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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10/06 13:03:33수정됨 |
Name | kpark |
Subject | 영화 소식들 짧게: 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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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 데이먼의 저 발언은 저 혼자 해석하기로는 이런 게 아닌가 싶어요.
예를 들면, 영화배우 톰 하디가 영화제작발표회에서 LGBT 언론기자에게서 질문을 하나 받아요. 예전의 한 인터뷰에서 \'성적 지향\'에 대해 매우 개방적인 의견을 피력한 바 있으나 자신의 성적 지향이 어떤지에 대하여는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했다고 하면서 얘기를 해달라고 해요. 이 때 톰 하디가 인상 쓴 얼굴로 \'내 성적 지향을 말해달란 얘기냐\' 물어요. LGBT기자가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Why\'라고 저음으로 되묻고는 곧 \'Thank you\'라며 한큐에 기자입을 다물게 해버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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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영화배우 톰 하디가 영화제작발표회에서 LGBT 언론기자에게서 질문을 하나 받아요. 예전의 한 인터뷰에서 \'성적 지향\'에 대해 매우 개방적인 의견을 피력한 바 있으나 자신의 성적 지향이 어떤지에 대하여는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했다고 하면서 얘기를 해달라고 해요. 이 때 톰 하디가 인상 쓴 얼굴로 \'내 성적 지향을 말해달란 얘기냐\' 물어요. LGBT기자가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Why\'라고 저음으로 되묻고는 곧 \'Thank you\'라며 한큐에 기자입을 다물게 해버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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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 데이먼의 저 발언은 저 혼자 해석하기로는 이런 게 아닌가 싶어요.
예를 들면, 영화배우 톰 하디가 영화제작발표회에서 LGBT 언론기자에게서 질문을 하나 받아요. 예전의 한 인터뷰에서 \'성적 지향\'에 대해 매우 개방적인 의견을 피력한 바 있으나 자신의 성적 지향이 어떤지에 대하여는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했다고 하면서 얘기를 해달라고 해요. 이 때 톰 하디가 인상 쓴 얼굴로 \'내 성적 지향을 말해달란 얘기냐\' 물어요. LGBT기자가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Why\'라고 저음으로 되묻고는 곧 \'Thank you\'라며 한큐에 기자입을 다물게 해버리거든요.
https://www.youtube.com/watch?t=1694&v=iDxovNO8RN0 (28분 13초부터 보심 돼요)
게이기자가 톰 하디의 성적 지향이 게이이길 바라며 그에 솔직하길 원해서 한 질문이든 이성애자인 줄 뻔히 알면서 확답이 듣고 싶어 던진 질문이든 개인의 성적 지향은 글자 그대로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닌\' 일이라는 의미에서 맷 데이먼의 발언은 맞을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영화배우 톰 하디가 영화제작발표회에서 LGBT 언론기자에게서 질문을 하나 받아요. 예전의 한 인터뷰에서 \'성적 지향\'에 대해 매우 개방적인 의견을 피력한 바 있으나 자신의 성적 지향이 어떤지에 대하여는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했다고 하면서 얘기를 해달라고 해요. 이 때 톰 하디가 인상 쓴 얼굴로 \'내 성적 지향을 말해달란 얘기냐\' 물어요. LGBT기자가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Why\'라고 저음으로 되묻고는 곧 \'Thank you\'라며 한큐에 기자입을 다물게 해버리거든요.
https://www.youtube.com/watch?t=1694&v=iDxovNO8RN0 (28분 13초부터 보심 돼요)
게이기자가 톰 하디의 성적 지향이 게이이길 바라며 그에 솔직하길 원해서 한 질문이든 이성애자인 줄 뻔히 알면서 확답이 듣고 싶어 던진 질문이든 개인의 성적 지향은 글자 그대로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닌\' 일이라는 의미에서 맷 데이먼의 발언은 맞을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배역을 연기할 때 배우의 성적 정체성 이미지가 덧씌워지는 걸 막아야한다] 에 한 표 던집니다.
일례로 저는 Gone Girl에서 Neil Patrick Harris의 러브신이 나오니까 극중 인물로 보고 있던 시선에서 갑자기 \"오 닐!!!이 이성애자 연기를 하네\"로 생각이 흘러가더라구요.
분명 연기도 훌륭했고 좋아하는 배우고 커밍 아웃을 응원하지만, \"배우\"로서는 손해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성정체성 뿐만 아니라 사생활의 노출 정도가 높으면 역할보다는 그 사람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져서 다양한 역할을 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Matt Damon도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일례로 저는 Gone Girl에서 Neil Patrick Harris의 러브신이 나오니까 극중 인물로 보고 있던 시선에서 갑자기 \"오 닐!!!이 이성애자 연기를 하네\"로 생각이 흘러가더라구요.
분명 연기도 훌륭했고 좋아하는 배우고 커밍 아웃을 응원하지만, \"배우\"로서는 손해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성정체성 뿐만 아니라 사생활의 노출 정도가 높으면 역할보다는 그 사람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져서 다양한 역할을 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Matt Damon도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핸드폰이라 간단하게만 제 의견을 피력해보자면..
열차의 마지막 칸에서 맨 앞칸까지 나아간다는 선형의 구조와 평면적인 캐릭터들이 만나서 단조로움을 불러일으킵니다. 평면적 캐릭터를 장기말로 소비하면서 입체적인 서사를 만들 수도 있었지만,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선형구조는 이를 방해합니다. 또한 평면적 캐릭터는 철학적 고민거리를 대사로 선언한 뒤 뒤 소비되어 버리는데, 이과정에서 캐릭터는 사라지고 철학만이 남게 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캐릭터의 평면성 때문에 송강호의 마지막선택이 힘을 잃는 다는 점입니니다. 돌아가는것과, 열차의 ... 더 보기
열차의 마지막 칸에서 맨 앞칸까지 나아간다는 선형의 구조와 평면적인 캐릭터들이 만나서 단조로움을 불러일으킵니다. 평면적 캐릭터를 장기말로 소비하면서 입체적인 서사를 만들 수도 있었지만,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선형구조는 이를 방해합니다. 또한 평면적 캐릭터는 철학적 고민거리를 대사로 선언한 뒤 뒤 소비되어 버리는데, 이과정에서 캐릭터는 사라지고 철학만이 남게 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캐릭터의 평면성 때문에 송강호의 마지막선택이 힘을 잃는 다는 점입니니다. 돌아가는것과, 열차의 ... 더 보기
핸드폰이라 간단하게만 제 의견을 피력해보자면..
열차의 마지막 칸에서 맨 앞칸까지 나아간다는 선형의 구조와 평면적인 캐릭터들이 만나서 단조로움을 불러일으킵니다. 평면적 캐릭터를 장기말로 소비하면서 입체적인 서사를 만들 수도 있었지만,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선형구조는 이를 방해합니다. 또한 평면적 캐릭터는 철학적 고민거리를 대사로 선언한 뒤 뒤 소비되어 버리는데, 이과정에서 캐릭터는 사라지고 철학만이 남게 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캐릭터의 평면성 때문에 송강호의 마지막선택이 힘을 잃는 다는 점입니니다. 돌아가는것과, 열차의 지배자가 되는 것, 열차를 파괴하는 것 이라는 세가지 선택지 중 마지막 선택지는 단선적인 캐릭터들 속에서 제 나름의 설득력을 갖는데 실패합니다. 결국 끝나기 직전 데우스 엑스 마키나. 차라리 알면서도 하고마는 결론에 도달했다면 그 나름의 울림을 줄수도 있었겠지만, 봉준호는 그러지 않았죠. 그게 아쉽습니다.
열차의 마지막 칸에서 맨 앞칸까지 나아간다는 선형의 구조와 평면적인 캐릭터들이 만나서 단조로움을 불러일으킵니다. 평면적 캐릭터를 장기말로 소비하면서 입체적인 서사를 만들 수도 있었지만,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선형구조는 이를 방해합니다. 또한 평면적 캐릭터는 철학적 고민거리를 대사로 선언한 뒤 뒤 소비되어 버리는데, 이과정에서 캐릭터는 사라지고 철학만이 남게 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캐릭터의 평면성 때문에 송강호의 마지막선택이 힘을 잃는 다는 점입니니다. 돌아가는것과, 열차의 지배자가 되는 것, 열차를 파괴하는 것 이라는 세가지 선택지 중 마지막 선택지는 단선적인 캐릭터들 속에서 제 나름의 설득력을 갖는데 실패합니다. 결국 끝나기 직전 데우스 엑스 마키나. 차라리 알면서도 하고마는 결론에 도달했다면 그 나름의 울림을 줄수도 있었겠지만, 봉준호는 그러지 않았죠. 그게 아쉽습니다.
1. 마지막 칸에서 맨 앞칸까지 나아간다는 것은 이야기의 구조가 아닙니다. 그건 인물들에게 주어진 하나의 퀘스트죠. 어떤 이야기에든 인물들에게는 어떤 퀘스트가 내려지고 이들은 이것을 완수해야 합니다.
2. 설국열차가 선형 구조(이 말이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를 띄고 있는 건 영화의 주제와 부합한다는 점에서 단조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이 영화가 펄프픽션 같은 엇갈린 시간축이나 12몽키즈 같은 순환 구조를 띄고 있을 당위도 없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인물들의 갈등과 고뇌, 새로운 사건을 계속해... 더 보기
2. 설국열차가 선형 구조(이 말이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를 띄고 있는 건 영화의 주제와 부합한다는 점에서 단조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이 영화가 펄프픽션 같은 엇갈린 시간축이나 12몽키즈 같은 순환 구조를 띄고 있을 당위도 없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인물들의 갈등과 고뇌, 새로운 사건을 계속해... 더 보기
1. 마지막 칸에서 맨 앞칸까지 나아간다는 것은 이야기의 구조가 아닙니다. 그건 인물들에게 주어진 하나의 퀘스트죠. 어떤 이야기에든 인물들에게는 어떤 퀘스트가 내려지고 이들은 이것을 완수해야 합니다.
