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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1/02/03 20:31:15수정됨 |
Name | ar15Lover |
Subject | (번역)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지에게 보내는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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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진보이죠.
인류는 오늘날과 달리 과거에는 더욱 위험한 모험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인류는 새로운 위험이 드러나더라도 논리적 인지의 폭이 넓어지는 것을 우선합니다. 길들여진 개들과는 다르죠.
그는 인간의 종 특성을 초기화하고 싶기에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성에서 가장 떨어진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렇지만 인류 절대 다수가 보기에 이상적인 인간성에서 가장 떨어진 사람이란 테러리스트이죠.
온실 속 화초로 자라서 인간성 회복을 위해 기술문명을 파괴하는 사람의 목소리 보다는, 콜레라를 비롯한 오염이 만연한 흙탕물... 더 보기
인류는 오늘날과 달리 과거에는 더욱 위험한 모험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인류는 새로운 위험이 드러나더라도 논리적 인지의 폭이 넓어지는 것을 우선합니다. 길들여진 개들과는 다르죠.
그는 인간의 종 특성을 초기화하고 싶기에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성에서 가장 떨어진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렇지만 인류 절대 다수가 보기에 이상적인 인간성에서 가장 떨어진 사람이란 테러리스트이죠.
온실 속 화초로 자라서 인간성 회복을 위해 기술문명을 파괴하는 사람의 목소리 보다는, 콜레라를 비롯한 오염이 만연한 흙탕물... 더 보기
인류의 진보이죠.
인류는 오늘날과 달리 과거에는 더욱 위험한 모험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인류는 새로운 위험이 드러나더라도 논리적 인지의 폭이 넓어지는 것을 우선합니다. 길들여진 개들과는 다르죠.
그는 인간의 종 특성을 초기화하고 싶기에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성에서 가장 떨어진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렇지만 인류 절대 다수가 보기에 이상적인 인간성에서 가장 떨어진 사람이란 테러리스트이죠.
온실 속 화초로 자라서 인간성 회복을 위해 기술문명을 파괴하는 사람의 목소리 보다는, 콜레라를 비롯한 오염이 만연한 흙탕물을 마시며 오염된 물에 가족을 잃어가며 자란 아프리카인으로서 정수 시설을 새로 개발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치있죠.
인류는 오늘날과 달리 과거에는 더욱 위험한 모험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인류는 새로운 위험이 드러나더라도 논리적 인지의 폭이 넓어지는 것을 우선합니다. 길들여진 개들과는 다르죠.
그는 인간의 종 특성을 초기화하고 싶기에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성에서 가장 떨어진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렇지만 인류 절대 다수가 보기에 이상적인 인간성에서 가장 떨어진 사람이란 테러리스트이죠.
온실 속 화초로 자라서 인간성 회복을 위해 기술문명을 파괴하는 사람의 목소리 보다는, 콜레라를 비롯한 오염이 만연한 흙탕물을 마시며 오염된 물에 가족을 잃어가며 자란 아프리카인으로서 정수 시설을 새로 개발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치있죠.
무엇을 위한 진보인가요? 현대인이 전근대인 혹은 원시 수렵채집인들보다 더 우월하다는 근거가 있나요? 저는 현대인과 원시 수렵채집인 중 어느쪽이 더 우월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는 기술 덕분에 현대인의 삶의 질이 좋아졌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외출과 마스크 착용을 비롯한 갖가지 행동을 통제당하는 현대인들의 삶의 질이, 원시 수렵채집인들의 삶의 질보다 좋은가요? 자연과 유리된채 미세먼지, 매연, 소음, 높은 인구밀도 속에서 살아가는 서울 시민의 삶의 질이 원시 수렵채집인들의 삶의 질보다 좋은가요?... 더 보기
누군가는 기술 덕분에 현대인의 삶의 질이 좋아졌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외출과 마스크 착용을 비롯한 갖가지 행동을 통제당하는 현대인들의 삶의 질이, 원시 수렵채집인들의 삶의 질보다 좋은가요? 자연과 유리된채 미세먼지, 매연, 소음, 높은 인구밀도 속에서 살아가는 서울 시민의 삶의 질이 원시 수렵채집인들의 삶의 질보다 좋은가요?... 더 보기
무엇을 위한 진보인가요? 현대인이 전근대인 혹은 원시 수렵채집인들보다 더 우월하다는 근거가 있나요? 저는 현대인과 원시 수렵채집인 중 어느쪽이 더 우월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는 기술 덕분에 현대인의 삶의 질이 좋아졌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외출과 마스크 착용을 비롯한 갖가지 행동을 통제당하는 현대인들의 삶의 질이, 원시 수렵채집인들의 삶의 질보다 좋은가요? 자연과 유리된채 미세먼지, 매연, 소음, 높은 인구밀도 속에서 살아가는 서울 시민의 삶의 질이 원시 수렵채집인들의 삶의 질보다 좋은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염이 만연한 흙탕물을 마시는 아프리카인들과 그들을 위해 정수시설을 개발하는 서구인? 서구 산업사회가 아프리카에 침투하기 이전, 아프리카인들은 지난 200만년간 외부의 도움 없이 잘만 살아왔습니다. 애초에 서구 산업문명이 그들의 터전을 망가뜨리지만 않았어도, 제 생각엔 그들은 지금도 잘 살았을거에요.
