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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9/30 14:22:13
Name   MANAGYST
Subject   한국형 시장경제체제
제가 쓴 글이 아니라,
SG Economist이신 오석태 박사님의 글입니다.
장문이어서 스크롤의 압박이 있지만, 좋은 글이어서 공유합니다.

https://www.facebook.com/suktae.oh.5

한국형 시장경제체제, 이영훈 엮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년.
한국이 저신뢰와 고갈등의 사회라는 것을 일단 인정하자.

서울대 경제연구소가 주관하고 KDI와 삼성경제연구소도 참가한 '한국형 시장경제체제의 모색'이라는 연구 과제의 결과물을 모은 책으로, 기본적으로 대표적 '뉴라이트' 경제사학자이며 당시 서울대 경제연구소 소장으로서 이 연구를 주도했던 이영훈 교수의 색깔이 짙게 배어 있다. 머리말에도 나와 있는 이 책의 잠정적인 결론은
1) 한국 경제는 국가주의 시장경제이며
2) 정부 규제가 심한 것은 한국이 저신뢰와 고갈등의 사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다가 '정부 규제를 처음 도입하여 한국 경제 발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 바로 일본 식민 세력이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추가하면 근대 한국 경제사에 대한 완벽한 설명이 될 테지만, 이 책은 거기까지 나가지는 않는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요, 가장 설득력있는 부분도 바로 이영훈 교수가 직접 쓴 제1장과 마지막 장이었다.

제1장은 자본주의의 다양성(Varieties of Capitalism, VoC) 이론을 통해 한국 경제의 특징을 논하고 있으며,
마지막 제11장은 유교와 근대화의 복선적 전환, 그리고 그레고리 헨더슨의 '소용돌이의 한국사회'를 원용한
'나선사회'라는 개념을 통해 한국 사회의 낮은 신뢰도와 높은 갈등은 물론 최근 수십년간 고도 성장까지 설명.

제1장에서는 우선 한국 경제의 잘 알려진 특성 7가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고도의 개방성, 2)국가경쟁력의 중심인 대기업, 3)혁신 역량이 없는 방대한 생계형 소기업, 4)불안정한 노동시장, 5)인력 수급 불균형, 6)직접금융이 우세한 금융시장, 그리고 7)강력한 규제.

VoC 이론은 자유시장경제(=영미형)와 조정시장경제(=독일 일본형)로 나눈 일차원적 분류로 시작하여,
국가의 경제 개입 정도와 이익단체의 긴밀한 조직 여부라는 두 차원에 의한 분류로 발전하였다.

일단 자유시장경제와 조정시장경제는 둘 다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지 않는 형태로,
이익단체(기업 및 노동자 단체)가 약한 곳은 자유시장경제(한국경제), 강하게 조직된 곳은 조정시장경제이다.
그리고 국가의 경제 개입이 강한 곳 중 이익단체가 약한 곳은 국가주의 시장경제(프랑스),
강한 곳은 보상국가 시장경제로(스페인), 전자는 90년대 이전의 프랑스, 후자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들고 있다.

한국 경제는 VoC의 일차원적 분류에서 흔히들 조정시장경제보다는 자유시장경제 쪽에 가까운 것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노동시장의 장기고용, 연공임금 등을 보면 또 조정시장경제의 특성이 보이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이영훈 교수는 한국의 연구자들이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비공식적 제도와 규범을 무시하고 있으며 무조건 조정시장경제를 선호하는 절망적 수준의 도덕적 규범성을 보인다고 비판한다. 이 교수는 한국형 시장경제의 특질이 2차원의 VoC 분류상 국가주의 시장경제임을, '대기업을 제외한 모든 경제주체가 국가의 보호와 육성의 대상임을 천명한 헌법의 경제 조항'을 들어 입증하고 있다. 정부의 규제가 강화된 것은 한국 경제가 부문간의 불균등과 격차를 스스로 조정할 능력이 취약하기 때문이며, 이는 한국이 고갈등 저신뢰 사회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한국이 유독 영세 자영업의 비중이 높은 것 역시 '저신뢰'로 설명된다.

(추가설명) 생산레짐론에 기초한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에 따르면 1980년대와 1990년대 상황에서 세계 자본주의는 크게 두 유형으로 나뉜다. 미국,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이 포함된 '자유시장경제(liberal market economies, LME)'와 독일과 북유럽국가 그리고 일본 등으로 대표되는 '조정시장경제(coordinated market economies, CME)'가 그것이다.(주4) 칼 폴라니의 이론적 틀에서 보면, CME는 시장과 국가-사회관계가 '맞물려'(embedded) 있는 상태이며, LME는 이 관계가 '풀려서'(disembedded) 시장이 자율적으로 기능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주5) 따라서 CME에서는 노사관계나 훈련 및 고용체계 등 제반 생산레짐 요소의 작동에 대하여 국가나 사회의 조정 혹은 개입이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반면, LME에서는 모든 생산관련 제도의 작동이 기본적으로 기업에 의해 시장의 원리대로 이루어진다. 자본주의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CME체제에서는 대체로 (LME체제와 달리) 성장, 효율성, 경쟁만이 아니라 분배, 형평성, 연대 등의 가치가 중시되고 지켜진다. 그럴 수 있는 것은 바로 약자 편에 서서 시장을 조정하고 사회공동체를 유지해가는 조정 역할을 국가 또는 사회가 맡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그러한 비시장적 조정 역할이 정책적으로 극소화된 형태의 LME체제라고 볼 수 있다.

