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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2/05/26 00:41:59
Name   양양꼬치(양라곱)
Subject   형의 전화를 끊고서, 진토닉 한 잔을 말았다.
가라 신자가 된지도 한참, 왜인지 변덕스럽게 책상에 앉아서 사도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몇 주 째 쓰지 않은 만년필의 잉크가 굳어진건 아닐까 잠깐 걱정했지만, 다행히 푸른 잉크는 아무 일 없이 종이에 젖었다.

나는 새롭게 번역된 사도신경을 좋아한다. 사실 [새롭게]라는 표현을 하기에는 벌써 십수년 전에 바뀌었지만. 특히 마지막의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나는 꼭 공-교회라고 띄어서 발음한다),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는 고백을 하나씩 꾹꾹 눌러서 기도하곤 했다.

그렇게 한 장을 쓰고서, 수 년 만에 성경을 펴고 잠시 읽기 시작한 순간, 전화가 왔다. 아직 11시가 지나지 않아서 핸드폰이 수면모드로 바뀌지 않았네, 하며 보니 형이었다. 이 시간에 전화한 것은 아마 술을 한잔 거나하게 하고 들어가는 길 일 것이다, 생각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끄러운 지하철 소리와 나른하게 취한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 최근의 형은 나의 여자친구 유무에 관심이 많았다. 지난 연인과 헤어지고 난 반년 전쯤이었을까, 항상 안부 카톡을 하면서 마지막에는 여자친구는 아직이냐고 묻곤 했다. 아니, 생각해보니 지난 연애 기간 중에도 자꾸 서울에 올라오라며, 여자친구랑 올라오면 술 한 잔 사주겠다고 채근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중에 한번 데려가겠다는 빈말로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었다.

“요즘 많이 힘들다. 진짜로 다 때려치고 여기서 멈추고 싶다.”

항상 천진한 형이 이렇게 이야기한건 정말 많이 지쳤다는 뜻이다. 아이 셋을 외벌이로 키우는 가장의 무게를 내가 어찌 가늠하겠나 생각하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아들의 미안함, 회사 생활의 힘듦, 이런 저런 이야기를 이어나가면서 다시 형은 나의 연애에 대해 물었다.

“너무 눈이 높은건 아니고?”

오늘 낮에 카톡하면서 형이 나에게 물었었다. 아니 뭐, 그럴수도 있고 하며 대화를 맺었는데, 통화하면서 그 생각이 났나보다. 이전의 연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그래도 요즘은 이래저래 만나려고 노력 중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이야기했다.

“나는 네가 자랑스러워. 어디가서 우리 동생 자랑 항상 하고 다닌다. 오늘도 같이 술마시면서 팀장님한테도 그랬어. 애가 공부 잘 해서 좋은 대학 가서, 좋은데서 일하고 있다고. 임마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너랑 나랑 온도차가 얼마나 심했는지 아냐. 좋은 사람 만나서 꼭 결혼해라. 그리고 나보다 더 좋은 조건에서 더 잘 키우고, 그렇게 살아”

맨정신에는 죄 안할것 같은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내면서, 마지막에는 딸래미한테 결혼하자고 이야기한 그 놈팽이를 없애버리겠다며 열을 냈다. 이제 유치원 다니는 애한테 할 소리인가 생각을 했지만, 나도 딸을 낳는다면 똑같았을 것 같아 맞장구치며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형과의 전화를 끊고, 뭔가 가슴에 나방이 날아다니는 것만 같아, 거실에 나와 진토닉을 한 잔 말았다.



나는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다. 내 인생의 전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열패감과 열등감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항상 부끄러웠고, 부족하다고 느꼈으며, 어느 하나 제대로 성취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는 것은 없으면서 오만했으며, 가진 것이 없는 것을 숨기기 위해 한껏 도망치기 바빴다.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나의 이런 모습을 조금 덜 드러내도록 훈련되었을 뿐, 다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나는 형에게 자랑스러운 동생이었을까.

최근에 방송에 나온 작가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MBTI는 내가 생각하는 나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나를 잘 아는 타인에게 나의 MBTI가 뭔지 한번 검사해보게 하라. 그 불일치 사이에서 나라는 사람을 더 입체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사실 내가 평면적으로 생각하는 부끄러운 나보다, 조금은 더 입체적으로 괜찮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어느새 두 잔째를 비우고 있다. 그리고 문득 내 프로필의 오래된 문구가 생각이 났다.
내가 원하는 삶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정말 그렇게, 나에게 정직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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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생님 화이팅!
  • 진토닉. 젓지 말고 말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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