누군가는 기술 덕분에 현대인의 삶의 질이 좋아졌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외출과 마스크 착용을 비롯한 갖가지 행동을 통제당하는 현대인들의 삶의 질이, 원시 수렵채집인들의 삶의 질보다 좋은가요? 자연과 유리된채 미세먼지, 매연, 소음, 높은 인구밀도 속에서 살아가는 서울 시민의 삶의 질이 원시 수렵채집인들의 삶의 질보다 좋은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염이 만연한 흙탕물을 마시는 아프리카인들과 그들을 위해 정수시설을 개발하는 서구인? 서구 산업사회가 아프리카에 침투하기 이전, 아프리카인들은 지난 200만년간 외부의 도움 없이 잘만 살아왔습니다. 애초에 서구 산업문명이 그들의 터전을 망가뜨리지만 않았어도, 제 생각엔 그들은 지금도 잘 살았을거에요.
인류의 삶은 그 무엇보다 찬란해지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진보는 빛나는 삶의 스펙트럼입니다.
이미 무언가 더 나은 것에 대한 인지의 형성이란, 그렇지 않은 삶 보다 우월합니다.
카진스키를 비롯하여, 녹색주의라든가, 환경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모두의 모순이란, 이미 인지 가능한 사회에의 혜택은 입었으나 특정한 환경에의 결핍에 의해 영구적으로 달성 불가능한 환상에 목 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1. 아프리카인들이 잘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의 많은 역사에서 자발적인 자국민 노예 판매, 폭력, 야만적인 생활 ... 더 보기
이미 무언가 더 나은 것에 대한 인지의 형성이란, 그렇지 않은 삶 보다 우월합니다.
카진스키를 비롯하여, 녹색주의라든가, 환경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모두의 모순이란, 이미 인지 가능한 사회에의 혜택은 입었으나 특정한 환경에의 결핍에 의해 영구적으로 달성 불가능한 환상에 목 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1. 아프리카인들이 잘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의 많은 역사에서 자발적인 자국민 노예 판매, 폭력, 야만적인 생활 ... 더 보기
인류의 삶은 그 무엇보다 찬란해지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진보는 빛나는 삶의 스펙트럼입니다.
이미 무언가 더 나은 것에 대한 인지의 형성이란, 그렇지 않은 삶 보다 우월합니다.
카진스키를 비롯하여, 녹색주의라든가, 환경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모두의 모순이란, 이미 인지 가능한 사회에의 혜택은 입었으나 특정한 환경에의 결핍에 의해 영구적으로 달성 불가능한 환상에 목 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1. 아프리카인들이 잘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의 많은 역사에서 자발적인 자국민 노예 판매, 폭력, 야만적인 생활 등 문명적인 교육과 환경에 속한 현대의 아프리카인들이라면 결코 만족하지 못 할 삶의 모습일 뿐입니다. 닫힌 사회는 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남미, 아시아 등 모든 곳에서 광기가 신앙이나 문화라는 명목으로 포장되어 왔을 뿐 결코 잘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불과 150년 전의 서울이란 도심 한 복판에 인간의 똥이 뒹굴고 포장된 도로는 거의 전무하여 악취와 벌레가 들끓는 곳이었습니다. 심지어 똥을 섞어 집을 짓는 아프리카의 문화를 좋은 것이라고 볼 현대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끔 한국 지상파 방송 등에서 특별 기획하는 사극 등은 당연히 실제보다 훨씬 미화되었다는 것은 아시죠? 거의 중산층 성인 대부분이 옷 한 벌로 평생을 지내는 삶이란 어떤 삶의 질일지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네요. 카진스키도 사진을 검색해보면 상당히 여러 벌의 옷을 갖고 있던데, 굳이 문명의 상징과도 같은 것들을 몸에 걸치고 그런 말들을 뱉는지 모순되네요. 그냥 수렵 채집인처럼 벗고 다니거나 풀이나 가죽으로 만들어 입으면 될텐데요.
2. 코로나 바이러스로 통제를 당한다 한들, 전 세계인 절대 다수는 전 세계의 150여년 전의 절대 다수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아갑니다. 좀 더 시간을 늘려 1000년 전 사람과 비교하자면, 오늘날 중산층 대부분은 1000년 전에 살던 모든 왕들보다 나은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날에는 루이 14세 처럼 한심하게 발치하는 사람도 없고, 앱 터치 몇 번이면 통화도 필요없이 점심과 저녁 심지어 새벽 야식도 식사가 내 취향대로 배달됩니다. 거의 1000년 전 왕들은 마법으로도 실현 불가능할 탁월한 삶의 질의 향상을 문명의 진보에 의해 달성되었습니다.
자연이 좀 망가지면 어떻습니까? 지금은 논리적으로 자연의 망가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1000년 전 사람보다 훨씬 잘 이해합니다.
오히려 국가 및 전문기관이 나서서 체계적으로 자연을 관리하는 것은 문명의 발달과 비례하여 더 나아졌습니다. 과거의 자연이란 그저 두려움과 무지 속에서 방치된 것 뿐이지요. 수렵 채집인의 삶이란 맹수한테 잡아먹히거나 동료에게 죽임 당하지나 않으면 감사한 삶이지요.
통제됩니다. 그러나 통제가 무엇인지 인지 불가능한 상태의 혼돈과 합의에 의한 통제는 서로 판이하게 다릅니다. 1000년 전만 해도 인권, 정치, 치안, 소유권 등은 그냥 적당한 통치자의 자율 권한에 가까웠습니다. 심지어 초야권, 처첩제, 노예제 등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더 먼 과거는 그런 것을 논할 필요도 없는 혼돈 그 자체이고요.
3. 우리가 현 시대에 알고 있는 개념들은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재편 될 것입니다. 경제, 금융, 민주주의, 인권, 복지, 사유 재산권, 컴퓨터, 인터넷 등 현 시대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라도 모두 그저 그런 주제로 재편 되거나 잊혀질 수 있습니다.
나치가 만들었던 국가사회주의라든가, 다양한 귀족제, 흑인 전용 가게, 아동 노동, 벽돌 크기의 휴대 전화 등은 이제 소설과 영화에서나 보는 것들입니다. 100년도 되지 않는 가까운 과거인데 이러한 시대의 것들을 더 좋은 것들로 받아들일 현대인이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할까요? 수렵채집인의 시대라면 말할 필요도 없지요.
