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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3/03/08 17:48:17수정됨
Name   하마소
Subject   느긋함과 조급함 사이의 어딘가
출산예정일.

디데이를 맞이했지만 솜이가 나올 생각을 않는다. 조짐이 없던 그간의 시간과 이를 이해시키기 위해 동원했던 여러 시각자료 등을 통해 그날이 오면 모든 게 바로 시작되어 진행되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갖기로 하지 않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날 즈음엔 괜한 신경이 이런저런 걱정들을 건드려 자극하곤 한다. 아마도 경과를 물어보는 여러 지인들의 연락이 아니었다면 그런 자극도 훨씬 덜했겠지만, 나와 세상을 함께하는 고마운 이들의 감사한 정성이 내 나약한 마음을 외면하기 위한 도구로 쓰여선 곤란하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고맙게 넘겨야지. 다행히 '아직 출산이 안되었을 경우'을 전제하여 예정된 검진일이 다가와 마음을 한시름 덜 수 있게 됐다. 의지할 상대가 있다는 건 여러모로 편한 일이긴 하다.

검진을 하고, 유도분만일을 확정짓는다. 아이가 건강하다는 선생님의 덧붙임이 우리에겐 전부같은 이야기였지만 어쨌든 새로운 예정일, 아니 좀 더 구체적인 단어로... 집행일이 맞겠지. 그런 날짜가 생겼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다. 이제는 진정,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지게 될 경계면이 확정된 셈이니까. 집으로 돌아와 부리나케 출산가방을 재정비하고 마음 또한 다잡아본다. 모든 걸 미리 준비할 수는 없다는 달갑지 않지만 어쩔 도리도 없는 사실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수 차례 경험하며 깨달은 바 있기에, 그나마 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에 집중해본다. 앞으로, 늦어도 1주일이 지나면, 우리는 서로의 다음으로 가장 사랑하게 되리라 예정된 존재와 만나게 된다. 시작부터 함께하는, 가장 기다려온 만남이 이루어지는 날.

유도분만 예정일이 다가올 때까지 세상과 만나볼 의사를 전혀 내비치지 않는 솜이를 보며, 세상 태평한 아이구나 하는 생각이 물씬 든다. 답답하진 않은걸까, 하는 생각도 해보다가 문득 떠올랐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들은 품에서의 안락함과 다른 무정형의 공기가 주는 어색함, 그리고 나를 지탱해주지 않는 텅빈 공간이 연출하는 적막함으로 훼손되는 평온을 보호하기 위해 온 몸을 동여매야 한다는 내용의 영상 따위가 떠올랐다. 아마도 솜이에게, 그리고 모든 아기들에게, 태어난다는 건 그 자체로 삶을 향한 가장 험난한 도전일테지. 그러니 원한다면, 너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있으렴. 머지 않아 만나게 될테니까, 우리의 조급함으로 너의 안온을 어지럽히는 일은 없을거야. 단지 바라는 게 하나 있다면 엄마가 명치가 아프다고 하니까 그건 좀 조심해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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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렇다 할 변수 없이 당일이 되어 분만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생각보다 조금 더 무겁다. 산모에게 다가올 무거운 통증과, 이를 매개로 떠오를 '임박'이라는 단어가 으레 그렇듯 머릿 속에 자리하던 이미지였는데, 이를 연상하기 어려운 지금이 빈약한 상상력의 내게는 조금 무겁다. 다만, 분만실 입장을 앞둔 입원 수속에서 그간 염두해온 지침을 모두 변경하는 사모님의 모습은 잠깐 놓칠 뻔 했던 현실감을 다시 붙들게 만드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여기가 실전이구나. 이미지로만 존재해오던 것들이 구체화되는 순간. 구름과 하늘 빛으로 도색되어 누워있는 동안 언제나 밖을 떠올릴 수 있게 만들어둔 천장과, 마치 이를 비웃듯 구석 어딘가에 조그맣게 나있던 환기창이 눈에 들어온 그 때 느껴진 뭔가 모를 심란함은 어떻게 표현하기 어려운 무언가였지만, 같은 광경을 보며 이내 튀어나온 사모님의 한마디는 굳이 더 꺼낼 말이 필요없을만큼 명확했다. "방탈출 카페에 온 것 같네. 아이를 낳아야만 나갈 수 있겠어."