2. 설국열차가 선형 구조(이 말이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를 띄고 있는 건 영화의 주제와 부합한다는 점에서 단조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이 영화가 펄프픽션 같은 엇갈린 시간축이나 12몽키즈 같은 순환 구조를 띄고 있을 당위도 없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인물들의 갈등과 고뇌, 새로운 사건을 계속해서 만든다는 점에서 이야기를 보다 입체적으로 만듭니다. 첫번째 칸, 두번째 칸, 세번째 칸으로 나아가면서 인물들은 계급 사회의 점진적인 발전 단계를 거치고, 이것은 단순히 선형 구조가 아니라 서로 각기 다른 층위를 가진 여러개의 세계관을 가지게 됩니다. 앞으로 꾸준히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구조 자체가 인간 역사의 부조리를 상징하는 부분인데 이를 단순하다고 깔 수는 없죠.
3. 이 영화가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것은 대사가 아닙니다.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인물을 둘러싼 세계 그 자체죠. 인물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읊조리는 것은 인간적 고뇌가 더 많으며 놀란 감독의 영화들처럼 구구절절 선언하지 않습니다.
4. 이 영화 속의 인물들이 평면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어떤 성격을 가지고 어떤 생각을 하며 이야기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계급론적인 고민 역시도 충분히 투영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커티스는 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정작 결단의 순간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며 흐느끼죠. 그리고 애초에 이 영화는 다른 사실주의 영화처럼 인간적 양감을 불어넣을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 세계와 그 구성원들, 그리고 의지와 선택의 측면에서 상징성이 두드러지는 인물들이 다르덴 형제 영화처럼 대단한 인간적 깊이를 갖출 수도 없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죠. 애초에 이 영화는 이런 성격과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라고 이해하면 충분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900만이나 든 게 이상한 일이죠. 그렇다고 나쁜 영화나 부진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하신 부분들은 사유가 내적서사를 통해 가지지 못한 \"개연성\"의 부분이 아닙니다. 입체적이지 못하다는 이야기죠.
2. 설국열차가 선형 구조(이 말이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를 띄고 있는 건 영화의 주제와 부합한다는 점에서 단조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이 영화가 펄프픽션 같은 엇갈린 시간축이나 12몽키즈 같은 순환 구조를 띄고 있을 당위도 없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인물들의 갈등과 고뇌, 새로운 사건을 계속해서 만든다는 점에서 이야기를 보다 입체적으로 만듭니다. 첫번째 칸, 두번째 칸, 세번째 칸으로 나아가면서 인물들은 계급 사회의 점진적인 발전 단계를 거치고, 이것은 단순히 선형 구조가 아니라 서로 각기 다른 층위를 가진 여러개의 세계관을 가지게 됩니다. 앞으로 꾸준히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구조 자체가 인간 역사의 부조리를 상징하는 부분인데 이를 단순하다고 깔 수는 없죠.
3. 이 영화가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것은 대사가 아닙니다.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인물을 둘러싼 세계 그 자체죠. 인물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읊조리는 것은 인간적 고뇌가 더 많으며 놀란 감독의 영화들처럼 구구절절 선언하지 않습니다.
4. 이 영화 속의 인물들이 평면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어떤 성격을 가지고 어떤 생각을 하며 이야기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계급론적인 고민 역시도 충분히 투영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커티스는 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정작 결단의 순간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며 흐느끼죠. 그리고 애초에 이 영화는 다른 사실주의 영화처럼 인간적 양감을 불어넣을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 세계와 그 구성원들, 그리고 의지와 선택의 측면에서 상징성이 두드러지는 인물들이 다르덴 형제 영화처럼 대단한 인간적 깊이를 갖출 수도 없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죠. 애초에 이 영화는 이런 성격과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라고 이해하면 충분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900만이나 든 게 이상한 일이죠. 그렇다고 나쁜 영화나 부진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하신 부분들은 사유가 내적서사를 통해 가지지 못한 \"개연성\"의 부분이 아닙니다. 입체적이지 못하다는 이야기죠.
1. 선형구조와 평면적인 캐릭터가 만나면서 단조로워집니다. 영화의 주제를 말하기 위해 선형구조가 필요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랬기에 평면적인 캐릭터를 선택했으면 안 됩니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두 번째 칸과 세 번째 칸에서 ‘무언가 잘못 되고 있다.’ 라는 느낌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저 ‘철도가 잘못되어 있다.’라는 구조의 모순을 반복해서 확인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이들에게 이루어지는 세뇌 교육 - 그 이후 이어지는 총격전 - 과 마약에 찌들어 있... 더 보기
1. 선형구조와 평면적인 캐릭터가 만나면서 단조로워집니다. 영화의 주제를 말하기 위해 선형구조가 필요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랬기에 평면적인 캐릭터를 선택했으면 안 됩니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두 번째 칸과 세 번째 칸에서 ‘무언가 잘못 되고 있다.’ 라는 느낌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저 ‘철도가 잘못되어 있다.’라는 구조의 모순을 반복해서 확인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이들에게 이루어지는 세뇌 교육 - 그 이후 이어지는 총격전 - 과 마약에 찌들어 있는 환락 사회. 두 번째 칸과 세 번째 칸은 첫 번째 칸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의 부조리를 설명하는데 그칠 뿐 혁명의 부조리를 설명하는 데는 실패합니다. 그 결과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우린 ‘뜬금없이’ 혁명의 부조리를 확인하게 되죠. 그래서 단순합니다.
2. “당신네들은 꼬리칸! 당신들의 위치를 잘 알으라고! 당신들 자리나 지켜!” 틸다 스윈튼의 모든 대사는 주제의식에 반함으로써 주제의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커티스를 향한 윌포드의 긴 설득은 어떻습니까? 커티스가 왜 윌포드를 잡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영화는 ‘그럴싸한’ 설명을 보여주고 있나요? 커티스의 입을 통해서 잡아야한다고 말할 뿐이죠. 구구절절하게 선언합니다. 나아가 혁명이 불가능성을 깨달아버리는 혁명가와 이미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독재자라는 구도는 전혀 신선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창세기전의 살라딘과 베라모드의 관계에서도 이와 같은 구도를 볼 수 있죠.
3. 영화가 먹물들에게 즐겁게 소비 될 수 있는건 계급론적인 고민을, 지나가던 개도 알아볼 수 있게 담고 있기 때문이죠. 설명하기 참 좋은 영화입니다. 동시에 그렇기에 별로인 영화입니다. 이미 충분히 소비된 계급론적 고민에서 나아간 지점이 있나요? 열차내의 전복 대신 열차의 전복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야 할까요? 그런데, 그것마저 너무 흔한 사유입니다.
4. 캐릭터가 제대로 된 서사를 따라 입체적으로 진화함으로써 당연히 도달했어야 할 ‘무언가 잘못 되고 있다’라는 지점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결말의 개연성은 붕괴됩니다. 동시에 그 결말이 봉준호가 도달하고 싶었던 사유라는 점에서, 사유의 개연성이 깨집니다.
2. “당신네들은 꼬리칸! 당신들의 위치를 잘 알으라고! 당신들 자리나 지켜!” 틸다 스윈튼의 모든 대사는 주제의식에 반함으로써 주제의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커티스를 향한 윌포드의 긴 설득은 어떻습니까? 커티스가 왜 윌포드를 잡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영화는 ‘그럴싸한’ 설명을 보여주고 있나요? 커티스의 입을 통해서 잡아야한다고 말할 뿐이죠. 구구절절하게 선언합니다. 나아가 혁명이 불가능성을 깨달아버리는 혁명가와 이미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독재자라는 구도는 전혀 신선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창세기전의 살라딘과 베라모드의 관계에서도 이와 같은 구도를 볼 수 있죠.
3. 영화가 먹물들에게 즐겁게 소비 될 수 있는건 계급론적인 고민을, 지나가던 개도 알아볼 수 있게 담고 있기 때문이죠. 설명하기 참 좋은 영화입니다. 동시에 그렇기에 별로인 영화입니다. 이미 충분히 소비된 계급론적 고민에서 나아간 지점이 있나요? 열차내의 전복 대신 열차의 전복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야 할까요? 그런데, 그것마저 너무 흔한 사유입니다.
4. 캐릭터가 제대로 된 서사를 따라 입체적으로 진화함으로써 당연히 도달했어야 할 ‘무언가 잘못 되고 있다’라는 지점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결말의 개연성은 붕괴됩니다. 동시에 그 결말이 봉준호가 도달하고 싶었던 사유라는 점에서, 사유의 개연성이 깨집니다.
지금 저희는
설국열차가 품고있는 사유의 측면이 내적서사와 어떻게 부딪히며
그 개연성이 어떻게 붕괴되는지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설득력을 왜 갖지 못하는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1. 선형구조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 정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이 이야기가 선형구조인지 아닌지, 그리고 미학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이 영화와 선형구조가 어울리지 않는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할머니님께 설명을 요구한 것도 이 부분입니다. (더불어 제 나름의 이해가 정확한지, 그렇지 않다면 어떤 부분에서 그러한지 선형구조가 서사와 잘 어울려 미학... 더 보기
설국열차가 품고있는 사유의 측면이 내적서사와 어떻게 부딪히며
그 개연성이 어떻게 붕괴되는지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설득력을 왜 갖지 못하는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1. 선형구조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 정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이 이야기가 선형구조인지 아닌지, 그리고 미학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이 영화와 선형구조가 어울리지 않는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할머니님께 설명을 요구한 것도 이 부분입니다. (더불어 제 나름의 이해가 정확한지, 그렇지 않다면 어떤 부분에서 그러한지 선형구조가 서사와 잘 어울려 미학... 더 보기
지금 저희는
설국열차가 품고있는 사유의 측면이 내적서사와 어떻게 부딪히며
그 개연성이 어떻게 붕괴되는지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설득력을 왜 갖지 못하는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1. 선형구조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 정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이 이야기가 선형구조인지 아닌지, 그리고 미학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이 영화와 선형구조가 어울리지 않는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할머니님께 설명을 요구한 것도 이 부분입니다. (더불어 제 나름의 이해가 정확한지, 그렇지 않다면 어떤 부분에서 그러한지 선형구조가 서사와 잘 어울려 미학적 완성도가 높은 사례와, 선형구조가 아닌 이야기가 서사와 잘 어울려 미학적 완성도가 높은 사례와, 선형 구조가 서사와 잘 어울리지 못해서 실패한 영화의 사례를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할머니님께서 이야기하는 인물의 입체성 역시도 정확한 정의와 모범적 사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인물들이 평면적인 것도 아닙니다. 커티스가 정말 평면적이라면, 열차 내부를 그렇게 관람하듯이 구경할 이유가 없죠. 어느 순간 이 인물은 주동자에서 관찰자의 시점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그 구조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후반부의 새로운 내통자이자 멜서스의 인구론을 따르는 또 다른 통제자로서 재사회화의 과정을 거치는거죠. 커티스가 열차의 매 칸을 통과하는 순간마다 이 인물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할머니님께서는 혁명의 부조리가 뭔가 점층적으로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시는데, 그런 미학적 당위는 이 영화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두번째 칸과 세번째 칸에서 혁명의 부조리가 나와야 할까요. 혹은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를 설명하는 데서 그치면 안되는 걸까요? 혁명의 부조리는 갑툭튀한 것이 아니라 그 올바름과 필요성에 대한 당연한 믿음을 파괴하는 충격요법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여태껏 혁명만이 답인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하고 갑작스레 깨달을 수 밖에 없다는 거죠. 그건 단순하지 않아요.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 위한 이야기 구조의 피크인거죠. 두번째 칸에서는 죽일 수 없는 순진무구한 존재들 사이에서도 총이 등장하며 결국 피를 통한 혁명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하고, 세번째 칸에서는 무기력한 상류층의 향락을 지나쳐가면서 타락해있는 세계의 단면을 확인합니다. 두번째 칸과 세번째 칸은 부조리한 세계가 어떻게 출발해서 그 정점에 다다르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거죠.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그리고 설국열차의 진짜 주인공은 커티스나 인물이 아니라 기차 그 자체죠. 부조리한 세계를 상징하는 우화적 도구로서 하나하나 흝고 가야 하고 이는 곧 그 세계관의 입체적인 면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인물이 입체적일 필요가 있는 게 아니라 세계가 입체적일 필요가 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목격자이자 체험자로서 세계 안의 부품으로 작동하는 거죠.