과거로의 회기를 추구하는 문명은 곧 최상류층을 제외한 절대 다수의 구성원이 끔찍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편화 시킵니다. 중국과 인도의 역사를 보면 잘 드러나지요.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서 서구를 비롯해 전 세계가 인정하는 국가였지만, 중국 내 중산층 이하의 삶이란 온갖 악습과 병폐를 문화라는 이름으로 덫발라오는 고통 그 자체였지요.
여성을 비롯해 약자의 입장은 과거로 갈 수록 뚜렷하게 열악해집니다. 심지어 아직도 중앙아시아 및 동유럽에서 혼인을 빙자한 납치와 폭력이 문화라는 것으로 자행되고 있지요. 여성은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되지 않거나, 동물과 같은 수준으로 취급받기도 했습니다. 고대 바빌론의 혼인 문화는 물건처럼 여성이 전시되고, 다수의 남성들이 경매로 참여하여 돈을 주고 사는 것이라고 하죠.
4. 안다만 제도의 원주민은 낯선 외부의 인간을 보면 죽이려드는 것 말고는 같은 인간이지만 더 나은 수준의 사회 활동이 불가능합니다. 그들이 외부인을 죽이려들면서 하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미세먼지, 높은 인구 밀도 등을 허용 불가하다는 마음일까요? 아니면 그냥 혼란과 무지에 의한 동물적인 야생성일까요? 안다만 원주민들에게 '삶의 질'이라는 개념 조차 없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미 무언가 더 나은 것에 대한 인지의 형성이란, 그렇지 않은 삶 보다 우월합니다.
카진스키를 비롯하여, 녹색주의라든가, 환경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모두의 모순이란, 이미 인지 가능한 사회에의 혜택은 입었으나 특정한 환경에의 결핍에 의해 영구적으로 달성 불가능한 환상에 목 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1. 아프리카인들이 잘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의 많은 역사에서 자발적인 자국민 노예 판매, 폭력, 야만적인 생활 등 문명적인 교육과 환경에 속한 현대의 아프리카인들이라면 결코 만족하지 못 할 삶의 모습일 뿐입니다. 닫힌 사회는 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남미, 아시아 등 모든 곳에서 광기가 신앙이나 문화라는 명목으로 포장되어 왔을 뿐 결코 잘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불과 150년 전의 서울이란 도심 한 복판에 인간의 똥이 뒹굴고 포장된 도로는 거의 전무하여 악취와 벌레가 들끓는 곳이었습니다. 심지어 똥을 섞어 집을 짓는 아프리카의 문화를 좋은 것이라고 볼 현대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끔 한국 지상파 방송 등에서 특별 기획하는 사극 등은 당연히 실제보다 훨씬 미화되었다는 것은 아시죠? 거의 중산층 성인 대부분이 옷 한 벌로 평생을 지내는 삶이란 어떤 삶의 질일지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네요. 카진스키도 사진을 검색해보면 상당히 여러 벌의 옷을 갖고 있던데, 굳이 문명의 상징과도 같은 것들을 몸에 걸치고 그런 말들을 뱉는지 모순되네요. 그냥 수렵 채집인처럼 벗고 다니거나 풀이나 가죽으로 만들어 입으면 될텐데요.
2. 코로나 바이러스로 통제를 당한다 한들, 전 세계인 절대 다수는 전 세계의 150여년 전의 절대 다수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아갑니다. 좀 더 시간을 늘려 1000년 전 사람과 비교하자면, 오늘날 중산층 대부분은 1000년 전에 살던 모든 왕들보다 나은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날에는 루이 14세 처럼 한심하게 발치하는 사람도 없고, 앱 터치 몇 번이면 통화도 필요없이 점심과 저녁 심지어 새벽 야식도 식사가 내 취향대로 배달됩니다. 거의 1000년 전 왕들은 마법으로도 실현 불가능할 탁월한 삶의 질의 향상을 문명의 진보에 의해 달성되었습니다.
자연이 좀 망가지면 어떻습니까? 지금은 논리적으로 자연의 망가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1000년 전 사람보다 훨씬 잘 이해합니다.
오히려 국가 및 전문기관이 나서서 체계적으로 자연을 관리하는 것은 문명의 발달과 비례하여 더 나아졌습니다. 과거의 자연이란 그저 두려움과 무지 속에서 방치된 것 뿐이지요. 수렵 채집인의 삶이란 맹수한테 잡아먹히거나 동료에게 죽임 당하지나 않으면 감사한 삶이지요.
통제됩니다. 그러나 통제가 무엇인지 인지 불가능한 상태의 혼돈과 합의에 의한 통제는 서로 판이하게 다릅니다. 1000년 전만 해도 인권, 정치, 치안, 소유권 등은 그냥 적당한 통치자의 자율 권한에 가까웠습니다. 심지어 초야권, 처첩제, 노예제 등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더 먼 과거는 그런 것을 논할 필요도 없는 혼돈 그 자체이고요.
3. 우리가 현 시대에 알고 있는 개념들은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재편 될 것입니다. 경제, 금융, 민주주의, 인권, 복지, 사유 재산권, 컴퓨터, 인터넷 등 현 시대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라도 모두 그저 그런 주제로 재편 되거나 잊혀질 수 있습니다.
나치가 만들었던 국가사회주의라든가, 다양한 귀족제, 흑인 전용 가게, 아동 노동, 벽돌 크기의 휴대 전화 등은 이제 소설과 영화에서나 보는 것들입니다. 100년도 되지 않는 가까운 과거인데 이러한 시대의 것들을 더 좋은 것들로 받아들일 현대인이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할까요? 수렵채집인의 시대라면 말할 필요도 없지요.
