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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6/03/24 21:36:04수정됨
Name   큐리스
Subject   제2화: 1998년 가을, 그냥 편할 것 같아서
1998년 가을, 대학교 2학년

심리학과 2학년 2학기였다.
학교 게시판에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학군단 모집. ROTC. 사진 속 군인들이 폼 나게 서 있었다. 어깨에 계급장이 반짝였다. 아래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대한민국 육군 학생군사교육단.
나는 그 포스터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어차피 가야 하는 거라면 조금 편하게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소대장으로 가면 조금 다르겠지.
그냥 편할 것 같았다.
지원서를 냈다.
면접 날,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옆자리 녀석이 슬쩍 물었다.
"전공이 뭐예요?"
"심리학이요."
"이름이 뭐예요?"
"김유나요."
녀석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183cm. 77kg. 영락없는 사내였다.
"...남자가 유나예요?"
평생 들어온 질문이었다. 초등학교 첫날부터 지금까지.
"네. 김유나입니다."
면접관이 똑같은 걸 물었다.
"심리학과 학생이 왜 학군단에 지원했나요?"
"사람을 이끌어야 하는 자리잖아요. 심리학이랑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면접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통과됐다.
합격 통보를 받은 건 학교 앞 분식집에서였다. 재민이가 떡볶이를 먹다가 전화기를 봤다.
"합격이면 한턱내야 하는 거 아니냐."
"내가 왜."
"네가 지원한 거잖아."
"어차피 둘 다 군대 가잖아."
"나는 알아서 가는데 넌 자원했잖아."
할 말이 없었다. 떡볶이를 더 먹었다.

2001년, FEBA

임관하고 첫 배치는 FEBA였다.
전방전투지역. 소위 계급장을 달고 첫 발령을 받은 곳이었다. 2001년 한 해를 거기서 보냈다.
별일 없었다.
2002년 겨울, 강원도 철원 GOP
중위를 달았다. 새 배치는 강원도 철원 GOP였다.
GOP. 일반전초. 철책선 바로 뒤편이었다. 북한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곳이었다.
1월이었다. 기온은 영하 20도였다. 바람이 불면 체감 온도는 더 내려갔다. 완전군장을 하고 철책 순찰을 나가면 코털이 얼었다. 눈썹도 하얗게 됐다.
첫날 소대에 들어서자마자 소대원들이 줄을 맞춰 서 있었다. 인원 점검을 하는데 막내 이 일병이 작은 목소리로 옆 동료한테 물었다.
"야, 소대장님 이름이 뭐래?"
동료가 속삭였다.
"김유나래."
이 일병이 잠깐 멈췄다.
"...진짜?"
그날부터 시작됐다.

아침 일과, 그리고 솔선수범

GOP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푸세식이었다. 영하 20도짜리 겨울에 푸세식 화장실이 버틸 리가 없었다. 얼어붙으면 넘쳤다. 넘치면 쌓였다. 쌓이면 탑이 됐다. 아침마다 그게 거기 있었다.
첫날 아침, 소대원들이 그 앞에서 눈치만 봤다. 누가 먼저 삽을 들지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당연했다.
나는 삽을 들었다.
소대원들이 아무 말도 못 했다. 소대장이 직접 삽을 든 거였다.
한 번 찍었다. 두 번 찍었다.
그렇게 첫날은 내가 직접 부쉈다.
다음날 소대원들을 불렀다.
"오늘부터 한 분대씩 일주일씩 관리한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소대장이 직접 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분대별 순환 관리 체계가 만들어졌다.
저녁에 이 일병이 조용히 물었다.
"소대장님, 이름 진짜 유나예요?"
"응."
"...여자 이름 아닙니까?"
"남자도 쓸 수 있어."
"근데 왜 하필 유나를..."
"부모님이 예쁜 이름 지어주고 싶으셨나 보지."
소대원들이 웃었다. 그날부터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나 소대장님. 딱히 막지는 않았다. 막아봤자 더 불렀다.
어느 날은 정색하고 말했다.
"소대장님이라고만 해."
이 일병이 차렷 자세로 대답했다.
"유나 소대장님, 알겠습니다."
소대원들이 동시에 웃음을 참았다. 어깨가 들썩였다.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야간, 기타 그리고 암구호

