고, 단순히 싸대기 한대를 쳤을 뿐인데 멀쩡해보이는 피해자가 실제로는 극단적인 약골이라 바로 죽어버린 경우 싸대기 친다고 사람이 즉사할 것이라고는 예견하기 어려우니까 그냥 폭행이고 죽은 것에 대해선 책임이 없습니다.
많은 국가에선 위와 같이 고의탈락한 사람들을 살인 통계에서 제외시키는데, 이렇게 빠지는 사람의 수만 하더라도 고의 살인기수와 얼추 비슷한 수가 됩니다. 결과를 내지 못한 미수/예비는 고의 인정과 탈락을 합친 것만큼 많거나 그보다 더 많은 것이 보통이고요. 결국 확실하지 않아서 다른 계열로 분류되었을 뿐 어쨌든 사람을 죽인 경우까지만 포함하더라도 두어배로 늘고, 죽이려고 했는데 실패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거기서 다시 두배 이상으로 늘어나서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교통사고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이 됩니다.
한편 위법성조각(경찰의 은행강도 사살, 군인의 적군사살 같은 정당행위나 당하기 직전에 연쇄살인마를 죽인 정당방위 등)이나 책임조각(9세의 살해행위 등), 암수범죄, 행위자 또는 지시자가 경찰/사법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서(독재자 등) 인지를 하더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경우 등, 위와 다른 타입으로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살해행위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살인 통계에서 말하는 ‘살인’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기본형 고의살인의 기수만을 포함하는 다소 제한적인 개념이고, 이렇게 제한적인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각종 고의성 사람 죽이기 및 그 시도는 통계상 ‘살인’보다 최소 몇배쯤 많기 때문에, 실제로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경우와 시도했으나 실패한 경우를 다 포함하면 교통사고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이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A.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2. 비난의 정도는 당연히 구체적인 행위 양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A 손에서 날아간 볼링공이 B 뚝배기를 깨서 B가 죽었습니다. A가 받는 비난의 정도는 구체적으로 볼링공이 어떤 경위로 B뚝을 향해 날아가게 되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애초부터 B를 죽이려고 던졌거나, C를 죽이려고 던졌는데 B가 맞아죽었거나, 꼭 누굴 죽이고 싶은건 아니었지만 누군가 맞아죽어도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이 있는 곳에 던졌는데 B가 맞아죽었다면 A는 살인의 고의로 살인 행위를 한 것이이고, 유기징역을 선택한다면 5-30년 징역입니다. 반면 단순히 B를 볼링공으로 때릴 의사(특수폭행) 또는 때려서 상해를 입히려는 의사(특수상해)로 행위를 했는데 사망이라는 결과가 발생했다면 특수폭행치사/상해치사고, 3-30년 징역입니다. 아예 누군가를 맞추거나 던질려는 생각 자체가 없었는데, 단지 부주의하게 볼링공을 빙빙 휘두르며 놀다가 손가락에서 빠져 날아간 공이 B뚝을 날렸으면 과실치사고, 1월-2년 금고입니다.
운전도 마찬가지라서, 일부러 사람을 죽일 의사로 쳐죽였거나 누가 죽더라도 할 수 없지 같은 마음가짐으로 인도에서 고속주행 같은 행위를 하다가 누굴 쳐서 죽였으면 살인인데, 음주운전하다 실수로 사고 내서 누군가 죽었으면 위험운전치사로 1-30년 징역이고, 그냥 실수로 사고를 냈는데 누가 죽었으면 교특법위반죄로 1월-5년 금고입니다. 법정형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실수로 볼링공을 날려서 사람을 죽인 것보다는 운전하다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때 다소 강한 비난을 받고, 폭행/상해고의로 쳤는데 결국 죽었거나 애초 살인고의가 있었던 경우보다는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인 쪽의 비난이 약간 적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3. 교통사고 사망자수가 상당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해선 자동차를 몰고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사회적으로 강하게 교통사고를 비난하지 않는 것(혹은 살인에 준할만큼 높은 형을 정하자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 것)은 일차적으론 이게 과실범이기 때문이고, 이차적으론 자동차의 운행이 사회에 불러오는 위험보다 그것을 타고 다녔을 때의 가치가 더 크다는 쪽으로 사회적 합의가 모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게 반드시 다수의 편의 따위의 가치를 위해 소수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을 감수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진국의 교통사고 사망률이라는 것은 대략 수십만대의 차량이 서울-부산을 한번씩 왕복했을 때 사망자가 한 명 나오는 수준입니다. 차와 기차 등이 없는 세상에서 수십만명이 같은 거리를 왕복하면 자릿수가 다른 사망자가 발생하겠죠. 즉 생명 대 생명으로 봐도 위험을 감수하고 타는게 이득입니다. 차보다 뚜렷하게 안전한 교통수단(기차 등)이 존재함에도, 그렇게 뚜렷하게 안전한 교통수단만을 허용하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은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구급차가 매년 몇 명을 살릴지, 꼭 구급차가 아니라도 차량의 운전이 직간접적으로 몇 명을 살릴지를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4. 폭력 행위에 대한 비난이 오로지 생명 존중에서 기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을 살짝 밀치면 일반적으로 그 사람이 죽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다소간의 기분 나쁨 외에 뭔가 영구적인 피해가 남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이건 폭행으로 처벌될 수 있습니다. 그보다 훨씬 심하게 손에 함마질을 해서 장애인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그 정도로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점은 동일한데, 역시 특수중상해로 2-20년 징역입니다. 생명위험과 사실상 무관한 이들 행위를 처벌하는 이유는, 남의 신체의 안전이나 완전성을 해하는 행위가 나쁘다는데 사회적 합의가 모아졌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사회적 합의가 모아졌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가 자기 손에 오함마를 내리찍어도 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5. 마지막 문단은 가타카가 필연이라는 취지인데, 인류에 적대적인 강 인공지능(스카이넷 같은)의 등장과 마찬가지로 가능성은 인정할 수 있으나 당연하게도 그게 필연은 아니겠지요. 강 인공지능과 마찬가지로 이게 되는건지 안 되는건지(또는 가부를 떠나 인간이 거기 도달할 수 있을지)부터가 일단 확실하지 않고, 도달한다 하더라도 가타카는 여러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비슷하게 되는지 안 되는지 불명확하면서 불가능하다고 입증하기 어려운 시나리오야 많고, 걔중엔 결론이 정 반대인 것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①완전한 핵융합과 ②인류를 적대하지 않는 강 인공지능 그리고 ③사실상 무한정 자가복제가 가능하며 서로 결합하여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나노로봇이 완성된다면, 전인류가 일생 동안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는 것쯤이야 아마 어렵지 않게 가능할 겁니다. land-rich cash-poor 귀족만 하더라도 대체로 일생 내내 자기가 흥미 생기는 것만 하고 사는데, 자릿수가 10개 이상 높은 에너지 사용이 가능해진다면 까짓거 전 인류가 못 할 이유가 별로 없겠죠.
사실 현재 기술 수준이라는 것은 상당히 보잘 것 없어서 전인류가 먹고 싶은 것만 먹는 것조차 지탱할 수가 없는 수준입니다. 모두가 자기가 먹고 싶은 만큼 최상등급 와규의 최상급 부위만을 먹는다고 칩시다. 최상등급 와규가 10마리당 하나꼴로 나오고 최상급 부위는 마리당 10kg 나온다고 가정하고, 원하는 만큼 먹었을 때 1인당 소비량이 연평균 100kg라면, 75억명의 소비 지탱을 위해선 매년 7,500억마리의 소를 죽여야 합니다. 즉 소 사육량이 지금의 천 배 이상으로 늘어나야 하는데, 지금 사육량만 하더라도 사료재배 등을 위해 전세계 농경지의 과반을 점유하고 있는 상태라서, 이걸 천 배 이상으로 확대하려면 모든 농경지에 수백층짜리 아파트형 농장을 짓고 담수화로 끌어온 물과 인공조명을 이용해 사료용 옥수수를 재배하고 소 사육을 해야 합니다. 지금 기술로는 당연히 어림도 없습니다만, 핵융합에 자가복제 나노로봇이라면 반드시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
A. 유나바머 현역시절은 미국 역사상 교통사고 사망자수가 피크점을 기록하던 시기입니다. 70년대 미국 인구 10만명당 교통사고 사망자수는 약 25명 언저리였는데, 그 후 지속적인 제도, 도로설계/환경 및 자동차 안전기술 발달로 인하여 10만명당 10명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이는 차량 보급이 막 시작되던 1910년대와 비슷한 수준이고, 주행거리를 기준으로 하면 1910년대의 1/30 내지 1/20, 1970년대의 1/5 내지 1/3 수준으로 줄어든 것입니다. 대부분은 제도/환경 및 기술 발전으로 인한 감소입니다.