2. [커티스가 왜 윌포드를 잡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영화는 ‘그럴싸한’ 설명을 보여주고 있나요? 커티스의 입을 통해서 잡아야한다고 말할 뿐이죠.] 라고 말씀하셨네요. 네, 말씀하신 대로 영화에는 구구절절한 설명도 없고 모호한 정의론이나 분노로 이야기가 움직입니다. 틸다 스윈튼의 대사는 주제의식이 아니죠. 그리고 그 정도의 표출도 하지 말라고 하면 이 세상 영화의 어떤 대사도 구구절절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대사로는 어떤 힌트도 주지 않은 채로 주제의식을 성공적으로 던지는 다른 사회적 영화의 예를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생각할 거리가 있는 오락영화에 너무 높은 기준치를 부과하고 계시는군요.
3. 메시지가 새롭지 못하다는 것과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 그리고 영화가 담고 있는 함의와 그 전달방식의 평가는 별개의 문제죠. 그렇게 따지면 매트릭스도 지겨울 정도로 반복된 호접지몽 이야기의 낡은 변주에 불과합니다. 설국열차가 사회학 논문 과제도 아니고 그 메시지가 어마무시하게 새로워야 할 필요는 없죠. 또한 혁명과 타락 사이에서 갈등하는 대신 제 3의 선택지로 공멸과 세계의 파괴를 선언하는 것은 충분히 새롭습니다. 최소한 한국 영화에서, 사이파이를 통해서, 이렇게 사회학적인 성찰을 담은 영화가 있었나요? 혹은 다른 나라의 사이파이물에서 혁명을 통한 전복과 해피엔딩 대신 반복될 수 밖에 없는 모순을 지적하고 그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해버리는 다른 영화가 있었나요? 이 영화는 카이에 뒤 시네마와 사이파이 팬들 및 다른 관객들에게도 대단히 호평을 받았습니다. 낡거나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4. 애초에 캐릭터의 진화를 목적으로 삼은 영화가 아닙니다. 그리고 열차 안을 이동해 끝에 도달하면서 커티스는 충분히 진화했죠.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성자 윌리엄도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선택의 기로에서 과감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지점은 이미 열차 초반부터 느꼈고 끝에서 부품으로 일하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새롭게 느낍니다.
개연성이라는 단어를 모호하게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는 인과관계에 따르면 부자연스럽다는 뜻인데 서사의 종국에 벌어지는 일들은 어찌보면 싸늘한 운명론적 시각이 느껴질 정도로 인과관계가 뚜렷하죠. 원인이 뚜렷하고 그 때문에 일어날 법한 일이 일어났는데 이게 왜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설국열차가 품고있는 사유의 측면이 내적서사와 어떻게 부딪히며
그 개연성이 어떻게 붕괴되는지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설득력을 왜 갖지 못하는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1. 선형구조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 정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이 이야기가 선형구조인지 아닌지, 그리고 미학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이 영화와 선형구조가 어울리지 않는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할머니님께 설명을 요구한 것도 이 부분입니다. (더불어 제 나름의 이해가 정확한지, 그렇지 않다면 어떤 부분에서 그러한지 선형구조가 서사와 잘 어울려 미학적 완성도가 높은 사례와, 선형구조가 아닌 이야기가 서사와 잘 어울려 미학적 완성도가 높은 사례와, 선형 구조가 서사와 잘 어울리지 못해서 실패한 영화의 사례를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할머니님께서 이야기하는 인물의 입체성 역시도 정확한 정의와 모범적 사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인물들이 평면적인 것도 아닙니다. 커티스가 정말 평면적이라면, 열차 내부를 그렇게 관람하듯이 구경할 이유가 없죠. 어느 순간 이 인물은 주동자에서 관찰자의 시점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그 구조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후반부의 새로운 내통자이자 멜서스의 인구론을 따르는 또 다른 통제자로서 재사회화의 과정을 거치는거죠. 커티스가 열차의 매 칸을 통과하는 순간마다 이 인물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할머니님께서는 혁명의 부조리가 뭔가 점층적으로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시는데, 그런 미학적 당위는 이 영화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두번째 칸과 세번째 칸에서 혁명의 부조리가 나와야 할까요. 혹은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를 설명하는 데서 그치면 안되는 걸까요? 혁명의 부조리는 갑툭튀한 것이 아니라 그 올바름과 필요성에 대한 당연한 믿음을 파괴하는 충격요법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여태껏 혁명만이 답인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하고 갑작스레 깨달을 수 밖에 없다는 거죠. 그건 단순하지 않아요.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 위한 이야기 구조의 피크인거죠. 두번째 칸에서는 죽일 수 없는 순진무구한 존재들 사이에서도 총이 등장하며 결국 피를 통한 혁명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하고, 세번째 칸에서는 무기력한 상류층의 향락을 지나쳐가면서 타락해있는 세계의 단면을 확인합니다. 두번째 칸과 세번째 칸은 부조리한 세계가 어떻게 출발해서 그 정점에 다다르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거죠.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그리고 설국열차의 진짜 주인공은 커티스나 인물이 아니라 기차 그 자체죠. 부조리한 세계를 상징하는 우화적 도구로서 하나하나 흝고 가야 하고 이는 곧 그 세계관의 입체적인 면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인물이 입체적일 필요가 있는 게 아니라 세계가 입체적일 필요가 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목격자이자 체험자로서 세계 안의 부품으로 작동하는 거죠.
2. [커티스가 왜 윌포드를 잡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영화는 ‘그럴싸한’ 설명을 보여주고 있나요? 커티스의 입을 통해서 잡아야한다고 말할 뿐이죠.] 라고 말씀하셨네요. 네, 말씀하신 대로 영화에는 구구절절한 설명도 없고 모호한 정의론이나 분노로 이야기가 움직입니다. 틸다 스윈튼의 대사는 주제의식이 아니죠. 그리고 그 정도의 표출도 하지 말라고 하면 이 세상 영화의 어떤 대사도 구구절절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대사로는 어떤 힌트도 주지 않은 채로 주제의식을 성공적으로 던지는 다른 사회적 영화의 예를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생각할 거리가 있는 오락영화에 너무 높은 기준치를 부과하고 계시는군요.
3. 메시지가 새롭지 못하다는 것과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 그리고 영화가 담고 있는 함의와 그 전달방식의 평가는 별개의 문제죠. 그렇게 따지면 매트릭스도 지겨울 정도로 반복된 호접지몽 이야기의 낡은 변주에 불과합니다. 설국열차가 사회학 논문 과제도 아니고 그 메시지가 어마무시하게 새로워야 할 필요는 없죠. 또한 혁명과 타락 사이에서 갈등하는 대신 제 3의 선택지로 공멸과 세계의 파괴를 선언하는 것은 충분히 새롭습니다. 최소한 한국 영화에서, 사이파이를 통해서, 이렇게 사회학적인 성찰을 담은 영화가 있었나요? 혹은 다른 나라의 사이파이물에서 혁명을 통한 전복과 해피엔딩 대신 반복될 수 밖에 없는 모순을 지적하고 그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해버리는 다른 영화가 있었나요? 이 영화는 카이에 뒤 시네마와 사이파이 팬들 및 다른 관객들에게도 대단히 호평을 받았습니다. 낡거나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4. 애초에 캐릭터의 진화를 목적으로 삼은 영화가 아닙니다. 그리고 열차 안을 이동해 끝에 도달하면서 커티스는 충분히 진화했죠.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성자 윌리엄도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선택의 기로에서 과감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지점은 이미 열차 초반부터 느꼈고 끝에서 부품으로 일하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새롭게 느낍니다.
개연성이라는 단어를 모호하게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는 인과관계에 따르면 부자연스럽다는 뜻인데 서사의 종국에 벌어지는 일들은 어찌보면 싸늘한 운명론적 시각이 느껴질 정도로 인과관계가 뚜렷하죠. 원인이 뚜렷하고 그 때문에 일어날 법한 일이 일어났는데 이게 왜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1.인셉션, 판의미로, 설국열차. 시작과 동시에 도착지가 정해져 그 도착지를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커티스의 관찰은 최초의 태도의 전복이나 변질이 아니라 강화를 위한 장치로 기능합니다. 따라서 두번째, 세번째는 동어반복입니다. 커티스에게 피를 통한 혁명의 필요성은 이미 첫번째에서 확립되었습니다. 도대체 입체를 뭐로 정의하고 계시는지?
2.이창동의 시. 틸다스윈튼의 대사는 그정도라 말할만한게 아니죠. 마더나 살추를 찍은 감독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는게 무리한 요구인지?