고도성장을 진두 지휘한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 경제가 독일, 일본과 같은 조정자본주의로 나아가기를 추구하였으며, 당시 한국 사회와 경제는 (일시적 현상이나마) 이례적으로 높은 수준의 신뢰와 통합을 보였다고 이 교수는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 특유의 나선사회가 가지고 있는 분열의 동력은 이러한 박정희의 노력을 실패하게 만들었으며, 박정희의 권위주의에 대항한 '민주화' 세력은 진정한 의미의 시민적 민주주의 세력이 아니라 나선사회의 상위를 추구하는 과도하게 정치화된 세력이었다고 비판한다. 민주화시대 들어 노동시장 역시 위계적으로 분절되었으며,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들만의 특별한 지위와 권리를 위해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용인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노동계급이나 그를 위한 연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갈하기도 한다.

이 교수는 현재 국가주의 시장경제인 한국 경제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조정시장경제보다는 자유시장경제 쪽이라고 판단한다. 앞에서 비판한 '규범성'을 가지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그보다는, 현재 한국이 가지고 있는 특징인 상부를 지향하는 나선사회가 조정시장경제의 덕목인 협약, 연대, 협동보다는 자유시장경제의 덕목인 경쟁, 계약, 위계 쪽에 더 가깝다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 경제가 객관적으로 독일 일본형보다는 영미형에 가깝다는 주장이다.

이상적으로야 독일 일본형을 추구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한국 경제는 영미형 쪽으로 유도하는 것이 더 쉽다는 생각,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영국이나 캐나다, 호주 정도의 사회안전망과 자유경쟁구도가 확보된다고 해도 한국 경제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질 것이다. 물론 정부의 시장경제에 대한 개입은 지금보다 훨씬 축소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정부의 개입이 그대로인 채 이익단체의 조직만 강해진다면 한국 경제는 보상국가 시장경제로 빠질 수도 있겠지만, 정부의 경제 개입 축소보다 이익단체의 조직 강화가 더 어려울 것 같다는 게 내 솔직한 느낌이다.

그리고 제11장, '한국사회의 역사적 특질'이다. 이 교수는 일단 19세기까지의 전통 사회가 고신뢰의 공동체 사회였는데 20세기들어 일제의 통치가 공동체를 깨뜨리고 한국을 저신뢰사회로 추락시켰다는 일부의 민족주의적 시각을 반박한다. 전통사회가 고신뢰 공동체였다는 주장은 주관적 환상일 뿐 논증된 바가 없다는 것이다. 비교제도적으로 볼 때 일본이 멤버십과 연대에 기초한 단체 위주의 사회, 그리고 중국이 상호침투적 국가와 콴시(선별적이고 호혜적인 신뢰 관계)에 기초한 관계 위주의 사회라면, 한국은 과연 어떠한 사회인가?

이 교수는 조선왕조의 강력한 중앙집권제도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군현당 인구 규모로 볼 때 조선의 중앙권력 밀도는 중국보다 3-5배 정도 높았다. 그리고 조선의 징세는 군현의 수령과 향리 집단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지주세력이 조세 행정에 구조적으로 개입하는 '상호침투'가 나타났던 중국과는 달랐다. 그리고 조선의 동리가 징세의 조직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무라(村)가 조세 행정을 주체적으로 수행했던 일본과도 전혀 달랐다. 결국 조선왕조의 조세 행정은 철저한 중앙집권에 기초했다는 얘기다. 지배세력이었던 양반은 근본적으로 중앙권력에 근거를 둔 세력이었지 농촌사회와 이해를 같이하는 지방세력이 아니었다.

동리(동네) 역시 일본의 무라와 같은 안정된 단체가 아닌, 상이한 신분(반상)의 혼거로 갈등이 잦고 둘로 쪼개지는 일도 많았으며 소농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이동도 많은 대단히 불안정한 조직이었다. (오늘날 영세 자영업의 불안정성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흔히 '미풍양속'으로 알고 있는 두레는 양반세력이 강한 동리에서 양반이 상민의 노동력을 강제동원하는 체제였다. 결국 동리를 구심으로 하여, 혹은 직능을 공동이해로 하여 단단하게 결속된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고, 개인간의 호혜적 신뢰관계는 반상의 신분제에 의해 크게 제약되었다.