다만 당시 미국의 살인사건 발생비도 10만명당 10건 근처로 지금의 두배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서구권 국가에서는 70-90년대에 모종의 이유로 살인을 포함한 각종 폭력범죄가 크게 늘어났는데, 유나바머 현역시절이 위 범죄피크 구간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구당 발생비를 기준으로 70년대와 20년대를 비교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살인:교통사고의 비례관계가 거의 비슷합니다(양쪽 다 교통사고가 2-3배 수준).
물론 국가별 사정은 달라서, 예를 들어 한국의 경우 서구권과 달리 70년대까진 자가용 보급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인구 10만명당 교통사고 사망자수가 약 10명에 불과했으나, 자가용이 보급되면서 90년대에 30명 수준까지 늘었고, 그 뒤 감소하여 지금은 약 7명 수준까지 줄어들었습니다. 살인은 기수/미수/에비는 물론이고 252-253조가지 합친 통계를 기준으로 하면 10만명당 발생비가 그때나 지금이나 10만명당 약 1-2건 수준이고, 기수만 추려보면 둘 다 1건이 안 될 겁니다(살인 발생비 변화패턴 역시 서구권과 좀 달라서, 한국에선 70-90년대 범죄폭증이 없고, 00년대에 일시적 증가가 존재합니다). 즉 한국에선 예나 지금이나 수 배 내지 수십배 정도 교통사고 사망자가 많습니다.
미국이 선진국 치고는 다소 특이할 정도로 살인이 많은 편이라 선진국이라면 2-3배 차이의 미국보다는 수배-수십배 차이의 한국에 더 가까운 것이 일반적이고, 후진국은 좀 랜덤인데 살인이 교통사고보다 많은 나라도 있고 미국 또는 한국과 비슷한 나라도 있습니다. 종합하여 전세계 평균을 내면, 인구 10만명당 발생비가 살인6:교통사고18 정도로 교통사고가 더 많습니다.
문제는 이런 류의 통계에서 말하는 살인은 주로 ‘250조 기수’ 같이 상당히 좁은 조건으로 한정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즉 미수/예비 등이 제외되는 것은 물론이고, 251-253조나 특가법 보복살인, (해상)강도살인, 강간살인 같은 고의범 역시 제외되며, (특수)폭행치사/상해치사, 현방치사 같은 결과적 가중범도 다 빠집니다. 구체적으로 한국의 경우 종래엔 250-255조만 카운트해서 리포트하다, 250조 한정 리포트로 바꿨습니다.
그런데 위와 같이 기본형과 조금 다른 범죄가 인정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살인의 의사나 용인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주먹으로 팼는데 피해자가 죽었으면 폭행, 폭행치사, 상해, 상해치사, 살인 중 하나가 성립할 수 있고, 사람을 칼로 찔러죽여도 특수상해, 상해치사, 살인 중 하나가 가능합니다. 구별은 고의와 예견가능성을 기준으로 이뤄집니다. 사망에 대해 예견가능성이 있는 상태로 폭행/상해 고의로 쳤으면 폭행/상해치사이고, 예견가능성이 없으면 그냥 폭행/상해, 살인고의면 살인입니다. 그런데 살인고의라는 것이 꼭 확정적 의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어서, 죽이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더라도 죽어도 할 수 없지 같은 생각으로 팼으면 살인고의가 있는 것이고, 그런 생각조차 없이 단순히 주먹질 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팼으면 폭행고의입니다.
사람의 심리를 읽는 기계가 있다면 읽어서 결론 내면 되는데, 범행 당시 행위자의 생각을 이처럼 정밀하게 알아내는건 당연히 불가능하고, 사실 정밀하게는 커녕 대강 어떤 생각을 했을지 조차도 정확하게 알 방법은 없습니다. 심지어 내심의 의사는 커녕 행위 당시 상황 자체도 정확하게는 모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결국 느슨하게 알려진 당시 정황을 바탕으로 뭔 생각을 가지고 그런 행위를 했는지 대강 겐또치는 형태로 고의가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 이미 거품 물고 기절한 사람의 머리통에 풀스윙 사커킥을 30방 날렸으면 최소한 죽어도 할 수 없지 같은 생각이 있었다고 볼 수 밖에 없으니 살인고의가 있는 것이고, 그냥 주먹 세방을 날렸는데 바로 죽어버린 경우 죽어도 할 수 없지 같은 생각을 했는지조차 확실치 않으니 폭행치사인 것이고, 단순히 싸대기 한대를 쳤을 뿐인데 멀쩡해보이는 피해자가 실제로는 극단적인 약골이라 바로 죽어버린 경우 싸대기 친다고 사람이 즉사할 것이라고는 예견하기 어려우니까 그냥 폭행이고 죽은 것에 대해선 책임이 없습니다.
많은 국가에선 위와 같이 고의탈락한 사람들을 살인 통계에서 제외시키는데, 이렇게 빠지는 사람의 수만 하더라도 고의 살인기수와 얼추 비슷한 수가 됩니다. 결과를 내지 못한 미수/예비는 고의 인정과 탈락을 합친 것만큼 많거나 그보다 더 많은 것이 보통이고요. 결국 확실하지 않아서 다른 계열로 분류되었을 뿐 어쨌든 사람을 죽인 경우까지만 포함하더라도 두어배로 늘고, 죽이려고 했는데 실패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거기서 다시 두배 이상으로 늘어나서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교통사고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이 됩니다.
한편 위법성조각(경찰의 은행강도 사살, 군인의 적군사살 같은 정당행위나 당하기 직전에 연쇄살인마를 죽인 정당방위 등)이나 책임조각(9세의 살해행위 등), 암수범죄, 행위자 또는 지시자가 경찰/사법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서(독재자 등) 인지를 하더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경우 등, 위와 다른 타입으로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살해행위도 다양합니다.
고달프고 가끔씩 폭력적이고 잔인한 거가 인간의 삶이라구요? 그걸 왜 자기 마음대로 정의를 내리시나요.
지금이 디폴트도 아니지만 과거도 디폴트가 아니고 사람들의 합의로 발달해온 세상을 완전 부정하시네요.
현대사회에서도 자아를 존중하고 자아실현을 하는 사람 많은데 자기 마음대로 상위욕구를 거세했다고 하시는 것도 혼자 정의를 내리시는 거고..
복잡한 사안을 혼자 정의내린 게 옳다고 그것만 주장하시니 대화가 될 리가 없죠.
제가 님의 문장을 반대로 얘기하면 개인의 폭력으로 자아존중감을 채우시려는 분은
폭력 행사에서 우위이시거나 문명적인 방법으로 자아존중감을 채울 수 없는 분이라고 하셔도 할 말 없겠네요.
지금이 디폴트도 아니지만 과거도 디폴트가 아니고 사람들의 합의로 발달해온 세상을 완전 부정하시네요.
현대사회에서도 자아를 존중하고 자아실현을 하는 사람 많은데 자기 마음대로 상위욕구를 거세했다고 하시는 것도 혼자 정의를 내리시는 거고..
복잡한 사안을 혼자 정의내린 게 옳다고 그것만 주장하시니 대화가 될 리가 없죠.
제가 님의 문장을 반대로 얘기하면 개인의 폭력으로 자아존중감을 채우시려는 분은
폭력 행사에서 우위이시거나 문명적인 방법으로 자아존중감을 채울 수 없는 분이라고 하셔도 할 말 없겠네요.
1. 동물의 길들임이나 쳇바퀴 도는 인생에 의문을 갖지 않는 사회에 대해 과거 노예제라는 악습의 연속이 충분히 수정되지 않고 눈가림되고 있다는 맥락에는 동의합니다.
2. 존엄 혹은 자유에 대해 깊은 강조를 나타내신 것으로 보이는데, 이 개념 자체가 감정적인 애착으로 얼버무린 것으로 느껴져 아쉽습니다. 모두 다 아시다시피 존엄 혹은 자유는 안보라든지 도덕성 등에 의해 적절하게 예외를 적용하여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일반적이죠.
3. 불과 250년 전만 해도 작성한 글과 같은 맥락에 대한 이해는 대중 다수에... 더 보기
2. 존엄 혹은 자유에 대해 깊은 강조를 나타내신 것으로 보이는데, 이 개념 자체가 감정적인 애착으로 얼버무린 것으로 느껴져 아쉽습니다. 모두 다 아시다시피 존엄 혹은 자유는 안보라든지 도덕성 등에 의해 적절하게 예외를 적용하여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일반적이죠.
3. 불과 250년 전만 해도 작성한 글과 같은 맥락에 대한 이해는 대중 다수에... 더 보기
1. 동물의 길들임이나 쳇바퀴 도는 인생에 의문을 갖지 않는 사회에 대해 과거 노예제라는 악습의 연속이 충분히 수정되지 않고 눈가림되고 있다는 맥락에는 동의합니다.
2. 존엄 혹은 자유에 대해 깊은 강조를 나타내신 것으로 보이는데, 이 개념 자체가 감정적인 애착으로 얼버무린 것으로 느껴져 아쉽습니다. 모두 다 아시다시피 존엄 혹은 자유는 안보라든지 도덕성 등에 의해 적절하게 예외를 적용하여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일반적이죠.
