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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1/05/22 21:34:12
Name   joel
Subject   메이저리그의 불문율 논쟁. 거죽만 남은 규범의 불편함.
미국 야구계에는 엄격히 지켜지는 여러가지 불문율들이 있습니다. 홈런 쳤으면 배트플립 하며 타구 바라보지 말고 빨리 뛰기나 해라, 점수차가 크게 벌어졌으면 도루하지 마라 등등. 얼마 전 이 불문율 가운데 하나를 어긴 사건 때문에 메이저리그에서 큰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사건의 경위는 이렇습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미네소타 트윈스를 상대로 9회 초에 11점차를 앞서가는 상황에서 미네소타는 어차피 끝난 게임 투수를 아끼기 위해 야수를 투수로 올립니다. 사실상 게임 끝났다는 백기 선언이었죠. 그런데 투 아웃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시카고의 타자 예르민 메르세데스는 3볼 0스트라이크 상황에서 힘없이 날아오는 한복판 공을 받아쳐 홈런을 쳐버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타자가 홈런 친 것이 무슨 사건 씩이나 될 일인가 싶지만 그간 메이저리그에서는 '점수차가 크게 벌어진 상황에서 투수가 3볼 0스트라이크로 몰린 상황이면 스윙을 하지 마라' 라는 것이 불문율이었기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불문율의 위력이 어찌나 강한지, 경기가 끝난 후 시카고의 감독인 토니 라 루사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팀 선수를 비판하며 사과의 뜻을 전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홈런을 친 당사자인 예르민을 비롯한 선수단은 여기에 반발했습니다. 예르민은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플레이 할 것이라고 밝혔고 다른 선수들마저 여기에 동의의 뜻을 표하죠. 그러자 토니 라 루사는 '감독실에 있는 건 나다' 라며 다시금 비판의 뜻을 밝힙니다. 정작 피해자인 미네소타는 관례대로 다음 날 시카고에게 보복구를 던지는 것으로 일단락을 지었으나 시카고 내부의 문제로, 더 나아가서는 mlb 전체에 다시금 불문율이란 꼭 지켜야 하는 것인가? 하는 화두를 던지며 보수적인 야구인들과 젊은 세대간의 갈등으로도 번지고 있습니다.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저런 지저분한 불문율 싹 집어치우고 필요하면 규정으로 콜드패나 항복을 명문화 하라는 입장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불문율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야구는 타 종목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 끝나는 게 아니라 아웃카운트를 잡아내야 끝납니다. 축구처럼 득실차가 의미 있는 종목도 아니고요. 그러니까 이 불문율의 목적은 한 마디로 말해서 상대가 '우리 진 거 인정하니까 스겜합시다' 라는 메시지를 보내왔을 때 티배깅으로 상대를 능욕하지 말고 명예롭게 빨리 끝내주자는 거죠. 홈런 치고 배트 플립하지 말라는 것은 공과 방망이를 다루는 스포츠에서 행여나 싸움날 일 만들지 말고 상대를 존중하자는 뜻이고요.

프로라면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느냐, 10점차도 뒤집히는 수가 있는데 끝날 때 까지는 끝난 게 아닌 것이 야구의 묘미 아니냐, 이것은 물론 올바른 반박입니다만 현실적으로 정론만을 들이밀 수가 없는 이유도 있습니다. 일년에 백 수십경기를 치르는 야구에서 매 경기를 이기려고 드는 감독은 없습니다. 패했다 싶으면 최대한 전력을 온존해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것이 명장이죠. 팬들 또한 그걸 알기에 점수차 벌어진 상황에서 감독이 필승조를 올리면 정신 나갔느냐고 비판합니다. 물론 세상사가 다 그렇듯 구체적으로 과연 몇점차 까지를 기준으로 해야 하느냐로 여전히 문제가 생깁니다만.

