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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5/01/27 09:49:14 |
Name | joel |
Subject | 해리 케인의 무관에 대하여. |
2025년 1월 27일을 기준으로, 분데스리가의 바이에른 뮌헨은 2위와 승점 6점차이로 1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해리 케인은 그의 생애 처음으로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겠지요. 자타가 공인하는 월드클래스 스트라이커로서 리그, 챔피언스리그, 월드컵, 유로에서 모조리 득점왕을 거머쥐었던 해리 케인이 여태껏 무관인 것은 축구사를 통틀어도 유례를 찾기 힘든 기묘한 사례입니다. 물론 축구란 스포츠 자체가 혼자만의 힘으로는 팀을 우승시킬 수 없는 종목이긴 합니다. 그러나 축구에는 다양한 대회들이 존재하고, 거기서 우승을 노려봄직한 빅클럽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또한 그 어떤 강팀이라 해도 한 시즌에 모든 대회를 싹쓸이 하는 일은 거의 없으니, 대체로 한 시즌에 총합 6,7개의 트로피를 빅클럽들이 하나 둘씩 나눠먹게 마련이죠. 케인 정도의 월드클래스 선수라면 빅클럽들이 당연히 모셔갈 것이기에, 뛰어난 선수의 이력서에 우승 경력들이 적히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죠. 간혹 매튜 르 티시에, 디 나탈레처럼 소속팀에 대한 애정 때문에 빅클럽으로의 이적을 거부하며 약소팀의 에이스로 남아 무관에 머물렀던 선수들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해리 케인이 속했던 토트넘, 바이언과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은 결코 약소하지 않았으며, 우승 한 번쯤은 노려볼 만한 팀이었지요. 케인이 트로피를 들을 수 있었던 결승전이 여태껏 6회나 있었던 것이 그 증거입니다. 케인이 가지고 있는 위상 또한 저 선수들에 비해 비할 바 없이 높지요. 그래서 케인의 무관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낯선 기록입니다. 그렇다면 케인이 우승을 못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흔히 그 원인으로 케인이 큰 무대에서 침묵하는 새가슴이라는 것을 지적합니다. 여태껏 케인이 출전했던 6번의 결승전 내내 무득점 무도움으로 부진했거든요. 그러나 새가슴이라는 말을 '평소에 잘 하다가 큰 경기에만 가면 부진하는 선수' 라고 정의한다면 케인은 거기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케인은 가끔씩 큰 경기가 아닐 때도 부진하곤 했거든요. 아마 토트넘 경기를 보신 분들은 아실 텐데, 평소의 리그 경기에서도 토트넘이 부진한 날에는 '오늘 케인 뭐함?' 이라는 감상이 나올 때가 종종 있었죠. 지난 시즌 바이언의 경기들에서도 못 하는 날은 지워졌었고, 케인이 득점왕을 기록했던 18 월드컵에서도 약팀 파나마 상대로의 몰빵 득점과 PK에 힘입었지 아주 대단한 활약을 하진 못 했죠. 24 유로에서도 그랬고요. 적어도 케인이 결승 전前에는 날아다니다가 결승전戰에는 침묵하는 그런 선수는 아니었다는 얘기죠. 그렇다고 케인이 범상한 선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축구는 1인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는 종목입니다. 잘 할 수 있는 멍석이 깔려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활약상이 널을 뛰지요. 경기당 1골 이상씩 넣던 12 메시 같은 예외를 빼면 그 어떤 공격수도 경기 단위로 끊으면 기복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케인 또한 그러했고요. 그러니 케인의 결승전 침묵의 원인을 따지려면 새가슴을 논하기 전에 그가 뭘 잘 하는지, 잘 할 수 있는 판이 깔려 있었는지를 따져 보는 것이 옳을 겁니다. 해리 케인은 슈팅과 공중볼 다툼에 능하고 경기장을 보는 시야가 뛰어난 선수입니다. 최전방 스트라이커임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패스 능력까지 갖추었기에 중앙선까지 내려와 공의 순환에 가담하는 것을 즐기며, 기회가 나면 정확한 침투로 득점을 만드는 능력까지 갖추었지요. 이런 선수가 팀에 있으면 미드필더들이 참 편해집니다. 공을 전방까지 올리기 힘들다 싶으면 냅다 케인의 머리를 노리고 롱볼을 차도 되고, 중앙으로 내려온 케인에게 공을 넘겨줘도 되죠. 