3. 불과 250년 전만 해도 작성한 글과 같은 맥락에 대한 이해는 대중 다수에게 인지조차 불가능했겠죠. 지금은 오히려 인지가 가능하고 동시에 많은 점에서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기는 합니다. 물론 이것이 지금이 250년보다 모든 면에서 향상되었다고 볼 수 많은 없지만요.
4. 말미에 서술한 유능함을 통해 자신을 발현하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그렇게 많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5. 시어도어 카진스키나 히틀러 등은 폭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사회적 동의를 얻을 수 없었고, 이러한 형태의 동의는 문명 사회에서는 결코 동의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계층 제도와 성과주의를 혼합하여 어느 정도 보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와 대중주의의 문제는 때때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적극적인 보완이 필요로 하지만, 그렇다하여도 폭력을 통한 조치는 보완으로 여겨질 수 없습니다.
6. 저 또한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행동과 사상이 무척 독특하게 여겨졌고, 복합적인 사고관을 결합하여 도출한 그의 메시지를 흥미롭게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반사회성에 기반한 아나키스트일 뿐입니다. 그래서 "정말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이 그에게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는 그가 컴퓨터와 인터넷을 접하였다면 생각이 완전하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여태 세상에 구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들을 합리적인 접근성과 기술 수준으로 세상에 해결책이자 예술들을 만들어내는 도구로 시대를 바꾸었죠.
7. 정부 및 권력자의 기형적인 행태와 프로젝트들은 분명 우려가 큽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치안, 시장경제, 금융, 통신, 교통 등을 나름대로 충실하게 관리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죠. 개인적으로 이에 대한 보완 방향은 정치의 큰 방향성과 제도를 리버테리언적인 요소를 의무화 시킴으로서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8. 기후 변화에 대한 대책과 방안은 무의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전반적으로 250년전에 비해서 기후 변화에 대한 의식과 제도는 나름대로 꾸준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물론 적극적인 생태주의자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겠지만,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생태주의자가 선호할 생활 방식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특히나 절대 다수의 생태 문제는 개인의 문제 보다는 기업과 국가의 잘못이 훨씬 크죠. 이것 역시 정치와 경제의 문제로서, 현실적으로 단계적인 대응 방안을 넘어 급진적인 대책은 실천이 불가능합니다.
9.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만 28세 이전에 뇌의 형성이 완료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에 따라 28세 이전에 경험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제도 및 사회를 바꾸는 것으로 굉장히 많은 것이 해결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2. 존엄 혹은 자유에 대해 깊은 강조를 나타내신 것으로 보이는데, 이 개념 자체가 감정적인 애착으로 얼버무린 것으로 느껴져 아쉽습니다. 모두 다 아시다시피 존엄 혹은 자유는 안보라든지 도덕성 등에 의해 적절하게 예외를 적용하여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일반적이죠.
3. 불과 250년 전만 해도 작성한 글과 같은 맥락에 대한 이해는 대중 다수에게 인지조차 불가능했겠죠. 지금은 오히려 인지가 가능하고 동시에 많은 점에서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기는 합니다. 물론 이것이 지금이 250년보다 모든 면에서 향상되었다고 볼 수 많은 없지만요.
4. 말미에 서술한 유능함을 통해 자신을 발현하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그렇게 많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5. 시어도어 카진스키나 히틀러 등은 폭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사회적 동의를 얻을 수 없었고, 이러한 형태의 동의는 문명 사회에서는 결코 동의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계층 제도와 성과주의를 혼합하여 어느 정도 보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와 대중주의의 문제는 때때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적극적인 보완이 필요로 하지만, 그렇다하여도 폭력을 통한 조치는 보완으로 여겨질 수 없습니다.
6. 저 또한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행동과 사상이 무척 독특하게 여겨졌고, 복합적인 사고관을 결합하여 도출한 그의 메시지를 흥미롭게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반사회성에 기반한 아나키스트일 뿐입니다. 그래서 "정말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이 그에게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는 그가 컴퓨터와 인터넷을 접하였다면 생각이 완전하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여태 세상에 구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들을 합리적인 접근성과 기술 수준으로 세상에 해결책이자 예술들을 만들어내는 도구로 시대를 바꾸었죠.
7. 정부 및 권력자의 기형적인 행태와 프로젝트들은 분명 우려가 큽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치안, 시장경제, 금융, 통신, 교통 등을 나름대로 충실하게 관리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죠. 개인적으로 이에 대한 보완 방향은 정치의 큰 방향성과 제도를 리버테리언적인 요소를 의무화 시킴으로서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8. 기후 변화에 대한 대책과 방안은 무의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전반적으로 250년전에 비해서 기후 변화에 대한 의식과 제도는 나름대로 꾸준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물론 적극적인 생태주의자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겠지만,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생태주의자가 선호할 생활 방식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특히나 절대 다수의 생태 문제는 개인의 문제 보다는 기업과 국가의 잘못이 훨씬 크죠. 이것 역시 정치와 경제의 문제로서, 현실적으로 단계적인 대응 방안을 넘어 급진적인 대책은 실천이 불가능합니다.
9.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만 28세 이전에 뇌의 형성이 완료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에 따라 28세 이전에 경험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제도 및 사회를 바꾸는 것으로 굉장히 많은 것이 해결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음 확신과 신념이 타인과 다르다하더라도 확신에 따라서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염려의 마음도 느껴집니다만, 저는 적어도 이곳에서,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의 신념에 대해서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 글의 근거가 다변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은 사실입니다. 사실 저 역시 제가 지나치게 카진스키의 시선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호라타래님이 쓴 글은 저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제 글이 지나치게 확신에 차있다는 지적도 옳습니다. 다시 제 글을 읽어보니, 좀 더 정중한 어조로 쓸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부끄럽습니다.
제가 그레타 툰베리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그레타 툰베리는 반체제적인 듯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체제를 돕고 있습니다. 카진스키는 대중적으로는 무서운 러다이트... 더 보기
제 글이 지나치게 확신에 차있다는 지적도 옳습니다. 다시 제 글을 읽어보니, 좀 더 정중한 어조로 쓸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부끄럽습니다.
제가 그레타 툰베리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그레타 툰베리는 반체제적인 듯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체제를 돕고 있습니다. 카진스키는 대중적으로는 무서운 러다이트... 더 보기
제 글의 근거가 다변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은 사실입니다. 사실 저 역시 제가 지나치게 카진스키의 시선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호라타래님이 쓴 글은 저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제 글이 지나치게 확신에 차있다는 지적도 옳습니다. 다시 제 글을 읽어보니, 좀 더 정중한 어조로 쓸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부끄럽습니다.
제가 그레타 툰베리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그레타 툰베리는 반체제적인 듯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체제를 돕고 있습니다. 카진스키는 대중적으로는 무서운 러다이트 테러리스트 이미지로 굳어졌지만, 사실 카진스키에게는 급진적 환경주의자의 면모가 있습니다. 애초에 테러의 동기 자체가 벌목과 고속도로 건설로 인해 살고 있던 숲의 아름다운 경치가 망가지는 것을 보고 분노했다는 것이고, 카진스키가 좋아하는 소설가는 에드워드 애비입니다. 에드워드 애비는 자연을 지키기 위해서는 테러를 저질러도 좋다며 에코 테러리즘을 선동했던 소설가 입니다.
하지만 에드워드 애비가 지키고자 했던 자연은, 평화롭고 자애로운 자연이 아니라, 야만인들과 맹수, 독사가 가득한 무시무시한 자연이었습니다. 그의 소설에서는 미국 서부 레드넥들이 마을이 ‘현대화’되어가는 것에 반감을 품고 건설장비들을 부숩니다. 시대착오적 카우보이가 등장해 철조망들을 끊고 자동차 운전자들에 욕을 들어가며 황무지를 질주합니다. 에드워드 애비는 현대 문명이 인간, 자연으로부터 야성을 거세하려 든다는 점을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서는 문학, 대중매체를 통해서도 수없이 다루어졌습니다. 조셉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에서 교양있는 문명인이었던 커츠가 콩고 강의 원시림에서 적응한 후 문명으로 돌아가길 거부한다던가, 유비소프트의 게임 <파 크라이 3>에서 남태평양의 야생에서 친구들을 해적들로부터 구하기 위해 사투하던 주인공이 막상 그토록 원하던 고향 미국으로 돌아갈 기회가 왔을 때 떠나기를 망설이는 장면이 나오는게 몇가지 사례입니다. 이런 테마가 대중매체에서 계속 반복되고, 현대인들이 이런 이야기에 매료되는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진스키는 급진적 환경운동가들을 비판합니다. 이들은 체제에 저항하는 듯 하지만, 인종차별, 성차별, 동물학대 반대와 같은 체제 친화적 이유들을 내세움으로써 실제로는 체제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습니다. 인종차별, 성차별, 동물학대를 해선 안된다는건 학교와 언론이 매일 가르치는 체제 친화적 가치이고, 이를 이유로 체제를 공격할 경우 체제는 약해지는게 아니라 공고해집니다. 체제는 엘리트들이 휴가철에 힐링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자연을 어느정도 보호하려 할 것이고, 결국 자연을 파괴하지 않더라도 동물들에게 GPS를 부착하고, 강에는 양식장에서 사육된 물고기를 풀고, 유전자 조작된 나무를 심는 방식으로 자연의 야성을 거세하려들 것입니다. 똑같은 환경운동을 하더라도, "감히 어머니 자연을 욕보이려 든다."는 식의, 체제가 수용할 수 없는(또는 공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를 들어야 체제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 그레타 툰베리가 싫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이 변한다면, 그간 성취해온 virtue를 어떻게 보호할 것이냐에 대해선, 중시되는 virtue가 시대마다 달라진다는 점, 그리고 이대로 기술발전이 이루어져 지금의 인간을 대체할 유전자 조작으로 강화된 "인간"들, 혹은 기계생명체들이 현대인들이 virtue로 여기는 것들을 존중하겠느냐는 의문점으로 답하고 싶습니다.