저는 이 사건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불문율의 가부보다도 불문율을 대하는 태도와 관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를 존중하라, 말은 참 좋습니다. 그런데 이 불문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빈볼을 얻어맞고 공개 비난을 들어야 한다면, 불문율 따위가 아니라 명문화된 규정을 어기고 정당한 경쟁을 훼손하는 약물이나 병살을 피하기 위해 수비수의 발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슬라이딩은 그보다 훨씬 더 무거운 비난에 시달려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약물을 복용한 선수가 동료로부터, 감독으로부터 그만한 언사를 받는 것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본즈가 약물 복용이 밝혀진 후 빈볼과 관중들의 야유 세례를 받긴 했지만 그 밖에 약물을 복용하고도 멀쩡히 선수생활을 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코클랭은 강정호의 다리를 분질러놓고도 '피하지 않은 수비수가 잘못' '규정상 문제가 없다' 라는 어처구니 없는 옹호를 받았죠. 이거 때문에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나긴 했지만 별다른 파장 없이 넘어갔습니다. 버스터 포지가 부상당하고 규정이 만들어지기 이전까지 포수를 날려버리려는 홈 쇄도 역시 비슷한 취급을 받았고요. 그 밖에 투수들이 파인타르 바르는 부정 투구를 비롯해서 규정을 어기고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짓거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이에 대해선 보복구를 던지지 않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불법, 편법을 저지른 사람은 '형기 채우고 나왔으면 됐지' '법이 그런 걸 어떡하나' 라는 말을 듣는데 법적으로 죄가 없는 사람은 동네 사람들에게 나쁜 놈이라며 질타를 받는다?

이러한 사실들은 상대를 존중한다는 미담으로 포장된 불문율들이 사실은 철저한 이해관계의 셈법 아래서 행해진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홈런치고 배트 플립하거나 다 끝난 상대를 철저히 두들겨봐야 내가 기분 좋은 거 말고는 실질적 이득이 없으며, 반대로 내가 당하면 참으로 기분이 더럽습니다. 그래서 강대국들이 암묵적으로 전략적 핵무기 사용만큼은 자제하고 있듯이 모두가 암묵적으로 우리 같이 하지 말자고 동의하는 것이고, 약물이나 부정투구, 악의적 슬라이딩은 남이 하면 나도 하면 그만이고 그만한 이익도 가져다 주기에 안 하는 놈이 바보인 거죠. 나에게 있어서 있으나 마나한 하찮은 것을 좀 지키기만 하면 '상대를 존중한다' 라는 입지를 지킬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그 '하찮은 일' 조차 하지 않은 사람, 모두가 쌓아온 질서에 도전하는 사람에 대한 단죄가 쓸데없이 엄격해 지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일테고요.

최초의 불문율은 정말로 아름다운 마음에서 시작했을지 모르나,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어야 사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아름다운 마음 따위는 쉽게 날아가버리고 우연히 맞물린 이해관계의 공백지대에 있는 말들만이 그 거죽만 남아 분에 넘치는 구속력을 갖게 되는 셈입니다. 이런 일은 야구 뿐만 아니라 세상사가 다 비슷합니다.

과거 심재륜 고검장 파동이 일어났을 당시 아랫 기수의 후배가 자신보다 윗자리로 승진하면 해당 기수들은 모두 검사복을 벗는 불문율이 화제가 된 적이 있죠. 이를 두고 세간에선 법이 아님에도 법보다 더 잘 지켜지는 기이한 관행이라 평했습니다.

무함마드는 사람들이 술 같은 사치품에 취해 맑은 마음을 잃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술을 금지했겠으나, 오늘날 카타르 월드컵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을 착취해 경기장을 만들면서도 율법에 따라 경기장내에서 맥주 한 잔조차 할 수 없는 월드컵이 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일 테고요.

현재 메이저리그에서도 이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야구가 젊은이들의 외면을 받는 원인이 경기를 즐기지 못 하게 하는 관행에 있다는 지적이 나오며 배트플립에 대한 인식도 나아진 상태고요. 불문율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젊은 세대가 주축이 되면 미래에는 모두 사라질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어떠한 결과가 나오건 불문율을 어긴다 해서 보복구가 날아드는 일을 당연시 하는 관행은 없어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사태에 대한 제 마음을 요약해주는 싯구 두 개를 인용합니다.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껍데기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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