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1/04/27 18:34:23
Name   BriskDay
Subject   간편하게 분노하는 시대
어릴 적 글을 쓰러 나가던 백일장이 있었다. 정해진 주제에 맞추어 글을 쓰고, 누가 잘 썼나 상을 받던. 작금의 인터넷은, 가히 조롱의 백일장이라 할만하다.
매 순간마다 각양각색의 주제로 열리는 백일장에서, 재기발랄한 조롱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수상한다. 유튜브, 커뮤니티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우수작은 여러 커뮤니티를 돌며 널리 이름을 떨친다.
그 대상도 욕 먹어야 마땅한 대상들이라, 수위는 나날이 높아져만 간다. 앞 뒤가 다른, 못 된, 멍청한 사람들. "나" 와는 다른 열등한 대상에게,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에게 자비심을 베풀 이유가 없다.
어설프게 자비를 베풀었다가는 다른 참가자들의 득달 같은 공격 앞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이 거대한 백일장에 참여하지 않고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열등한 대상들을 옹호하는 것과 다를 바 없고, 다름이 아닌 틀림이 된다.
감정을 배제한 논리적 공박도 다수를 상대로는 피곤한 일인데, 악의가 섞인 비꼼으로 무장하고 "발작 버튼"을 누르려는 상대방들을 맞서는 것은 얼마나 감정 소모가 큰 일인가. 그 과정에서 자칫 "발작" 하거나, 논리적 잘못을 저지르는 순간 백일장의 주제가 되어버리는 것은 덤이다.

이 백일장의 가장 큰 문제점은, 조롱 - 즉 비하가 일정 부분 사실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꼽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인터넷에서 욕 먹는 대상들의 예시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흑인, 중국인, 남자, 여자, 진보 지지자, 보수 지지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일정 부분"이 아니라, "사실" 이다. 내가 흑인을 싫어한다고 가정해보자. BLM 을 외치고 눈을 찢는 흑인이 없을까? 증오 범죄를 저지르는 흑인은 없을까? 5분만 두드리면 수십 수백명은 뽑아낼 수 있다. 조금만 포장해서 올리면, '합리적인 증오' 글이 완성된다.
굳이 통계적 결과를 따질 필요가 없는 인터넷에서는, 저런 '증오받아 마땅한' 흑인 비하 글이 넘쳐난다. 인터넷 한 구석의 사건들을 가져다 모아놓으면, 흑인이라는 것 외에는 하나로 묶을 수 없는 집단이 열등한 내로남불 집단이 되어버린다. 남자, 여자, 중국인, 진보 지지자, 보수 지지자, 동성애자, 채식주의자라고 다를까?
BLM 을 외치며 아시안 인권도 지지하는 흑인 운동가가 있는지는 중요한게 아니다. 그런 사람이 없으면 없기 떄문에, 있으면 극소수라, 많으면 어쨌든 아시안을 비하하는 흑인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나의 비하는 정당화된다.

오늘날 혐오와 분노는, 옳다 그르다의 차원이 아니라, 어려운지 쉬운지의 차원이다. 혐오하지 않기 위해, 분노하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에 반해 분노와 혐오는 참으로 간편하고 어떨 때는 재밌기까지 하다. 내가 찰지게 비꼰 댓글이 추천을 받노라면, 상대방이 화가 나서 무너지는 모습은 어떠한가.

기사를 보아도 그렇다. 평소 기레기라는 표현으로 까이는 기자들은 어떠한가?
기자들은 명확한 근거 대신, 커뮤니티 화제 글을 퍼나르기 급급하고, 명확하지도 않은 관계자에 근거해 기사를 쏟아낸다.
그에 동조하고 싶은 "나"는 평소 기자를 욕하다가도, "얘들이 왠 일로 이런 기사를", "믿을 순 없지만 사실이라면" 이라는 양념을 버무려 내 분노의 재료로 삼는다.
그 기사가 사실일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고, 거짓이라도 별반 다를게 없다. "어쨌든 기자가 잘못한게 아니냐", "이런 기사도 믿게 한 쪽이 나쁜거 아니냐" 는 의견들이 팽배하고, 나의 분노는 다시 한번 정당화된다.