순산과 난산을 가늠하는 지표는 뭘까. 비정상 진통 상태로 자궁 경부의 개대, 태아의 하강이 이행되지 않아 분만의 진행이 실패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난산의 의학적 정의가 있지만, 출산까지의 여정이 그저 어렵고 고된 관문이었다는 감각만으로도 최소한 개인의 입장에서 난산이라 부르지 않을 이유는 딱히 없어보인다. 심지어 우리가 마주한 상황은, 앞서 기술한 의학적 정의에 정확히 부합하는 난산 상태에 해당했다. 하루 정도 달아둔 촉진제의 자극과 서서히 열려가는 자궁 경부에도 아랑곳 없이 내려올 생각을 않는 솜이를 향해 잠깐이지만 처음으로 답답함을 느껴버렸는데, 어떤 생각들은 품었다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자괴를 일으키곤 할테고, 내게는 이 답답함이 그런 생각이었다. 아이와 함께하기로 한 결심의 순간부터 줄곧 자연분만에 대한 강한 의지를 숨기지 않았던 사모님이었기에, 길어지는 통증과 꺾여야 할 의지를 눈 앞에 둔 입장의 심정이 그리 긍정적일 수는 없다. 다만, 함께하지만 결코 당사자는 될 수 없는 내게 허락되는 마음이 어디까지인 지 알 수 없는 건 이 답답함을 더욱 조급하게 몰아붙이는 문제. 그래서일까,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한 이후의 시간은 무척이나 빨리 흘러갔다.

분만실을 나서 수술실로 사모님을 비롯한 사람들이 분주히 이동하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막으로 가려진 시야 너머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정신이 없다. 무슨 생각에 빠질 새도 없이 금방 장막이 걷히고 입실 요청을 받는다. 이만큼 자라느라 조금 늦었다는 듯 활발히 움직이며 크게 울어대는 생각보다 커다란, 그럼에도 여전히 작디 작은 솜이와 처음 마주한 순간. 잠깐 눈을 돌려 여전히 수술대에 누워 봉합중인 사모님을 바라본다. 첫 순간을 함께하지 못한 게 아쉽다는 생각을 잠깐 하다, 탯줄을 자르고 영상과 사진을 정신없이 찍었다. 둘 다 건강하다는 말과 함께 수술실을 빠져나와 입원실로 향한다. 텅 빈 방안에 홀로 자리하자마자 정신없던 새 되짚지 못했던 온갖 생각들이 머릿 속을 일시에 어지럽히더니, 갑자기 나도 모르게 엄청난 기세의 눈물이 쏟아져 나온다. 어떤 마음에서일까. 그저 기쁨과 감격, 감사라는 마음이 투영된 울음으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그동안 해왔던 마음의 준비와, 다짐이 꺾이는 동안에도 가장 먼저 솜이의 무운을 신경써온 사모님의 처연함과, 잠깐 느꼈던 답답함에 대한 회한과, 앞으로 우리를, 나를 온전히 의지하게 될 한 소중한 생명체의 무게감같은 것들 전부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해소하는 그나마 유일한 방도라면 모든 걸 토해내듯 쏟아내는 오열이었으리라. 그렇게 얼마간, 쉬이 그치지 않는 울음을 토해냈다.

뒤늦게 수술실을 나온 사모님을 만나러 병상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도 자신의 일부였던 아기를 스스로의 세상으로 보내고 상당량의 체온을 잃어버린 탓일까, 온몸을 안타까울 정도로 떨며 힘들어하는 동안에도 솜이의 안부를 먼저 묻는다. 잘 태어났다는 말과 함께 동영상을 보여주자, 그제서야 안심한 듯 자신의 힘겨운 몸상태를 살피기 시작한다. 제어할 수 없는 통증과 오한으로 수 시간을 보내고, 그러고도 제대로 움직이기 조차 힘겨운 며칠을 보내는 동안 사모님은 언제나 새벽의 연락을 놓치지 않고 수유실로 향했다. 그 시간만이 솜이와 맞닿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그 몸을 일으킬 수 있는 건 엄청난 의지이거나, 혹은 의지 이상의 무언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라면 가능했을까. 나의 일부였던 존재와의 만남이라는 건 아마도 내가 평생에 걸쳐서도 알 수 없을 지 모를 감각이기에, 상상할 필요는 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강한 울림을 주는 무언가로 인지될 수 있게. 그러니 우선은 힘겨운 몸을 이끌고 엄마가 된 사모님을 잘 보필하는 것으로, 그 상상에 내 마음을 한발짝 보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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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퇴원을 하고, 조리원을 거쳐 이제는 세 사람이 함께하는 가득차 터져나갈 듯한 집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마도, 언젠가 그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행복한 시간들이 지금도 하루하루, 그렇게 흘러가고 있겠지. 불과 2주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 어떤 단서로도 경험한 바 없는 기쁨과 함께 삶의 전반을 쏟아내야 하는 무게에 의한 피로를 동시에 체험하고 있다. 그래서인가, 분명 기쁘고 행복한 시간들인데, 약간의 불안들이 우릴 갉아먹진 않을까 하는 우려들과 이따금 만나곤 한다. 꽤 오랜 시간 잠들지 않던 지난 밤의 솜이를 붙잡아 안으며 얼굴과 마음을 찡그릴 뻔 하던 내 모습과, 잠깐 선잠에 빠지는 동안 아기가 2층에서 떨어지는 꿈과 마주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사모님의 모습은 분명 일상 이상의 피로를 반영하는 단면이 된다. 이 단면이 비추어질 때마다 우리는 잠깐이지만 앞으로 잘할 수 있을까, 따위의 걱정들과 마주한다. 그런 마음을 알아서일까,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는걸까. 그러거나 말거나 솜이는 참 느긋해보인다.