이 교수의 주장 중 가장 독특한 부분이 바로 일본 식민지 시대에도 조선왕조 5세기에 걸쳐 진행된 유교적 전환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식민지 하에서의 근대로의 전환과 기존의 유교적 전환, 두 가지가 복선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얘기다. 비록 공식 영역에서 반상의 신분은 사라졌지만, 호주제의 도입으로 유교적,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양반 한정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퍼지게 되었고, 족보가 간행되면서 친족 집단의 광역 통합이 나타나기도 했다. ('온 국민 양반되기'의 바람은 일제 시대에도 여전했다는 것이다.) 동리 양반들은 신분제의 폐지에도 불구하고 자기들끼리의 결속을 유지하였다. 결국 '조선의 향촌 사회는 일제 침략으로 결코 망하지 않았으며, 일제 치하에서 그 본래의 구조와 성격에는 근본적인 변동이 없었다.' (기존 지배계급, 즉 양반들은 이제 사실상 일본의 권력에 근거를 두게 되었으며, 암묵적인 친일 세력이었다는 이야기로 들리기도 한다.)

반상으로 구분된 동리의 불안정성은 한국전쟁 당시 그토록 많은 마을에서 좌우간의 학살이 벌어진 근본 원인이기도 하다. 한국 전쟁의 근원은 수백년동안 이어져 내려온 신분/계급간의 갈등이라는 얘기이며, 즉 한국 전쟁의 내인설을 지지하는 논리로 연결된다. 이영훈 교수가 이것을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유교화와 근대화의 복선 전환은 심지어 대한민국 건국과 농지개혁으로 인한 실질적인 신분제 철폐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일부 마을에서 반상의 신분 질서는 7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으며, 옛 노비나 상민들의 양반 되기, 즉 유교적 인간화도 계속되었다. (다들 빠짐없이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신분질서에 의거한 두레 등의 단체는 이제 해체되었고, 잔존한 친족집단 역시 진정한 공동체가 아니었다. (문중의 재산은 제사 봉행을 핑계로 종가가 사실상 독점하였으며, 가난한 친족원을 위한 공동체적 부조 같은 것은 없었다.)

여기서 이영훈 교수는 그레고리 헨더슨의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를 소환한다. 한국 사회는 동질적이며, 원자화된 개인이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에서 중앙권력을 추구하는 거대한 소용돌이라는 주장이다. 이 교수는 소용돌이(vortex) 대신 나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특히 '(교육을 통해) 나선을 그대로 따라가다가는 최상층부에 도달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연줄을 통한 도약이 필요하다'는 대목은 한국 사회의 현 상태를 적확히 묘사하고 있었다. 몇몇 다른 미국 인류학자의 연구 역시 정서적 유대가 취약하고 자식들은 도시로 보내고 싶어하는 농촌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시장에서도 19세기 이전으로 역사가 올라가는 상인 조직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도시민의 사회상활은 더욱 삭막하였다. 여러 연구자들은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을 철두철미한 가족주의, 교육을 통한 출세 지향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현대 한국에서 벌어진 농촌의 조직 운동으로 이 교수는 새마을운동에 주목한다. 새마을운동은 마을을 공유재산과 공동사업의 주체로 재편성했다는 점에서 분명 일본의 무라, 즉 단체사회를 지향한 것이었다. 특히, 새마을운동이 단기간에 성공한 것은 무엇보다 중앙 정부가 마을에 자립-자조-기초마을이라는 차별적 등급을 부여했기 때문이며, 이는 한국의 중앙집권적인 나선사회적 특성이 새마을운동에도 적용됨을 잘 나타낸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 농촌 사회는 개방적이고 유동적인 조직이다.

이러한 한국의 나선사회적 특성은 한국의 고도성장에 공헌하기도 했다. 특히, 우수한 인적자본이 계층 상승의 기회를 찾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고도성장을 주도한 대기업집단(재벌)의 등장은 정치와 관료제를 대체하는 또 하나의 중앙집권적 위계의 창출을 의미하였다. 전통사회와 현재 한국사회는 나선사회라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는 현대에는 국가고시 합격과 '삼성고시' 합격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태에서 '한국적 소용돌이의 역사는 그 상층부가 권력을 지향하는 엘리트들의 파당이 주도하는 비생산적인 도덕논쟁으로 일관되어왔다.'는 헨더슨의 분석은 민주화 이후 현재의 정치에도 적용될 수 있다. 무엇보다, '민주화 이후 권력 엘리트들은 대기업을 억누르면서 중소기업이 주도하는 성장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계속 노력하였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것(중소기업 주도 성장 모델)은 나선사회의 짜임새와 익숙한, 그래서 다수의 한국인이 신바람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역사적 경로가 아니었다'는 이 교수의 결론은 너무나 뼈아프다. 한국인의 특성상 '히든 챔피언'보다는 역시 잘 알려진 재벌 기업에서 일하는 것이 더 '신바람' 난다는 얘기다.