3.결국 광장의 이명준의 선택과 하등다를바 ... 더 보기
2.이창동의 시. 틸다스윈튼의 대사는 그정도라 말할만한게 아니죠. 마더나 살추를 찍은 감독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는게 무리한 요구인지?
3.결국 광장의 이명준의 선택과 하등다를바 ... 더 보기
1.인셉션, 판의미로, 설국열차. 시작과 동시에 도착지가 정해져 그 도착지를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커티스의 관찰은 최초의 태도의 전복이나 변질이 아니라 강화를 위한 장치로 기능합니다. 따라서 두번째, 세번째는 동어반복입니다. 커티스에게 피를 통한 혁명의 필요성은 이미 첫번째에서 확립되었습니다. 도대체 입체를 뭐로 정의하고 계시는지?
2.이창동의 시. 틸다스윈튼의 대사는 그정도라 말할만한게 아니죠. 마더나 살추를 찍은 감독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는게 무리한 요구인지?
3.결국 광장의 이명준의 선택과 하등다를바 없는 커티스의 선택이 뭐가 새로운지도 모르겠고, 작품내내 이명준의 움직임을 통해 결국 이명준의 중립국과 자살을 인정하게 만들어버리는 광장과 달리 설국열차는 뜬금포죠. 영화내적으로는 전혀 공감할 수없는 결론의 도출. 그게 카타르시스인가요? 한국 관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듯 하군요.
사회학 논문도 아닌데 다른 한국영화에서 사회학적성찰이 있었는지를 왜찾습니까?
4. 아이를 본 커티스는 마치 미리 알고 있었기라도 한듯 그게 사실이라면 부셔버린다라는 결론에 도달하죠. 결론이 수십개는 있을법한상황에서 전혀 모르던 사실을 알게된 후 가장 하기어려운 선택을 추가적인 다른 사건없이하는게 개연성이라고 보신다면 할말은 없네요.
2.이창동의 시. 틸다스윈튼의 대사는 그정도라 말할만한게 아니죠. 마더나 살추를 찍은 감독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는게 무리한 요구인지?
3.결국 광장의 이명준의 선택과 하등다를바 없는 커티스의 선택이 뭐가 새로운지도 모르겠고, 작품내내 이명준의 움직임을 통해 결국 이명준의 중립국과 자살을 인정하게 만들어버리는 광장과 달리 설국열차는 뜬금포죠. 영화내적으로는 전혀 공감할 수없는 결론의 도출. 그게 카타르시스인가요? 한국 관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듯 하군요.
사회학 논문도 아닌데 다른 한국영화에서 사회학적성찰이 있었는지를 왜찾습니까?
4. 아이를 본 커티스는 마치 미리 알고 있었기라도 한듯 그게 사실이라면 부셔버린다라는 결론에 도달하죠. 결론이 수십개는 있을법한상황에서 전혀 모르던 사실을 알게된 후 가장 하기어려운 선택을 추가적인 다른 사건없이하는게 개연성이라고 보신다면 할말은 없네요.
왜 공격적인 말투를 쓰시는지 모르겠군요.
1. 그렇게 치면 인셉션은 오히려 비선형구조에 가깝죠. 시작도 모호할 뿐더러 그 시작을 영화 속의 인셉션 작전의 시작이라 놓고 봐도 꿈에 들어갈 때마다 분기가 갈라지고 다양한 엔딩이 나오게 됩니다. 판의 미로 역시 시작과 동시에 끝이 정해진다는 점에서 비선형구조보다는 선형구조라고도 충분히 볼 수 있구요. (설국열차가 왜 선형구조로서 미학적 완성도가 떨어지는지를 이야기하는데 그 사례로 설국열차를 다시 드는건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작품을 이야기하셔야겠죠) 분명한 것은, 할머니님께서 쓰시는... 더 보기
1. 그렇게 치면 인셉션은 오히려 비선형구조에 가깝죠. 시작도 모호할 뿐더러 그 시작을 영화 속의 인셉션 작전의 시작이라 놓고 봐도 꿈에 들어갈 때마다 분기가 갈라지고 다양한 엔딩이 나오게 됩니다. 판의 미로 역시 시작과 동시에 끝이 정해진다는 점에서 비선형구조보다는 선형구조라고도 충분히 볼 수 있구요. (설국열차가 왜 선형구조로서 미학적 완성도가 떨어지는지를 이야기하는데 그 사례로 설국열차를 다시 드는건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작품을 이야기하셔야겠죠) 분명한 것은, 할머니님께서 쓰시는... 더 보기
왜 공격적인 말투를 쓰시는지 모르겠군요.
1. 그렇게 치면 인셉션은 오히려 비선형구조에 가깝죠. 시작도 모호할 뿐더러 그 시작을 영화 속의 인셉션 작전의 시작이라 놓고 봐도 꿈에 들어갈 때마다 분기가 갈라지고 다양한 엔딩이 나오게 됩니다. 판의 미로 역시 시작과 동시에 끝이 정해진다는 점에서 비선형구조보다는 선형구조라고도 충분히 볼 수 있구요. (설국열차가 왜 선형구조로서 미학적 완성도가 떨어지는지를 이야기하는데 그 사례로 설국열차를 다시 드는건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작품을 이야기하셔야겠죠) 분명한 것은, 할머니님께서 쓰시는 선형구조라는 단어의 뜻이 여전히 모호하며, 그것이 어떻게 이 작품의 완성도를 해치냐는지도 명징하지 않다는 겁니다. 설국열차는 다양한 열린 선택지 속에서 이런 저런 가능성을 열어놓을 필요가 없는 이야기에요. 닫힌 공간에서, 닫힌 이야기를 하며, 열린 결말로 나아가는 작품입니다. 정해진 시작과는 다른 끝에 다다른다는 점에서 오히려 비선형구조라고 볼 수도 있겠죠. 아무튼, 설국열차는 선택의 가짓수가 다양할 필요도 없고, 닫힌 가능성 속에서 인물들의 엄청난 내적 갈등을 담을 필요도 없습니다. 애초에 감독이 그걸 의도한 게 아니니까요. 설국열차의 초점은 퀘스트를 맞이하는 \"인간\"이 아니라, 어떤 식의 \"퀘스트\"가 주어지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것입니다. 놀란의 다크나이트 같은 영화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커티스가 쓸데없이 이랬다 저랬다 할 필요가 없죠. 적당히 고뇌하고 회의하면서도 열린 길을 앞으로 쭉 가면 됩니다. 사건을 일으키는 핵심 인물의 의지가 이야기 자체의 원동력이 되는데 거기서 어떤 입체성을 더 부여할까요.
2. 그러니까, 세계의 구조와 모순을 다루는 이야기에 인간의 고뇌를 다루는 영화를 비교대상으로 삼으면서 이렇게 찍었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전혀 맞지 않는 기대죠. 이창동의 시는 사회학적 성찰을 담고 있는 영화라고 하기 어려워요. 스타워즈에 스페이스 오뒷세이를 가져다대는 거나 다름 없습니다. 감독이 의도한 장르가 있고 그 의도한 만큼 뽑아내면 되는거죠. 전에 찍은 작품이 어땠건간에, 장르에 맞지 않는 요구는 핀트가 어긋난 비판입니다.
3. 왜 굳이 최인호의 광장을 끌고 오는지는 모르겠군요. 사회 속에서 무너져가는 인간의 이야기와,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인간의 믿음을 둘러싼 세계를 그리는 이야기는 아예 궤가 다릅니다. 사회학적 통찰이라도 둘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어요. 더욱이나 광장의 이명준이 이도 저도 아닌 도피의 선택을 한 것과 세계 자체를 부수는 커티스의 선택은 그 스케일이나 사회학적인 파동에서 완전히 다릅니다. 사회 속에서 무력한 개인과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강력한 개인을 어떻게 비교할 수가 있나요.
저희는 지금 영화를 해석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대중들의 일반적 호오를 끌고 올 필요도 없습니다. 전문가의 이야기가 훨씬 더 의미있죠. 그리고 그 주제가 낡았다고 하시니 제가 그것이 낡게 보이는 증거를 제시해달라고 하는 겁니다. 낡았으면 낡은 만큼 다른 서브컬쳐들이 그런 식의 이야기와 결말을 다루었겠죠. 사회학적으로 유의미한 영화나 작품들은 많이 있을 겁니다.
4. 커티스가 그걸 알고 있었기라도 한 듯 한 묘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거기에 절망했을 뿐이죠. 지도자를 처단하고, 계급주의를 타파하고, 평등한 세계를 만들수 있을지 알았지만 본인의 노력이 처음부터 헛된 것이었으며 월포드의 제안을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미래가 없다는 사실에 다른 선택을 한 겁니다. 절망적 세계관, 주동인물의 절망, 그 인물을 부추기는 선지자, 머릿칸에 도착하기까지의 열차칸 묘사 등 커티스가 열차를 전복시키고 세계 자체를 파괴한다는 선택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개연성이 없다는 건 온당하지 못한 비판이죠. 하기 어려운 선택이다 와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혹은 그럴 만 했다 는 서로 부딪히는 조건이 아닙니다. 하기 어렵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고 그럴만 했으며 그럴 수 있었기에 커티스가 열차를 날려버린거죠.
1. 그렇게 치면 인셉션은 오히려 비선형구조에 가깝죠. 시작도 모호할 뿐더러 그 시작을 영화 속의 인셉션 작전의 시작이라 놓고 봐도 꿈에 들어갈 때마다 분기가 갈라지고 다양한 엔딩이 나오게 됩니다. 판의 미로 역시 시작과 동시에 끝이 정해진다는 점에서 비선형구조보다는 선형구조라고도 충분히 볼 수 있구요. (설국열차가 왜 선형구조로서 미학적 완성도가 떨어지는지를 이야기하는데 그 사례로 설국열차를 다시 드는건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작품을 이야기하셔야겠죠) 분명한 것은, 할머니님께서 쓰시는 선형구조라는 단어의 뜻이 여전히 모호하며, 그것이 어떻게 이 작품의 완성도를 해치냐는지도 명징하지 않다는 겁니다. 설국열차는 다양한 열린 선택지 속에서 이런 저런 가능성을 열어놓을 필요가 없는 이야기에요. 닫힌 공간에서, 닫힌 이야기를 하며, 열린 결말로 나아가는 작품입니다. 정해진 시작과는 다른 끝에 다다른다는 점에서 오히려 비선형구조라고 볼 수도 있겠죠. 아무튼, 설국열차는 선택의 가짓수가 다양할 필요도 없고, 닫힌 가능성 속에서 인물들의 엄청난 내적 갈등을 담을 필요도 없습니다. 애초에 감독이 그걸 의도한 게 아니니까요. 설국열차의 초점은 퀘스트를 맞이하는 \"인간\"이 아니라, 어떤 식의 \"퀘스트\"가 주어지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것입니다. 놀란의 다크나이트 같은 영화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커티스가 쓸데없이 이랬다 저랬다 할 필요가 없죠. 적당히 고뇌하고 회의하면서도 열린 길을 앞으로 쭉 가면 됩니다. 사건을 일으키는 핵심 인물의 의지가 이야기 자체의 원동력이 되는데 거기서 어떤 입체성을 더 부여할까요.