또한 다른 윙어들은 케인의 패스를 믿고 과감히 전방 침투가 가능해지기에 케인은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우산효과를 주는 선수입니다. 과거 토트넘이 에릭센의 이탈, 델리 알리의 몰락 이후 미드필더진이 무너져 내렸음에도 한동안 상위권 경쟁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고요. 그러나 이토록 많은 것을 가진 케인에게도 약점은 있습니다. 아쉽게도 케인은 발이 빠른 선수가 아닙니다. 그리고 188cm에 달하는 큰 키는 공중볼 다툼에는 이점이 될 수 있을지라도 좁은 공간에서 발재간을 부리기에는 부적합한 조건이죠. 과거의 아자르나 지금의 음바페가 보여주듯 폭발적인 속도와 드리블로 상대 수비를 찢어내는 플레이는 케인에게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축구팬들이 상상하는 ‘혼자 힘으로 팀을 구하는’ 모습은 케인과 거리가 있다는 것이죠. 이런 이유로 만약 팀 전체의 움직임이 경색되고 밀려버리면 그 때는 케인이 장점을 발휘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아무리 케인이 동료들에게 우산을 씌워줘본들 상대가 그를 압도하는 전력을 갖추거나 케인의 기여를 받아먹을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지요. 차라리 케인이 팀 동료들을 편하게 해주는 선수가 아니라 90분 내내 침묵하다가도 한 번의 돌파로 기회를 만들어내는 유형의 선수라면 그런 상황에서 뭔가를 보여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선수가 실질적인 기여도는 케인에게 미치지 못 한다 하더라도 말이죠.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건 케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제 다시 케인이 치렀던 결승전들을 복기해 봅시다. 1415 시즌의 리그컵 결승은 그 해 리그 우승팀이던 첼시가 상대였고 케인도 아직 잠재력이 다 폭발하기 이전의 스물 두살 먹은 애송이였죠. 리버풀과 붙었던 1819 챔스 결승은 사실 결승전에 간 것 자체가 기적이었던 데다가 케인은 부상을 달고 억지로 출전을 감행한 상태였고요. 뭐, 그 몸으로 억지로 출전을 요구한 것 자체를 탓할 순 있겠습니다만. 2021 리그컵 결승은 패왕 맨시티에게 밀렸습니다. 이 때는 전력부터가 크게 차이가 났는데 결승을 앞두고 토트넘이 감독을 자르는 자폭까지 했지요. 2324 시즌을 앞두고 열린 리가 포칼은 케인이 바이에른 뮌헨에 합류한 후 첫번째 경기였고 그나마 게임의 승패가 갈린 후 교체투입이었죠. 유로 24 때는 잉글랜드가 결승에 간 과정부터가 졸전의 연속이었으며, 결승에서는 한 수 위의 기량과 전술적 완성도를 갖추었던 스페인에게 무너졌습니다. 유일하게 유로 20 결승은 케인과 잉글랜드가 우위에 서서 경기를 치르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날은 케인도 전반까지 괜찮은 활약을 했습니다. 케인은 거의 수비형 미드필더만큼이나 깊숙히 후방으로 내려와 전방으로 볼을 투입하는 역할을 맡았고, 잉글랜드의 선제골도 후방 깊숙한 곳에서 전방으로 찔러준 케인의 패스에서 시작되었죠. 그러나 후반들어 잉글랜드가 후방으로 내려앉아 우세를 지키는 선택을 하자 케인의 장점은 발휘될 수 없었고 케인도 같이 사라졌습니다. 즉, 여태껏 케인은 자신을 위한 멍석이 깔린 상태에서, 갑의 입장으로 결승전에 임해본 적이 사실상 없습니다. 마치 과거 스타리그에서 사용된 맵을 보면 홍진호가 우승을 못 한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런 맵을 가지고 어떻게 결승을 갔는지가 더 신기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물론 세상에 핑계 없는 준우승은 없다고, ‘케인이 더 잘했다면 우승을 했겠지’ 라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어쨌건 케인의 부진 자체에 본인의 탓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애당초 우승이란 것은 그리 엄밀하고 정확한 잣대에 의해 판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런 이유로 누군가가 무관을 해야 한다면, 이른바 유관력 있다는 선수들도 살아남지 못 합니다. 예를 들어 22 월드컵 결승전에서 에밀리아노 마르티네스가 해낸 구국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그 날 메시가 빼앗긴 공이 프랑스의 득점으로 이어졌던 장면은 오늘날 메시의 월드컵 무관력의 예시가 되어 조롱을 당하고 있었을 것이고, 프랑스가 98 월드컵에서 조별탈락을 기록했다면 지단의 사우디전 퇴장은 나라 말아먹은 바보짓으로 손가락질을 받고 있었겠지요. 