이영훈 교수의 위 주장은 탄탄한 실증적 증거를 기반으로 했다기보다는 가설에 더 가깝다고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다. 조선 사회의 비하라는 '뉴라이트' 사관의 일반적 특성을 공유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고, 한국 역사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없는 아마추어 학자요 '문화재 도둑'이기도 했던 헨더슨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뢰가 부족하고 연대가 드문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을 바라볼 때, '옛 조선은 신뢰와 공동체 정신이 충만한 이상적 사회였다'는 '초대교회'와 같은 과거의 신비화, 이상화가 과연 현재 신뢰를 되찾고 연대를 형성하는 데 효과적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완벽했던 한국이 일제 시대 들어오면서 망했다'는 시각은 자칫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친일파 척결'로 환원시키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차라리 '한국은 원래 신뢰가 꽝이고 다들 각자도생으로 교육이나 연고를 통해 출세만 하려고 한다'는 비관적인 시각이 오히려 신뢰도 향상과 연대 증진을 위한 건설적인 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나머지 부분, 즉 이 책의 본문에 해당하는 각 연구자들의 한국 경제에 대한 서술을 하나하나 정리해 본다.

제2장, '한국의 국가혁신체제'에서는 특허간 인용 데이터를 이용하여 한국 및 각국의 국가혁신체제를 분석하였다. 저자는 우선 한국이 성공적으로 중진국 함정을 넘어선 비결이 바로 1980년대 중반부터 연구개발(R&D) 투자를 획기적으로 늘린 것이라고 지적한다. (나는 영미형 자유시장경제의 특징에 '급진적 혁신'이 포함되어 있음에 주목한다. 적어도 한국의 연구개발-혁신은 조정자본주의형의 점진적 혁신, 즉 기존 생산라인의 개선이나 숙련의 축적에 의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한국 경제가 자유시장경제에 가까운 또 하나의 측면이다.) 한국과 타이완은 기술수명주기가 짧은 IT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추격형 국가혁신체제'를 가지고 있다. 기술수명주기가 짧다는 얘기는 다시 말하면 항상 '앞으로의 유망 분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 쪽으로 옮겨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중진국 함정을 넘어선 한국은 이제 기술수명이 긴 분야 (생명과학, 소재, 기계)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선진국형 국가혁신체제로 전환을 해야 한다. 한국의 기술수명주기는 2000년도부터 다시 길어지기 시작했지만 아직 독일이나 일본에는 못 미친다. 한국의 혁신이 대기업에 집중되었으며 기업간의 상호 교류가 적다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은 결과이다. 저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결합, 노사간의 대타협, 여러 분야 기술의 융합이라는 세 가지 과제를 제시하면서 글을 끝맺는다.

제3장, '한국 대규모 기업집단의 특징과 전망'은 대규모 기업집단이 후발 산업화국가에 있어서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명제로부터 시작한다. 세계적으로 보아 분산된 소유구조하의 전문경영인 중심 회사가 대기업의 지배적인 형태를 이루는 것이 오히려 예외적이기도 하다. 기업집단의 형성에서 중요한 것은 통제권과 현금흐름권의 괴리 유도 (즉 주식 소유권보다 더 강한 통제권의 확보)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장치로 자유로운 기업간 주식 소유(즉 순환출자)와 차별적 투표권을 가지는 주식의 발행(황금주 등)을 들 수 있다. 주요 선진국에서 소유가 분산된 전문경영인 체제가 등장한 것은 적어도 미국과 일본의 경우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미국의 강력한 독점금지법, 일본의 전후 미 군정에 의한 재벌 해체 등)

한국 대규모 기업집단의 경우 통제권과 현금흐름권의 괴리가 높아서 (즉 '오너 가문'의 소유지분이 낮아서) 경영자와 주주 사이, 그리고 지배주주와 소액주주 사이에서 대리인 비용이 이중으로 발생하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이러한 '재벌 체제'를 소유 분산-전문 경영인 체제로 전환하려는 주도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미국에는 강력한 반독점 정치 세력이 있었고, 영국에는 지배주주에 효과적으로 대항한 기관투자자, 독일에는 강력한 노조, 그리고 일본에는 미 군정이 있었다.) 저자는 한국 경제가 선진화되면서 현재의 가족 중심 기업집단 체제가 그대로 존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하면서도, 전문경영인 체제로의 급격한 전환을 추진할 주도 세력을 찾기가 당분간 쉽지 않아 보인다는 유보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기업체제 공존 여건 조선' '통제권과 현금흐름권의 괴리를 해소하는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기업간 배당소득세제 강화, 법인간 주식소유 비용 인상 등 제도 확립' '지배가문의 출구전략 마련' 등의 대안을 제시하며, 기존의 통제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지주회사제도, 신규순환출자 금지 등의 정책들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역시 '재벌 개혁'에는 '화끈한' 대안 제시가 어렵다는 내 기존의 생각만 더 굳어진다.