2. 그러니까, 세계의 구조와 모순을 다루는 이야기에 인간의 고뇌를 다루는 영화를 비교대상으로 삼으면서 이렇게 찍었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전혀 맞지 않는 기대죠. 이창동의 시는 사회학적 성찰을 담고 있는 영화라고 하기 어려워요. 스타워즈에 스페이스 오뒷세이를 가져다대는 거나 다름 없습니다. 감독이 의도한 장르가 있고 그 의도한 만큼 뽑아내면 되는거죠. 전에 찍은 작품이 어땠건간에, 장르에 맞지 않는 요구는 핀트가 어긋난 비판입니다.
3. 왜 굳이 최인호의 광장을 끌고 오는지는 모르겠군요. 사회 속에서 무너져가는 인간의 이야기와,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인간의 믿음을 둘러싼 세계를 그리는 이야기는 아예 궤가 다릅니다. 사회학적 통찰이라도 둘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어요. 더욱이나 광장의 이명준이 이도 저도 아닌 도피의 선택을 한 것과 세계 자체를 부수는 커티스의 선택은 그 스케일이나 사회학적인 파동에서 완전히 다릅니다. 사회 속에서 무력한 개인과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강력한 개인을 어떻게 비교할 수가 있나요.
저희는 지금 영화를 해석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대중들의 일반적 호오를 끌고 올 필요도 없습니다. 전문가의 이야기가 훨씬 더 의미있죠. 그리고 그 주제가 낡았다고 하시니 제가 그것이 낡게 보이는 증거를 제시해달라고 하는 겁니다. 낡았으면 낡은 만큼 다른 서브컬쳐들이 그런 식의 이야기와 결말을 다루었겠죠. 사회학적으로 유의미한 영화나 작품들은 많이 있을 겁니다.
4. 커티스가 그걸 알고 있었기라도 한 듯 한 묘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거기에 절망했을 뿐이죠. 지도자를 처단하고, 계급주의를 타파하고, 평등한 세계를 만들수 있을지 알았지만 본인의 노력이 처음부터 헛된 것이었으며 월포드의 제안을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미래가 없다는 사실에 다른 선택을 한 겁니다. 절망적 세계관, 주동인물의 절망, 그 인물을 부추기는 선지자, 머릿칸에 도착하기까지의 열차칸 묘사 등 커티스가 열차를 전복시키고 세계 자체를 파괴한다는 선택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개연성이 없다는 건 온당하지 못한 비판이죠. 하기 어려운 선택이다 와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혹은 그럴 만 했다 는 서로 부딪히는 조건이 아닙니다. 하기 어렵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고 그럴만 했으며 그럴 수 있었기에 커티스가 열차를 날려버린거죠.
1. 우리가 감독의 선택을 존중하는건 선택의 결과도 감독에게 묻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쭉 가는 커티스와 열차라는 구조의 선택은 각각은 납득이 가는 선택일 수 있지만 동시에 선택되었을 때 너무나도 뻔한 스토리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입체의 정의를 듣지 못했습니다.
2. 개인의 부조리로부터 삶의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설국열차와 비교될 수 있죠. 비슷한 장르를 원한다면 지옥의 묵시록을 이야기할 수 있겠죠. 사유의 폭이 다르다고 느끼시다면 역으로 런닝타임과 규모의 한계에 부딪혀, 사유를 서사속에 담지 못하고 설명... 더 보기
2. 개인의 부조리로부터 삶의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설국열차와 비교될 수 있죠. 비슷한 장르를 원한다면 지옥의 묵시록을 이야기할 수 있겠죠. 사유의 폭이 다르다고 느끼시다면 역으로 런닝타임과 규모의 한계에 부딪혀, 사유를 서사속에 담지 못하고 설명... 더 보기
1. 우리가 감독의 선택을 존중하는건 선택의 결과도 감독에게 묻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쭉 가는 커티스와 열차라는 구조의 선택은 각각은 납득이 가는 선택일 수 있지만 동시에 선택되었을 때 너무나도 뻔한 스토리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입체의 정의를 듣지 못했습니다.
2. 개인의 부조리로부터 삶의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설국열차와 비교될 수 있죠. 비슷한 장르를 원한다면 지옥의 묵시록을 이야기할 수 있겠죠. 사유의 폭이 다르다고 느끼시다면 역으로 런닝타임과 규모의 한계에 부딪혀, 사유를 서사속에 담지 못하고 설명하는걸 선택한건 아닌지 물어볼 수 있을겁니다.
3. 선택이 설득력을 갖는가는 지점에서 비교가능하죠. 광장에서의 이명준의 선택은 커티스의 그것보다 그 파장이 적음에도 광장은 작품내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반면에 설국열차는 커티스의 선택을 변호하기 위해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요. 전복의 설득력을 얻기위하여 무엇을 하나요? 그저 혁명의 설득력을 부여하는데 그칠뿐이죠. 그것도 제대로 되었는지는 모르구요.
4. 열차칸 묘사는 위에서 말했듯이 열차를 날려버리는 것에 설득력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남궁민수가 설득력을 부여하는 시도를 하는데 그에게는 주어진 물리적 시간이 부족합니다.
2. 개인의 부조리로부터 삶의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설국열차와 비교될 수 있죠. 비슷한 장르를 원한다면 지옥의 묵시록을 이야기할 수 있겠죠. 사유의 폭이 다르다고 느끼시다면 역으로 런닝타임과 규모의 한계에 부딪혀, 사유를 서사속에 담지 못하고 설명하는걸 선택한건 아닌지 물어볼 수 있을겁니다.
3. 선택이 설득력을 갖는가는 지점에서 비교가능하죠. 광장에서의 이명준의 선택은 커티스의 그것보다 그 파장이 적음에도 광장은 작품내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반면에 설국열차는 커티스의 선택을 변호하기 위해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요. 전복의 설득력을 얻기위하여 무엇을 하나요? 그저 혁명의 설득력을 부여하는데 그칠뿐이죠. 그것도 제대로 되었는지는 모르구요.
4. 열차칸 묘사는 위에서 말했듯이 열차를 날려버리는 것에 설득력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남궁민수가 설득력을 부여하는 시도를 하는데 그에게는 주어진 물리적 시간이 부족합니다.
지금 저희는 비평을 두고 논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논쟁의 핵심이 되는 작품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죠. 그런데 할머니님께서는 추상적인 단어로 어떤 미학적 당위를 말씀하시는데 이게 와닿지 않습니다. 만일 설국열차가 좋은 평을 받을 수 없는 영화고, 사유와 내적 서사가 어떻게 합치되지 않으며, 개연성이 부족하다면, \"무엇이 어떻게\"에 대한 설명으로 선형구조와 캐릭터의 입체성이라는 조건은 불충분한 설명이라는 겁니다. 모든 영화는 이래야 한다 - 라는 미학적 당위라면 이건 당연히 반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고 설국열차는 어떠어떠한 부... 더 보기
지금 저희는 비평을 두고 논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논쟁의 핵심이 되는 작품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죠. 그런데 할머니님께서는 추상적인 단어로 어떤 미학적 당위를 말씀하시는데 이게 와닿지 않습니다. 만일 설국열차가 좋은 평을 받을 수 없는 영화고, 사유와 내적 서사가 어떻게 합치되지 않으며, 개연성이 부족하다면, \"무엇이 어떻게\"에 대한 설명으로 선형구조와 캐릭터의 입체성이라는 조건은 불충분한 설명이라는 겁니다. 모든 영화는 이래야 한다 - 라는 미학적 당위라면 이건 당연히 반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고 설국열차는 어떠어떠한 부분에서 어떻게 됐어야 한다 - 라는 당위라면 훨씬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야죠. 같은 논리로 저는 퍼시픽 림도 비판할 수 있습니다. 선형구조를 띄고, 캐릭터가 입체적이지 않다는 근거로요. 그러나 이 영화를 그렇게 평가한다면 그것은 영화가 핵심으로 다루는 부분인 \"로봇과 괴수의 시각적 청각적 아름다움과 오락적 재미\"를 건너뛰는 이야기가 됩니다. 설국열차는 좋은 작품이 아니다, 선형구조를 띄고 있으며 캐릭터가 입체적이지 못하니까, 라는 비판은 [왜 설국열차가 선형구조를 띄어서는 안되는지, 캐릭터가 어떤 면에서 어느 정도로 입체적이어야 했고 그 부분을 실패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작품 내적으로 \"분석\"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개인의 주관적 감상을 설득하기 위한 객관적 실증적 증거가 없어서 제가 계속 되묻고 반박하는 거죠. 지금 할머니님은 자의적인 주장으로 자의적인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내가 볼 때 퍼시픽림은 좋은 작품이 아니야, 선형구조를 띄고 있고 캐릭터가 입체적이지 못하니까, 같은 주장의 연속은 비평적으로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1-1. 다른 이야기는 다 부차적이고, 열차라는 구조와 커티스의 캐릭터가 어떻게 뻔하지 이에 대한 분석적 근거를 제시하셔야 합니다. 설국열차는 좋은 작품이 아냐, 왜냐하면 뻔하기 때문이지, 왜 뻔하냐면 열차라는 구조와 커티스의 덜 입체적인 캐릭터가 동시에 맞물렸으니까, 라는 논리적 구조를 띄고 있는데 마지막 근거는 열차라는 구조와 커티스의 덜 입체적인 캐릭터가 \"어떻게\" 이야기를 뻔하게 만드는지 훨씬 더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합니다. 선형적인 구조를 띄고 있다, 와 커티스의 캐릭터가 덜 입체적이다 라는 것은 \"뻔하다\" 라는 감정에 대한 인과가 아닙니다. 선형적 구조를 띄고, 캐릭터가 그다지 입체적이지 않은 수많은 영화들이 뻔한 느낌을 주지 않고 나름의 미학적 가치를 획득하고 있습니다. 뻔하다고 느끼는 이유로 구조를 제시하시는데 이 구조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요.