불과 19세기 미국에서, 부통령 에런 버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이 결투를 벌였습니다. 명예를 위해, 복수를 위해 결투를 통해 사람을 죽이는게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오히려 이를 회피하는 사람을 겁쟁이라고 비웃었던 시절이 고작 200년전에 불과했습니다. 명예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던 전근대~근대 초기 유럽인들의 가치관은 열등하고 야만한 것이고, (경찰, 군대의 폭력 이외의)모든 폭력을 경멸하는 현대인들의 가치관은 우월하고 교양있는 것일까요? 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등장할 유전자 조작된 강화 "인간"들, 혹은 기계생명체들이 예수,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듣고 감명을 받을까요? 이들이 현대인들이 열광하는 마블 어벤저스 시리즈, DC코믹스의 배트맨과 조커의 대결을 보며 똑같이 열광할까요? 현대인들처럼 쉬는날 하루종일 이불에서 뒹굴며 유튜브를 보거나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게임을 할까요? 현대인들이 가끔씩 게으름을 피우거나 오락에 열중하는 동안 유전자 조작된 강화 인간들과 기계생명체들은 쉬지않고 공부하고 일해서 현대인들을 도태시키진 않을까요? 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가치관을 지키고 싶다면, 유전자 강화 "인간"들, 기계생명체들이 등장하는걸 막는편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호라타래님이 현대사회에 만족한다고 말씀하셨듯이, 제 경험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금 환경에 만족하냐고 물어보면 만족한다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막상 사회 전반, 특히 젊은 층에게서 보이는 정서는 자신감이 아니라 무력감인 것 같습니다. 특히 지금 세대의 출산에 대한 무관심은 적어도 제가 아는 바에 따르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제 눈에는 한국 사회가 정말 심각하게 병들어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이 시어도어 카진스키가 지적한, 과학기술과 산업화에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카진스키는 전세계적인 반산업, 반과학 혁명을 일으켜 현대 문명을 제거한 후 자연친화적 수렵채집사회로 복귀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대단히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주장이고, 쉽게 공감, 동의를 얻을 주장이 아닙니다.
이 주장을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비판들이 정당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야만하고 미개한 가치관은 열등하고, 현대인들의 세련되고 교양있는 가치관은 우월한 것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저는 이게 정당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글이 지나치게 확신에 차있다는 지적도 옳습니다. 다시 제 글을 읽어보니, 좀 더 정중한 어조로 쓸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부끄럽습니다.
제가 그레타 툰베리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그레타 툰베리는 반체제적인 듯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체제를 돕고 있습니다. 카진스키는 대중적으로는 무서운 러다이트 테러리스트 이미지로 굳어졌지만, 사실 카진스키에게는 급진적 환경주의자의 면모가 있습니다. 애초에 테러의 동기 자체가 벌목과 고속도로 건설로 인해 살고 있던 숲의 아름다운 경치가 망가지는 것을 보고 분노했다는 것이고, 카진스키가 좋아하는 소설가는 에드워드 애비입니다. 에드워드 애비는 자연을 지키기 위해서는 테러를 저질러도 좋다며 에코 테러리즘을 선동했던 소설가 입니다.
하지만 에드워드 애비가 지키고자 했던 자연은, 평화롭고 자애로운 자연이 아니라, 야만인들과 맹수, 독사가 가득한 무시무시한 자연이었습니다. 그의 소설에서는 미국 서부 레드넥들이 마을이 ‘현대화’되어가는 것에 반감을 품고 건설장비들을 부숩니다. 시대착오적 카우보이가 등장해 철조망들을 끊고 자동차 운전자들에 욕을 들어가며 황무지를 질주합니다. 에드워드 애비는 현대 문명이 인간, 자연으로부터 야성을 거세하려 든다는 점을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서는 문학, 대중매체를 통해서도 수없이 다루어졌습니다. 조셉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에서 교양있는 문명인이었던 커츠가 콩고 강의 원시림에서 적응한 후 문명으로 돌아가길 거부한다던가, 유비소프트의 게임 <파 크라이 3>에서 남태평양의 야생에서 친구들을 해적들로부터 구하기 위해 사투하던 주인공이 막상 그토록 원하던 고향 미국으로 돌아갈 기회가 왔을 때 떠나기를 망설이는 장면이 나오는게 몇가지 사례입니다. 이런 테마가 대중매체에서 계속 반복되고, 현대인들이 이런 이야기에 매료되는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진스키는 급진적 환경운동가들을 비판합니다. 이들은 체제에 저항하는 듯 하지만, 인종차별, 성차별, 동물학대 반대와 같은 체제 친화적 이유들을 내세움으로써 실제로는 체제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습니다. 인종차별, 성차별, 동물학대를 해선 안된다는건 학교와 언론이 매일 가르치는 체제 친화적 가치이고, 이를 이유로 체제를 공격할 경우 체제는 약해지는게 아니라 공고해집니다. 체제는 엘리트들이 휴가철에 힐링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자연을 어느정도 보호하려 할 것이고, 결국 자연을 파괴하지 않더라도 동물들에게 GPS를 부착하고, 강에는 양식장에서 사육된 물고기를 풀고, 유전자 조작된 나무를 심는 방식으로 자연의 야성을 거세하려들 것입니다. 똑같은 환경운동을 하더라도, "감히 어머니 자연을 욕보이려 든다."는 식의, 체제가 수용할 수 없는(또는 공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를 들어야 체제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 그레타 툰베리가 싫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이 변한다면, 그간 성취해온 virtue를 어떻게 보호할 것이냐에 대해선, 중시되는 virtue가 시대마다 달라진다는 점, 그리고 이대로 기술발전이 이루어져 지금의 인간을 대체할 유전자 조작으로 강화된 "인간"들, 혹은 기계생명체들이 현대인들이 virtue로 여기는 것들을 존중하겠느냐는 의문점으로 답하고 싶습니다.
불과 19세기 미국에서, 부통령 에런 버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이 결투를 벌였습니다. 명예를 위해, 복수를 위해 결투를 통해 사람을 죽이는게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오히려 이를 회피하는 사람을 겁쟁이라고 비웃었던 시절이 고작 200년전에 불과했습니다. 명예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던 전근대~근대 초기 유럽인들의 가치관은 열등하고 야만한 것이고, (경찰, 군대의 폭력 이외의)모든 폭력을 경멸하는 현대인들의 가치관은 우월하고 교양있는 것일까요? 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등장할 유전자 조작된 강화 "인간"들, 혹은 기계생명체들이 예수,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듣고 감명을 받을까요? 이들이 현대인들이 열광하는 마블 어벤저스 시리즈, DC코믹스의 배트맨과 조커의 대결을 보며 똑같이 열광할까요? 현대인들처럼 쉬는날 하루종일 이불에서 뒹굴며 유튜브를 보거나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게임을 할까요? 현대인들이 가끔씩 게으름을 피우거나 오락에 열중하는 동안 유전자 조작된 강화 인간들과 기계생명체들은 쉬지않고 공부하고 일해서 현대인들을 도태시키진 않을까요? 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가치관을 지키고 싶다면, 유전자 강화 "인간"들, 기계생명체들이 등장하는걸 막는편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호라타래님이 현대사회에 만족한다고 말씀하셨듯이, 제 경험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금 환경에 만족하냐고 물어보면 만족한다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막상 사회 전반, 특히 젊은 층에게서 보이는 정서는 자신감이 아니라 무력감인 것 같습니다. 특히 지금 세대의 출산에 대한 무관심은 적어도 제가 아는 바에 따르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제 눈에는 한국 사회가 정말 심각하게 병들어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이 시어도어 카진스키가 지적한, 과학기술과 산업화에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카진스키는 전세계적인 반산업, 반과학 혁명을 일으켜 현대 문명을 제거한 후 자연친화적 수렵채집사회로 복귀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대단히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주장이고, 쉽게 공감, 동의를 얻을 주장이 아닙니다.