제4장, '경제발전의 전개 형태와 중소기업'은 통계 분석을 통해 한국의 중소기업 발전의 역사적 패턴을 제시한다. 일단, 중소기업 중심의 산업화가 전개된 선진국과는 달리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후발 공업국에서는 대기업이 먼저 육성된 후 이를 지원하기 위해 중소기업이 나중에 육성되었다. 한국의 중소기업 육성은 70년대 중화학공업화를 그 기점으로 한다. 한국 중소기업 발전은 '부품 국산화'의 과정이었고, 그에 따라 중소기업의 생산 비중도 계속 증가하였다. (60년대 경공업 중심 발전기에는 중소기업 생산비중이 감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과 한국 중소기업을 볼 때 가장 큰 차이점은, 우리나라의 경우 대기업에 대한 중소기업의 1인당 부가가치 비율이 줄어들면서도 세계 시장에서의 수출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대기업에 대한 중소기업의 1인당 부가가치 비율이 유지되고 있지만 세계 시장에서의 수출 점유율은 줄어들었다. 한국 중소기업의 교섭력이 약한 것이 잘 드러나지만, 중소기업의 희생으로 한국 수출의 점유율이 유지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저자는 신뢰가 부족한 한국에 일본식 장기지속형 분업관계(하청제)를 도입하다 보니 대기업의 우월적 지위 남용을 막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제 저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대적 수를 통해 한국의 경제 발전 단계를 둘로 나눈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수가 같이 늘어났고 고용 역시 동반 증가하였다. 당시는 수출 주도의 고도성장기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파이 쟁탈전'이 심하지 않았고, 또 둘 다 해외 기술의 도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술 격차가 크지 않았다. 그러나 80년대 말-90년대 초에 이르러 대기업의 수는 눈에 띄게 감소하지만 중소기업의 수는 계속 늘어나는 뚜렷한 변화가 나타난다. 저자는 동구권의 붕괴와 중국의 개방에 따른 '세계화'로 인해 경쟁이 격화되면서 대기업은 축소되었고, 남은 대기업은 기술집약형 기업으로 체질을 바꾸면서 가격경쟁력 확보를 위해 중소기업으로 생산을 전가했다고 해석한다. 중소기업 중에서도 특히 직원 10명 미만의 소기업 비중이 엄청나게 늘어났으며, 이 소기업은 많은 경우 외국인 노동자에 의존하게 된다. (이 분석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대기업 수의 감소와 하청 중소기업의 증가라는 추세가 흔히 생각하듯 90년대 말의 IMF 경제위기가 아닌 80년대 말-9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집약적 대기업-노동집약적 중소기업의 장기지속적 분업 관계를 그대로 두고 중소기업의 기술집약화, 소위 '히든 챔피언'을 육성하는 것은 무척 어려울 것이다. 장기지속적 분업 관계 자체가 대기업의 고통을 중소기업으로 전가하는 것을 전제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이나 일본의 중소기업들은 많은 경우 대기업이 있기 전부터 존재했지만, 한국의 중소기업은 처음부터 대기업의 하청 기업임을 전제로 하고 창업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소기업은 기술 혁신을 통해 새로운 제품을 개발할 유인도, 생산성을 높여 비용을 절감할 유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결국 기존의 장기지속적 분업 관계를 청산하고 개방적 분업구조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과도한 지배력 행사를 방지하는 정책, 중소기업간 수평적 네트워크의 활성화 등도 더해진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는 '조직과 연대가 활성화되지 않은 경우 차라리 영미식의 경쟁적 자유시장경제가 낫다'는 위 이영훈 교수의 주장과도 일맥 상통하는 듯하다.

제5장, '한국 자영업 부문의 현황과 구조적 특성'은 한국의 현 자영업 부문이 과거 전통 소상공인 부문과 단절되었다는 전제로부터 글을 시작한다. 이는 이영훈 교수가 지적한 '한국에 예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길드와 같은) 상공인 조직이 없다'는 사실과 일맥 상통한다. (잘 내려오던 조직을 일본이 깨뜨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 자영업 불안의 핵심은 바로 경쟁의 격화이다. 기본적으로 자영업자의 주된 경쟁상대는 다른 자영업자이지 대기업은 아니다. 자영업자의 경쟁은 제로섬 게임을 특성으로 하는 상대적 경쟁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과당 경쟁을 낳는다. 이렇게 '사회적 덫'이 되어 버린 자영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진입을 줄여야 하고, 특히 자금 지원 등 자영업 지원 정책은 신중하게 추진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솔직히 '당장 중단하라'고 외치고 싶다. 자영업자에 대한 정부 차원의 경영 컨설팅 같은 것은 정말 '혈세' 낭비다.)

그 대안으로 등장하는 게, '전가의 보도'고 '약방의 감초'격인 사회서비스 부문이다. 사회서비스 확충은 복지 지출 확충과 연결된다는 것 하나만 지적하자. 그리고 저자가 같이 주장하는 사업서비스 부문의 확충은 한국 사회의 신뢰도 향상 및 '연줄' 위주의 사업 관계 배격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장 IT 서비스와 공고 등 대표적인 사업서비스 부문에서 대기업의 인하우스 회사들이 시장을 꽉 잡고 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사회적 기업은 여기도 등장하는데, 역시 저신뢰 사회에서는 차라리 정부가 직접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저자가 마지막으로 제안하는 지역주민과 밀착된 네트워크 구축은 과연 수도권 인구가 2천만이 넘는 한국에서 주도적인 형태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근본적으로, 우리나라에 있어서 동네(지역사회)의 단결성과 자율성이 일본보다 훨씬 약하다는 이영훈 교수의 연구가 여기에도 적용된다.