1-2. 입체에 대한 질문은 제가 처음에 드린 겁니다. 입체적이지 않은 캐릭터가 단조로움의 이유라고 주장하신 건 할머니님입니다. 그렇다면 입체적이라는 할머니님의 정의가 뭔지, 그리고 설국열차에서 어느 정도의 입체성을 확보했어야 하는지, 그와 비슷한 바람직한 선례는 뭐가 있는지 비교를 통해 이야기해야죠. 장르, 감독의 스타일, 주제 모든 게 완전히 다른 이창동 감독의 시 같은 영화가 아니라요.
1-3. 선형구조라는 정의 자체도 모호하다는 걸 전 지적했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을 해주세요.
2.[개인의 부조리로부터 삶의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간다는 점]이라고 하셨는데 설국열차가 다루는 건 삶의 부조리가 아닙니다. 설국열차가 다루는 것은 사회적 부조리며, 이를 구조적으로 해체하고 있죠. 이창동의 시와는 전혀 댈 수가 없고 지옥의 묵시록은 제가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시놉시스나 원작 소설의 정보로 파악해봤을 때 역시나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애초에 설국열차는 한 개인에서 출발하는 게 아닙니다. 개인들이 속한 사회를 문제로 제시하고 있죠. 사회적 부조리에서 출발해 사회적 부조리로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한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이를 통해 사회 전체로 그 초점을 확대하거나 파고드는 이야기가 아니란 거죠. 커티스의 내면 따위는 별로 알 필요도 없고 영화상에서 묘사되는 대로만 이해하면 땡입니다. 중요한 건 기차의 구조와 이 기차가 어떻게 세상을 은유하고 있는가죠.구조의 이야기와 내면의 이야기는 동치될 수가 없어요.
3. 그러니까, 어떤 비슷한 부분을 가지고 어떤 작품을 설국열차의 반면교사나 모범사례로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치면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까 지아 장 커의 천주정을 설국열차에 갖다 대고 이랬어야 한다~ 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혹은 사이파이 장르로서 사회의 부조리를 다루고 있는 점이 비슷하니 테리 길리엄의 제로법칙의 비밀처럼 설국 열차도 이래저래했어야 한다~ 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구조를 지적하신다면 아예 다른 장르와 주제를 가진 작품에 비교하실 게 아니라 구조적으로 어떤 점이 미흡한지를 분석하셔야 합니다. 설국열차가 설득력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는 것은 주장이지 실증적인 분석이 아닙니다.
전복의 선택이 설득력이 없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이 영화를 더더욱 잘못 보신 겁니다. 애초에 커티스가 선택한 전복은 논리적 설득력을 가지고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될 것이다 라는 주장이나 예측이 아니에요. 결국 이렇게 될 지도 몰라!! 라는 감독의 종말론적 선언입니다. 그 선언은 사유 끝에 나온 것도 아니고 합리적인 고민을 거쳐 나온 이성의 결과물도 아니에요. 막다른 궁지에 몰린 인간이, 등떠밀려서 선택하는거죠. 그래서 결국 자기파괴와 공멸의 위험을 안고서 결국 세계 자체를 부숴버리는 거구요. 때문에 제한된 공간과 그 공간에서 계속 떠밀려가는 인물과, 모호한 의지로 출발한 인간이 진실을 만나 선명한 절망을 만나게 되는 결말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이 서사와 구조 자체로 설국열차는 타당한 개연성을 획득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뭘 바꿔야 할까요. 중요한 건 커티스라는 인물의 내면과 사고가 아닙니다. 의지와 희망에 충실하던 인간을 그렇게 몰아붙이는 \"세계\"자체가 중요한거죠. 난 모르겠다 다 죽자 가 뜬금없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인물의 고뇌에 불필요하게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4. 그 인과관계는 월포드의 고백과, 커티스가 직접 목격하는 현실로 충분히 메꿔집니다. 왜 열차를 날려버려야 했냐면, 그럴 수 밖에 없게끔 모든 상황이 커티스를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민중들이 봉기를 할 때 철학적 논리적 근거를 장착하지 않습니다. 울분과 절망이 그 원동력이죠. 커티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꾸고 싶었지만 바꿀 수 없다면, 결국 다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죠.
차라리 글을 길게 쓰시는 게 어떨까요.
1-1. 다른 이야기는 다 부차적이고, 열차라는 구조와 커티스의 캐릭터가 어떻게 뻔하지 이에 대한 분석적 근거를 제시하셔야 합니다. 설국열차는 좋은 작품이 아냐, 왜냐하면 뻔하기 때문이지, 왜 뻔하냐면 열차라는 구조와 커티스의 덜 입체적인 캐릭터가 동시에 맞물렸으니까, 라는 논리적 구조를 띄고 있는데 마지막 근거는 열차라는 구조와 커티스의 덜 입체적인 캐릭터가 \"어떻게\" 이야기를 뻔하게 만드는지 훨씬 더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합니다. 선형적인 구조를 띄고 있다, 와 커티스의 캐릭터가 덜 입체적이다 라는 것은 \"뻔하다\" 라는 감정에 대한 인과가 아닙니다. 선형적 구조를 띄고, 캐릭터가 그다지 입체적이지 않은 수많은 영화들이 뻔한 느낌을 주지 않고 나름의 미학적 가치를 획득하고 있습니다. 뻔하다고 느끼는 이유로 구조를 제시하시는데 이 구조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요.
1-2. 입체에 대한 질문은 제가 처음에 드린 겁니다. 입체적이지 않은 캐릭터가 단조로움의 이유라고 주장하신 건 할머니님입니다. 그렇다면 입체적이라는 할머니님의 정의가 뭔지, 그리고 설국열차에서 어느 정도의 입체성을 확보했어야 하는지, 그와 비슷한 바람직한 선례는 뭐가 있는지 비교를 통해 이야기해야죠. 장르, 감독의 스타일, 주제 모든 게 완전히 다른 이창동 감독의 시 같은 영화가 아니라요.
1-3. 선형구조라는 정의 자체도 모호하다는 걸 전 지적했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을 해주세요.
2.[개인의 부조리로부터 삶의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간다는 점]이라고 하셨는데 설국열차가 다루는 건 삶의 부조리가 아닙니다. 설국열차가 다루는 것은 사회적 부조리며, 이를 구조적으로 해체하고 있죠. 이창동의 시와는 전혀 댈 수가 없고 지옥의 묵시록은 제가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시놉시스나 원작 소설의 정보로 파악해봤을 때 역시나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애초에 설국열차는 한 개인에서 출발하는 게 아닙니다. 개인들이 속한 사회를 문제로 제시하고 있죠. 사회적 부조리에서 출발해 사회적 부조리로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한 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이를 통해 사회 전체로 그 초점을 확대하거나 파고드는 이야기가 아니란 거죠. 커티스의 내면 따위는 별로 알 필요도 없고 영화상에서 묘사되는 대로만 이해하면 땡입니다. 중요한 건 기차의 구조와 이 기차가 어떻게 세상을 은유하고 있는가죠.구조의 이야기와 내면의 이야기는 동치될 수가 없어요.
3. 그러니까, 어떤 비슷한 부분을 가지고 어떤 작품을 설국열차의 반면교사나 모범사례로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치면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까 지아 장 커의 천주정을 설국열차에 갖다 대고 이랬어야 한다~ 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혹은 사이파이 장르로서 사회의 부조리를 다루고 있는 점이 비슷하니 테리 길리엄의 제로법칙의 비밀처럼 설국 열차도 이래저래했어야 한다~ 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구조를 지적하신다면 아예 다른 장르와 주제를 가진 작품에 비교하실 게 아니라 구조적으로 어떤 점이 미흡한지를 분석하셔야 합니다. 설국열차가 설득력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는 것은 주장이지 실증적인 분석이 아닙니다.
전복의 선택이 설득력이 없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이 영화를 더더욱 잘못 보신 겁니다. 애초에 커티스가 선택한 전복은 논리적 설득력을 가지고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될 것이다 라는 주장이나 예측이 아니에요. 결국 이렇게 될 지도 몰라!! 라는 감독의 종말론적 선언입니다. 그 선언은 사유 끝에 나온 것도 아니고 합리적인 고민을 거쳐 나온 이성의 결과물도 아니에요. 막다른 궁지에 몰린 인간이, 등떠밀려서 선택하는거죠. 그래서 결국 자기파괴와 공멸의 위험을 안고서 결국 세계 자체를 부숴버리는 거구요. 때문에 제한된 공간과 그 공간에서 계속 떠밀려가는 인물과, 모호한 의지로 출발한 인간이 진실을 만나 선명한 절망을 만나게 되는 결말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이 서사와 구조 자체로 설국열차는 타당한 개연성을 획득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뭘 바꿔야 할까요. 중요한 건 커티스라는 인물의 내면과 사고가 아닙니다. 의지와 희망에 충실하던 인간을 그렇게 몰아붙이는 \"세계\"자체가 중요한거죠. 난 모르겠다 다 죽자 가 뜬금없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인물의 고뇌에 불필요하게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4. 그 인과관계는 월포드의 고백과, 커티스가 직접 목격하는 현실로 충분히 메꿔집니다. 왜 열차를 날려버려야 했냐면, 그럴 수 밖에 없게끔 모든 상황이 커티스를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민중들이 봉기를 할 때 철학적 논리적 근거를 장착하지 않습니다. 울분과 절망이 그 원동력이죠. 커티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꾸고 싶었지만 바꿀 수 없다면, 결국 다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죠.
차라리 글을 길게 쓰시는 게 어떨까요.
1.선형구조와 평면적 캐릭터가 어떻게 마지막 선택을, 봉준호의 사유를 뜬금포로 만드는지는 이미 설명했습니다.
1-1 캐릭터가 입체적이지 않으면서 선형구조를 띄며 사유를 설득력있게 전달하는 영화의 예시를 들어주시면 감사하겠구요.