과거로의 회기를 추구하는 문명은 곧 최상류층을 제외한 절대 다수의 구성원이 끔찍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편화 시킵니다. 중국과 인도의 역사를 보면 잘 드러나지요.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서 서구를 비롯해 전 세계가 인정하는 국가였지만, 중국 내 중산층 이하의 삶이란 온갖 악습과 병폐를 문화라는 이름으로 덫발라오는 고통 그 자체였지요.
여성을 비롯해 약자의 입장은 과거로 갈 수록 뚜렷하게 열악해집니다. 심지어 아직도 중앙아시아 및 동유럽에서 혼인을 빙자한 납치와 폭력이 문화라는 것으로 자행되고 있지요. 여성은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되지 않거나, 동물과 같은 수준으로 취급받기도 했습니다. 고대 바빌론의 혼인 문화는 물건처럼 여성이 전시되고, 다수의 남성들이 경매로 참여하여 돈을 주고 사는 것이라고 하죠.
4. 안다만 제도의 원주민은 낯선 외부의 인간을 보면 죽이려드는 것 말고는 같은 인간이지만 더 나은 수준의 사회 활동이 불가능합니다. 그들이 외부인을 죽이려들면서 하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미세먼지, 높은 인구 밀도 등을 허용 불가하다는 마음일까요? 아니면 그냥 혼란과 무지에 의한 동물적인 야생성일까요? 안다만 원주민들에게 '삶의 질'이라는 개념 조차 없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카진스키를 비롯해서 현대 사회가 주입 하는 문제는 저는 좀 다르게 봅니다.
현대 절대 다수의 청소년과 아이들이 받는 교육은 결국 예수회 교육과 대량생산 방식이 혼합되어 찍어내는 인재 생산 과정입니다. 오늘날에는 정말 아이인 시기부터 민감한 청소년 시기 까지 그래도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교육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기는 하지만, 여전히 예수회 교육과 대량생산 방식의 혼합의 연장입니다. 크게 다르지 않죠.
머리를 크게 때려 맞는 듯한 부분이, 왕실과 같은 최고위층 혹은 귀족층이 받는 교육의 방식과 대중 다수를 위해 받는 그리고... 더 보기
현대 절대 다수의 청소년과 아이들이 받는 교육은 결국 예수회 교육과 대량생산 방식이 혼합되어 찍어내는 인재 생산 과정입니다. 오늘날에는 정말 아이인 시기부터 민감한 청소년 시기 까지 그래도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교육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기는 하지만, 여전히 예수회 교육과 대량생산 방식의 혼합의 연장입니다. 크게 다르지 않죠.
머리를 크게 때려 맞는 듯한 부분이, 왕실과 같은 최고위층 혹은 귀족층이 받는 교육의 방식과 대중 다수를 위해 받는 그리고... 더 보기
카진스키를 비롯해서 현대 사회가 주입 하는 문제는 저는 좀 다르게 봅니다.
현대 절대 다수의 청소년과 아이들이 받는 교육은 결국 예수회 교육과 대량생산 방식이 혼합되어 찍어내는 인재 생산 과정입니다. 오늘날에는 정말 아이인 시기부터 민감한 청소년 시기 까지 그래도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교육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기는 하지만, 여전히 예수회 교육과 대량생산 방식의 혼합의 연장입니다. 크게 다르지 않죠.
머리를 크게 때려 맞는 듯한 부분이, 왕실과 같은 최고위층 혹은 귀족층이 받는 교육의 방식과 대중 다수를 위해 받는 그리고 일반적으로 오늘날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의 맥락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삶의 질이나 인생 전체에 유용성을 봤을 때 제가 판단하기에는 적어도 후자 보다는 전자가 보편 교육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날 고교 및 대학을 졸업하고, 엄청난 교육을 받았다 한들 대다수는 회사에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거의 0에 가깝게 무지한 상태로 시작합니다. 회사 뿐일까요, 경제 및 금융, 높은 단계의 사회 생활 등도 0에 가깝게 무지한 상태로 사회에 투입됩니다.
이미 18세기 무렵 서구에서 가장 발전했던 영국에서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여행을 다니는 것을 대학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설혜심씨의 그랜드 투어라는 책에서 자세하게 나옵니다.
삶은 행복해야 합니다. 다양해야 하며, 당위성이 갖춰져야 합니다. 지성과 미덕을 갖춰야 합니다. 사회성을 갖추고 하나의 시민으로서 살아가야 하죠. 그러나 이러한 행복, 다양성, 당위성, 지성, 미덕, 사회성 등의 인격과 인생에 대해 사회는 놀랍도록 무책임합니다. 물론 과거에 비해서는 나아졌다고 봐야하죠.
자유는 인간이 이루는 모든 것의 궁극 중 하나입니다. 자유의지가 아니더라도(자유의지가 없다고 전제하더라도) 자유로운 환경, 경제, 문화, 지식 등은 인간의 인격과 인생을 옳게 만드는 데에 결정적입니다.
문명이란 자유를 위한 연료와도 같습니다. 국가의 가장 원초적 기능은 국민의 보호이죠. 맹수로부터, 범죄자로부터, 재해로부터 물리적으로 제도적으로 보호하는 것이죠. 문명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또한 국가가 특정한 분야로 발전하더라도 결국에는 자유와 유관한 것만 살아남습니다. 문명도 마찬가지죠.
사유재산권이 주식회사가 GDP가 생겨나고 경제의 자유화, 진보가 주목을 받아왔고 주목받고 있습니다. 사유재산권이, 금융시장이 없었으면 산업혁명은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국이 없었으면 오늘날의 세상은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 중에서도 급진적인 자유라고 여겨지는 것도 수용되는 것이 영국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인류는 모든 방면에서 자유를 진보시키도록 해야하고, 또 그렇게 해 왔습니다.
