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1/01/21 09:22:54
Name   사이시옷
Subject   34살, 그 하루를 기억하며
몸이 크게 안좋은 날이 아니면 대부분 일찍 일어났습니다. 새벽의 공기를 마시면 에너지가 들어오는 기분이었거든요. 베란다 창문을 살짝 연 틈으로 새벽 공기를 느끼고 직장에 가는 아내의 밥을 챙겨줍니다. 비록 어제 저녁에 먹었던 된장찌개라도, 몸에는 안좋지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스팸이라도 구워서 식탁에 올렸지요. 맛있게 먹어주는 아내의 얼굴을 잠깐 보고 배웅하면 이제 우두커니 혼자입니다.


설거지를 하고 티비를 켜면 아침 마당이 한창. 평생 눈에 들어오지 않는 방송이었는데 청소기를 들고 이 방, 저 방을 다녀도 내용이 귀에 쏙쏙 잘 들어옵니다. 청소기 작업이 끝나면 지난 번 생일 선물로 받은 물걸레 청소기로 원목 바닥을 천천히 밀고 나가면 청소가 끝납니다. 반짝반짝 새로 태어난 듯한 원목 바닥을 보면 마음도 깨끗해집니다. 하지만 청소가 끝나면 약정 끝난 핸드폰 마냥 체력이 다 떨어져 소파에 누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통증이 없는 날이라 감사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몇 시간 누워있어야 하는 것은 꽤나 답답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눈을 붙이고 얼마나 지났을까. 반쯤 열어놓은 창 밖으로 살아있는 것들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파란 트럭에서 들려오는 채소 아저씨의 목소리. 편의점 앞에서 들리는 직장인 아저씨들의 희미한 대화 소리. 11층인데도 솔솔 바람을 타고 소리가 귀로 기어들어옵니다. 그렇게 점심 때가 된 것이지요.


겨우 몸을 일으켜 먹을 것을 찾습니다. 보통은 남은 반찬에 남은 밥을 꾸역꾸역 먹곤 하는데 그렇게 하기엔 참을 수 없이 우울한 날이 찾아왔습니다. 조금 우울하면 편의점에서 4000원 짜리 도시락을 사서 올라오는데 오늘은 편의점 도시락 따위로 해결될 날은 아닙니다. 그러면 슬리퍼를 끌며 밖으로 나옵니다. 그리곤 집 근처 3000원짜리 짜장면을 파는 식당으로 가서 짜장 곱배기를 뱃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몇 분만에 후루룩 점심을 보내버리고 와이프가 준 만 원짜리로 계산을 한 다음 설렁 설렁 걷기 운동을 시작합니다.


집 근처엔 큰 공원이 있어 걷기 참 좋았습니다. 평일 낮 공원에 수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전에는 몰랐지요. 처음엔 생경한 풍경에 놀랐다가 곧 자연스럽게 그 풍경의 일부로 녹아 들어갔습니다. 하릴 없이 걷다보면 계절이 보입니다. 겨우내 메말랐던 벚꽃 나무에는 봉우리가 조금씩 솟아 오르고 있습니다. 공원 옆 모교 옆을 지나며 안아프고, 건강하고, 쓸데없이 즐거웠던, 친구들과 복작복작했던 10대를 추억하기도 합니다. 지금 이 거리엔 저를 빼곤 아무도 남아 있지 않지만요.


걷다보면 약 기운 때문인지 어지럽습니다. 통증을 잡아주는 약이라는데 약을 먹으면 하루종일 영혼이 반쯤 나와있는 기분입니다. 눈의 총명함과 정신의 맑음을 80% 이상 빼앗긴 느낌이지요. 고통을 없애는 댓가가 일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활력이라니 많이 서글펐습니다. 게다가 몸이 정말 안 좋을 때 먹는 약은 글씨를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디버프를 주어 좋아하는 책조차 읽을 수가 없었죠.