제6장, '한국 식료 부가가치 사슬의 특징'은 한국의 농업 및 농산물 시장에 대한 연구이다. 일단 교역조건의 악화로 인해 생산성 향상에도 불구하고 농업 취업자당 명목 부가가치 비율은 다른 나라에 비해 낮다는 결과를 제시한다. 투입-산출의 부가가치 사슬 측면을 볼 때 한국의 농업은 중간투입 중 석유제품과 화학제품의 비중이 높고 (한국의 자연 조건이 농업에 맞지 않음을 나타내는 수치라 볼 수 있다. 석유제품은 하우스 난방 연료, 화학제품은 비료와 농약으로 추정된다.) 판로면에서는 가계 최종소비에 비해 식품가공업이나 외식업에 대한 중간투입의 비중이 높음을 지적한다. 전세계적으로 대형유통업체의 시장지배력이 강화되면서 농산물의 유통마진이 급격히 상승하는 것도 언급한다. 한국의 농산물 유통에 있어서 농업협동조합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 보이기는 하나 시장 교섭력을 가지고 거래를 주도하는 기능은 아직 제한적이라고 평가한다.

솔직히 정부의 농업 지원 정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 이 글에 제시된 농업 대책들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농업소득 제고를 위해서 농산물시장에서 생산자들의 교섭력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은 기본적으로 경쟁을 제한하고 담합을 하라는, 그리고 농산물 수입은 계속 최소화해야 한다는 얘기로 들린다. 적어도 가계 입장에서는 (농산물 가격을 올린다는 것이니) 탐탁치 않은 주장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농업의 석유 및 화학 제품 의존도 완화를 위해 농업 에너지원의 가격체계를 정상화(즉 농업용 전기 및 석유 가격의 인상)하자는 주장은 나는 개인적으로 찬성하지만 분명 농민들의 강한 반대에 부딛칠 것이 뻔해 보인다.

제7장, '한국 고령노동시장 성격에 대한 비교사적 접근'은 최근 한국 노동시장의 가장 큰 특징으로 등장한 활발한 고령노동시장의 특징을 정리한 글이다. 한국의 노인(65세 이상) 고용률이 OECD 평균의 두 배가 넘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노인 빈곤율이 OECD 최고인 것은 물론 연금 제도의 미비가 주 원인이지만 고령노동이 청장년노동에 비해 근속년수가 짧고 임시직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령자 고용 증가와 일자리 질 저하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1970-80년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장기적인 추세이다. 기술 발전에 따라 고령자 노동에 대한 수요는 줄어드는 것이 일반적인 반면, 연금 미비, 조기 퇴직, 청년실업 악화로 인한 자녀 지원 등에 의해 고령자 노동의 공급은 계속 늘고 있다. 수요는 주는데 공급은 늘고 있으니 당연히 가격은 내려가고 고용 형태도 불안해진다. 특히 가슴아픈 통계 분석 결과는 '취업하지 못한 성인 자녀를 둔 (고령) 기혼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다른 기혼 여성에 비해 유의미하게 높았다'는 것이었다. 취준생의 엄마가 마트나 식당에서 알바를 한다는, 뭐 그런 얘기다. 한편, 국민연금 제도가 도입된 지 25년이 지난 2013년 한국 고령인구의 연금수급 비율을 미국의 사회보장법 시행 후 25년이 지난 1960년과 비교한 분석은 양국간의 제도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분석으로 보였다. (찾아보니 최초의 미국 사회보장연금 수급자인 Ida May Fuller는 1874년생으로 사회보장법이 시행된 후 딱 3년만 보험료를 낸 후 만 66세인 1940년부터 1975년 100세로 사망할 때까지 계속 연금을 받았다고 한다. 25달러 보험료 내고 2만 3천 달러의 연금을 받았다.)

제8장, '한국의 소득분배'는 잘 알려진 김낙년 교수의 글이다. 기존 통계청 가계 조사의 상위 계층 소득 파악이 어렵기 때문에 소득세 통계를 사용해서 소득분배를 분석한 것은 기본적으로 그 유명한 피케티의 방법론이다. 소득세 통계로 볼 때 한국의 시장소득 및 가처분소득 기준 지니 계수는 모두 지난 20년간 큰 폭으로 상승했으며, 국제 비교를 해 보면 시장소득 기준으로는 OECD 국가 중 노르웨이에 이어 불평등도가 두 번째로 낮은 나라이지만 가처분소득 기준으로는 세계 5번째로 불평등도가 높은 나라가 된다. 소득집중도 (상위 0.1%와 1%의 소득 비중)를 보면 외환위기 이후 급등하는 모습이 관찰되며, 소득 그룹별 근로소득 추이를 보면 실질소득 기준으로 상위 10% 그룹은 높은 상승률을 지속하는 반면 나머지 90% 그룹은 1995년 이후 평균임금이 정체되는 모습이다.