그 밖에도 코파 21 결승전에서 메시가 1대1 기회 날려먹고 경기 내내 부진했던 것이나, 23 챔결에서 홀란이 침묵했던 것 등등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이기거나 졌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의 실책은 유관력에 묻혀버리고 누군가의 실책은 팀을 말아먹은 역적짓이 되곤 합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결정된 일에 대해서까지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건 대학교 조별과제나 다름 없습니다. “교수님, 우리 조원이 잠수를 탔는데요?/응 그건 니 무학점력(力) 탓이야.” “교수님, 우리 조원 하나가 외국인인데 한국말을 못 해요./네가 좀 더 준비 잘 했으면 됐잖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유관 또는 무관이 마땅한 선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벤치에 앉아서도 가는 곳마다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옥새라 불리는가 하면 누군가는 불운과 환경, 실력의 절묘한 조화 속에 실패만을 맛보게 되지요. 케인의 무관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선수들이 다 그렇듯 케인 또한 장점과 단점을 가진 선수고, 세상일이 다 그렇듯 우승과 무관 또한 개인의 기량에 따라 정확한 인과관계에 의해 가려지는 게 아닙니다. ‘케인이 더 잘 했으면 우승 한 번은 했겠지.’ 이 말 자체는 맞아요. 그러나 저런 말로 케인의 무관이 정당화 되어야 한다면 12 류현진에게 ‘니가 더 잘 던졌으면 10승은 했겠지’ 라는 말을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만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지요. 우리는 그의 무관의 원인 가운데 얼마만큼을 그의 귀책사유로 삼아야 하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여태껏 케인이 보여준 활약들이 충분히 우승을 기대하고도 남는 것이었다는 것뿐 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해리 케인은 올 시즌 우승에 크게 다가선 상황입니다. 꼭 올 시즌이 아니라 하더라도 바이에른 뮌헨에 있는 이상 은퇴 전에 우승 한 번은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가 우승을 차지한다 해도, 그게 케인이 이전보다도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 덕분은 아닐 거에요. 오히려 전성기보다 더 낮은 기량을 보였음에도 우승할 확률이 더 높겠지요. ............................................... 3줄 요약. 이런 케인보다 더 암울한 상황에서 7전8기를 해냈던 어윤수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네요. ![]() (울지 마라 케인. 넌 이 때의 Soo장님보다는 우승할 확률이 높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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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로 비유하면 김태균이 홈런 못 친다고 욕 먹던 것과 비슷합니다. 김태균이 홈런 대신 볼넷과 2루타로 한화에 엄청난 기여를 했지만 당장 팬들의 눈에는 '김태균이 볼넷으로 걸어나가고 후속타자 병살로 이닝 종료'가 더 크게 들어올 수 밖에 없으니까요. 모든 게 수치로 증명되는 야구조차 이런 희생자가 나오는 판에 하물며 축구에서는 더더욱이나 피상적인 평가의 목소리가 커질 수 밖에 없지요.
조던 옹도 축구선수였으면 '응 불스무관따리 ㅋㅋ' 로 조롱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이게 축구의 매력이자 단점이기도 하겠지만요.
조던 옹도 축구선수였으면 '응 불스무관따리 ㅋㅋ' 로 조롱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이게 축구의 매력이자 단점이기도 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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