집에 돌아오면 방전된 몸을 다시 눕힙니다. 그리곤 4시 반 정도에 일어나 소파에 누워 와타나베의 건물 탐방을 봅니다. 의자를 유난히 좋아하는 반할아버지가 일본의 예쁜 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입니다. 한 때는 이 프로그램을 보는게 생활의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기분 좋게 방송을 보고 요리 채널로 돌리면 오늘 뭐 먹을까가 나옵니다. 차돌 된장찌개. 재료를 잘 숙지해서 마트로 달려갑니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집 앞 지하철 역 안으로 쏙 들어갑니다.


개찰구 쪽에서 오랜만에 칼퇴한 와이프가 나옵니다. 한 손엔 장바구니, 한 손엔 와이프의 손을 잡고 재잘재잘 둘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둘의 등 뒤로 해가 뉘엇뉘엇 넘어갑니다.


10년간의 30대 중에 8년을 병과 싸우며 지냈습니다. 그래서 30대의 대표적인 하루를 꼽아보면 신혼집에서 백수로 지내던 때가 생각납니다. 지독한 통증 속에서 언제 다시 어른으로서 1인분을 할 수 있을지가 가장 심각한 고민이었던 그 때. 지금 돌아보면 꽤나 평화롭게 느껴지는건 제 인생이 결국 -1인분에서 1인분에 가까워진 까닭이겠지요.


하지만 그 때는 하루 앞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루 앞도. 단 하루 앞도.



27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392 일상/생각오빠 변했네? 14 그럼에도불구하고 18/04/16 5137 28
    9004 의료/건강AI와 영상의학의 미래는? 32 Zel 19/03/27 7041 28
    14715 사회한국 언론은 어쩌다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나?(2) 18 삼유인생 24/05/29 1989 27
    14674 일상/생각삽자루를 추모하며 3 danielbard 24/05/13 1168 27
    14554 일상/생각아들이 안경을 부러뜨렸다. 8 whenyouinRome... 24/03/23 1539 27
    13653 일상/생각20개월 아기 어린이집 적응기 16 swear 23/03/21 2304 27
    13577 기타헤어짐을 준비하는 중입니다. 18 1cm 23/02/17 3335 27
    13369 기타16강 기념 이벤트 결과발표 36 tannenbaum 22/12/04 2003 27
    12393 꿀팁/강좌인체공학적 사무 환경 조성하기 42 구글 고랭이 21/12/31 5725 27
    12348 일상/생각도어락을 고친 것은 화성학과 치과보철학이었다 2 Merrlen 21/12/15 3725 27
    12310 일상/생각둘째를 낳았습니다. 14 고양이카페 21/11/29 3499 27
    12097 일상/생각합리적인 약자 7 거소 21/09/19 4340 27
    12055 일상/생각그동안 홍차넷에서 그린것들 73 흑마법사 21/09/08 3788 27
    12232 창작개통령 1화 44 흑마법사 21/11/02 4659 27
    11365 게임랑그릿사와 20세기 SRPG적 인생 12 심해냉장고 21/01/23 3934 27
    11356 일상/생각34살, 그 하루를 기억하며 7 사이시옷 21/01/21 3667 27
    11275 정치정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픈 이기심 99 켈로그김 20/12/25 6504 27
    11113 일상/생각팬레터 썼다가 자택으로 초대받은 이야기 20 아침커피 20/11/06 3843 27
    12613 일상/생각일상의 사소한 즐거움 : 어느 향료 연구원의 이야기 (1편) 5 化神 22/03/11 3696 27
    11004 문화/예술여백이 없는 나라 10 아침커피 20/09/29 4675 27
    10773 요리/음식토마토 파스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35 나루 20/07/13 7223 27
    10384 요리/음식소고기 타다끼를 만들어 봅시당~~ 13 whenyouinRome... 20/03/15 10860 27
    8015 기타러시아와 미국의 전술 교리에 대해 알아봅시다 16 기쁨평안 18/08/08 5476 27
    7362 영화인어공주, 외국어, 인싸 24 기아트윈스 18/04/10 5112 27
    8075 일상/생각나는 술이 싫다 5 nickyo 18/08/18 4349 27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