1-2 이창동의 시는 개인의 이야기에 천착하지 않습니다. 도식적으로 접근하면 설국열차의 개인-세계의 구조를 런닝타임이라는 제약아래서 개인-삶의 구조로 축소시킨거죠. 개인의 모순을 삶의 모순으로 전이시키는데 성공한 시와 달리 설국열차는 세계의 모순을 무엇에 근거하여 설득시키고 있는지 입증해야하는건 왕... 더 보기
1-1 캐릭터가 입체적이지 않으면서 선형구조를 띄며 사유를 설득력있게 전달하는 영화의 예시를 들어주시면 감사하겠구요.
1-2 이창동의 시는 개인의 이야기에 천착하지 않습니다. 도식적으로 접근하면 설국열차의 개인-세계의 구조를 런닝타임이라는 제약아래서 개인-삶의 구조로 축소시킨거죠. 개인의 모순을 삶의 모순으로 전이시키는데 성공한 시와 달리 설국열차는 세계의 모순을 무엇에 근거하여 설득시키고 있는지 입증해야하는건 왕... 더 보기
1.선형구조와 평면적 캐릭터가 어떻게 마지막 선택을, 봉준호의 사유를 뜬금포로 만드는지는 이미 설명했습니다.
1-1 캐릭터가 입체적이지 않으면서 선형구조를 띄며 사유를 설득력있게 전달하는 영화의 예시를 들어주시면 감사하겠구요.
1-2 이창동의 시는 개인의 이야기에 천착하지 않습니다. 도식적으로 접근하면 설국열차의 개인-세계의 구조를 런닝타임이라는 제약아래서 개인-삶의 구조로 축소시킨거죠. 개인의 모순을 삶의 모순으로 전이시키는데 성공한 시와 달리 설국열차는 세계의 모순을 무엇에 근거하여 설득시키고 있는지 입증해야하는건 왕천군님입니다.
1-3 시작과 동시에 - 라는 문장에서 설명했습니다.
2. 사회적 문제로 시작해 사회적 문제로 끝나는걸 설득력있게 보여줄수 있는지에 대하여 회의적입니다. 관객은 등장인물의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특징때문에 영화에서 개인과는 구분되는 사회적 문제를 설득력있게 다룬다는건 불가능합니다. 영화에서 다루는 사회적 부조리는 결국 등장인물의 시각에서 재편된 무언가에 불과 합니다. 사건이 등장인물의 변화를 유발하고, 등장인물이 다시 사건에 영향을 미치며, 사유에 도달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사건은 사건으로 남고 등장인물은 등장인물로 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은 마치 변화한듯 아무런 거부감 없이 사건을 다른 층위로 바라본다는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요. 두번째 세번째칸에서 그럴 기회가 있었음에도 최종점에 다다르서야 변화가 찾아옵니다. 등장인물의 변화는 필연적이라는걸 봉준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테니까요.그러나 등장인물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변화를 수용할 수 있을지 몰라도 관객은 그럴 수 없습니다. 변화는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왔고, 충분한 설득력을 얻기전에 영화는 막을 내리니까요. 따라서 기차의 은유는 기차의 은유를 알고 있던 자들만이 향유할 수 있습니다. 소수의 관객에게 설명할 기회를 제공하면서 지적인 만족감을 줄 수야 있겠죠. 영화의 가치는 상실하겠지만요. 지옥의 묵시록은 시종일관 사회적 문제로부터 벗어나지 않지만 동시에 병렬적으로 개인의 문제를 설명하는데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그로인해 관객은 등장인물의 시각으로부터 사회적문제의 심각성과 어려움을 느끼게 되죠.
3. 애초에 예시를 들 필요가 없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작품의 질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예시가 왜 필요합니까? 예시를 요청했으니 드린것 뿐입니다. 예시를 요청하고 나서 그걸 공격하니 어처구니가 없군요.
4. 울분과 절망을 느꼈습니다. 지금의 방식은 문제가 있어요. 여기까지는 월터스와 기차밑 아이를 통해 설득력을 얻습니다. 그래서 열차를 전복시킵니다. 이지점의 인과가불투명합니다. 광우병시위가 그대로 끝난건 대체할 만한 방법이 없었던거고, 프랑스혁명이 체제를 전복시킨건 귀족정의 모순의 해답이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설국열차는 어떤가요? 남궁민수의 몇마디 하나로 커티스가 애라모르겠다 다 뒤집어 엎어라는 선택을 한다구요? 남궁민수는 제3의 길을 결말에 이르러서야 제시할 뿐입니다. 광우병시위에서 체제전복을 이야기한 어떤 집단처럼요.
글을 길게 쓸 물리적 시간이 없습니다. 전 여기까지하죠.
1-1 캐릭터가 입체적이지 않으면서 선형구조를 띄며 사유를 설득력있게 전달하는 영화의 예시를 들어주시면 감사하겠구요.
1-2 이창동의 시는 개인의 이야기에 천착하지 않습니다. 도식적으로 접근하면 설국열차의 개인-세계의 구조를 런닝타임이라는 제약아래서 개인-삶의 구조로 축소시킨거죠. 개인의 모순을 삶의 모순으로 전이시키는데 성공한 시와 달리 설국열차는 세계의 모순을 무엇에 근거하여 설득시키고 있는지 입증해야하는건 왕천군님입니다.
1-3 시작과 동시에 - 라는 문장에서 설명했습니다.
2. 사회적 문제로 시작해 사회적 문제로 끝나는걸 설득력있게 보여줄수 있는지에 대하여 회의적입니다. 관객은 등장인물의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특징때문에 영화에서 개인과는 구분되는 사회적 문제를 설득력있게 다룬다는건 불가능합니다. 영화에서 다루는 사회적 부조리는 결국 등장인물의 시각에서 재편된 무언가에 불과 합니다. 사건이 등장인물의 변화를 유발하고, 등장인물이 다시 사건에 영향을 미치며, 사유에 도달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사건은 사건으로 남고 등장인물은 등장인물로 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은 마치 변화한듯 아무런 거부감 없이 사건을 다른 층위로 바라본다는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요. 두번째 세번째칸에서 그럴 기회가 있었음에도 최종점에 다다르서야 변화가 찾아옵니다. 등장인물의 변화는 필연적이라는걸 봉준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테니까요.그러나 등장인물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변화를 수용할 수 있을지 몰라도 관객은 그럴 수 없습니다. 변화는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왔고, 충분한 설득력을 얻기전에 영화는 막을 내리니까요. 따라서 기차의 은유는 기차의 은유를 알고 있던 자들만이 향유할 수 있습니다. 소수의 관객에게 설명할 기회를 제공하면서 지적인 만족감을 줄 수야 있겠죠. 영화의 가치는 상실하겠지만요. 지옥의 묵시록은 시종일관 사회적 문제로부터 벗어나지 않지만 동시에 병렬적으로 개인의 문제를 설명하는데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그로인해 관객은 등장인물의 시각으로부터 사회적문제의 심각성과 어려움을 느끼게 되죠.
3. 애초에 예시를 들 필요가 없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작품의 질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예시가 왜 필요합니까? 예시를 요청했으니 드린것 뿐입니다. 예시를 요청하고 나서 그걸 공격하니 어처구니가 없군요.
4. 울분과 절망을 느꼈습니다. 지금의 방식은 문제가 있어요. 여기까지는 월터스와 기차밑 아이를 통해 설득력을 얻습니다. 그래서 열차를 전복시킵니다. 이지점의 인과가불투명합니다. 광우병시위가 그대로 끝난건 대체할 만한 방법이 없었던거고, 프랑스혁명이 체제를 전복시킨건 귀족정의 모순의 해답이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설국열차는 어떤가요? 남궁민수의 몇마디 하나로 커티스가 애라모르겠다 다 뒤집어 엎어라는 선택을 한다구요? 남궁민수는 제3의 길을 결말에 이르러서야 제시할 뿐입니다. 광우병시위에서 체제전복을 이야기한 어떤 집단처럼요.
글을 길게 쓸 물리적 시간이 없습니다. 전 여기까지하죠.
1. 아뇨. 할머니님은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느낀다는 주관적 감상을 나열하셨죠. 미학적으로 불완전한 부분을 지적하려면 내가 이렇게 느꼈다 - 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해서 불완전하고 어떻게 해야 완전할 수 있었는지 균열과 이를 메꾸는 대안을 모두 제시하지 않고서는 설득하기 어렵습니다. 선형구조가 [어떻게] 평면적 캐릭터와 부딪히고 어그러지는지 미학적 당위에 대해서 어떤 분석도 없어요.
1-1. 이런 식의 접근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선형구조라면 캐릭터가 입체적이어야 한다 ... 더 보기
1-1. 이런 식의 접근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선형구조라면 캐릭터가 입체적이어야 한다 ... 더 보기
1. 아뇨. 할머니님은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느낀다는 주관적 감상을 나열하셨죠. 미학적으로 불완전한 부분을 지적하려면 내가 이렇게 느꼈다 - 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해서 불완전하고 어떻게 해야 완전할 수 있었는지 균열과 이를 메꾸는 대안을 모두 제시하지 않고서는 설득하기 어렵습니다. 선형구조가 [어떻게] 평면적 캐릭터와 부딪히고 어그러지는지 미학적 당위에 대해서 어떤 분석도 없어요.
1-1. 이런 식의 접근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선형구조라면 캐릭터가 입체적이어야 한다 or 선형구조가 아니라면 캐릭터가 입체적일 필요가 굳이 없다 라는 전제를 가지고 영화의 완성도를 논하는 방법이 추상적이며 세세하지 못하다는 거에요. 하물며 같은 제작사에서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마블의 히어로물들도 분위기와 이야기가 제각기 다릅니다. 그런데 감독도 다르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그 방식도 다른데 왜 선형구조와 사유의 전달이라는 단 두개의 공통점을 가지고 비교를 해야 하나요. 작품 내적으로 분석해야죠.
제가 사례를 요구하는 건 용어의 정의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하기 위한 것이지 다른 작품과의 비교를 통한 장단점 찾아내기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성공했다, 실패했다는 가치판단의 주장을 근거로 쓰시는데 그건 할머니님의 자의적인 판단이지 분석이 아닙니다. 간단하게 다시 말씀드리자면 이창동이 시에서 했듯이 봉준호가 설국열차에서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건 스페이스 오뒷세이의 큐브릭만큼 스타워즈의 루카스도 어쩌구 저쩌구 해야 한다는 단순 비교에 불과해요. 카체이스가 나오니까 레픈 감독의 드라이브가 패스트 앤 퓨리어스처럼 격렬한 속도감을 내뿜어야 할까요? 간첩이라는 소재가 겹치고 남북 관계의 모순을 그리고 있으니 쉬리의 강제규처럼 붉은 가족의 이주형도 똑같이 해야 할까요? 캐릭터의 입체성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는 작품마다 다릅니다. 지금 할머니님의 주장은 몇가지 겹치는 부분이 있으니 비교대상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전제에 문제가 있습니다.
