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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0/31 22:29:41
Name   난커피가더좋아
Subject   비동시성의 동시성과 한국의 페미니즘
부제: 1403번 글, "맑스주의와 사르트르로 본 메갈리안"에 대한 한 자유주의자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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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로 달까, 아님 새로 글을 팔까 고민하다가 새로 팝니다. 블로그로 치면 댓글이 아닌 트랙백이겠지요. nickyo님의 글에서 출발하기는 하지만 해당 논의와는 약간 결을 달리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 될 것이어서, 일단 새로 글을 파기로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댓글로 다신

[본문의 문제제기 자체는 실제로 꽤 예전부터 지속적으로 나오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도 이 글을 쓰면서 인지하지 못한 부분은, 이런 문제제기는 맨날 반복하면서 왜 제대로 된 대안생산이나 실천적 지위는 가지려 하지 않느냐는 반응에 저도 아, 그렇네. 하고 생각하게 되네요. 급진적 여성주의가 이런 방식으로 발화하는게 문제라면(미러링 전략같은) 어떻게 하는게 낫다는건데? 이제까지 평화롭게 열심히 운동했던 것 보다 지금 이러는게 화제성자체는 비약적으로 높인것도 사실이고, 그렇다면 그 부작용 뿐만 아니라(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온) 장점들을 고려했을때 다음 대안을 함께 고민해서 문제제기와 같이 내놓는 것이 더 ... 합리적인 비판이었다는 반성을 하게 되네요. 문제제기는 낡았고, 대안은 없으니 이 글이 딱히 여성주의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는 제가 여성주의를 제 3자로 바라볼 수 있는 남성이라서 그렇겠죠.. 어떤 실천적 대안이 있을지를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에 대한 저의 장문의 답변이 될 것 같습니다.

1. 페미니즘의 보편성과 한국의 특수성

다른 여느 비서구 사회와 마찬가지로 한국은 특수합니다. 여기에서의 보편은 이미 전 세계적인 지배이념(최소 OECD국가 수준 내에서)이 된 서구의 좌우파 이데올로기와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발 딛고 있는 '합리성'을 말합니다. 한국의 특수성은 일반적으로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단어로 잘 표현됩니다. 이는 원래 19세기 후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타난 현상을 설명하던 것이지만, 최근에는 한국이라는 국가와 사회 전반을 꿰뚫는 용어로 자주 활용됩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엄청난 스마트폰 보급율을 자랑하며 놀랍도록 탈근대적 속성을 가진 개인들이 존재하는 이 나라에는 여전히 곳곳에 지독하게도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이고 유교문화적인 속성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경제영역에서는 그 어떤 자본주의 사회보다 '효율'과 '근대성'을 강조합니다. 전근대-근대-탈근대가 정말 뒤죽박죽 뒤섞여 있다는 얘깁니다.
물론 단선적이고 발전적인 시간 개념을 갖고 있는 서구의 개념틀이지만, 우리가 이미 그들이 만든 제도와 이념에 따라 국가를 형성해놨기 때문에, 이 분석틀은 꽤나 유용합니다. 서구의 선진국이라고 해서 해당 국가와 사회, 공동체 내에 이러한 '비동시적인 것들의 동시적 존재'가 없다는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그들은 300년 가까운 근대화의 경로를 따라온 관계로 조금씩 한 단계씩 넘어갔고, 현재는 철학적으로는 근대성에 대한 해체와 복원의 논의가 존재하고, 정치사회적으로는 탈근대적 가치와 근대적 가치의 갈등과 조화 양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 얘기로 다시 돌아옵시다. 한국이 이 같은 특성을 갖게 된 건 70년간 초고속 압축성장을 해왔기 때문이에요.  전통적인 남아선호-아들사랑의 가부장제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시어머니는 사실상 전근대에 태어난 분들이었고, 그의 자녀가 살아온 시간은 초고속 근대화의 과정이었으며, 다시 그의 자녀들이 살고 있는 환경과 추구하는 가치는 탈근대적 속성이 강합니다. 물론 이렇게 세대별로만 딱 떼어서 사람의 문제로만 볼수도 없습니다. 모든 문화와 관습과 제도가 그렇게 뒤죽박죽 섞여있고, 그러한 뒤섞임은 우리의 가치체계와 사고체계 안에서도 똑같이 뒤죽박죽입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요. 개개인의 생각을 우리가 모두 탐구할 수는 없으니, 사회 문화와 구조 전반에 대한 얘기로 한정시켜보겠습니다.  (저 역시 전근대/근대/탈근대의 사고방식이 제 머릿속에 혼재해 있다고 느낍니다. 종종.)

