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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3/05/28 22:09:29
Name   당근매니아
File #1   8d55455e_b92e_4159_80e1_de2a3275960f.jpg (166.2 KB), Download : 3
Subject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 기술적으로 훌륭하나, 감정적으로 설득되지 않는다, 또다시.




제95회 아카데미상 7관왕에 빛나는 <에에올>을 뒤늦게 봤습니다.  지금 찾아보니 남우주연상 빼고 주요한 상은 죄다 타간 거 같네요.  애초에 남자 주연이 없는 영화이니 고것은 받을 수가 없는 상이었고, 탈 수 있는 상은 다 가져갔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입장에서 본 에에올은 헐리우드에서 만든 <헤어질결심>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최대한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기술적으로 뛰어나나 마음 깊이 설득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죠.  헤어질결심 역시 제게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유가 뭘까 곰곰히 생각을 해봤습니다.  헤어질결심에 대한 평을 쓸 때 나름으로 내렸던 결론은, 애초에 관객이 탕웨이에게 매료된다는 걸 전제로 구성된 영화건만 제 눈에는 이정현이 더 이뻤던 게 문제라는 거였죠.  박해일 형사님 눈 삐었음?

이번 영화, 에에올은 그보다는 좀 복잡한 이유에서 울림이 없었습니다.  3가지 정도 요소로 정리될 수 있겠네요.  

① 이건 순전히 제 개인적인 이유일 겁니다.  에에올은 기본적으로 모녀관계에 관한 이야기인데, 전 딸이 아닐뿐더러 어머니와의 관계 역시 극중의 그것과는 겹쳐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가족과 우리 엄마가 엮인 스토리가 제게는 영화의 것보다 더 극적이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엄마가 주었던 믿음과 사랑이 더 컸기 때문에, 양자경과 스테파니 수가 지지고 볶는 게 그다지 와닿지 않았어요.  만들어낸 이야기는 실제의 열화판이기 마련이고, 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엔딩크레딧에 실화 주인공의 영상이나 사진을 보여주는 게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의 아우라 앞에서 각색된 이야기는 빛을 잃기 마련이에요.  

② 두번째로는 이야기의 전개에 관한 것인데, 사실 에에올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아주 거칠게 압축해서 일본에서 한참이나 울궈먹었던 "세카이물"과 큰 차이가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물론 극의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메인 빌런의 목적이 분명해지고 축소되다 보니, 이야기의 결은 다소 달라지긴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능한 개인의 선택에 따라 세계의 향방이 갈리는 이야기는 너무 많이 보아왔던 물건이에요.

③ 마지막 요인은 이런 류의 '평행세계물'이 공통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문제이자, 아마도 몇 안되는 사람들만 불편감을 느낄 종류의 것입니다.  에에올에서도 '작은 선택이 현격한 차이를 만들어내고, 그 결과로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고, 그래서 선택 하나마다 새로운 세계가 갈라져 나온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인물간의 관계는 너무나 고정적이죠.  가장 거슬리는 건 그 모든 다른 선택들에도 불구하고 A와 B가 애를 낳으면 걔는 어느 세계에서나 C라는 거에요.  물론 무한대의 가능성을 훑는다면 A와 B의 생식세포가 무한대의 확률을 뚫고 정확하게 동일한 유전자 교차를 통해 만들어질 수도 있겠고, 또다시 무한대의 확률을 뚫고 딱 그 두 세포가 만나 정확한 수정란을 만드는 데에 성공할 수도 있겠죠.  근데 보통은 같은 커플이 생식활동을 하더라도 체위를 비롯한 무수한 가능성에 의해서 나오는 애는 완전히 다른 유전자로 구성된 다른 인물이 되겠죠.  그럼에도 평행세계물들은 대개 이런 식이에요.  아주 편의주의적이죠.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도는 순간 몰입은 이미 끝나고, 그래서 저는 평행세계고 멀티버스고 간에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에에올이 기술적으로 엄청나게 훌륭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부기영화에서 자세히 풀어놓은 상징물의 배치들도 그렇고, 교차편집을 위해 소요된 막대한 노고와 극의 진행을 위해 도입된 아이디어들, 그 모든 걸 하나로 묶은 각본의 구성까지 대단해요.  그리고 헤어질결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막대한 수고와 고민들을 거쳐 만들어진 영상이 안타깝게도 제게 와닿지 않았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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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nielbard
    놀랍게도 비슷하네요. 딸-어머니의 관계가 공감이 안된다면 영화의 파괴력이 2배는 떨어진다고 저도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들인데, 부모님과의 트러블이 아예 없었습니다. 지금도 없구요. 왜저렇게 싸울까 라는 생각만 계속 들면서 눈만 호강했다는 느낌이..
    열한시육분수정됨
    ① 너무나 부럽습니다.
    ② 서양인들이 이런 일본만화식 전개를 평생 접하지 못하다가 발견하면 엄청난 재미를 느끼더군요. 제게는 오징어 게임이 대표적인 경우였어요. 정말 명작이라고 칭찬이 자자한데, 데스노트와 도박묵시록 카이지에서 이미 전부 더 자극적으로 활용된 아이디어들.
    ③ 대중성과 타협을 해야지요. 정말 정교한 양자역학적 접근을 원한다면 BBC 물리 다큐멘터리 시리즈들이 훌륭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이루는 부모-자식간 갈등 이외의 또 하나의 축은 지금 세대 특유의 허무주의입니다. 2010년대 중반 이후로, 모든 삶을... 더 보기
    ① 너무나 부럽습니다.
    ② 서양인들이 이런 일본만화식 전개를 평생 접하지 못하다가 발견하면 엄청난 재미를 느끼더군요. 제게는 오징어 게임이 대표적인 경우였어요. 정말 명작이라고 칭찬이 자자한데, 데스노트와 도박묵시록 카이지에서 이미 전부 더 자극적으로 활용된 아이디어들.
    ③ 대중성과 타협을 해야지요. 정말 정교한 양자역학적 접근을 원한다면 BBC 물리 다큐멘터리 시리즈들이 훌륭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이루는 부모-자식간 갈등 이외의 또 하나의 축은 지금 세대 특유의 허무주의입니다. 2010년대 중반 이후로, 모든 삶을 멀티미디어로, 그것도 내가 매일 가지고다니는 손바닥에 들어오는 기계에서 내가 원하는 순간에 언제고 간접체험하거나 심지어 간접체험을 당하게 되는 (인스타그램 등의 SNS) 세대가 겪는 허무주의지요. 세상에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고 온갖 잘난 사람들의 성취와 화려한 '일상샷' 등을 보게 되면서, 동시에 주눅이 드는, 소외감을 느끼는 10대, 20대의 사람들의 경험을 단순히 대사로 읊는 것이 아니고 영상으로 체험시켜주었다는 점이 매우 독창적인 작품이라 입소문으로 여러 오스카를 가져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집에 가는 제로스
    덕후들한텐 식상한거에 난리나는거 보면 좀 기분이 찝찝함 ㅋㅋ 아마 홍대병 비슷한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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