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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12/31 17:37:51
Name   트린
Subject   또 다른 2025년 (18)
18.

두 사람은 연단에 나온 사람들의 서툰 연설과 구호 속에 파묻혔다. 민주, 자유, 인권 등 꼭 필요하지만 2025년 현재는 참 먼 가치들이 귓가를 떠돌았다.  
수진은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의 행보를 구상하는 모양이었다. 보민은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일어서서 파란색 플라스틱 간이 화장실로 향했다. 남자 셋, 여자 다섯 개로 각 칸마다 줄이 거의 30미터는 넘어갔다.
줄을 오래 서면서 보민은 자연스레 주변의 다양한 잡담을 들었다.

"아까 떡볶이랑 오뎅 주던데 확실히 따뜻한 게 좋아."
"커피 한 잔 더 마시고 싶다."
"또 화장실 오려고? 참으셔."
"밤에 진압 들어온다는 얘기가 있던데..."
"인원도 줄고 허술해지니까 아무래도 가능해."
"군인들 속에 119 구급차 대기하던데 여기서 낙상한 사람 있을 때 출동을 안 했대요."
"에이, 설마."
"진짜래요. 그 차는 아예 안 움직이고, 따로 한 대가 더 왔대요."
"차로 200미터 거리를 안 온 거잖아."
"그렇죠."
"아니, 지들은 무슨 귀족이야? 다칠 때 바로 치료하려고 응급차를 미리 예약해 놔?"
"그러게 말이에요. 위생병이니 그런 사람들도 있을 텐데 119까지 독차지하는 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어요."

보민은 신기한 일도 다 있다 생각하며 일을 마쳤다. 그리고 앉아 있는 것보다 서 있는 게 좋기도 하고, 궁금증도 일어 사람들 사이에 숨어 연단을 살폈다.
과연 한 30분 지켜보니 수진의 말대로 의심되는 자들이 연단 주변에 포진했다. 추위를 막기보다는 뛰는 데 특화된 편한 신발, 남들보다 잘 터지는 핸드폰, 유도로 단련돼 남들보다 굵은 손가락을 가진 남자들이 보초 서듯 원형을 그리며 걸어다녔다. 대놓고 티가 나는 몇 명은 주최측이 항의하자 도망가듯 사라졌지만 얼마 안 가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

'어지간히 우리를 잡고 싶은 모양이군.'

새삼 여기까지 예측한 수진이 존경스러워졌다.
보민은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안고 자리로 돌아왔다. 수진은 마스크 너머 멍한 눈으로 그를 맞이했다.

"어서와. 화장실 줄 길지?"
"그렇더라. 별 일 없었지?"
"응."
"여기서 아프면 힘들겠다."
"그게 무슨 말이야?"

보민은 화장실 앞에서 무심코 들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연단 앞 정보과 형사들의 매복이 주 화제였는데 수진은 그건 건성으로 듣는 눈치였다.

"119 구급차가 계엄군 사이에 서 있다고?"
"그렇다데."

수진은 벌떡 일어나더니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보민은 맡은 자리가 보도 연석 근처라 앉아 있기 편해 살짝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의 경중은 확실했다. 그녀가 움직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보민은 수진을 따라 인파를 뚫고 앞으로, 시위 조직위가 계엄군을 조준한 스피커가 달린 크레인 앞에 도착했다.
정보과 형사들이 모인 연단이 얼마 멀지 않아 보민이 긴장하는 사이, 수진은 운전석에서 소음 차단 헤드폰을 낀 크레인 차주를 만났다.
어느새 슬픈 표정이 된 수진은 큰 소리로 오십대 후반 남성인 차주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저씨, 크레인 꼭대기에 카메라 있죠?"
"있죠? 충돌 방지용.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왜요?"

수진은 꼬깃한 돈 10만 원을 꺼내 차주에게 보여주고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저기 군인들 중에 저희 오빠가 있는 것 같아요. 평소 사이는 안 좋은데 확인하고 싶어요."
"확인요?"
"있으면 시위 그만하려고요."
"아."