카진스키를 비롯해서 현대 사회가 겪는 문제는 무엇일까요? 물론 문제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하나로 표현하자면 무엇일까요? 자유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 한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말했듯이 "자유를 주어도 어쩔 줄을 모릅니다", 2021년은 다를까요? 오히려 더 악화되었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어떤 개념이 만연하더라도 그것을 체계적으로 익히지 않으면 알 수 없거나, 제대로 활용할 수 없습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 다지만, 아무리 천재인 사람이어도 낯선 곳에서 낯선 언어와 낯선 문화에서 완전하게 터득하여 생활하는 데에는 3년 보다 더 걸립니다.
현대인이 미성년자에서 벗어나 성인으로 사회 생활 할 때 겪는 모습은 이것입니다. 낯선 자유의 언어가 가득한 곳에 내던져 지는 것이지요. 이것을 국가사회주의나 공산주의 등으로 해결하는 척 하는 시기가 있었던 거고요.
정리하자면 사회에 자유가 있는 것(사회가 없는 데 자유가 있지는 못 합니다)이고 형성된 것이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문명 또한 그렇고요. 그런데 문제는 자유의 언어에 대해 우리 사회는 무책임하다 따라서 이에 대한 체계적인 사고 전환이 필요하다입니다.
현대 절대 다수의 청소년과 아이들이 받는 교육은 결국 예수회 교육과 대량생산 방식이 혼합되어 찍어내는 인재 생산 과정입니다. 오늘날에는 정말 아이인 시기부터 민감한 청소년 시기 까지 그래도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교육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기는 하지만, 여전히 예수회 교육과 대량생산 방식의 혼합의 연장입니다. 크게 다르지 않죠.
머리를 크게 때려 맞는 듯한 부분이, 왕실과 같은 최고위층 혹은 귀족층이 받는 교육의 방식과 대중 다수를 위해 받는 그리고 일반적으로 오늘날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의 맥락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삶의 질이나 인생 전체에 유용성을 봤을 때 제가 판단하기에는 적어도 후자 보다는 전자가 보편 교육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날 고교 및 대학을 졸업하고, 엄청난 교육을 받았다 한들 대다수는 회사에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거의 0에 가깝게 무지한 상태로 시작합니다. 회사 뿐일까요, 경제 및 금융, 높은 단계의 사회 생활 등도 0에 가깝게 무지한 상태로 사회에 투입됩니다.
이미 18세기 무렵 서구에서 가장 발전했던 영국에서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여행을 다니는 것을 대학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설혜심씨의 그랜드 투어라는 책에서 자세하게 나옵니다.
삶은 행복해야 합니다. 다양해야 하며, 당위성이 갖춰져야 합니다. 지성과 미덕을 갖춰야 합니다. 사회성을 갖추고 하나의 시민으로서 살아가야 하죠. 그러나 이러한 행복, 다양성, 당위성, 지성, 미덕, 사회성 등의 인격과 인생에 대해 사회는 놀랍도록 무책임합니다. 물론 과거에 비해서는 나아졌다고 봐야하죠.
자유는 인간이 이루는 모든 것의 궁극 중 하나입니다. 자유의지가 아니더라도(자유의지가 없다고 전제하더라도) 자유로운 환경, 경제, 문화, 지식 등은 인간의 인격과 인생을 옳게 만드는 데에 결정적입니다.
문명이란 자유를 위한 연료와도 같습니다. 국가의 가장 원초적 기능은 국민의 보호이죠. 맹수로부터, 범죄자로부터, 재해로부터 물리적으로 제도적으로 보호하는 것이죠. 문명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또한 국가가 특정한 분야로 발전하더라도 결국에는 자유와 유관한 것만 살아남습니다. 문명도 마찬가지죠.
사유재산권이 주식회사가 GDP가 생겨나고 경제의 자유화, 진보가 주목을 받아왔고 주목받고 있습니다. 사유재산권이, 금융시장이 없었으면 산업혁명은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국이 없었으면 오늘날의 세상은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 중에서도 급진적인 자유라고 여겨지는 것도 수용되는 것이 영국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인류는 모든 방면에서 자유를 진보시키도록 해야하고, 또 그렇게 해 왔습니다.
카진스키를 비롯해서 현대 사회가 겪는 문제는 무엇일까요? 물론 문제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하나로 표현하자면 무엇일까요? 자유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 한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말했듯이 "자유를 주어도 어쩔 줄을 모릅니다", 2021년은 다를까요? 오히려 더 악화되었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어떤 개념이 만연하더라도 그것을 체계적으로 익히지 않으면 알 수 없거나, 제대로 활용할 수 없습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 다지만, 아무리 천재인 사람이어도 낯선 곳에서 낯선 언어와 낯선 문화에서 완전하게 터득하여 생활하는 데에는 3년 보다 더 걸립니다.
현대인이 미성년자에서 벗어나 성인으로 사회 생활 할 때 겪는 모습은 이것입니다. 낯선 자유의 언어가 가득한 곳에 내던져 지는 것이지요. 이것을 국가사회주의나 공산주의 등으로 해결하는 척 하는 시기가 있었던 거고요.
정리하자면 사회에 자유가 있는 것(사회가 없는 데 자유가 있지는 못 합니다)이고 형성된 것이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문명 또한 그렇고요. 그런데 문제는 자유의 언어에 대해 우리 사회는 무책임하다 따라서 이에 대한 체계적인 사고 전환이 필요하다입니다.