GOP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1소대장이 기타를 잘 쳤다. 소위였다. 어딘가에서 기타 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3소대장 중위였고, 그는 1소대장 소위였다. 계급으로 따지면 내가 높았다. 상관없었다. 기타 앞에서는 잘 치는 사람이 선생이었다.
기타를 하나 구했다. GOP 반입 금지 물품이었다. 어떻게 들여왔는지는 쓰지 않겠다.
어느 날 밤, 기타를 들고 나섰다. 3소대 섹터를 벗어나 산 능선을 넘으면 1소대 섹터였다. 체력은 자신 있었다. 영하의 날씨에 기타를 들고 능선을 넘는 게 문제는 아니었다.
능선을 넘었다. 1소대 섹터였다. 거의 다 왔다 싶었다.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1소대 초병이었다. 어둠 속에서 능선을 넘어오는 인원을 발견한 거였다.
나는 멈췄다.
"암구호."
암구호를 댔다. 정확했다.
초병이 잠깐 침묵했다. 그래도 총을 내리지 않았다.
"...한 번 더요."
다시 댔다. 똑같이 정확했다.
또 침묵이 흘렀다.
"그거 뭐예요."
"...기타."
"왜 들고 오세요."
"배우러 왔어."
"네?"
"3소야. 내려."
총이 내려갔다. 초병 얼굴에 뭔가 복잡한 표정이 지나갔다. 밤중에 기타 들고 능선 넘어온 타 소대 소대장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규정에는 없었을 거였다.
그렇게 넘어갔다.
1소대장 소위한테 기타를 배웠다. 중위가 소위한테 배우는 거였다. 몇 번을 그렇게 다녔다. 능선을 넘을 때마다 1소대 초병들은 암구호를 확인했다. 나중에는 기타 소리가 나면 그냥 넘겨줬다.

새벽 4시, 보아 No.1

야간 순찰이 끝나고 내무반으로 돌아왔다. 새벽 4시였다. 잠이 잘 오지 않는 밤이었다.
기타를 꺼냈다. 배운 거 연습이나 해야지 싶었다. 침상 한쪽 구석에 앉아서 최대한 작게 줄을 튕겼다.
이 일병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소대장님, 뭐 치세요?"
"연습."
"무슨 노래요?"
"보아."
"No.1이요?"
"응."
이 일병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같이 해도 돼요?"
"자야지."
"못 자고 있었어요."
나는 한참 생각했다. 새벽 4시였고, 내무반 불은 꺼져 있었다. 소대원들이 침상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낮게, 최대한 낮게 줄을 짚었다.
You still my number one, 날 찾지 말아죠...
이 일병이 낮게 따라 불렀다. 안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영하 20도 GOP 철책선 새벽 4시에 "날 찾지 말아죠"가 흘렀다.
철책선에서 날 찾지 말아죠를 부르는 게 웃겼지만, 그 순간에는 그냥 노래였다.
한 소절쯤 됐을 때 옆에 누운 오 상병이 몸을 뒤척였다.
"소대장님, 저도요."
자는 줄 알았던 오 상병이었다.
"너 일어나 있었어?"
"네."
"왜 말 안 했어."
"말하면 혼날 것 같아서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한 번만 더."
다시 전주를 눌렀다. 셋이서 조용히 따라 불렀다. 침상에 나란히 앉아서, 부대 규정 같은 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새벽 4시였고, 추웠고, 노래가 흘렀다.

2002년 6월, 철책선의 함성

2002년 여름이 왔다.
한일 월드컵이었다.
GOP에서도 경기를 볼 수 있었다. 작은 TV가 있었다. 소대원 전원이 주황색 작업복을 입고 TV 앞에 모였다. 우리가 가진 가장 밝은 색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렇게 입고 앉았다.
한국이 골을 넣었다.
온 철책선에 함성이 울려퍼졌다.
영하 20도에 얼던 그 철책선에서, 한여름에 소리가 터졌다. 옆 소대에서도 들렸다. 멀리서도 들렸다. 북쪽 방향으로 함성이 날아갔다.
경계태세가 B급으로 올라갔다.
그래도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날의 함성은 지금도 생각난다. 잊을 수가 없다.

봄, 여자친구의 방문

봄에 여자친구가 면회를 왔다.
GOP는 외부인 출입이 안 됐다. 방법이 있었다. 보급 트럭이 드나들었다. 트럭 짐칸에 올라타면 됐다.
운전병한테 말을 꺼냈다.
"있잖아, 이번에 트럭 올 때."
운전병이 눈을 가늘게 떴다.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요."
"내가 책임진다."
"진짜요?"
"응."
운전병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가져온 거 나눠주시면 돼요."
그렇게 했다.
여자친구가 트럭 짐칸에서 내렸다. 표정이 조금 굳어 있었다. GOP 안의 공기는 달랐다. 조용하고 팽팽했다. 바람이 철책에서 내려왔다.
잠깐이었지만 만났다.
그 여자친구랑은 나중에 헤어졌다. 군용 트럭까지 동원했는데.
헤어질 때 여자친구가 말했다.
"오빠 이름이 유나라서 좋았어. 특별한 것 같았거든."
특별한 이름으로도 부족했나 보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GOP의 하루하루는 비슷했다.
분대별 화장실 관리. 철책 순찰. 야간 근무. 기타 연습. 그 사이사이에 소대원들이 뭔가를 했고, 웃었고, 침상에서 잠들었다.
영하 20도의 겨울이 지나고, 월드컵의 여름이 지나고, 여자친구가 다녀간 봄이 지났다.

GOP에는 아직 이야기가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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