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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6/03/26 07:12:13
Name   큐리스
Subject   제3화: 2002년 겨울, 아무도 먼저 가려 하지 않았다
GOP라는 건 General OutPost의 약자다. 일반전초. 말이 좋아 '일반'이지,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철책 바로 앞에 소대 단위로 붙어사는 곳이다. 백골부대였다. 철원 최전방, 남방한계선 철책이 코앞인 소초. 중위 계급장을 달고 3소대장으로 배치됐을 때, 나는 이미 소위로 1년을 보낸 뒤였다. 2001년 FEBA에서 1년을 보내고 GOP로 올라왔다.
처음 GOP에 올라왔을 때 느낀 건 하나였다. 조용하다는 것. 그런데 그 조용함이 평화로운 조용함이 아니었다. 뭔가 꽉 눌려있는 듯한 조용함이었다. 철원 평야를 지나 능선을 타고 올라오면 소초가 나오는데, 단층 콘크리트 구조물에 주변은 철망이 겹겹이 둘러쳐져 있다. 그 너머로 DMZ. 그 너머로 북한. 이론상 그렇다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근무 구조는 단순했다.
전반야와 후반야로 나눈다. 전반야는 EENT, 해가 지기 30분 전부터 야간 초소에 투입돼 자정까지 근무한다. 후반야는 자정부터 BMNT, 해가 뜨기 30분 후까지다. 각 조는 2인 1조, 사수-부사수로 구성된다. 전반야 다섯 조, 후반야 다섯 조.
근무 시에는 단독군장이다. 실탄 75발, 수류탄 2발이 지급된다. K3 부사수는 탄통 두 개. 유탄 사수는 유탄 아홉 발. 민간인들이 생각하는 군대 근무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게 매일 반복된다. 하루도 쉬지 않고.

초소는 63번부터 67번까지 늘어서 있었다. 각 초소와 OP는 유선으로 연결돼 있다. 전화기 하나, 버튼 하나. 초병이 버튼을 누르면 OP에서 '띠딕' 소리가 난다. 살아있다는 신호다. 교대 시간마다 순서대로 한 바퀴 돈다. 63번, 64번, 65번, 66번, 67번. 이게 정상이면 그날 밤은 평범하다.
나는 소대장으로서 96K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OP와 나 사이의 통신 수단이다. 초소에서 직접 나에게 연락할 방법은 없다. 유선 버튼과 전화기는 오직 초소와 OP 사이에서만 작동한다. OP가 감지하고, OP가 96K로 나에게 알린다. 그게 흐름이다.