기술의 진보 덕분에 인류의 삶이 찬란해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세련된 옷과 근사한 음식을 고성능 스마트폰으로 주문할 수 있으니 인류의 삶이 찬란해졌다고 말씀하신다면, 인간의 다양한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소 획일적인 인간관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옷도 몇개 없었고 집도 초라했다? 심지어 집을 똥을 섞어 지었다? 별로 나빠보이지 않는데요? 검소하고 자연친화적인 삶이잖아요. 전 요새 미니멀리즘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미니멀 라이프 추구하는 사람들은 옷들을 버리고 나서 오히려 더 행복해졌다고 말합니다. ... 더 보기
세련된 옷과 근사한 음식을 고성능 스마트폰으로 주문할 수 있으니 인류의 삶이 찬란해졌다고 말씀하신다면, 인간의 다양한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소 획일적인 인간관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옷도 몇개 없었고 집도 초라했다? 심지어 집을 똥을 섞어 지었다? 별로 나빠보이지 않는데요? 검소하고 자연친화적인 삶이잖아요. 전 요새 미니멀리즘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미니멀 라이프 추구하는 사람들은 옷들을 버리고 나서 오히려 더 행복해졌다고 말합니다. ... 더 보기
기술의 진보 덕분에 인류의 삶이 찬란해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세련된 옷과 근사한 음식을 고성능 스마트폰으로 주문할 수 있으니 인류의 삶이 찬란해졌다고 말씀하신다면, 인간의 다양한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소 획일적인 인간관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옷도 몇개 없었고 집도 초라했다? 심지어 집을 똥을 섞어 지었다? 별로 나빠보이지 않는데요? 검소하고 자연친화적인 삶이잖아요. 전 요새 미니멀리즘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미니멀 라이프 추구하는 사람들은 옷들을 버리고 나서 오히려 더 행복해졌다고 말합니다. 반드시 부귀영화를 추구해야만 잘 사는건 아니라는 점은 예수, 석가모니 같은 성인들이 누누히 강조했던 사실 아닌가요?
현대 기술이 크나 큰 편의를 제공해주는건 사실입니다만, 지나치게 많은 편의를 제공해주다보니 사람들로부터 운명의 주인이될 기회를 박탈해갑니다. 게다가 현대 기술이 지나치게 많은 편의를 제공한 결과, 게으르고 나약하고 소심한 사람들을 양산해냈습니다. 육체의 안락함과 말초적 쾌락을 최상의 가치로 추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삶을 유치하고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자연을 심각하게 훼손했고, 그 결과는 코로나바이러스, 기후변화와 같은 전염병과 자연재해로 돌아왔습니다. 자연파괴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돌아옵니다.
인간에게는 성취감이 필요한데, 현대 사회는 지나치게 대규모로, 고도로 조직화되어서 인간이 자율적으로 성취감을 얻는 것을 방해합니다. 인간이 성취감을 얻기 위해선 목표가 필요한데, 기술은 목표를 없애버립니다. 저는 지금 기독교 신학 논문을 하나 읽고 있는데, 이 논문에서도 유사한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전 기독교인이 아니고, 신앙심도 없고, 세속적인 사람이지만, 고난을 수용하고 극복해야 인간이 되는 것이지, 고난을 없애버리는 방법으로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신학자들의 주장은 세속적인 현대인들 역시 한번쯤 생각해보아야할 부분 아닌가 싶습니다.
카진스키를 비롯한 녹색주의자들은 문명의 이기를 누려놓고선 왜 문명을 비난하냐는건 논리학에서 말하는 Ergo Decedo, 즉 꼬우면 떠나라는 논리적 오류를 저지르는 것 같아 보입니다.
마르크스와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외쳤지만, 정작 자신은 노동하지 않고 누릴 것 다 누리는 쁘띠 부르주아의 삶을 살았습니다만, 그래서 이들을 위선자라고 봐야할까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소총으로 미군을 죽였던 베트콩들은 위선자들인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세련된 옷과 근사한 음식을 고성능 스마트폰으로 주문할 수 있으니 인류의 삶이 찬란해졌다고 말씀하신다면, 인간의 다양한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소 획일적인 인간관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옷도 몇개 없었고 집도 초라했다? 심지어 집을 똥을 섞어 지었다? 별로 나빠보이지 않는데요? 검소하고 자연친화적인 삶이잖아요. 전 요새 미니멀리즘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미니멀 라이프 추구하는 사람들은 옷들을 버리고 나서 오히려 더 행복해졌다고 말합니다. 반드시 부귀영화를 추구해야만 잘 사는건 아니라는 점은 예수, 석가모니 같은 성인들이 누누히 강조했던 사실 아닌가요?
현대 기술이 크나 큰 편의를 제공해주는건 사실입니다만, 지나치게 많은 편의를 제공해주다보니 사람들로부터 운명의 주인이될 기회를 박탈해갑니다. 게다가 현대 기술이 지나치게 많은 편의를 제공한 결과, 게으르고 나약하고 소심한 사람들을 양산해냈습니다. 육체의 안락함과 말초적 쾌락을 최상의 가치로 추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삶을 유치하고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자연을 심각하게 훼손했고, 그 결과는 코로나바이러스, 기후변화와 같은 전염병과 자연재해로 돌아왔습니다. 자연파괴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돌아옵니다.
인간에게는 성취감이 필요한데, 현대 사회는 지나치게 대규모로, 고도로 조직화되어서 인간이 자율적으로 성취감을 얻는 것을 방해합니다. 인간이 성취감을 얻기 위해선 목표가 필요한데, 기술은 목표를 없애버립니다. 저는 지금 기독교 신학 논문을 하나 읽고 있는데, 이 논문에서도 유사한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전 기독교인이 아니고, 신앙심도 없고, 세속적인 사람이지만, 고난을 수용하고 극복해야 인간이 되는 것이지, 고난을 없애버리는 방법으로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신학자들의 주장은 세속적인 현대인들 역시 한번쯤 생각해보아야할 부분 아닌가 싶습니다.