1-3. 그래서 제가 그 정의가 여전히 모호하다는 걸 인셉션과 판의 미로의 예시를 다시 들며 이야기했습니다.
2. 여기서도 역시 할머니님은 일반적인 사회적 주제 영화의 공식을 기준으로 설국열차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장르적 공식이나 특징을 반드시 따라야 할 이유는 없어요. 안하고 싶으면 안하는 겁니다. 개인의 고통을 사회적 고통으로 확대하는 감독도 있을 것이고 싸늘하게 사회 속 개인의 고통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감독도 있을 겁니다. 이 부분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실패했다\" 같은 가치판단으로 점철되어 있을 뿐 분석이 없어요.
등장인물의 변화는 필연적이지 않습니다. 무슨 히어로 성장물도 아니고, 애초에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몇번이나 말씀드렸어요. 영화가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은 세계 그 자체이고, 기차의 은유는 무슨 대단한 에니그마도 아니니 소수 지식인의 향유물이라 판단하는 건 과장입니다. 오히려 누가 봐도 알 수 있게끔 적나라하게 상징성을 드러내고 있죠.
사유의 과정을 등장인물이 일일히 고뇌나 울부짖음 방황으로 드러낼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래야 하죠? 애초에 설국열차는 등장인물이 주가 아니라 세계 전체를 투영하는 거고 그 모순과 부조리는 기차라는 세계를 바라보는 데서 관객이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 부분인데요. 등장인물이 알아채지 못해도 사회의 부조리를 알리는 극들은 얼마든지 있죠. 지아 장 커의 천추정이 대표적으로 그런 작품이구요. 관객이 언제나 등장인물에 자신을 투영해서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바깥에서 인형극을 바라보는 것처럼 관찰자로서 전달자인 등장인물을 바라보죠. 이를테면 울프 오브 월 스트릿에서 스콜세지는 관객이 주인공에 자신을 투영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거리감을 두고 인물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까발리죠. 영화 속 인물 중에서 그 누구도 돈의 중독성과 이를 쫓는 군상들의 허상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하지마 그 부조리를 관객은 충분히 알아챌 수 있죠. 설국열차 역시도 관객이 등장인물이 되어서 일일히 사건의 일희일비를 느끼며 성장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차와 인형을 가지고 봉준호가 벌이는 인형놀음을 구경하는 거죠.
3. 그 예시가 비교 대상과 합치하지 않기 때문이죠. 소재의 비슷함, 사회 문제의 인식과 제기, 부조리의 고발 같은 주제의 큰 틀만 가지고 완전히 다른 작품을 동일 선상에 있는 것처럼 설명하려 하는 시도는 맞지 않아요.
4. 설국열차의 모순이 왜 명확하지 않나요? 계급이 나뉘어져 있고 하층의 사람들은 늘 생존의 위협을 당해야 하는 문제가 뚜렷하지 않습니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 끝칸에 도달했지만 혁명 시도 자체가 결국 제도와 구조 자체를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오면서 더 깊고 큰 모순이 나오는거죠. 할머니님은 계속해서 커티스란 인물의 내면에서 그 동기를 찾으려고 하니까 이게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겁니다. 맞아요, 보통 사람이 보면 설마 다 같이 잘 살자고 혁명 일으킨 놈이 저렇게까지 다 죽게 일을 벌일까? 라고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커티스의 절규와 남궁민수의 회유를 듣는 걸 보면서 관객은 그 인물의 심리가 아니라, 여태껏 유지되어온 한 인물의 의지와 결심, 그리고 그 의지가 길을 잃고 막다른 곳에 처한 현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어떤 식의 결단이든 이루어지고, 거기에는 공멸이라는 선택지가 가장 유력하며 극적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인지합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살아왔고 무슨 생각을 하며 평소 성격은 어떻고....라는 부분은 부가적이에요. 어떤 공간, 사회적 구조 속에서, 선택과 운명을 두고, 한 인물의 동기와 목적이 결국 어떤 결과를 이루어내는가 하는 부분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플롯 중심의 스토리를 자꾸 캐릭터 중심의 스토리로 이해하는 건 설국 열차에 대한 오독이에요.
1-1. 이런 식의 접근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선형구조라면 캐릭터가 입체적이어야 한다 or 선형구조가 아니라면 캐릭터가 입체적일 필요가 굳이 없다 라는 전제를 가지고 영화의 완성도를 논하는 방법이 추상적이며 세세하지 못하다는 거에요. 하물며 같은 제작사에서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마블의 히어로물들도 분위기와 이야기가 제각기 다릅니다. 그런데 감독도 다르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그 방식도 다른데 왜 선형구조와 사유의 전달이라는 단 두개의 공통점을 가지고 비교를 해야 하나요. 작품 내적으로 분석해야죠.
제가 사례를 요구하는 건 용어의 정의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하기 위한 것이지 다른 작품과의 비교를 통한 장단점 찾아내기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성공했다, 실패했다는 가치판단의 주장을 근거로 쓰시는데 그건 할머니님의 자의적인 판단이지 분석이 아닙니다. 간단하게 다시 말씀드리자면 이창동이 시에서 했듯이 봉준호가 설국열차에서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건 스페이스 오뒷세이의 큐브릭만큼 스타워즈의 루카스도 어쩌구 저쩌구 해야 한다는 단순 비교에 불과해요. 카체이스가 나오니까 레픈 감독의 드라이브가 패스트 앤 퓨리어스처럼 격렬한 속도감을 내뿜어야 할까요? 간첩이라는 소재가 겹치고 남북 관계의 모순을 그리고 있으니 쉬리의 강제규처럼 붉은 가족의 이주형도 똑같이 해야 할까요? 캐릭터의 입체성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는 작품마다 다릅니다. 지금 할머니님의 주장은 몇가지 겹치는 부분이 있으니 비교대상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전제에 문제가 있습니다.
1-3. 그래서 제가 그 정의가 여전히 모호하다는 걸 인셉션과 판의 미로의 예시를 다시 들며 이야기했습니다.
2. 여기서도 역시 할머니님은 일반적인 사회적 주제 영화의 공식을 기준으로 설국열차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장르적 공식이나 특징을 반드시 따라야 할 이유는 없어요. 안하고 싶으면 안하는 겁니다. 개인의 고통을 사회적 고통으로 확대하는 감독도 있을 것이고 싸늘하게 사회 속 개인의 고통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감독도 있을 겁니다. 이 부분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실패했다\" 같은 가치판단으로 점철되어 있을 뿐 분석이 없어요.
등장인물의 변화는 필연적이지 않습니다. 무슨 히어로 성장물도 아니고, 애초에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몇번이나 말씀드렸어요. 영화가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은 세계 그 자체이고, 기차의 은유는 무슨 대단한 에니그마도 아니니 소수 지식인의 향유물이라 판단하는 건 과장입니다. 오히려 누가 봐도 알 수 있게끔 적나라하게 상징성을 드러내고 있죠.
사유의 과정을 등장인물이 일일히 고뇌나 울부짖음 방황으로 드러낼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래야 하죠? 애초에 설국열차는 등장인물이 주가 아니라 세계 전체를 투영하는 거고 그 모순과 부조리는 기차라는 세계를 바라보는 데서 관객이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 부분인데요. 등장인물이 알아채지 못해도 사회의 부조리를 알리는 극들은 얼마든지 있죠. 지아 장 커의 천추정이 대표적으로 그런 작품이구요. 관객이 언제나 등장인물에 자신을 투영해서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바깥에서 인형극을 바라보는 것처럼 관찰자로서 전달자인 등장인물을 바라보죠. 이를테면 울프 오브 월 스트릿에서 스콜세지는 관객이 주인공에 자신을 투영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거리감을 두고 인물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까발리죠. 영화 속 인물 중에서 그 누구도 돈의 중독성과 이를 쫓는 군상들의 허상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하지마 그 부조리를 관객은 충분히 알아챌 수 있죠. 설국열차 역시도 관객이 등장인물이 되어서 일일히 사건의 일희일비를 느끼며 성장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차와 인형을 가지고 봉준호가 벌이는 인형놀음을 구경하는 거죠.
3. 그 예시가 비교 대상과 합치하지 않기 때문이죠. 소재의 비슷함, 사회 문제의 인식과 제기, 부조리의 고발 같은 주제의 큰 틀만 가지고 완전히 다른 작품을 동일 선상에 있는 것처럼 설명하려 하는 시도는 맞지 않아요.
4. 설국열차의 모순이 왜 명확하지 않나요? 계급이 나뉘어져 있고 하층의 사람들은 늘 생존의 위협을 당해야 하는 문제가 뚜렷하지 않습니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 끝칸에 도달했지만 혁명 시도 자체가 결국 제도와 구조 자체를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오면서 더 깊고 큰 모순이 나오는거죠. 할머니님은 계속해서 커티스란 인물의 내면에서 그 동기를 찾으려고 하니까 이게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겁니다. 맞아요, 보통 사람이 보면 설마 다 같이 잘 살자고 혁명 일으킨 놈이 저렇게까지 다 죽게 일을 벌일까? 라고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커티스의 절규와 남궁민수의 회유를 듣는 걸 보면서 관객은 그 인물의 심리가 아니라, 여태껏 유지되어온 한 인물의 의지와 결심, 그리고 그 의지가 길을 잃고 막다른 곳에 처한 현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어떤 식의 결단이든 이루어지고, 거기에는 공멸이라는 선택지가 가장 유력하며 극적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인지합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살아왔고 무슨 생각을 하며 평소 성격은 어떻고....라는 부분은 부가적이에요. 어떤 공간, 사회적 구조 속에서, 선택과 운명을 두고, 한 인물의 동기와 목적이 결국 어떤 결과를 이루어내는가 하는 부분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플롯 중심의 스토리를 자꾸 캐릭터 중심의 스토리로 이해하는 건 설국 열차에 대한 오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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