66번 초소 이야기는 처음부터 분위기가 달랐다.
소대원들이 말을 잘 안 했다. 이유를 물어봐도 "그냥요" 하고 얼버무렸다. 60번대 초소들 중에 66번은 야간에는 거의 운영하지 않는 가초소(임시초소)였다. 위치상 산 사면이 꺾이는 지점이라 시야가 좁고, 주간에만 관측 목적으로 썼다. 밤에는 빈 초소다. 전화기와 버튼만 달랑 놓여 있는.
그 아래 철주번호 3527 구간은 침투 이력이 있는 지점이었다. 수풀이 우거지고 계곡이 내려오는 지형이라 접근이 용이하다고 인수인계 때 들었다. 그래서 그 구역은 항상 신경을 곤두세웠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그 구역이 더 묘하게 느껴졌다. 나무들이 설화를 입고 서 있고, 달빛이 철책 위에 반사되면 흰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 밤에 66번을 지나치다 보면 괜히 걸음이 빨라진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소대원들 모두가 그랬다.
새벽 3시 17분.
허리춤에서 치직 소리가 났다.
96K였다.
"소대장님. OP입니다."
잠결이었다. 후반야 근무자들이 투입된 지 세 시간쯤 됐을 때였다.
"어."
"66번에서 신호가 들어왔습니다."
잠이 확 깼다.
66번은 가초소다. 야간에 운영하지 않는다. 거기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는 초소에서 버튼이 눌렸다는 뜻이다. 고장이 아닌 이상 누군가 눌렀거나, 아니면 아무도 안 눌렀거나, 둘 중 하나다.
"다시 확인해봐."
"네. 확인하겠습니다."
30초쯤 침묵. 그리고 다시 96K.
"방금 또 들어왔습니다. 간격은 약 3초."
나는 방한복을 입고 96K를 허리에 찼다. 원칙상 전령을 데리고 가야 했다. 2인 1조. 이 일병을 깨울까 잠깐 생각했다. 근데 새벽 3시다. 전반야 마치고 겨우 누운 애다. 소대장은 원래 혼자도 많이 다녔다. 그냥 나섰다.
소초 문을 열고 나왔다. 영하 20도. 숨이 바로 하얗게 피어올랐다. K1를 들고 순찰로를 따라 걸었다. 발밑에 눈이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냈다. 달은 없었다. 손전등을 켜면 위치가 노출된다. 끄고 걸었다. 눈이 쌓인 덕에 그나마 희미하게 길이 보였다.
63번 초소를 지났다. 64번. 그리고 65번 앞을 막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다.
"거기 서!"
소리가 철책선을 타고 퍼졌다.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65번 초소 초병이었다. 단독군장에 K2를 겨누고 있었다. 칠흑 같은 새벽, 방한복을 두껍게 껴입은 사람 하나가 손전등도 없이 혼자 순찰로를 걸어오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찰칵.
조정간이 안전에서 단발로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무섭다기보다, 기분이 더러웠다.
빈 가초소 신호 확인하러 나왔다가, 내 부하 총구 앞에 서 있는 게 어이가 없었다.
이게 뭔 개죽음인가.
실탄이 장전된 K2다. 긴장한 초병이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고 있다. 영하 20도 새벽에.
"나야! 3소야!"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왔다.
"...소대장님?"
"어! 나! 김유나 중위!"
침묵이 흘렀다. 길게 느껴졌다.
"...암구호."
암구호를 댔다. 맞았다. 그제야 초병이 천천히 총구를 내렸다. 나는 손을 내리면서 심장이 아직도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초병 얼굴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소대장님... 혼자 오시면 어떡해요."
할 말이 없었다.
"미안. 가봐야 해서."
66번으로 향했다. 안개가 허리까지 차올라 있었다. 계단 앞까지 다가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전화기가 있었다. 버튼이 있었다. 버튼 위에 먼지가 앉아 있었다. 눌린 흔적이 없었다. 전화기를 들었다. 아무 소리도 안 났다. 96K를 꺼냈다.
"OP, 나 지금 66번 안에 있어. 아무것도 없어."
"소대장님... 소대장님 들어가시자마자 신호 멈췄습니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버튼을 다시 봤다. 먼지. 전화기를 다시 봤다. 침묵. 초소 밖을 봤다. 안개와 눈과 철책.
설명이 안 됐다. 고장이라고 하기엔 두 번 연속 정확한 간격으로 들어왔다. 누군가 눌렀다고 하기엔 흔적이 없었다. 나는 문을 닫고 나왔다. 소초로 돌아오는 내내 뒷목이 서늘했다. 영하 20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65번 초소 앞을 다시 지나쳤다. 초병이 조용히 경례를 했다. 아무 말도 안 했다. 나도 아무 말도 안 했다.
다음 날 아침 소대원들한테 얘기했더니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거기 원래 그래요."
누군가 그렇게 말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더 이상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났을 때, TOD 무전이 왔다.
TOD는 열상감지장비다. 열을 감지해 형체를 잡아낸다. 한겨울 영하 20도 새벽에 사람이 있으면 선명하게 잡힌다. 그 무전이 온 건 12월 초였다.
"소대장님. TOD에서 3527 지점 계곡 근처에 인원 세 명 감지됩니다."
철주번호 3527 구간 아래쪽 계곡이었다. 66번 초소에서 내려다보이는 방향이었다.
"이동 중이야, 정지해 있어?"
"정지해 있습니다. 근데... 열원이 약합니다."
열원이 약하다는 게 이상했다. 영하 20도에서 체온이 있으면 TOD에 선명하게 잡혀야 한다. 약하다는 건 뭔가 다르다는 뜻이었다.
나는 혼자 나갔다. 3527 철주지점아래는 물이 흐르고 있다. 얼음위로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 손전등을 켜고 내려갔다. 발자국이 있으면 바로 확인할 수 있다. 눈 위에 발자국은 숨길 수가 없다.
계곡 입구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발자국이 없었다. 짐승이 지나간 흔적도 없었다. 그냥 눈이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눈.
96K를 켰다.
"OP, 지금 3527 철주앞이야. 아무것도 없어. TOD 지금 어때?"
잠깐 침묵이 흘렀다.
"소대장님... 소대장님 올라가시기 5분 전에 사라졌습니다. 세 명 다."
손전등 불빛이 눈 위에 반사돼 하얗게 빛났다. 바람 소리만 있었다. 사방이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철수."
소초로 돌아오는 길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도 잘 되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그 뒤로 3527 철주쪽으로 갈때는 다들 아무말이 없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죽음이다. 조정간 단발 소리와 함께.

두 번째 죽음은 그로부터 2년 뒤, 푸켓 해변에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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