카진스키를 비롯한 녹색주의자들은 문명의 이기를 누려놓고선 왜 문명을 비난하냐는건 논리학에서 말하는 Ergo Decedo, 즉 꼬우면 떠나라는 논리적 오류를 저지르는 것 같아 보입니다.
마르크스와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외쳤지만, 정작 자신은 노동하지 않고 누릴 것 다 누리는 쁘띠 부르주아의 삶을 살았습니다만, 그래서 이들을 위선자라고 봐야할까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소총으로 미군을 죽였던 베트콩들은 위선자들인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안다만 제도의 원주민은 낯선 외부의 인간을 보면 죽이려드는 것 말고는 같은 인간이지만 더 나은 수준의 사회 활동이 불가능합니다. 그들이 외부인을 죽이려들면서 하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미세먼지, 높은 인구 밀도 등을 허용 불가하다는 마음일까요? 아니면 그냥 혼란과 무지에 의한 동물적인 야생성일까요? 안다만 원주민들에게 '삶의 질'이라는 개념 조차 없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이건 뭐 인디언들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주장하던 과거 서구 백인들이나 조선인은 야만하다고 주장한 20세기 초반 일제 압제자들이랑 다를게 없는 발상이네요. 저 주장과 정확히 같은 논리로 미개한 야만인이라 멸시당했던 한국인들의 조상은 뭐가 됩니까? 우리는 미개한 야만인들의 후손이여요? 전 여기까지만 말하고, 더 이상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이건 뭐 인디언들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주장하던 과거 서구 백인들이나 조선인은 야만하다고 주장한 20세기 초반 일제 압제자들이랑 다를게 없는 발상이네요. 저 주장과 정확히 같은 논리로 미개한 야만인이라 멸시당했던 한국인들의 조상은 뭐가 됩니까? 우리는 미개한 야만인들의 후손이여요? 전 여기까지만 말하고, 더 이상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검소와 미니멀리즘은 지속 불가능하고 다수에게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대중 다수가 모든 방면에서 종교인과 같은 절제된 생활을 따르는 것의 결론이란 인류의 소멸 뿐입니다. 이것이 종교나 검소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지속 가능성의 면에서 그렇습니다.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게으르고 나약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모든 역사에서 드러납니다. 한국에서 자주 쓰는 표현 중에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라는 표현이 그렇게 쓰이죠. 심지어 문자가 생겨나던 역사시대 초기에도 문자 사용의 보급을 보고 게으르고 나약한 것이라는 표현을 썼었죠. 현 영국 여... 더 보기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게으르고 나약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모든 역사에서 드러납니다. 한국에서 자주 쓰는 표현 중에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라는 표현이 그렇게 쓰이죠. 심지어 문자가 생겨나던 역사시대 초기에도 문자 사용의 보급을 보고 게으르고 나약한 것이라는 표현을 썼었죠. 현 영국 여... 더 보기
검소와 미니멀리즘은 지속 불가능하고 다수에게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대중 다수가 모든 방면에서 종교인과 같은 절제된 생활을 따르는 것의 결론이란 인류의 소멸 뿐입니다. 이것이 종교나 검소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지속 가능성의 면에서 그렇습니다.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게으르고 나약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모든 역사에서 드러납니다. 한국에서 자주 쓰는 표현 중에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라는 표현이 그렇게 쓰이죠. 심지어 문자가 생겨나던 역사시대 초기에도 문자 사용의 보급을 보고 게으르고 나약한 것이라는 표현을 썼었죠. 현 영국 여왕의 남편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특별한 귀족 학교가 아니라 고의로 열악한 시골 학교에 보내졌지만, 그의 삶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게으르고 나약할 수록 발전합니다. 낭만적인 사람들만이 역설적으로 가장 전쟁을 잘 하는 법이죠. 인간의 마음이 간사해서 인간의 마음까지 무시하게 되는 인간의 특성 자체를 무시하게 되는 것이란, 인간의 소멸 뿐입니다. 죽음 숭배와 같죠.
그냥 거의 모든 것을 쾌락으로 치부하면, 불교 창시 이전에 만연했던 고행자들의 삶 정도 외에는 별 선택지가 없습니다. 혹은 그리스의 어느 섬 중에서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 고립된 수도원 정도죠.
고난을 왜 수용하고 극복해야 할까요? 자이나교 신자들은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거의 모든 것을 소유하지 않고 머리털도 한 올 한 올 다 뽑습니다. 좋게 말해서 종교 생활이지만, 노숙자같은 삶을 당연하게 여기는 생활입니다.
혹은 종교성을 활용한 종교적 공동체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미시들이 하는 것이 그렇게 근사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혹은 사우디처럼 모든 여성을 꽁꽁 감싸고, 모든 여성의 그림을 검은색으로 칠하는 것도 근사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무엇이 고난인지 아닌지는 인간이 판별하는 것도 불가합니다.
카진스키와 녹색주의자들에게 떠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로, 실현 가능한 답이 없습니다. 둘째로, 카진스키와 녹색주의자야 말로 가장 문명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본의가 아니더라도)돈벌이 수단내지 자아 실현의 수단으로 삼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조금만 생각해보더라도 영구적으로 답이 나올 수 없는 문제입니다. 문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오류입니다.
마르크스와 레닌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의 첫째와 둘째가 답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돈벌이 수단내지 자아 실현의 수단으로 삼은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사기 혹은 사이비라고 하죠.