김 교수는 1990년대 중반 소득 분배에 큰 변화가 나타난 이유로 다음 몇 가지를 든다. 첫째는 경제 성장 둔화 및 그로 인한 취업 증가율 둔화이다. 산업 구조가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고도화되었고, 이는 결국 전체 고용 감소 및 '숙련편향적 기술변화'를 가져와 근로자 간의 소득 격차가 커졌다는 것이다. 앞의 제4장에서 본 80년대 말-90년대 초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의 고용 이전과 약간의 시차가 잇다. 둘째, 외환위기 이후 개인소득 성장률 증가가 전체 국민소득 증가보다 낮아진 현상을 지적하며, 이는 결국 국민소득 중 기업이 차지한 비중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다. 세째, 외환위기 이후 성과주의 보수체계의 확산이 상위 0.1% 소득 비중 상승의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 김 교수는 특히 대기업집단 내부에서 계열사 간의 경쟁을 통한 CEO 시장이 형성된 점을 주목한다. 네째, 1990년대 후반에 일어난 변화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 초반부터 계속된 소득세 최고 세율의 인하는 과세의 누진성을 후퇴시키고 소득 집중도를 높였다. 잘 알려진 내용들이라 특별히 덧붙일 얘기는 없다.

제9장, '한국 사회갈등의 진단과 통합 촉진 자원으로서의 신뢰'는 대니 로드릭이라는 학자의 모형을 기초로 국제 비교를 통해 한국의 사회갈등을 분석한 글이다. 한 국가의 사회갈등 수준은 구조적 균열 요인과 갈등관리 역량을 통해 나타낼 수 있다. 한국의 구조적 균열 요인은 OECD 30개국 중 12위로 나타났고, 다섯개 세부 요소 중 민족/종교와 세대갈등은 OECD 평균보다 낮았으며, 노사, 계층, 지역 갈등은 평균보다 높았다. 문제는 갈등관리 역량 측면에 있어서 한국이 OECD 국가 중 끝에서 4위라는 것이다. (한국 아래에는 usual suspects들인 그리스, 멕시코, 터키가 있다.) 세부 역량인 정치적 조정, 시장제도의 합리성, 사회 통합, 문화적 관용, 법 제도 기반 등 모든 측면에서 다 평균을 하회한다. 결국 구조적 균열 요인과 갈등관리 역량을 모두 고려한 총체적 사회갈등 수준은 OECD 30개국 중 (갈등이 심한 국가부터 따져서) 6위로 나왔다.

저자는 갈등관리 역량 강화의 전략으로 단기적으로는 고균열-고갈등관리 국가인 영미형 갈등관리 강화 모델을 참고하고, 중기적으로는 중균열-고갈등관리 국가인 독일의 이해관계자 모델을 추구하고, 장기적으로 저균열-고갈등관리의 북유럽형 신뢰 증진 모델을 추구하는 것을 제시한다. 조정시장경제보다는 자유시장경제 쪽이 가능성이 높다던 이영훈 교수의 주장이 다시 생각나는 대목이다. 여기서 저자는 꽤 도식적인 전략을 제시한다. 가치갈등-이해관계갈등의 분류 중 상대적으로 관리가 쉬운 이해관계 갈등의 관리 쪽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찬성-반대, 다수-소수의 두 가지 차원을 써사 다음과 같은 2 X 2 전략 매트릭스를 짜 놓았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가정은 정부가 찬성 쪽이라는 것이다.) 1) 소수의 찬성과 반대가 부딛친 경우에는 협상 우선 전략을 쓴다. 2) 찬성이 다수이고 반대가 소수인 경우에는 소수 반대에 대한 보상과 설득 중심의 전략을 쓴다. 3) 찬성이 소수이고 반대가 다수인 경우에는 해당 정채에 대한 신뢰를 구축한다. 4) 찬성, 반대 모두 다수인 경우에는 국론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 활성화 전략을 쓴다. (현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 개혁의 경우 찬성 반대 모두 다수인 '커뮤니케이션 활성화 전략'에 해당되어 노사정 합의와 미디어 정책 토론 등 '매뉴얼'대로 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것 같다. 노사정이 모두 잘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일단 판단을 유보한다.)

중장기적으로 우리 사회의 균열을 완화한다는 것은 결국 신뢰를 확충한다는 얘기다. 다시 신뢰가 등장한다. 그리고, 최근 조사한 한국의 신뢰 지수는 OECD 중 25위이다. 역시 한국은 저신뢰 사회이다. (OECD 국가 중 그렇다는 얘기로 '물타기'를 해 보지만...) 제도의 개선 못지 않게 비제도적 노력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 '비지배적 상호성'을 통한 민주주의의 질적 심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공자님 말씀'들이 나온다. 선진국이 신뢰를 바탕으로 사회 갈등을 극복한 사례로 맨 먼저 '의견조정 합의문화를 바탕으로 미래협약을 체결한 독일 폭스바겐의 노사협상'이 나오는 것이 눈에 띈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의견조정과 합의문화가 아니라 뇌물과 성상납을 바탕으로 한 협약이었음을.