여기에 자유주의, 사회주의, 여성주의 등은 일종의 '보편성을 획득하는 신념체계이자 철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수잔 몰러 오킨이라는 학자 얘기로 가보겠습니다.

2. 수잔 몰러 오킨, 페미니스트계의 마르크스

저는 그녀를 감히 이렇게 평가합니다. "Is Multiculturalism Bad for Women?"이라는 논문을 처음 읽었을 때 받았던 충격은 학부 1학년 시절 공산당 선언을 읽었을 때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거든요. 그녀는 자유주의자입니다. 아주 극단의 자유주의자이면서 매우 강경한 페미니스트입니다. 그녀는 공적 영역에서의 성차별 금지 따위를 넘어서 일상에서의 모든 평등을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가족 내에서 어떻게 가사분담이 이뤄져야하는지까지 아주 세세하게 다 따지고 들 정도입니다.
영미권에서 한창 벌어지던 다문화주의를 둘러싼 논쟁에서 그녀가 주장하는 건, "어차피 그간의 모든 정치사회 공동체는 가부장제에 기반해 있었고, 여성은 차별받았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젠더' 개념 자체를 해체하고 아예 개개인의 인간으로서 완전한 평등을 이룩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전히 차별적임에도 그나마 가장 진전이 된 자유주의 사회만이 유일한 해법이며 기타의 종교적/문화적 관습에 따르는 다른 문화 공동체는 '절멸'돼도 상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절멸이 어려울 경우, 그 집단의 여성들은 최소한 '탈출'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경우에는 그 문화 자체를 '전환'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의 과정에는 반드시 각 문화의 가부장적이고 차별적인 속성들에 '물든' 나이든 여성이 아니라 가장 큰 피해를 겪는 '젊은 여성'들의 의견이 중점적으로 반영돼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절멸', '탈출', '전환'의 과정에는 '자유주의 국가'가 '인권'과 '차별철폐'의 관점에서 개입할 수 있고 그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젠더개념의 해체'까지 주장하는 그녀의 근본주의적이고 본질주의적인 페미니즘은 다른 자유주의자 혹은 다문화주의자, 그리고 다문화주의 페미니스트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많이 받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사고할 기회'를 만들어주고 논쟁의 장을 열어줬다는 점에서, 그리고 실질적으로 다종의, 그리고 중층의 억압구조에 눌린 여성들에게 비전과 논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컸습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메갈리아가 갖는 함의가 존재한다면 저는 바로 이와 유사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3. 수잔 몰러 오킨에 대한 다문화주의자들의 비판과 한국적 적용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잔 몰러 오킨에 대한 다문화주의자들, 다문화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은 반드시 새겨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의 많은 페미니스트 이론가들도 '아시아적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는데요, 이는 한국사회가 서구 기준에서는 '다문화 중 하나'에 속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 얘기는 이 답변의 본질이 아니니 빼기로 하지요.
수잔 몰러 오킨에 대한 주된 비판은 그녀가 백인중산층 여성을 중심으로 '여성성'을 상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평등이 구현돼야 할 사적 영역'으로 제시하는 가족 안에는 '하루 하루 벌어먹고 살아야만 하는 흑인 여성'이나 동성애자, 혹은 다른 문화권에 속한 비주류 여성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하면, 주류 내 비주류인 여성과 비주류 내 비주류인 여성이 감당해야 하는 억압의 구조나 차별의 강도, 심지어 학대의 수준은 너무나 다를 수밖에 없는데, 만약 적절하게 내부적인 변화가 일어날 여지가 있다고 하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는 겁니다. 즉 '비주류 공동체의 보호막'을 함부로 걷어내지 않는 것이 그녀들의 실질적인 삶의 수준을 유지하는 데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 유색인종이자 무슬림(ISIS나 탈레반 같은 극단적인 무슬림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훨씬 온건한 무슬림이라고 칩시다.)인 한 여성이 자신의 공동체가 해체 돼 밖으로 나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녀는 '다문화주의 존중'에서 얻을 수 있는 보호막을 하나도 갖지 못한 상태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무슬림에 대한 차별, 그리고 여성으로서 주류 집단내에서도 여전이 존재하는 차별까지 온몸으로 다 받아야 합니다. 가부장제나 성차별을 그러니까 용인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다층적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 함부로 모든 걸 일거에 해방시키려는 시도 자체가 오히려 피해자를 만들 수도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문화주의자들은 '다문화 존중'의 틀 안에서 그녀들의 인권향상을 가능케하고 성차별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진지하게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비판은 한국 상황에도 생각보다 잘 적용됩니다. 한국 사회는 그 특유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으로 인해 마치 서구의 다문화주의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와 유사한 문제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트 계산원부터 수많은 비정규직 청소 노동자들까지. 일상적 성희롱과 성추행에 저항하기 어렵고 노동기본권 역시 보장받기 어려워서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nickyo님은 이걸 한국식 자본주의의 특성으로 보실 수 있겠지만, 저는 전근대성으로 봅니다.)에게는 비록 가부장제적 속성을 가진 조직이라도 '노조'(이건 근대성이죠)자체가 큰 보호막이 됩니다. 저 같은 '깨시민 한남충'의 지지와 사회적 발언 역시 도움이 됩니다. 또한 근대적인 자본주의 효율성 문제 하나로 '모성성'보호에 지나치게 인색한 대한민국 기업 조직에는 비록 '모성성의 강조'가 갖는 가부장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논리에 기반한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의 옹호는 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비교적 번듯한 직장내에서 벌어지는 성희롱과 그에 대한 처벌의 과정 특히 권력관계가 강하게 작동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자유주의자들의 여론이 큰 도움을 줍니다. 미약해보이지만 그래도 힘이 생긴다는 거죠. 그리고 한국사회 전반에 '탈근대적인 젠더개념의 해체'를 주장하는 근본주의적 페미니스트의 존재 그 자체는 지속적인 자극이 될 것입니다.