사이비 종교라도 해당 종교 단체 내에서 스스로들 끼리 하는 것은 그나마 문제가 적지만, 문제는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문제죠. 카진스키와 녹색주의자들이 하는 행위는, 유럽에서 무슬림들이 샤리아법은 좋으니 모두가 따라야 한다며 그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신의 이름으로 심판한다며 돌로 사람들을 쳐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게으르고 나약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모든 역사에서 드러납니다. 한국에서 자주 쓰는 표현 중에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라는 표현이 그렇게 쓰이죠. 심지어 문자가 생겨나던 역사시대 초기에도 문자 사용의 보급을 보고 게으르고 나약한 것이라는 표현을 썼었죠. 현 영국 여왕의 남편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특별한 귀족 학교가 아니라 고의로 열악한 시골 학교에 보내졌지만, 그의 삶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게으르고 나약할 수록 발전합니다. 낭만적인 사람들만이 역설적으로 가장 전쟁을 잘 하는 법이죠. 인간의 마음이 간사해서 인간의 마음까지 무시하게 되는 인간의 특성 자체를 무시하게 되는 것이란, 인간의 소멸 뿐입니다. 죽음 숭배와 같죠.
그냥 거의 모든 것을 쾌락으로 치부하면, 불교 창시 이전에 만연했던 고행자들의 삶 정도 외에는 별 선택지가 없습니다. 혹은 그리스의 어느 섬 중에서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 고립된 수도원 정도죠.
고난을 왜 수용하고 극복해야 할까요? 자이나교 신자들은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거의 모든 것을 소유하지 않고 머리털도 한 올 한 올 다 뽑습니다. 좋게 말해서 종교 생활이지만, 노숙자같은 삶을 당연하게 여기는 생활입니다.
혹은 종교성을 활용한 종교적 공동체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미시들이 하는 것이 그렇게 근사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혹은 사우디처럼 모든 여성을 꽁꽁 감싸고, 모든 여성의 그림을 검은색으로 칠하는 것도 근사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무엇이 고난인지 아닌지는 인간이 판별하는 것도 불가합니다.
카진스키와 녹색주의자들에게 떠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로, 실현 가능한 답이 없습니다. 둘째로, 카진스키와 녹색주의자야 말로 가장 문명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본의가 아니더라도)돈벌이 수단내지 자아 실현의 수단으로 삼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조금만 생각해보더라도 영구적으로 답이 나올 수 없는 문제입니다. 문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오류입니다.
마르크스와 레닌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의 첫째와 둘째가 답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돈벌이 수단내지 자아 실현의 수단으로 삼은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사기 혹은 사이비라고 하죠.
사이비 종교라도 해당 종교 단체 내에서 스스로들 끼리 하는 것은 그나마 문제가 적지만, 문제는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문제죠. 카진스키와 녹색주의자들이 하는 행위는, 유럽에서 무슬림들이 샤리아법은 좋으니 모두가 따라야 한다며 그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신의 이름으로 심판한다며 돌로 사람들을 쳐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같은 인간인데도 외부인을 무조건 죽이려들면 짐승이죠. 북미 인디언이나 조선인은 적어도 의사소통을 통해서 문제 해결을 하려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요점은 사회 활동이 없으면 더 높은 차원의 사고 활동도 불가하다 입니다. 모든 인류는 미개한 야만인의 후손입니다. 야만이란 보다 문명화된 시각에서 상대적으로 야만하면 야만하다고 표현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직장 동료가 점심 때 인육을 먹거나 길 한복판에 대소변을 처리하면 그것을 야만하다고 하지, 문명적이라고 할까요?
절대 다수의 인류 구성원들은 보다 문명화된 상대와 접하면, 그것을... 더 보기
요점은 사회 활동이 없으면 더 높은 차원의 사고 활동도 불가하다 입니다. 모든 인류는 미개한 야만인의 후손입니다. 야만이란 보다 문명화된 시각에서 상대적으로 야만하면 야만하다고 표현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직장 동료가 점심 때 인육을 먹거나 길 한복판에 대소변을 처리하면 그것을 야만하다고 하지, 문명적이라고 할까요?
절대 다수의 인류 구성원들은 보다 문명화된 상대와 접하면, 그것을... 더 보기
같은 인간인데도 외부인을 무조건 죽이려들면 짐승이죠. 북미 인디언이나 조선인은 적어도 의사소통을 통해서 문제 해결을 하려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요점은 사회 활동이 없으면 더 높은 차원의 사고 활동도 불가하다 입니다. 모든 인류는 미개한 야만인의 후손입니다. 야만이란 보다 문명화된 시각에서 상대적으로 야만하면 야만하다고 표현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직장 동료가 점심 때 인육을 먹거나 길 한복판에 대소변을 처리하면 그것을 야만하다고 하지, 문명적이라고 할까요?
절대 다수의 인류 구성원들은 보다 문명화된 상대와 접하면, 그것을 보고 따라서 문명화하려고 합니다. 북미 인디언들도 서구인들을 통해 문자를 만들거나 신식 무기를 통해 무장 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죠. 보다 문명화된 것을 보고도 의도적으로 보다 문명화 된 것을 기피한다면 그것은 야만입니다.
요점은 사회 활동이 없으면 더 높은 차원의 사고 활동도 불가하다 입니다. 모든 인류는 미개한 야만인의 후손입니다. 야만이란 보다 문명화된 시각에서 상대적으로 야만하면 야만하다고 표현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직장 동료가 점심 때 인육을 먹거나 길 한복판에 대소변을 처리하면 그것을 야만하다고 하지, 문명적이라고 할까요?
절대 다수의 인류 구성원들은 보다 문명화된 상대와 접하면, 그것을 보고 따라서 문명화하려고 합니다. 북미 인디언들도 서구인들을 통해 문자를 만들거나 신식 무기를 통해 무장 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죠. 보다 문명화된 것을 보고도 의도적으로 보다 문명화 된 것을 기피한다면 그것은 야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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