제10장, '한국의 시장경제: 제도의 부정합성과 가치관의 혼란'은 제도경제학의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이 제도와 문화, 가치관의 부정합성이 높은 국가라는 것을 지적한다. 잘 알려진 대로 한국은 물적자본과 인적자본의 양 측면에서 자본이 풍부한 나라이고, 정책 관련 변수에 있어서는 연구투자에는 강점이 있지만 노동시장 규제와 창업 정책은 부족하다. 특히 제도 측면에 있어서는 전반적인 후진성이 나타난다. 결국 한국 경제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구속력 있는 제약조건은 자본이 아니라 제도적 요인이다. 제도를 다시 경제제도와 비경제제도로 분류하면 한국은 경제제도는 평균적으로 양호하지만 (노동자유도가 낮다는 것은 너무나 잘 홍보되어 있다) 비경제제도의 질이 상대적으로 미흡하다. 특히, '정부의 여론 수렴 정도와 책임성' 및 '정치 안정성과 폭력의 부재'라는 정치 관련 두 개의 항목에서 지난 15년 동안 진전이 없었다는 점을 특기할 만하다. 결국 정치가 문제이다.

경제체제와 제도의 정합성 측면을 볼 때 한국은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미국/영국형-일본형-유럽대륙형-북구형의 제도 분류는 이영훈 교수가 언급했던 VoC 이론과 흡사하다. 한국의 경우 단기고용과 장기고용의 혼재, 직접금융과 간접금융의 혼재,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비대칭적 연결망(하청), 집단주의 성향이 강하면서도 낮은 복지 수준 등 선진국의 제도 분류에 잘 맞추어지지 않는다. 저자는 '일관성이 결여된 한국형 경제체제는 그만큼 경쟁력 보유 산업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약간은 견강부회식 해석을 내린다. 하지만 현재의 체제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에는 동의하는 듯하다.

홉스테드라는 사람이 개발한 가치관의 국제 비교(세계가치관조사, World Value Survey) 결과를 보아도 한국인은 조사 대상 OECD 국가 중 경쟁지향성과 위험회피성이 모두 1등인 얼핏 모순된 성향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사실 한국인에게는 이 두 가지 성향이 절대 모순이 아니다. 한국인은 '평생 위험 회피권'을 쟁취하기 위해 경쟁한다. 공무원시험, 교사 임용고사, 대입에서의 의대 선호 등이 그 좋은 예이다. 또한, '직장 선택시 최우선 고려사항'이라는 설문에 대해 한국인은 압도적 다수가 높은 소득(23.6%)과 안정성(57.4%)을 선택하여 여러 가치 중 부를 가장 선호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었다. (참고로 스위스 사람들은 보람이 51.2%였다.) 세계가치관조사 결과를 종합 분석해 보니 한국인의 물질주의 정도는 OECD 국가 중 압도적으로 1등이었다. 이러한 물질주의적 가치관은 물론 한국의 과거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겠지만, 이제는 바꾸어야 할 때인 듯하다. (참고로 이러한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한국의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의 진입을 방해하고 있다는 저자의 분석은 한국이 '중진국 함정'에서 벗어난 지 오래이므로 잘못된 것이다. 이제 저성장 시대가 도래한 것 같으니 물질주의적 가치관의 배격은 성장 그 자체를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세계 가치관 조사에 나타난 한국의 신뢰도를 보면 사실 좀 복잡하다. 가족에 대한 신뢰는 OECD 평균보다 높지만 나머지 이웃, 지인,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한 신뢰도는 평균보다 낮다.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를 보면 행정부에 대한 신뢰는 OECD 평균보다 높지만 사법부와 국회에 대한 신뢰는 낮다. 결국 한국인은 가족과 '나선사회의 최고봉'인 중앙집권적 정부에 대해서만 신뢰를 보일 뿐 상거래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사업 파트너 및 고객에 대한 신뢰와 민주정에 있어서 중요한 사법부 및 입법부에 대한 신뢰가 낮은 것이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가족 및 '통치하는 정부'에 대한 원초적 신뢰는 잘 갖추어져 있지만 (얼마 전에 읽은 '옆집 형이 들려주는 흥미로운 글로벌 금융 탐방기'에서 보았듯이 정부에 대한 신뢰가 잘 갖추어지지 않은 나라들도 많다) 사회를 발전시키지 위한, 타인 및 '견제하는 정부'에 대한 신뢰는 낮다고나 할까. 어쨌든 최악이 아니니 다행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앞으로 이루어야 할 과제가 분명 산적해 있다.

이러한 제도와 가치관의 부정합성이 한국의 고부패와 저신뢰를 낳았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솔직히 인과관계의 방향을 반대로 잡아도 (고부패와 저신뢰가 제도와 가치관의 부정합성을 가져왔다) 큰 문제는 없을 듯하다. 결국 제도와 가치관을 바로잡고 부패를 없애며 신뢰를 높이는 노력을 동시에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일단은 한국이 저신뢰 고갈등 사회라는 '고해'로부터 시작해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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