4. 미완의 근대성을 완성하는 것, 그리고 공존하기.

저는 간혹 글에서 느껴지듯이 하버마스를 가장 좋아합니다. 근대의 기획이 '목적합리성'으로만 왜곡돼 이뤄진 관계로 지금의 많은 문제가 나타났다고 보는 견해에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미완의 근대'를 완성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한 프로젝트라고 믿습니다. 우리안에 존재하는 전근대적 사고와 제도, 관습과 습성들을 근대적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고 또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버마스가 제시하는 '소통합리성'의 틀 안에서 우리는 공존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 동시적인 것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 나라에서는, 그 각각의 공존으로 각 층위에서의 문제를 해결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메갈리아는 존재 자체로는 의미가 분명 있습니다. 그들이 행하는 몇 가지 행위들, 특히 애란원에 대한 지원이라든가 하는 부분을 빼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nickyo님이 문제를 제기하신 대로, 그들이 자신만의 근본주의를 각 층위에 무리하게 투영시키려고만 하고 계몽하려고만 하면 문제는 더 꼬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최고로 긍정적인 해석'과 '최악으로 부정적인 해석'이라는 글을 쓴 걸 기억하실 겁니다. 진실은 그 어느 중간쯤이라고 말하면서요. 저는 메갈리아가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하는 것 자체는 문제 삼지 않고자 합니다. 그러나, '혐오발언'을 중심으로만 문제제기가 이뤄진다면 그 중요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악영향도 생길 것이라고 봅니다. [수잔 몰러 오킨의 핵심 가치는 '여성권을 넘어서는 모든 인간의 평등한 인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메갈리아도 다시 '인권 감수성' 위에서 자신들의 근본주의를 주장하는 건 어떨까요? 가부장제에 대한 공격은 물론이고 자유주의가 갖는 양성평등에 대한 관점과 그 기만성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들은 운동가도, 이론가도, 학자집단도 아니기에 그걸 학문적으로 정교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걸 요구하는 건 부당합니다. 그러나 미러링의 방식, 혐오발언의 지속적인 반복이 아닌 방식으로 충분히 그들의 '유희'를 만들어낼 순 없을까요? (저는 메갈리아가 갖는 힘의 근간에는 '유희의 속성'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폭발력이 세지요.)

적대를 넘어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것. 모두가 완벽히 행복해질 수 없지만 누구든지 각자의 상황에서 조금씩 나은 상황을 맞도록 하는 것. 아주 막연하고 추상적이지만, 현실에서 문제에 부닥칠때마다 그래도 가능하고 힘이 생기는 이 방법이 좋지 않겠느냐 라고 제안하는겁니다.

답변을 하려다가 제 의견만 장황하게 풀어놓은 꼴이 됐습니다만, 그래도 한 번쯤 이런 관점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 받아들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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