이 주장을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비판들이 정당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야만하고 미개한 가치관은 열등하고, 현대인들의 세련되고 교양있는 가치관은 우월한 것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저는 이게 정당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주변에서 접하기 힘든 주제를 치밀하고 다층적으로 풀어내는 내용 덕분에 대단히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비록 한국 그리고 홍차넷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공격 받기 좋은 내용이지만, 공들여 뚜렷한 논지의 화두를 던지는 점이 마치 사막 가운데 오아시스 같아 특별한 즐거움이 되네요.
그리고 홍차넷에 ar15Lover님 같은 천재분이 종종 계시던데, 특히나 이 세상에 빛나는 무언가를 이루실 것 같아 기대가 크네요.
비록 한국 그리고 홍차넷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공격 받기 좋은 내용이지만, 공들여 뚜렷한 논지의 화두를 던지는 점이 마치 사막 가운데 오아시스 같아 특별한 즐거움이 되네요.
그리고 홍차넷에 ar15Lover님 같은 천재분이 종종 계시던데, 특히나 이 세상에 빛나는 무언가를 이루실 것 같아 기대가 크네요.
문단 전체를 제 개인적인 방식으로 요약해보면 대충 이렇게 요약되네요.
" 현대 사회는 (과거 사회와 마찬가지로) 개개인이 시스템에 의해, 주체적 성질을 잃어가고 있으며, 기술의 발달이 그것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 이렇게 성장하는 기술들이 (유전공학과 인공지능) 이러한 시스템의 (앙시앵레짐적인) 계급화를 영속화 시킬 것이고, 나아가 지구의 환경 그 자체를 파멸시킬 것이다" - 머 제 마음대로 요약한 거라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도 이러한 논제에 대해서 찬성하는(생각하는) 부분이 은근히 많고, 이러한 문제... 더 보기
" 현대 사회는 (과거 사회와 마찬가지로) 개개인이 시스템에 의해, 주체적 성질을 잃어가고 있으며, 기술의 발달이 그것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 이렇게 성장하는 기술들이 (유전공학과 인공지능) 이러한 시스템의 (앙시앵레짐적인) 계급화를 영속화 시킬 것이고, 나아가 지구의 환경 그 자체를 파멸시킬 것이다" - 머 제 마음대로 요약한 거라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도 이러한 논제에 대해서 찬성하는(생각하는) 부분이 은근히 많고, 이러한 문제... 더 보기
문단 전체를 제 개인적인 방식으로 요약해보면 대충 이렇게 요약되네요.
" 현대 사회는 (과거 사회와 마찬가지로) 개개인이 시스템에 의해, 주체적 성질을 잃어가고 있으며, 기술의 발달이 그것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 이렇게 성장하는 기술들이 (유전공학과 인공지능) 이러한 시스템의 (앙시앵레짐적인) 계급화를 영속화 시킬 것이고, 나아가 지구의 환경 그 자체를 파멸시킬 것이다" - 머 제 마음대로 요약한 거라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도 이러한 논제에 대해서 찬성하는(생각하는) 부분이 은근히 많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왜 보편적으로 개개인들이 이러한 문제를 "심각하게" 자각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해결되어야 봅니다. 그래서 이 글에 나와있진 않지만, 카진스키가 말하는 "대리만족"이라는 개념과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문화 사이의 인지적 측면에 대해서 좀 고려해봐야되는 것 같구요.
그렇기에 일단, 개개인들에게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다각적인 관점으로" 인지시키는게, 우선순위인 것 같습니다.
(사실 글쓴이님이 동물원의 동물과 현대 사회속 인간을 빗대어 표현하는 것은 이게 보편적으로 사실 사람들이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거든요. 또 여기서 표현하는 "존엄성"이라는 어휘 자체가 모호합니다. 안전함과 존엄성이 서로 충돌되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거든요. 여기가 중국같은 국가도 아니고, "안전성"으로 인해서, 시놉티콘적으로 존엄성이 제거된다는 논지 자체가 조금 저에겐 황당하게 들립니다. 적어도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있지않나요? 그렇기에 글쓴이님은 매슬로의 욕구단계설로 현대 사회의 인간이 "xx단계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기에, 존엄성을 잃어버렸다 했는데, 존엄성 상실의 전제조건인 매슬로의 욕구단계설과 현대 사회의 인간이 맺는 관계 자체가 개개인의 주체적인 신경성에 의거하기 때문에, 현대사회가 존엄성을 짓밞는다는 논리는 일종의 일반화처럼 저에게 느껴지네요.
저는 계보적인, 또는 어떤 것과 비교적으로 표현하는 글보다, 어떤 실증적인 data를 지시하는 통계를 사용해서, 논지를
강화시키는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정말 간단하게, 미국의 정치 정책자체가 로비스트를 통해 돌아간다는 사실같은거 말입니다. [물론 글쓴이님은 독자들이 이정돈 알고 있겠지?라는 전제하에 쓴 것 같네요.])
" 현대 사회는 (과거 사회와 마찬가지로) 개개인이 시스템에 의해, 주체적 성질을 잃어가고 있으며, 기술의 발달이 그것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 이렇게 성장하는 기술들이 (유전공학과 인공지능) 이러한 시스템의 (앙시앵레짐적인) 계급화를 영속화 시킬 것이고, 나아가 지구의 환경 그 자체를 파멸시킬 것이다" - 머 제 마음대로 요약한 거라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도 이러한 논제에 대해서 찬성하는(생각하는) 부분이 은근히 많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왜 보편적으로 개개인들이 이러한 문제를 "심각하게" 자각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해결되어야 봅니다. 그래서 이 글에 나와있진 않지만, 카진스키가 말하는 "대리만족"이라는 개념과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문화 사이의 인지적 측면에 대해서 좀 고려해봐야되는 것 같구요.
그렇기에 일단, 개개인들에게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다각적인 관점으로" 인지시키는게, 우선순위인 것 같습니다.
(사실 글쓴이님이 동물원의 동물과 현대 사회속 인간을 빗대어 표현하는 것은 이게 보편적으로 사실 사람들이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거든요. 또 여기서 표현하는 "존엄성"이라는 어휘 자체가 모호합니다. 안전함과 존엄성이 서로 충돌되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거든요. 여기가 중국같은 국가도 아니고, "안전성"으로 인해서, 시놉티콘적으로 존엄성이 제거된다는 논지 자체가 조금 저에겐 황당하게 들립니다. 적어도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있지않나요? 그렇기에 글쓴이님은 매슬로의 욕구단계설로 현대 사회의 인간이 "xx단계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기에, 존엄성을 잃어버렸다 했는데, 존엄성 상실의 전제조건인 매슬로의 욕구단계설과 현대 사회의 인간이 맺는 관계 자체가 개개인의 주체적인 신경성에 의거하기 때문에, 현대사회가 존엄성을 짓밞는다는 논리는 일종의 일반화처럼 저에게 느껴지네요.
저는 계보적인, 또는 어떤 것과 비교적으로 표현하는 글보다, 어떤 실증적인 data를 지시하는 통계를 사용해서, 논지를
강화시키는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정말 간단하게, 미국의 정치 정책자체가 로비스트를 통해 돌아간다는 사실같은거 말입니다. [물론 글쓴이님은 독자들이 이정돈 알고 있겠지?라는 전제하에 쓴 것 같네요.])
정성어린 댓글 감사합니다. 잘 요약해주셨습니다.
보편적인 개개인들이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자각하지 못하는 이유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추측해보자면:
1) 사람들은 이미 직감적으로 이 문제를 느끼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대중에게 이 느낌(?)을 정돈된 언어로 설명할 능력이 없다보니, QAnon 딥스테이트라든가, 베리칩 음모론, 5G 코로나 전파설, 백신 음모론 같은 허무맹랑한 음모론들이 인기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음모론들은 공통적으로 신기술에 대한 공포, 그리고 권력자들이 그 기술로 자신을 지배할지도... 더 보기
보편적인 개개인들이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자각하지 못하는 이유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추측해보자면:
1) 사람들은 이미 직감적으로 이 문제를 느끼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대중에게 이 느낌(?)을 정돈된 언어로 설명할 능력이 없다보니, QAnon 딥스테이트라든가, 베리칩 음모론, 5G 코로나 전파설, 백신 음모론 같은 허무맹랑한 음모론들이 인기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음모론들은 공통적으로 신기술에 대한 공포, 그리고 권력자들이 그 기술로 자신을 지배할지도... 더 보기
정성어린 댓글 감사합니다. 잘 요약해주셨습니다.
보편적인 개개인들이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자각하지 못하는 이유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추측해보자면:
1) 사람들은 이미 직감적으로 이 문제를 느끼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대중에게 이 느낌(?)을 정돈된 언어로 설명할 능력이 없다보니, QAnon 딥스테이트라든가, 베리칩 음모론, 5G 코로나 전파설, 백신 음모론 같은 허무맹랑한 음모론들이 인기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음모론들은 공통적으로 신기술에 대한 공포, 그리고 권력자들이 그 기술로 자신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기반해있고, 이는 제가 본문에서 지적한 것(기술 발전으로 인한 인간성 상실, 기술 발전을 통한 지배층의 권력 강화)과 일맥상통합니다.