예정일을 맞이하고도, 탄생을 기다려온 우리의 재촉에도 아랑곳없이 평온하던 성품이 드러나는 건지, 솜이는 참으로 느긋한 아이같다. 여간 무거워지지 않으면 축축해진 기저귀에도 그리 반응하지 않고, 한번 잠들면 꽤 오랜 시간 온 집을 평온하게 해주고, 아빠의 서툰 손놀림으로 목욕을 하는 동안에도 우는 기색이 없다. 감사하고 기특하면서도, 초보 아빠는 여기에서 마저 하나의 걱정거리를 만들어 버린다. 혹여 모를 우리의 둔감함으로 일어날 지 모를 문제를 눈치채지 못한다면 어찌할 지, 같은 누구든 겪었을 법한 그런 걱정들. 그래도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갉아먹어 매몰시키지만 않는다면 마음 한 구석에 보관해두는 편이 나으리란 생각도 해본다. 중심을 잃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이따금의 조급함은 위험과 조우한 순간의 우리를 발견하여 움직일 수 있게 만들테니까. 그래도 그 조급함이 느긋함을 몰아세우거나, 몰아내서는 곤란하다. 나는, 우리는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정해진 때가 있고,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무언가가 달성되어야 한다는 문법에 우리는 참 익숙해져 있다. 공부를 해야할 시기, 취업을 하여 일을 하며 재정을 축적해야 할 시기 따위로 이름붙여진 무언가들. 시간을 메타적으로 인지하여 이를 통해 타자화된 자신을 설계해야 하는 작업, 이른바 최적화. 저마다 다르게 흐르고, 그래서 각자 달라질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의 시간을 가늠할 때에도 이 작업은 언제나 유효하다, 아니, 유효한 것으로 사회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 인식에 쫓기지 않고, 느긋함이 늦됨으로 여겨질 지 모를 그 순간에도 우리는 마음놓고 아이를 기다릴 수 있을까. 이를 질문으로 놓는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우리가 단단해지는 거겠지. 흔들리지 않고, 더디게 가는 듯 보이는 시간을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도록. 그리고 아이가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을 설계하고 이에 우리도 기댈 수 있도록 하는 것.

다만 혹여 지금보다 더 단단해질 우리를 그려내더라도 걱정이 완전히 걷히는 건 아니다. 최적화의 유효성을 사회의 모든 말단에 입증해버린 현대의 시선에 아이가, 아이의 느긋함이 자리할 곳은 어딘가에 있을까. 그저 미래의 도구적 가치를 증명해야 할 수단으로 인지되거나, 정상성에 어긋난 순간 인격탈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길 손꼽아 갈구하는 시선의 높은 밀도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꺾지 않고 지탱할 수 있을까. 초보는 이래서 슬프다. 많은 것들이 걱정의 단서가 되니까. 그럼에도 괜찮고, 괜찮을거다. 집에 돌아와 사모님의 반가운 얼굴과 솜이의 느긋한 표정을 보는 순간 이런 걱정들따위 아무 것도 아닌 것 마냥 허물어진다. 내 마음도 공연히 부유하지 않고, 그 사이의 어딘가에 안착해 있겠지. 그러니까 괜찮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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