차주는 머리를 긁다가 올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수진은 발판을 밟고 올라가 10만 원을 내밀었다. 차주는 네비 옆의 화면 하나를 켜줬다. 부팅 후 차량 후방 카메라처럼 크레인 꼭대기를 중심으로 가상의 그리드가 충돌을 방지하도록 고안된 화면이 수방사가 주축이 된 계엄군 전방 조를 비추었다. 그들은 밑에 바퀴가 달려 단체로 이동도 고정도 쉽고, 철제 프레임을 펼치면 바리케이드도 되는 강화 플라스틱 방패 벽 뒤에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확대도 되나요?"
"4k니 되죠. 어디 보실 거예요."
"뒤쪽요. 119 근처요."
"보자."

차주는 그 말대로 화면의 아이콘을 조작해 화면을 이동시키더니 119 구급차 근처를 확대했다. 수진은 화면에 들어갈 것처럼 뚫어지게 쳐다봤다. 관찰 시간은 어느새 10분을 넘었다. 처음엔 뭐라 하려던 차주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다른 패드를 꺼내 저장한 넷플릭스를 감상했다. 15분이 지나자 수진이 외쳤다.

"오빠!"
"있어요?"

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울한 태도로 인사하고 크레인 조수석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차주보다 수진을 더 잘 아는 보민은 그녀가 크게 흥분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충분히 멀어진 뒤 보민이 물었다.

"뭐가 있었어?"
"완전 홈런이야, 홈런. 로또도 이런 로또가 없어. 보민 씨 우린 살았어. 하늘이 우릴 돕고 있어."

좀 전까지 침울하고 멍했던 수진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녀의 밝은 목소리에 보민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다행이네. 근데 뭐가 어쨌길래?"
"정보사는 첩보 영화처럼 잠복 시 위장 차량을 많이 써. 아무래도 환경에 녹아야 하니까. 그런데 그 중 가장 많이 쓰는 게 뭔지 알아?"

보민은 이제야 이야기 흐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구급차."
"정답. 어디에 있어도 상관없고, 모두가 비켜주고. 그 이야기 들었을 때 딱 정보사다 싶었어. 그래서 계속 봤더니 우리 부대 팀장인 김기현 소령이 있어."

수진은 열띤 태도로 보민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세종로 119 안전 센터 일명 종로소방서에서는 두피 열상 사고를 신고받고 최민석 소방위의 4호 구급차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평소엔 경력 나이 성별 계급이 달라도 서로 존중하며 함께 오래 근무한 사이라 농담이 난무하는 팀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20만 명이 운집한 이유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시위대끼리 밀려서 넘어지는 일은 몇 없고 대체로 계엄군이 40여 명 정도 고막을 터뜨리거나, 머리를 깨거나, 안면을 찢었다. 이번 건도 그런 것 같았다.  
막내인 박준영 소방사는 맞은편 김서윤 소방교에게 바나나와 단백질 바를 건넸다.
서윤이 피식 웃었다.

"저녁 대신이다?"
"오늘밤이 고비잖아요. 먹다가 나가다 먹다가 나가다 하겠죠."

평소 같으면 불길한 소리 말라고 민석이 한 마디 했을 텐데 잠잠했다. 담담한 인정이었다.
119 구급차가 사이렌을 켜고 진입하자 차들은 어찌됐든 조금씩 붙어서 차선을 내주었다. 사태의 심각성에 동의하는지 평소보다 차량들의 반응이 빠릿했다. 안 그래도 빠른 대응이 필수인 출혈 관련 사건인지라 반가운 현상이었다.
곧 광화문으로 접어들자 도로를 가득 메운 인파가 그들을 맞이했다. 50번 가깝게 들락날락거린 상황, 노란 조끼를 입은 주최측 인사 10여 명이 익숙한 태도로 경광등을 휘두르며 응급차 좌우에 도열해 함께 걸었다.
민석이 일반인임을 감안해 풀어서 물었다.

"머리에서 피가 많이 나는 환자 때문에 왔는데 텐트로 가는 거죠?"

신고자가 여기 의료 지원팀이어서 하는 질문이었다.

"네, 대기 중이랍니다!"
"알겠습니다. 인도해 주세요."

맨앞의 두 명은 무전기를 쓰며 더 앞으로 뛰어갔다. 그들은 곧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준영이 말했다.