2) 속해있는 계급의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저의 글에 공감 또는 동의하기 힘들어하시는 분들은, 아마도 현대 사회에 나름 적응한 도시 거주자-화이트 컬러 계급에 속하지 않을까 싶습니다.(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고,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농촌 거주자-블루 컬러 계급에게는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경험인데, 이런 주장을 납득하지 못하시는 분들은 끝까지 납득 못하고, 납득하시는 분들은 스펀지가 물 빨아먹듯이 받아들이시더라고요.
인간의 존엄성이 무엇이느냐에 대해서는, 제가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가면 갈수록 현대 사회는 사람들에게 원래의 본성과는 다른 방향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합니다. 예를들어, ADHD(주의력 결핍장애)는 농경사회, 수렵채집사회에서 장애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현대 사회에서만 장애로 여겨지죠. 현대 공교육이 어린이들에게 장시간 앉아서 수업에 집중하길 요구하니까요. 또 대부분의 남자 어린이들은 현실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활동적인 일을 선호합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는 이 욕구를 억압하고, 수학, 과학을 공부하길 요구합니다. 현대사회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과학자, 기술자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가 인간에게 본성을 억압하길 요구한다는 점에서, 저는 현대사회가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중국을 언급하신건, 아마 한국과 서방세계의 민주주의를 고려하신 것 같습니다. 이건 카진스키가 여러 차례 다루었던 주제인데, 민주주의는 체제를 오히려 강화시켜줍니다.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의 일부분입니다. 카진스키가 쓴 글을 인용해볼게요.
[[기술-산업 체제는 소위 말하는 “민주적”인 유연성 덕분에 유별나게 강하다. 독재 체제는 뻣뻣하기 마련이고, 긴장감과 반항심이 쌓이다가 결국 혁명으로 인해 무너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민주적” 체제는, 긴장감과 반항심이 심각할 정도로 쌓이면 한걸음 물러서고, 타협해서 긴장을 해소한다.
1960년대, 우리 주요 도시들의 공기가 누구에게나 느껴질 정도로 안좋아지자, 사람들은 환경오염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시위하기 시작했고, 환경보호기관이 설립되었고, 문제를 완화시키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물론, 환경오염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불만은 충분히 해소되었고, 체제에 가해지는 압력은 줄어들었다.
따라서, 체제를 공격하는 것은 마치 고무를 치는 것 같다. 주철은 뻣뻣하고 푸석푸석하기 때문에 망치를 휘둘러 부술 수 있다. 하지만 고무는 유연하기 때문에, 망치로 내리쳐도 망가지지 않는다: 체제는 저항이 힘과 탄력을 잃을 때까지 양보한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온다.]]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실제 결정은 정부 고위 관료, 기업 임원, 기술 전문가들에 의해 내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들이 플랜 a, b, c를 내놓고 국민은 그 중 뭘 선택할지 투표하는 식인거죠. 이를 근거로 우리가 자유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치 죄수에게 저녁 메뉴를 선택할 수 있게 해주면 죄수는 자유로운 것이다라는 말과 비슷하게 느껴지거든요. 결정권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는, 민주국가 미국이든 공산당 독재국가 중국이든 드라마틱한 차이가 없지 않은가 싶습니다. 어차피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지시를 일방적으로 따라야하는 입장인 점에서 동일한 것 아닌가 하는게 저의 조심스러운 주장입니다.
보편적인 개개인들이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자각하지 못하는 이유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추측해보자면:
1) 사람들은 이미 직감적으로 이 문제를 느끼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대중에게 이 느낌(?)을 정돈된 언어로 설명할 능력이 없다보니, QAnon 딥스테이트라든가, 베리칩 음모론, 5G 코로나 전파설, 백신 음모론 같은 허무맹랑한 음모론들이 인기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음모론들은 공통적으로 신기술에 대한 공포, 그리고 권력자들이 그 기술로 자신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기반해있고, 이는 제가 본문에서 지적한 것(기술 발전으로 인한 인간성 상실, 기술 발전을 통한 지배층의 권력 강화)과 일맥상통합니다.
2) 속해있는 계급의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저의 글에 공감 또는 동의하기 힘들어하시는 분들은, 아마도 현대 사회에 나름 적응한 도시 거주자-화이트 컬러 계급에 속하지 않을까 싶습니다.(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고,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농촌 거주자-블루 컬러 계급에게는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경험인데, 이런 주장을 납득하지 못하시는 분들은 끝까지 납득 못하고, 납득하시는 분들은 스펀지가 물 빨아먹듯이 받아들이시더라고요.
인간의 존엄성이 무엇이느냐에 대해서는, 제가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가면 갈수록 현대 사회는 사람들에게 원래의 본성과는 다른 방향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합니다. 예를들어, ADHD(주의력 결핍장애)는 농경사회, 수렵채집사회에서 장애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현대 사회에서만 장애로 여겨지죠. 현대 공교육이 어린이들에게 장시간 앉아서 수업에 집중하길 요구하니까요. 또 대부분의 남자 어린이들은 현실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활동적인 일을 선호합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는 이 욕구를 억압하고, 수학, 과학을 공부하길 요구합니다. 현대사회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과학자, 기술자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가 인간에게 본성을 억압하길 요구한다는 점에서, 저는 현대사회가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중국을 언급하신건, 아마 한국과 서방세계의 민주주의를 고려하신 것 같습니다. 이건 카진스키가 여러 차례 다루었던 주제인데, 민주주의는 체제를 오히려 강화시켜줍니다.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의 일부분입니다. 카진스키가 쓴 글을 인용해볼게요.
[[기술-산업 체제는 소위 말하는 “민주적”인 유연성 덕분에 유별나게 강하다. 독재 체제는 뻣뻣하기 마련이고, 긴장감과 반항심이 쌓이다가 결국 혁명으로 인해 무너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민주적” 체제는, 긴장감과 반항심이 심각할 정도로 쌓이면 한걸음 물러서고, 타협해서 긴장을 해소한다.
1960년대, 우리 주요 도시들의 공기가 누구에게나 느껴질 정도로 안좋아지자, 사람들은 환경오염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시위하기 시작했고, 환경보호기관이 설립되었고, 문제를 완화시키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물론, 환경오염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불만은 충분히 해소되었고, 체제에 가해지는 압력은 줄어들었다.
따라서, 체제를 공격하는 것은 마치 고무를 치는 것 같다. 주철은 뻣뻣하고 푸석푸석하기 때문에 망치를 휘둘러 부술 수 있다. 하지만 고무는 유연하기 때문에, 망치로 내리쳐도 망가지지 않는다: 체제는 저항이 힘과 탄력을 잃을 때까지 양보한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온다.]]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실제 결정은 정부 고위 관료, 기업 임원, 기술 전문가들에 의해 내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들이 플랜 a, b, c를 내놓고 국민은 그 중 뭘 선택할지 투표하는 식인거죠. 이를 근거로 우리가 자유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치 죄수에게 저녁 메뉴를 선택할 수 있게 해주면 죄수는 자유로운 것이다라는 말과 비슷하게 느껴지거든요. 결정권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는, 민주국가 미국이든 공산당 독재국가 중국이든 드라마틱한 차이가 없지 않은가 싶습니다. 어차피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지시를 일방적으로 따라야하는 입장인 점에서 동일한 것 아닌가 하는게 저의 조심스러운 주장입니다.
표현이 조금 거칠지만, 제가 느끼는 현실 인식과 우려가 거의 일치하네요. 가끔은 그냥 기우겠거니 할 때도 있지만, 최소한 한국에서는 지배계급의 권력이 더 공고해지고, 양극화가 더 뚜렷해질 거라 보입니다. 말씀하시는 결정권의 박탈이라는 문제를 포함해서요. 본문에서는 과학기술을 주로 다루셨는데, 권력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대중을 통제하는 인문학적인 접근 방법도 더욱 정교해지고 있습니다. 최소한 한국에서는 지난 촛불집회에서 보았듯이, 70~80년대 무력항쟁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혹자는 다르게 평가할 수 있지만, 최소한 저는 그게 대중이 무... 더 보기
표현이 조금 거칠지만, 제가 느끼는 현실 인식과 우려가 거의 일치하네요. 가끔은 그냥 기우겠거니 할 때도 있지만, 최소한 한국에서는 지배계급의 권력이 더 공고해지고, 양극화가 더 뚜렷해질 거라 보입니다. 말씀하시는 결정권의 박탈이라는 문제를 포함해서요. 본문에서는 과학기술을 주로 다루셨는데, 권력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대중을 통제하는 인문학적인 접근 방법도 더욱 정교해지고 있습니다. 최소한 한국에서는 지난 촛불집회에서 보았듯이, 70~80년대 무력항쟁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혹자는 다르게 평가할 수 있지만, 최소한 저는 그게 대중이 무장해제되었다라고 느낍니다. 본문에 제시된 무력을 통해 저항한다.는 명제는 한국에서는 끝났습니다. 저항의 측면에서 일본의 초식남과 같이 한국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계층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현상을 트롤링이라고 부릅니다. 풀어서 말하면 극단의 비협조적, 공멸입니다. 비폭력적이지만 권력자들이 원하는 것에 비협조적이며 그저 소멸해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죠. 좀 더 영민한 이는 이민을 하거나요. 이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출산율은 계속 떨어지고 이민율이나 실업율, 자살율은 늘어날지 모릅니다. 21세기의 한국이 극복할 수 있을까요?