화를 내고자 인터넷을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에게는 서로를 통제할 권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화나기 위해 인터넷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한번만 다시 생각해보는 어떨까? 왜 우리는 진실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커뮤니티 글에 명확하지도 않은 기사로 집단을, 개인을 조롱하는 것일까.
상대방이 욕 먹어 마땅한 대상이라면, 정말로 상대방은 욕 먹어 마땅한 대상이 맞는지 생각해보자. 역설적으로 정말로 분노해야할 일이 너무 많기에, 간편하게 화내기에는 너무 아까운 세상이다.


=====================================================================

최근 글쓰기 연습을 하고 있는데, 중학교 이후로 제대로 글을 써본 적이 없다보니 잘 적히지가 않네요.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다 쓰고보니 횡설수설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냥 지울까 하다가.. 이렇게라도 써봐야 좀 익숙해질 것 같아서 올려봅니다.

혹시나 논쟁이 될까봐 미리 적자면, 홍차넷에서 이렇다는 얘기도 아니고, 요사이 인터넷을 보면서 생각한 내용입니다.
또한 본문에 언급된 어떠한 집단도 옹호할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25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189 역사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알기 위한 용어 정리. 1편 15 코리몬테아스 23/10/12 2727 25
    14145 육아/가정여름의 끝자락. 조금 더 자란 너 6 쉬군 23/09/14 1772 25
    13476 의료/건강엄밀한 용어의 어려움에 대한 소고 31 Mariage Frères 23/01/12 2728 25
    13402 경제이 사건의 시작은 질게의 한 댓글이었습니다. 11 아비치 22/12/17 2755 25
    12824 기타[홍터뷰] 헬리제의우울 ep.2 - 싸우지 말고 순수해 12 토비 22/05/16 3552 25
    12459 일상/생각그 식탁은 널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2 Erzenico 22/01/22 3651 25
    12102 문화/예술과연 문준용 씨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36 Cascade 21/09/20 6096 25
    11621 일상/생각간편하게 분노하는 시대 30 BriskDay 21/04/27 4687 25
    11614 일상/생각20대가 386의 글을 보고 386들에게 고함(1) 21 가람 21/04/26 4731 25
    11171 일상/생각모 바 단골이 쓰는 사장이 싫어하는 이야기 6 머랭 20/11/26 3716 25
    10855 일상/생각풀 리모트가 내 주변에 끼친 영향 16 ikuk 20/08/12 5110 25
    10518 경제300만원 사기당할뻔한 이야기. 12 사나남편 20/04/21 4826 25
    9739 일상/생각따뜻함에 대해서 19 19/09/29 4035 25
    9464 스포츠파퀴아오-서먼 : Who will be resurrected? 5 Fate 19/07/21 5924 25
    9417 경제퀀트는 어떤 일을 하고, 그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22 굴러간다 19/07/10 6389 25
    9242 게임와고 300용사 26 알료사 19/05/28 6824 25
    9053 일상/생각유폐 2 化神 19/04/10 3775 25
    8737 일상/생각노가대의 생존영어 이야기 24 CONTAXS2 19/01/06 5050 25
    8595 일상/생각엑셀에 미쳤어요 21 Crimson 18/12/03 4608 25
    8515 게임아내가 게임을 실컷 할 수 있으면 좋겠다. 14 세인트 18/11/13 4956 25
    8221 기타뇌종양에 노래가 도움될까요 4 꾸니꾸니 18/09/13 4551 25
    7771 생활체육홈트레이닝을 해보자 -2- 35 파란아게하 18/06/30 7323 25
    7644 스포츠복싱을 잘해봅시다! #1 : 스탠스 14 Danial Plainview 18/06/09 11720 25
    7618 의료/건강애착을 부탁해 16 호라타래 18/06/03 7500 25
    7596 정치권력과 프라이버시 30 기아트윈스 18/05/28 5113 25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