"심한가 봐요."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보통은 알아서 처리하고 끝내는데."
"근데 신기하다 그쵸? 계엄령인데 이제 대규모 시위도 하고."
"초반엔 바로 총 맞았겠지."
"맞아요. 장갑차 돌아다니고 장난 아니었죠."  

비교적 점점이 흩어졌던 초반과 달리 중간쯤 들어가자 줄을 맞춰 앉는 사람들의 공간이 나타났다. 무전기를 든 사람들의 조치에 힘입어, 도열해 앉은 사람들 한 중간에 차 한 대 지나갈 정도의 공간은 만들어졌다. 방석과 팻말, 구호가 적힌 종이를 든 사람들이 서서 걱정 또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걷는 속도여도 끊임없이 전진한 결과, 구급차는 의료 본부 텐트 앞에 섰다.
환자는 담요를 깐 들것 위에 누워 있었다. 그는 큰 덩치에 이십대 후반 내지는 삼십대 초반 남자였다. 누구에게 심하게 맞았는지 얼굴이 퉁퉁 부은 상태에서 오른쪽이 엄청난 출혈을 보였다. 피가 담요, 옷깃, 들것, 바닥까지 물들였다.
준영이 중얼거렸다.

"아이고."

처치는 1급 응급 구조사 자격증이 있는 서윤이 전담하였다. 준영은 서윤이 집중력을 발휘하라고 묵직한 구급 가방은 두르고, 경추 보호대와 휴대용 산소통은 바퀴 달린 침대에 던진 뒤 차 밖으로 끌어냈다.
서윤은 가장 먼저 텐트에 들어가 두꺼운 거즈로 상처 부위를 꽉 누르며 물었다.  

"선생님, 제 말씀 들리나요?"
"들려요."

서윤은 한 손으로 펜라이트를 켜 동공을 확인했다. 그 다음 손가락을 들었다.

"눈으로 따라오세요."
"네."

다행이었다. 동공이 빛에 반응하고, 따라오는 걸 보니 양쪽 안구는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환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통스러운 듯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반 박자 느리게 손가락을 좇았다.
서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어지러우세요?"
"네... 속이 울렁거려요..."  
"어떻게 이렇게 다치신 거예요."

보호자인 듯한 마스크 차림의 젊은 여자가 안절부절하는 태도로 말하려는데 옆에 의료 지원팀의 간호사가 격앙된 말투로 외쳤다.

"군인들이 돌을 던졌대요!"
"...네, 맞아요."

뇌진탕으로 판정한 서윤은 침대를 펼치던 준영에게 외쳤다.

"반장님, 경추 보호대 채워 주세요. 이송합니다."
"네!"

준영이 남자에게 경추 보호대를 채우는 동안 민석이 구급차에서 나와 들것 옆에 섰다. 처치가 끝난 뒤 두 사람이 그를 들것 그대로 올려 바퀴 달린 침대에 놓았다.
서윤이 물었다.

"보호자 분, 같이 가실 거죠?"

마스크 낀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구급차에 올라탔다. 민석은 강북삼성병원 응급의료센터를 목표로 네비를 세팅한 뒤, 멈췄던 사이렌을 다시 울렸다.
차가 인파 사이를 되짚어 가는 동안 여자가 롱 패딩 안을 뒤적거렸다. 서윤은 그녀가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려고 핸드폰이라도 꺼내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나온 건 무려 검은색 권총이었다.  
권총을 뽑은 여자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뒤로 더 빼서 뒷문에 찰싹 달라붙었다. 좁은 차내에서 총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여러분, 잠시만요. 죄송하지만 여기를 좀 봐주세요."

그녀는 세 사람에게 극단적인 상황을 마주치게 만들어서 되게 실례를 저지른다는 어투였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정으로 미안해하는 듯했다.
민석은 각도상 총이 잘 안 보였다. 서윤은 뭔가 현실 같지 않아서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사실 일반인이 총을 볼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하지만 서윤 옆 준영은 군대를 다녀와서인지 쏟아질 것 같은 충혈된 눈으로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였다.  

"운전사 분, 제게 총이 있는데 혹시 사고 날 수도 있어요. 사이렌 끄고 일단 차를 옆에 붙여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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