1) 일단 제 생각에는, 인간을 쉽게 설득하려면, 명료한 표현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명료한 표현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일단 연역적인 서술에 관한 증명을,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체감할 수 있는 경험"으로 내보이는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인 주장은 [현존하는 현실의 제도를 완전히 부정하기에,] 그런 것보다 실증적으로 어떻게 "관료주의 또는 역사적 시스템"이 개개인을 억압하는가?에 대한 답변이 필요한데, 이 답변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쉽게 납득할 수... 더 보기
1) 일단 제 생각에는, 인간을 쉽게 설득하려면, 명료한 표현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명료한 표현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일단 연역적인 서술에 관한 증명을,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체감할 수 있는 경험"으로 내보이는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인 주장은 [현존하는 현실의 제도를 완전히 부정하기에,] 그런 것보다 실증적으로 어떻게 "관료주의 또는 역사적 시스템"이 개개인을 억압하는가?에 대한 답변이 필요한데, 이 답변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통계적 자료"같은게 필요하다는 거죠. 예를들어, 글쓴이님이 "현대 공교육"을 예시로 드셨는데, 이거 관련해서, 토드 로즈라는 사람이 현대 교육이 평균과 보편성에 개개인성을 가둔다고 비판헸던 바가 있어요. https://en.wikipedia.org/wiki/Todd_Rose
거기에는 평균에 대한 환상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통계적으로 심리적으로 어떻게 잘못됬는지 간략하게 서술하더군요. 적어도 제 생각에는 이런 방법이 설득에 좋은 것 같아요. - (사실 이런쪽 비판은 인문적으로, 예술적으로 무수히 많죠)
2) 일단 현대사회가 존엄성을 억압한다고 한다면, 일단 존엄성의 정의를 가장 기초적인 것들로 규정하고 시작해야겠지요.
(사실 언어적 정의로 가면, 이런 가치판단이 이미 전제되어있는, 어휘들은 정의(완전하게 의미를 고정)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제가 굳이 정의해본다면, 존엄성은 일단 저희가 정서적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상태의 성질을 지시한다쳐보죠.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많은 관점을 도출시킬 수 있어요.(한국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봐야되는 것 같습니다.) 의식주라는 관점에서, "주거" "기아(食)" / 또는 "의료" "교육받을 권리" "노동시간" "글쓴이님이 지적하시는 개개인성을 인정받을 권리" 기타등등 수많은 관점이 존엄성이라는 하나의 어휘에서 도출되죠.
일단 제가 간략하게, 현대 사회의 문제를 의료라고 꼬집는다면, 미국의 경우,(대충드는 예시라서 부정확합니다)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49438&code=11141400&cp=nv
상황이 이러한데,
https://www.statista.com/statistics/257364/top-lobbying-industries-in-the-us/
로비 비중에서 의료분야가 2019년에 압도적 1위고...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3865876/
결국 이렇게 되어, 제도적으로 형성된 "가난"이 비싼 의료보험때문에, 진통제를 사용하고 미국인은 마약을 사용하고, 노숙자가 되고, 악순환이죠..
근데 문제는 일반적 사람들이나 기관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통계-응용수학 자체가 금융계(헤지펀드등)나, 기득권자들이 오히려 더 잘사용한다는 겁니다. - 기본적으로 경제학의 주류가 애초에 보편적 윤리나 시장 원리를 전제로 하고 있거든요.그리고 성장을 목표로, 몇몇 보이는 숫자의 수치의 증대를 목표로, 신자유주의적 원리가 강화되구요(- 미국의 경우 - 이건 제 개인적인 급진적 주장입니다.) 저의 순전히 독단적인 생각에는 결국 충분하게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전제를 갖추고, [선험적] 도구의 학문을 다각적으로 사용해서, 사람들을 설득하는게 가장 최선인 것 같습니다. 저희가 사변적으로 이야기를 해봤자, 일종의 meme화나, 무방향성, (시스템의 본질을 건드리지 않는) 다원주의의 늪 -PC-을 벗어날 수 없다고 봅니다.
미국이 아닌, 다른 국가들 (인도네시아, 태국, 러시아, 중국, 아프리카 등등) 이런 국가들은 더 심각하죠.
가장 현실적인 해결 방안은 대중들이 스스로 자각해서, 직접 민주제를 실천하거나, 억압된 개개인 모두가 의식적으로 각성해서,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실천하고, 창의적 해결방안을 만드는 거 겠죠. (그러나 보수들을 관찰해보면, 일종의 "철인정치"식 엘리트주의를 암묵적으로 전제시켜서,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사고가 나온 원인을 생각해보면 이 해결 방안은 굉장히 비현실적입니다.)
2.1 - ( 지극히 독단적인 저의 생각으론 한국의 경우,) 글쓴이님의 주장은 보수나 나이드신 어른들한텐 택없는 주장처럼 들릴껍니다. 그들은 성장하는 경제를 직접적으로 체험하고, 경제적 빈곤에서 오는 불안성을 해소했기에, (물론 요즘 세태를 보고, 사고가 바뀐 사람도 있겠죠.) ~~국가에 비해서, 거시적 측면에서, 거대한 미국의 경제학적 논리가 진리다.(실용적 관점에서 보면, 부분적으로 타당한 이야기입니다.)에서 출발해서, 최종적으론 온갖 해괴한 정치적 옹호를 하기 때문이죠.(극우로 비약하는 현상을 언급하는 겁니다.)
(여당)진보의 경우는 저런걸 인지하고 정책을 짜는거 같은데, 일종의 선험적(논리적-실증적) 정확성을 잃고, 정치적 편향성을 여기 저기 도입시키고, 소위 말하는 헬조선 특유의 "고인물화"(지들끼리 다 해먹는? - 윤xx씨 사건 보고, 어처구니가 좀...)다 된 것 같구요.
3) 그래서 제가 최종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일종의 인식과 문화의 관계죠. 글쓴이님이 말씀하신, 존엄성에서 일종의 개개인성이라는 단어가 전제되어있는 느낌이 들었는데, 저는 개개인성(주체성)의 억압하는 본질을 저는 고정관념으로 보거든요. 그리고 그 고정관념을 형성시키는 1차적인 외부요인을, 정서적 당위성(논리적 느낌에 의한 당위성)을 전제시키는 우리의 "문화적 요인"으로 보는거죠. 역으로 또 살펴보면 그러한 정서적 당위성에서 부인할 수 없는 정서(긍정적인 가치의 관점에서의 情이나 사랑같은 것들)도 느끼고 있구요.
4) 저는 솔직히 제 생각을 말하자면, 제가 지각하는 "대중적인 문화"에서 천민자본주의나, (예를 들면 힙합의 FLEX), 할리우드나 네이버 연예기사면, 광고를 볼때, 일종의 "가치 판단에 영향을 주는 관념들(감각-정서)"을 전파하는 느낌도 들고요.( 인지비약 - 확증편향일 수도 있죠. ) 개인적으로 콰인이나 기 드보르의 글들을 보고, 근 1년 사이에, 뭔가 확실히 사고도 바뀌게 되고, 이상하게 변하게 되더라구요. 여하튼 뭐 그렇습니다. 인식이라는게 사실 범주가 넓게 사용될 수 있는 단어이다 보니, 수많은 생각이 많이 나더라구요.
제가 좋아하는 책인 화이트헤드 - 관념의 모험에 이런 말이 나와있습니다.
"우리들은 습관적으로 돌, 행성, 동물 등과 같은 것들을 말할 때, 그러한 개체적 사물이 일시적인 한순간이라도 그 자체의 본성상 실제로 필수적 요건인 환경과 분리되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이러한 추상은 사고의 불가결한 요소로서, 조직적인 환경의 필수적인 배경은 전제될 수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결과, 사물의 궁극적 본성에 대한 어떤 이해와, 그러한 추상적 진술에 전제되어 있는, 배경에 대한 이해가 모두 결여되어 있는 경우, 모든 과학은 그들이 서로 모순된 배경을 암암리에 전제하는 다양한 명제들을 결부시키는 과오를 범하게된다."
마지막으로 좀 당연해보여서, 의미없는 댓글이었는데 반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거기에는 평균에 대한 환상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통계적으로 심리적으로 어떻게 잘못됬는지 간략하게 서술하더군요. 적어도 제 생각에는 이런 방법이 설득에 좋은 것 같아요. - (사실 이런쪽 비판은 인문적으로, 예술적으로 무수히 많죠)
2) 일단 현대사회가 존엄성을 억압한다고 한다면, 일단 존엄성의 정의를 가장 기초적인 것들로 규정하고 시작해야겠지요.
(사실 언어적 정의로 가면, 이런 가치판단이 이미 전제되어있는, 어휘들은 정의(완전하게 의미를 고정)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제가 굳이 정의해본다면, 존엄성은 일단 저희가 정서적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상태의 성질을 지시한다쳐보죠.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많은 관점을 도출시킬 수 있어요.(한국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봐야되는 것 같습니다.) 의식주라는 관점에서, "주거" "기아(食)" / 또는 "의료" "교육받을 권리" "노동시간" "글쓴이님이 지적하시는 개개인성을 인정받을 권리" 기타등등 수많은 관점이 존엄성이라는 하나의 어휘에서 도출되죠.
일단 제가 간략하게, 현대 사회의 문제를 의료라고 꼬집는다면, 미국의 경우,(대충드는 예시라서 부정확합니다)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49438&code=11141400&cp=nv
상황이 이러한데,
https://www.statista.com/statistics/257364/top-lobbying-industries-in-the-us/
로비 비중에서 의료분야가 2019년에 압도적 1위고...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3865876/
결국 이렇게 되어, 제도적으로 형성된 "가난"이 비싼 의료보험때문에, 진통제를 사용하고 미국인은 마약을 사용하고, 노숙자가 되고, 악순환이죠..
근데 문제는 일반적 사람들이나 기관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통계-응용수학 자체가 금융계(헤지펀드등)나, 기득권자들이 오히려 더 잘사용한다는 겁니다. - 기본적으로 경제학의 주류가 애초에 보편적 윤리나 시장 원리를 전제로 하고 있거든요.그리고 성장을 목표로, 몇몇 보이는 숫자의 수치의 증대를 목표로, 신자유주의적 원리가 강화되구요(- 미국의 경우 - 이건 제 개인적인 급진적 주장입니다.) 저의 순전히 독단적인 생각에는 결국 충분하게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전제를 갖추고, [선험적] 도구의 학문을 다각적으로 사용해서, 사람들을 설득하는게 가장 최선인 것 같습니다. 저희가 사변적으로 이야기를 해봤자, 일종의 meme화나, 무방향성, (시스템의 본질을 건드리지 않는) 다원주의의 늪 -PC-을 벗어날 수 없다고 봅니다.
미국이 아닌, 다른 국가들 (인도네시아, 태국, 러시아, 중국, 아프리카 등등) 이런 국가들은 더 심각하죠.
가장 현실적인 해결 방안은 대중들이 스스로 자각해서, 직접 민주제를 실천하거나, 억압된 개개인 모두가 의식적으로 각성해서,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실천하고, 창의적 해결방안을 만드는 거 겠죠. (그러나 보수들을 관찰해보면, 일종의 "철인정치"식 엘리트주의를 암묵적으로 전제시켜서,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사고가 나온 원인을 생각해보면 이 해결 방안은 굉장히 비현실적입니다.)
2.1 - ( 지극히 독단적인 저의 생각으론 한국의 경우,) 글쓴이님의 주장은 보수나 나이드신 어른들한텐 택없는 주장처럼 들릴껍니다. 그들은 성장하는 경제를 직접적으로 체험하고, 경제적 빈곤에서 오는 불안성을 해소했기에, (물론 요즘 세태를 보고, 사고가 바뀐 사람도 있겠죠.) ~~국가에 비해서, 거시적 측면에서, 거대한 미국의 경제학적 논리가 진리다.(실용적 관점에서 보면, 부분적으로 타당한 이야기입니다.)에서 출발해서, 최종적으론 온갖 해괴한 정치적 옹호를 하기 때문이죠.(극우로 비약하는 현상을 언급하는 겁니다.)
(여당)진보의 경우는 저런걸 인지하고 정책을 짜는거 같은데, 일종의 선험적(논리적-실증적) 정확성을 잃고, 정치적 편향성을 여기 저기 도입시키고, 소위 말하는 헬조선 특유의 "고인물화"(지들끼리 다 해먹는? - 윤xx씨 사건 보고, 어처구니가 좀...)다 된 것 같구요.
3) 그래서 제가 최종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일종의 인식과 문화의 관계죠. 글쓴이님이 말씀하신, 존엄성에서 일종의 개개인성이라는 단어가 전제되어있는 느낌이 들었는데, 저는 개개인성(주체성)의 억압하는 본질을 저는 고정관념으로 보거든요. 그리고 그 고정관념을 형성시키는 1차적인 외부요인을, 정서적 당위성(논리적 느낌에 의한 당위성)을 전제시키는 우리의 "문화적 요인"으로 보는거죠. 역으로 또 살펴보면 그러한 정서적 당위성에서 부인할 수 없는 정서(긍정적인 가치의 관점에서의 情이나 사랑같은 것들)도 느끼고 있구요.
4) 저는 솔직히 제 생각을 말하자면, 제가 지각하는 "대중적인 문화"에서 천민자본주의나, (예를 들면 힙합의 FLEX), 할리우드나 네이버 연예기사면, 광고를 볼때, 일종의 "가치 판단에 영향을 주는 관념들(감각-정서)"을 전파하는 느낌도 들고요.( 인지비약 - 확증편향일 수도 있죠. ) 개인적으로 콰인이나 기 드보르의 글들을 보고, 근 1년 사이에, 뭔가 확실히 사고도 바뀌게 되고, 이상하게 변하게 되더라구요. 여하튼 뭐 그렇습니다. 인식이라는게 사실 범주가 넓게 사용될 수 있는 단어이다 보니, 수많은 생각이 많이 나더라구요.
제가 좋아하는 책인 화이트헤드 - 관념의 모험에 이런 말이 나와있습니다.
"우리들은 습관적으로 돌, 행성, 동물 등과 같은 것들을 말할 때, 그러한 개체적 사물이 일시적인 한순간이라도 그 자체의 본성상 실제로 필수적 요건인 환경과 분리되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이러한 추상은 사고의 불가결한 요소로서, 조직적인 환경의 필수적인 배경은 전제될 수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결과, 사물의 궁극적 본성에 대한 어떤 이해와, 그러한 추상적 진술에 전제되어 있는, 배경에 대한 이해가 모두 결여되어 있는 경우, 모든 과학은 그들이 서로 모순된 배경을 암암리에 전제하는 다양한 명제들을 결부시키는 과오를 범하게된다."
마지막으로 좀 당연해보여서, 의미없는 댓글이었는데 반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70~80년대 무력항쟁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현대는 더 이상 정부를 무너뜨린다고 해서 변화가 찾아오는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체제이고, 정부는 일개 하수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일본의 초식남 현상이나 한국의 극단적인 저출산 현상은 발전된 과학기술과 산업화로 인한 병리현상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이를 명확히 증명할 근거는 없지만요. 자발적인 출산포기가 권력자들 혹은 체제에 저항하는 유의미한 수단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한국의 경우 저출산으로 인해 병역자원 감소로 인한 국방력 약화 ... 더 보기
70~80년대 무력항쟁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현대는 더 이상 정부를 무너뜨린다고 해서 변화가 찾아오는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체제이고, 정부는 일개 하수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일본의 초식남 현상이나 한국의 극단적인 저출산 현상은 발전된 과학기술과 산업화로 인한 병리현상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이를 명확히 증명할 근거는 없지만요. 자발적인 출산포기가 권력자들 혹은 체제에 저항하는 유의미한 수단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한국의 경우 저출산으로 인해 병역자원 감소로 인한 국방력 약화 같은 심각한 위기를 겪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로 인한 비용은 결국 일반 대중에게 전가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권력자들에게 중요한건 본인들의 지위유지이지, 나라가 아니거든요. 나라 경제가 박살이나든 국방력이 약화되든 그로 인한 피해는 대중에게 돌리고, 자기들이 살고 있는 성만 안전하면 되는거고, 상황이 영 아니다 싶으면 까짓꺼 다른 나라로 이민가면 그만입니다.
다만 이 상황에 무력을 통해 저항한다는 명제가 한국에서 끝났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중요한건 무엇을 향해 저항하냐는 것입니다. 광화문 광장에 떼지어 반정부 구호를 외치고, 경찰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방식의 저항은 말씀하신데로 무의미합니다. 하지만 전기발전소, 데이터 센터, 반도체 생산공장, 유전공학 연구소 등 산업기반시설, 과학 기술에 대한 공격은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게 저의 조심스러운 생각입니다.
다만 이 상황에 무력을 통해 저항한다는 명제가 한국에서 끝났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중요한건 무엇을 향해 저항하냐는 것입니다. 광화문 광장에 떼지어 반정부 구호를 외치고, 경찰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방식의 저항은 말씀하신데로 무의미합니다. 하지만 전기발전소, 데이터 센터, 반도체 생산공장, 유전공학 연구소 등 산업기반시설, 과학 기술에 대한 공격은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게 저의 조심스러운 생각입니다.
목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